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목자
못된 목자
2024년 2월 21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15-17
(11: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지니라
(11:16)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11:17) 화 있을진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이스라엘을 한 목자에게 단독으로 모든 책임을 걸게 하신 것은 원래 인간의 몸이 인간 자아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사가 힘든 이유는 환경에 생존에 도와주지 않아서도 그러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즉 내가 아니면 아무도 내 인생을 책임질 자가 없다고 자부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몸의 무게를 자아 책임 하에 감당하기가 세월이 갈수록 힘겨워집니다. 시간은 육신에게 기력을 빼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의 자기 몸을 자기가 감당하면 아니되는 걸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양에 불과하고 필연적으로 목자가 이끌어주어야 제대로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이스라엘은 인정하나 이방민족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이방민족이 섬기는 신은 목자 관계가 아니라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거래 관계로 맺어지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방민족에게 있어 신은 인간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알아서 하고 힘에 겹거나 기적이 필요한 것은 신이 해준다는 내용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자되시는 주님께서 알아서 챙겨주셔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 왜냐하면 양의 미래나 운명이나 가야될 길의 목적인 양 본인의 담당이 아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이스라엘이 이제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목자에게 묻습니다. 곧 이스라엘에게 왕에게 묻습니다. 유다 나라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언한 대로입니다. “화 있을진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슥 11:17)
이 예언에 대한 역사적 실현은 열왕기 25:7에 나옵니다.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 왕의 파탄은 곧 이스라엘 전체의 파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목사를 친히 세우시고 또한 그 목자를 친히 치시는 겁니까?
그것은 장치 참된 목자, 선한 목자, 말씀대로 목자다움을 다 성사시키는 목자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림자가 실체보다 먼저 오는 겁니다. 그림자 없이는 실체도 없는 겁니다. 단순히 ’악한 목자가 와서 사라지면 뒤에 선한 목자가 온다‘는 식이 아닙니다. 도리어 악한 목자에게 잡아 먹히는 목자만이 선한 목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목자의 몸‘ 때문입니다. 목자가 갖고 있는 제구는 양을 소유하고 지배하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양을 위험에서 건져내라고 주신 겁니다. 양에게 들어닥치는 최고의 위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음입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이 저주스러운 죽음에서 건져줄 수 없는 양은 결코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못된 목자, 곧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라엘을 보홀하고 지키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화한 자들입니다. 못된 목자가 갖고 있는 제구는 양을 압제하고 빼앗는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못된 목자에게 있어 양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신체 부위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못된 목자는 눈과 팔은 하나님에 의해서 떨어지고 빼내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목자에 대한 이 단호한 처단은 이스라엘에게 실망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희망적입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죽음 가운데서 생명으로 빠져나올 능력자임이 자신의 몸을 통해서 보여질 수만 있다면 이미 성도에게는 참된 목자가 자신을 찾아왔음을 확증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어 무덤에 내려갔다가 사흘만이 멀쩡하게 다시 부활하심이 자신의 몸을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바로 예수님의 몸에서 벌리신 모든 일이 양을 제대로 양답게 하기 위해 일어난 일임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런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우리 인간들이 선택하면 될까요?
이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이미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소유하고 책임지려는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즉 못된 목자가 타인들을 대할 때, 자기 살찌우기 위해 자기 소유물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도 타인과 예수님에 대해서는 자기 이익이 되게끔 이용하려는 못된 목자 심보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이 된다는 것은, 이 못된 목자 성품을 지닌 나로 인해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천국은 어떤 절차를 보이면서 성사되는지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 잘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
여기서 천국은 예수님 자신의 밭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원수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바로 이점이 인간들의 마음밭과 차이나는 점입니다. 우리 안에 원수가 들어올 때 우리 자신이 해결하므로서 천국가는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추수 작업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추수란 곧 ‘하나님의 선물 주심’입니다.(요 4:10)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수건과 대야들고 제자들을 발을 씻어줍니다. 모든 게 선물입니다. 단 추수 때에서 나타날 결과로서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위해 예수님께서 못된 목자에게 죽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값없는 구원’이라는 선물은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오롯이 바탕이 되는 근거에 입각해서 그러합니다.
