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저주를 안 하면 뭐가 안 됩니까? 은사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잖아요. 이래도 저주 안해? 하고 우리를 조집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참으로 저주해야 될 자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버려요. 그걸 비로소 느끼게 되면 이제 와서 느끼는 게 아니고 원래부터 잠복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요. 내 안에 여차하면 예수님이라도 나는 저주하겠다는 그런 괴물을 처음 태어날 때부터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평소에 그게 안 들키기 위해서 믿음생활, 신앙생활, 복음생활 온갖 거 다 한 거예요. 그건 가짜 내 모습인데 진짜 내 모습은 저주를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두 강도가 있었잖아요. 둘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한 강도가 처음부터 예수님보고 저를 생각해 달라 하지 않았어요. 둘다 그때 강도들도 같이 욕하더라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에. 같이. (27:44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은사를 준 이유는, 은사는 비소유성이죠, 아주 깊이 있게 생각해보세요. 은사가 없다는 말은, 소유성으로 산다. 은사 없는 특징이 소유성이에요. 소유성은 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내가 행위에 나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사가 없는데 은사가 주어진다는 것은 이 은사가 인간의 은사 없음을 십자가가 공격하는 거예요. ‘너는 은사 없지? 너는 너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라고 말씀이라는 용액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인간을 지목해왔다는 겁니다. 온 세상에.
어떤 사람은 ‘복음이 다 퍼지지도 않았는데.’ 아니에요! 지금 온 세상이라 하는 것은 단위별로 온 세상이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이거 참 어려운데… 판케이크를 생각하면 돼요. 판케이크. 전에 서울강의에서 했는데 네 번째 짐승, 마지막 짐승이 로마잖아요. 로마가 마지막 짐승입니다. 로마 때 십자가 사건이죠.그러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시간성으로 끝났어요. 하나님의 일은 언어로 표현 못해요. 그냥 일곱 때가 아니고 일곱 이레에요. 한 때, 두 때, 반 때에요. 이거는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단어로서 하나님의 일, 예수님의 일을 곧이곧대로 그대로 표현 못합니다. 로마가 끝났어요. 로마가 끝나면서 성경도 끝나요. 요한계시록으로 끝나요.
그다음 그 뒤에 시대는 뭐냐? 이걸 반복하는 겁니다.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마지막 때까지 계속해서 있어야 되고 영원히 천국 가도 십자가 사건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로마까지 있었던 인류의 역사를 그 다음 시대에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는 거예요.
시대는 두 가지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시간과 하나는 어려운 단어로 묵시, 묵시는 너무 어려우니까 영적세계, 양쪽 다 중첩이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은 어디 있겠어요? 시간 속에 있겠죠. 왜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지면 아, 내 마음대로 안 되어야 다 이루어진 세상이고 이것이 바로 이미 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적용되는 원리는 로마 때까지 적용되는 이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되풀이해서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말씀이 새로운 용액으로서, 또 용액으로서, 또 용액으로서 그 시대에 맞는 용액이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라는 환경의 이어짐이 아니라, 새 언약의 반복을 위하여 환경이 그때마다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그때마다 환경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적용은 이미 완료된 성경말씀, 말씀 외에 나가면 안돼요, 성경말씀이 그 시대마다 딱딱 집어넣어지는 거예요. 그 시대마다.
모든 이 세상의 움직임이 예수님을 저주케 하는 상황들로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들이닥쳐요. ‘내 중보기도는 왜 응답 안 해주십니까. 나 혼자 구원받아서 나 혼자 천당 가면 재미지겠다, 정말. 나 지금 속상해 미치겠어.’ 이런 마음. 그게 저주에요. 그게 저주입니다.
그래서 12장 3절에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믿음이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에요. 믿음은 해석입니다. 결과적인 해석이에요. 믿음이라는 해석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왜냐하면 저주해야 될 예수님을 찬양하고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