오늘날 양은 그저 주신 구원을 증거를 찾는 남은 생애만 남아 있습니다. 반면에 지옥가는 자들은 그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식으로 역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해매고 있습니다. 성도의 눈에는 실제로 지옥이 현실적으로 그래도 나타난다는 점이 신기하고 신나는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모든 일이 말씀대로, 말씀 안에서 이루어짐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2강-스가랴 11장 15-17절(못된 목자) 24022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1장 15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찌니라,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아멘.
여기에 우매한 목자, 또는 못된 목자 잘못된 목자. 못된 목자라는 것은 17절에 나와 있죠. 양떼를 버린 그런 목자를 하나님께서 거론을 하시는데, 이 목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심을 쏟기 마련입니다. 그 목자가 여기 양 떼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고 흩어진 양 떼를 찾지 않았다라고 하는 이 대목에서 그리고 이 목자가 목자들이 아니고 하나의 목자라고 부각을 시키는 점에서 이 목자의 정체는 정치적입니다. 왕입니다.
그래서 이 못된 목자에 대한 처벌이 오늘 17절 끝에 나와있는데,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항을 두고 이 예언이 이루어지는가? 열왕기하 25장 7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유다 나라의 마지막 왕이 등장합니다. 시드기야입니다. 이 시드기야 왕에 대해서 갈대아, 바벨론 나라입니다. 바벨론 왕에게 끌려가서 7절에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왕의 신체가 그냥 능지처참이 될 정도로 두 눈을 빼버리고 아들들을 눈 빼기 전에 다 죽이고 죽이고 난 뒤에 눈을 빼고, 이렇게 몸 자체가 왕의 몸 자체가 망가졌다는 것은 이것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의 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절단난 것을 왕의 몸으로 표출하고 표현한 겁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나의 전체 집단을 대표하는 자의 몸에 어떤 증상이나 어떤 사태가 일어나서 몸이 갈기갈기 찢어진다든지 몸이 회손 된다는 것을 그 나라의 왕과 국가가 연계돼있다는 것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에 어떤 분이 제대로 된 그 나라의 대표자, 목자가 된다면 그 목자에게 일어난 상황, 역사적 상황이 그 목자를 고대하고 목자를 목자로 인정하는 여러 집단의 미래가 확정되는 겁니다. 그 몸에 의해서.
이 못된 목자, 악한 목자, 우매한 목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양을 지켜야 될 목자가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망가졌다면 그걸 대체해서, 이게 목자가 단독, 단일 인물이거든요. 그 단일 인물을 대체해서 어떤 목자가 등장하게 되느냐? 그 목자가 못된 목자하고 대비되는 선한 목자라면 선한 목자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그분을 선한 목자로 알고 있는 양들의 운명과 직결되어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죠. 이거는 그 목자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 4절에 보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죽더라도 상관없어. 생명이 더 세니깐. 죽더라도 널 살려낼 거야”라는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그냥 “참 기분 좋다. 도움받았습니다. 위로됩니다.”하고 거기서 머물면 안돼요. “근거가 뭡니까?” 근거가 뭡니까를 제시가 되어야 돼요.
좋은 이야기고 참 위로가 되기는 되는데 죽어도 부활 되고 죽어도 생명 얻고 천국 간다니까 참 고맙습니다만은 이게 그냥 위로에 그치고 그냥 허풍적인 아무 근거도 없이 사람 좋아라고 하는 이야기의 끝이라면 이것같이 허무한게 어디있겠습니까? 근거가 있어야 돼요 근거가. 그 근거는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근거다.
“아니요, 아니요, 그 근거로 모자라요.” 그 근거로서도 많이 부족한 거에요. 그럼 어떤 근거가 필요하냐? 제대로 된 목자가 아닌 목자가 작살 났다는 확실한 언약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돼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진짜 목자는 가짜 목자가 오지 않으면 진짜 목자가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 특히 예언서 성경을 접근할 때 우리의 발상 자체가 완전히 거덜 나야 돼요. 그림자가 실체보다 먼저 있다는 사실. 이거 누가 믿겠어요?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은 실체가 있고 작대기가 있어야 그림자가 생기고 하듯이 실체가 먼저 있고 태양이 비추면 그림자 생기는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 속에 그림자부터 먼저 만들어 놨어요. 그 그림자가 뭐냐? 인간들의 한계라고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에요. 이 말은 인간은 역사 바깥으로 못 나가는 신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를 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주께서는 손을 댑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질문하는 것도, 율법 주는것도 전부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시를 했죠. “네가 내 말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너는 망한다, 저주 받는다.” 전부다 역사적으로 증빙이 되는 것들이에요. 그럼 이스라엘 역사는 뭐냐? 고스란히 하나님의 법대로 안 지켰더니만 작살 나고 망했다는 증좌, 증거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성도의 해야 할 일이 뭐냐? 성도의 할 일은 간단해요. 아무것도 한 것없이 그저 구원받은 증좌를 찾아다니면 되는 거에요. 남은 생애를 통해서. 한 것도 없는데 내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계속 천국으로 가고 있어요. 이 얼마나 신납니까? 여러분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제가요 이 세상 살면서 제일 신나는게 뭐냐하면 이거에요. 신나는 정도가 아니에요.
신바람이 나는 정도가 뭐냐하면, 지옥 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는 것이 이게 진짜 너무너무 신나요. 성경에만 있는 지옥이 하나님께서 이게 웬 복인지 실제로 뉴스나 이 사회 속에서 치과에 다니면서 병원에 다니면서 한의원 가서 침 맞으면서 그 만나는 모든 환자나 의사나 모든 것이 발설하는 것이 전부 다 지옥에, 이곳이 지옥입니다 라고 알려주는 말만 나오니까, 그게 너무너무 신기한거에요.
“너네는 눈감아라 지옥은 내 알아서 할게” 이렇게 하게 되면 “아, 참 지옥 보고싶었는데 섭섭하네.” “너는 천국 가. 지옥은 보지 말고” 이러면 우리가 약간 섭섭한게 있는데, 그게 아니고 거리에 나가나 온 세상에 나가나 뭐 총선이고 대선이고 모든 것이 사람들의 행위와 생각과 사고방식이 “지옥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메가폰잡고 떠들고있는 그 현장을 온몸으로 체험해 주고 있는거에요.
그들의 소리는 한결같은 소리에요. 사람이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것, 뭘 행해야 복 받는다는 것, 노력해야 행복해진다는 것. 한결같은 지옥에서나 들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걸 생각해볼 때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을 때 아마 얼마나 신났겠는가? 신바람 이박사가 아니고 돌에 맞으면서 너무너무 신기하고 지옥을 직접 돌에 맞는 체험을 통해서 “확실히 성경대로 지옥이 있구나, 그냥 관념이 아니고 실제로 지옥, 이게 지옥이구나”는 것을 온몸으로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성도에게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너무너무 고맙고 너무너무 감사하죠.
세상은 역사 안에 갇혀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그림자밖에 몰라요. 실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실체가 왔는데 실체를 그냥 잡아 죽였죠. 그들은 그림자만 남아 있는거에요. 그래서 여기 오늘 고린도후서 5장과 관련해서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못된 목자부터 먼저 언급하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지 않는 목자는 선한 목자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지 않으면 그 어떤 희생과 봉사를 해도 그거는 선한 목자 아니에요.
그냥 자기 행함만 거기다 투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스가랴 15절에 보면 우매한 목자의 ‘기구’, 기구가 나와요. 기구하면 자꾸 혼동되니까 다른 말로 하면 제구. 목자들이 갖고 다니는 제구 여러 가지 기구들. 그게 어떤 것이 있는지 그거는 사무엘상 17장 40절에 보면 나옵니다.
소년 다윗이 목자니까 갖고 다니는 여러 가지 제구들이 있어요. 40절에 보면,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그러니까 막대기는 기본이고 주머니 속에 있고 주머니 속에서 목자 다윗은 돌맹이를 거기다가 집어넣고 물매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손에 들고 있겠죠.
그렇다면 이것을 통해서 목자의 제구라는 것은 목자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는 부속 주머니들 이렇게 보면 되죠. 그럼 막대기나 여기에 돌멩이나 물매, 이것은 무슨 용도냐 하면 양을 위험에서 지키라는 거에요. 목자라는 그 이미지 안에 뭐가 있느냐하면 ‘양들은 항상 위험하다. 제 갈 길을 모른다. 목자가 양을 대표해서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목자는 어디로 갈 줄을 모르는 그런 대상자가 양이다.’ 그런 뜻이 함축되어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목자 없이는 나는 어떻게 할 게 없다는 거에요. 내가 양이고 할게 없다는 말은 양에게 들이닥칠 위험한 어떤 존재에 대해서 양은 감당 못한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고민은요 몸이 여기있는데 몸이 내꺼라고 생각하니까 내 몸을 내가 감당못해서 고민이라는 거에요 인생 이라는게. 배고프면 먹여줘야되죠 잠 안오면 또 잠재워줘야 되죠, 아프면 또 뭐해야 되죠.
분명히 내 몸인데 내 몸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요. 나를 숨을 막히게 만들어요. 내 몸이. 감당 안 되면 자살이죠. 감당 안 되면 자살이에요. 간당간당 감당하게 되면 질질 끌 듯이 내 몸을 갖고 가는거에요. 이게 이방인들이, 인간들이 여기서 해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해답은 이스라엘 구조 내에서 밝혀져요. “너희는 양이잖아. 양이 왜 양을 감당해. 양은 목자한테 맡겨.” 이게 이스라엘의 율법 속에 하나님의 예언 속에 제시한 거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감당을 못하도록 그렇게 만든 거에요.
그런데 목자를 떼버리고 양이 양 주제에 내가 감당하려고 하니까 여기에 목자의 원수, 목자의 원수는 인간에겐 존재성을 못 느껴요. ‘그런게 있나?’ 해요. 그냥 인간은 자기 몸 챙기면 된다고 하죠. 목자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가 양들을 가만두겠습니까? 달려들죠.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한 거에요. 목자를 세웠습니다. 왕을 세웠습니다. 선지자 세우고 제사장 세웠습니다. 목자입니다. 그 목자가 이스라엘을 못 지킵니다. “목자부터 한번 당해라.”
그래서 오늘 스가랴에 17절에 보면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되어 있어요. 인간이 사적으로 볼 때 가장 귀한 것 중에 귀한 것이 눈이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눈입니다. 그리고 눈만있으면 안 되잖아요.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팔도 멀쩡해야겠죠.
하나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목자야, 네 팔 네 눈, 너한테 귀하냐?” “예, 귀합니다.” “양이 더 귀해. 양이 더 귀하다고. 내가 너한테 목자의 기능을 준 것은 너의 눈보다 팔보다 더 귀한 것을 지키라고 했는데 너는 그 양을 어떻게 했느냐”는거에요. 너가 갖고 있는 그 기구, 너가 갖고 있는 그 지도자의 권력, 목자로서의 통치 원력은 어디 써먹었느냐 하는 겁니다. 어디에 써먹었을까요?
16절,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다시 말해서 양을 지키는 용도로 써야 될 그 힘을 양을 뜯어먹는 양을 자기 것으로 소유시키는데 다 사용한 거에요. 양을 소유한 거에요. 언제?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렇습니다. 사울 왕부터 시작해서 다윗에 반짝 거렸다가 솔로몬 이후부터 다시 완전 내리막길로 꽂아집니다.
전부다 왕들이 권력으로 양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사유화시키고 소유화시켰어요. 자기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양을 뜯어먹었습니다. 양을 자기의 먹잇감으로 사냥감으로 그렇게 간주했습니다. 그 구약에 그걸 보면서 우리는 불만이 있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왕들이 제대로 하지 다윗처럼 제대로 하지, 다윗도 처음에 그러지도 않았어요.
왜 이렇게 못된 양이 돼서 하나님 만든 나라가 이렇게 망하도록 하느냐? 하고 불만이 있는데 그 불만을 가지면 안돼요. 왜? 못된 목자가 있어야 그다음에 선한 목자가 그 뒤에 오게 되어있어요. 그림자부터 먼저 나타나고 실체는 뒤에 나타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죠. ‘가짜가 죽어야 진짜가 나타난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건 아닙니다.
가짜에 의해서 진짜가 죽어야 진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제3의 지역에서 기다릴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인간에게는 진짜 목자는 없습니다. 가짜 목자가 있고 모든 백성들, 인민들이 가짜 목자에 합세해서 진짜 목자를 죽여야 그 죽임을 당한 분이 바로 진짜 목자에요. 그래서 어떤 인간도 “나는 가짜 목자 말고 진짜 목자 믿고 싶어.” 그거 안 돼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그런 선택의 여지를 준 적이 없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진짜 목자 예수님을 믿어야지” 그런거는 허용될 수 없어요. 그래서 이 성경 예언의 말씀이 그렇게 어려운 거에요. 그것이 이러한 비밀이 어디에 풀리느냐 하면, 이게 풀려야 풀리는거지 그냥 뭐, 성경에 나와 있는데. 설명해줘서 풀리면 정말 다행스러운데요. 이게 마태복음 13장에 비유에 비밀의 열쇠가 거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고 해서 ‘천국은’ 해놓고 천국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등장인물들을 주님에 의해서 하나, 둘 소개시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좋은 씨를 뿌린 농부가 나오고요, 좋은 씨가 나와요. 그러면 이것으로 천국이 다냐? 아닙니다. 그 뒤에 나옵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여기 원수가 어디에 오느냐 하면, 농부의 자기 밭에 원수가 와요. 침투하도록 허용하는 겁니다. 못된 목자가 침범해서 하나님의 밭을 온통 못된 목자 판으로 돌려 놓을 때 그게 바로 천국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절차요 과정입니다. 사람들은 이걸 이해 못하죠. 왜냐하면 “이 좋은 밭에 왜 원수가 오도록 하나님께서 방치하십니까?”라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항의하면, 오히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나무랍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렸죠. 못된 목자의 특징은 상대를 자기 소유화 시킨다 했죠? 그 속성이 있어요. 내가 선한 목자 믿어서 천국 가겠다는 이 속성이 못된 목자 속성하고 똑 일치되어요. 소유하려는 거에요. 내 밭에 나쁜 것 오면 안되고 내 밭은 좋은 것만 와야 된다고 하는 그 의식. 그래서 나한테 유리해야 되고 나는 내가 나를 챙기는데 실패가 없어야 되는 이 사고방식. 이게 바로 마귀가 뿌려놓은 마귀적 속성이에요.
‘나의 바른 선택이 나의 미래를 좋게 확정한다.’ 이게 악마적 속성이라고요. 참 많은 사람들이 교회 와서 복음을 듣고 또 교회 안 와도 복음을 듣고 하면서 어디서 코 깨지고 자빠지느냐 하면 이 대목이에요. 이걸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눈 올 때 눈 치우는 기계가 써래하는거에요. 써래. 쭉 미는거요. 눈을 치울 때 나무로 만든. 삽은 아니고 그냥 쭉 밀어서 쓴다고 써래라고 하거든요.
써래 하니까 헤어질 결심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이름이 서래인데. 써래. 싹 쓸어버리는거에요. 옛날 잉크프린트 할 때 쓱 밀지요. 주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선한 목자만이 아는 방식이 뭐냐? 자기 양을 죽음에서까지 자기 양을 건질 수 있는 능력과 힘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이미 창세 전에 의논한 대로 에배소서 1장 7절의 말씀, ‘자기 피’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너무나 간단한 거에요. 그 피를 발라놓고 그다음에 뭐냐? 하나님이 그 피를 악마들이 덮잖아요. 덮으면 써래 가지고 그걸 밀어내는 거에요. 어디까지? 끝까지 밀어내요. 지옥이나 가라. “어떻게 피를 덮느냐?, 피를 덮어. 니가 뭔데 피를 덮느냐” 이 말이죠.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이보다 더 쉽게 해요? 복음은 뭐냐 하면, 피 묻은걸 몰라요 모르는데 성령이 와서 우리를 저 지옥까지 밀어내면 뒤돌아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피만 달랑 거기에 현장에 피만 또렷하게 드러내는 것.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거에요.
왜 밀어낼까요? 우리는 피를 소유하고 피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악마적 속성을 이 육신이 있는한 못 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나한테 유리한 것 내가 챙길거야.” 이게 악마적 속성이에요. 도무지 자기부인이 안돼요. 자기 부정이 안된다고요. 좋은 것 많이 들어서 그것으로 내 구원, 천당갈려고 시도해요. 밀어낸다는 생각을 못하는거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오해가 있는거에요. “가라지가 생기는데 왜 가만두십니까?”
악한 목자가 악한 목자한테 맞아 죽어야 그게 선한 목자에요. 우리 인간들이 골라잡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질 않습니다. 가라지가 있어야 천국이 되어요. 가라지가 있어야. 언제?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결국 이 추수 때라는 추수의 의미가 요한복음 4장 10절에 보면 함축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기에 선물이라는 말이 나와요. 니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아야 된다. 그 선물이 뭐냐? 추수입니다. 4장 35절 38절,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일방적인 추수 선언이죠. 뭐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요.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이 말은 추수를 당한 사람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거에요. 선물. 한사람이 수고한 거에요. 선한 목자만 수고했지 추수 당하는 사람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선물로 구원받는다는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런 행위를 통해서 말씀해주셨어요. 13장 4절부터 보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이렇게 되어있어요.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물로 죄 사해서 천국 보낸다는 이 취지가 예수님이 손수했던 발 씻어 주는 것보다 더 명백하게 더욱 투명하게 이야기한 데가 어디 나옵니까? 이걸 안 믿어요?
주께서 발 씻어줘서 천당 가는걸 이걸 안 믿는다는 말입니까? 진짜 안 믿기가 힘들어요. 이거는. 안 믿는게 기적이야. 이걸 안 믿는게 기적이에요. 안 믿는사람들이 이렇게 궁시렁 거립니다. “죄 씻어 주는거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죠. 그거 믿습니다. 고맙게 여기는데, 내 인생 어떻게 됩니까?” 이게 써래가지고 한번 지옥까지 한번 밀려봐야 내 인생 어떡해 내 인생 어떡해 내 체면은 위신은 어떡해 이런 소리가 서래가지고 확 한번 지옥 구덩이까지 밀어봐야 돌아서보면 거기에 피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죠.
내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아프면 어떻게 됩니까? 직장 잘리고 먹을 것도 없는 내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왜 그 이야기가 거기서 왜 나옵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늘 말씀을 주신 것은 선한 목자를 이야기하면서 왜 악한 목자부터 먼저 언급하신 이유를 아시겠죠? 악한 목자는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도 못 알아봐요. 왜? 한통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은 내 몸 내가 챙기는데 이렇게 부담이 되고 감당이 안 되니까 괜찮은 대통령, 대통령 왕이 와가지고 경제나 좀 살려주면 좋겠습니다. 이래가지고 전부다 그게 못된 목자, 우매한 목자만 찾게 되어있어요.
제가 이렇게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잘 이해가 안 될꺼에요. 그래서 이해되는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슬슬 짐작하겠죠. 벌써... 1990년도에 나온 노래인데요. 노래 가사가 이래요.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을 묻지 마세요. 이리저리 나부끼며 사는 게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하면서. 온갖 세상살이 온갖 시름 다 잊으시고” 방실 방실한 방실이가 불렀던 노래죠.
여기서 성경과 딱 일치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하면서.” 여기 ‘술이나 한잔하면서’ 이 대목입니다. 사람은 사람이 위로해줘요. 남이 위로해준다고요. “내 인생 어떻게 해요. 책임져주세요.” 할 때 주님은 안 도와줍니다. 사람이 옆에 와서 위로해줘요. 복음 말씀이 위로 되는게 아니에요. 성경 말씀이 위로해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를 위로 해요 사람이. 그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그 대목이 바로 사무엘상 28장 3절과 22절에 나옵니다.
여기 사무엘상을 보면 사울 왕이 등장해요. 사울 왕은 이스라엘 왕입니다. 근데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삼았어요. 못된 목자에요. 자기 죽을 생각 없습니다. 이스라엘 통해서 자기가 살찌고 자기 자리가 공고하고 그 공고한 자리를 후손들에게 계속 물려줄 정치적인 의도만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 사울 왕이 율법대로 한다고 사무엘상 28장 3절에 보면,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 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율법대로 하나님 신명기 말씀대로 지키면, 내가 그렇게 왕으로 하면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여길 것이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제 사무엘 죽었으니까 자기가 말씀대로 율법대로 살면 되지 않겠느냐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짜 이스라엘 왕이라면 그 왕이 이스라엘을 악한 원수, 블레셋에서 건져낼 수 있는 역량이 있어줘야 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게 이스라엘은 역사판이니까.
신약에 오면 죽음에서 부활시켜줄 능력이 있어줘야 돼요. 이걸 구약적으로 바꾸면 이스라엘 주변의 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낼 수 있는 역량과 지식 능력이 있느냐가 이게 선한 목자냐 못된 목자냐 구분됩니다. 사무엘은 블레셋을 아무리 봐도 이길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변장을 하고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으러 갑니다. 여자 보고 싶어서 간게 아니에요.
죽었던 사무엘을 불러내게 하는 용도로 갑니다. 하, 여기서 무시무시한 현장감이 등장합니다. 뭐냐 하면, 저승에 간 유령을 불러내어서 그 유령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부리지 못하고 도로 저승으로 돌려 보내야 될 아주 험악한 안타까운 처지가 이 역사적 인간세계입니다. 유령을 불러내도 유령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도로 돌려줘야 돼요. 그것은 이 역사 자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적 세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사무엘은 언약 세계에 있는 사람이에요. 언약 세계와 언약 세계를 구현하라고 이스라엘이 있는데 이스라엘의 사울 왕이 중간에 그 언약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하나님은 써래가지고 사울왕 확 걷어내 버립니다. 걷어내면 거기서 율법의 정신은 뭐냐 하면 희생양이에요. 제물이 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사울 왕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에요.
그런데 사울이 지가 왕이랍시고 하나님의 왕 됨을 자기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누구하고 한패가 되었다? 신접한, 이미 저주받은 여인과 함께 한패가 되어 가지고 죽은 유령을 끄집어 내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어요. 어떤 도움도 못 받습니다. 이거는 끊어진 상태라는거에요. 자 끊어진 상태에서의 그 서글픔이, 사무엘상 28장 22절,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무슨 말입니까?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 한잔하면서. 그래서 세상살이 모든 시련을 잊으시구려.” 우리 인생들은, 인간들은 이렇게 삽니다. 교회 가봐도 소용도 없고 별 위로도 안 되고. 나 교회 갈 때 은근히 뭐 기대했지. 하나님 내 인생 도와줄 줄 기대했지. 근데 뭐 복음 전하는데 죽으라고 “죽는 것이 성공입니다.” 이러고 있는데 내가 기대하고 원했던거 하고 전혀 다른데 더 교회 나갈 이유가 없지요. 나는 다른걸 원하고 있다고. 다른걸요.
나는 내 소유라고요. 내가 나를 소유하고 싶어요. 사울 왕이에요. 힘든 내 인생을 내가 감당하고 싶어요. 그게 못된 목자에요. 타인은 내 밥벌이고 먹잇감이고 사냥감이여야 한다는 거에요. 내가 살기 위해서. 모든 인간이 이런 인간밖에 없습니다. 선한 목자는 모든 인간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선한 목자는 죽임을 당합니다. 인간은 그림자였던 거에요. 못된 목자로 보여주는 그림자. 선한 목자가 우리 악마의 젖어있는 인간의 손에서 죽는 그분만이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림자로서 이 인간의 역사를 덮어버렸어요.
이스라엘 역사는 그 자체가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너무나 멋진 땅. 지금도 가도 멋져요. 저 남쪽에는 사막이지만 북쪽에는 너무 살기 좋아요. 밀림도 있고 수풀도 있어요. 그 멋진 땅. 한번 소유했잖아요. 놓치기 싫은거에요. 어쨌든 간에 하나님 도와주셔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애걸하면서 간절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거는 목자, 그 목자에 대해서 이미 규정을 했습니다.
“우매한 목자야, 이 못된 목자야.” 아마 그런 소리하면 “제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제가 어때서 못된 목잡니까?” 아마 자꾸 이렇게 대들 겁니다. 그거는 아무도 옳은 목자가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목자도 죽고난 뒤에 부활한 목자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거는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되죠. 추수 때까지. 근데 그 추수 때가 언제냐?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가 추수 때였어요. 선물을 받으니까, 성령을 선물로 받으니까.
그 선물이 뭐냐?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선물로 받은 성도의 특징은 뭐냐? 천국 가면서 아무것도 하지도 않았는데 천국을 보내시는 그 증좌, 증거들을 보게 하시는거에요.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그 신기함. 지옥 가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 많아도 너무 많아요. 찾는 이가 적어요. 근데 그게 기분 나쁜게 아니고 섭섭한 게 아니고 그게 너무 신기한 거에요. “이상하다. 거저 주신 은혜도 안 믿어? 왜 그렇지?”
가장은 집안을 지키는게, 가문을 지키는게 가장이죠. 그러면 나라는 누가 지킵니까? 나라는 왕이 지키잖아요. 지금 그까지가 인간이 알고있는 거에요. 그까지가. 이게 바로 신접한 세계에요. 눈에 보이는 세계에요. 아직 죽음 이후의 세계하고 끊어진 상태에요. 주님께선 거기다가 더 추가합니다. “천국은 누가 지키느냐?” 천국은 선한 목자가 지키십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드려서, 그 지키는 선한 목자가 어떻게 지키느냐? 참, 믿기지 않지만 진짜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8절부터 말씀 보게 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이거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한테 당한다는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세계는 아무리 인간세계가 여러 가지 사태가 있다 하더라도 전부가 말씀 안으로 돌아 온다는 거에요. 말씀 밖으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빈말이 아니라는 거에요. 뱀은 반드시 나타나야 되고요. 반드시 그 뱀은 메시아의 발꿈치를 물어야 돼요. 그래서 그 18절 끝에, “성경을 응하려 함이라” 해놓고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 말은 이 못된 목자야, 나를 빨리 죽여.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선한 목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니가 나와서 증명해야지, 이 세상은 오직 지옥인 것을, 망해도 그들은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그걸 말씀대로 예수님이 하셨던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 선한 목자가 돌아가셨잖아요? 3일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분만이 선한 목자다 이말이죠.
그럼 양은 뭡니까? 이 세상에 양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악마, 뱀의 후손, 예수님을 공격했던 그 공격한 것으로부터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지는 그것이 바로 양이 되는겁니다. 그러면 성도 안에 뭐냐? 성도 안에 악한 목자도 들어있고, 선한 목자도 들어있어서 내 행위가 날마다 피를 가리고 있다는 것을 본인 내부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거에요.
그래서 지옥도 알고 천국도 알고 가라지도 알고 알곡도 알고 이 속의 세계는 말씀 그 자체의 세계. 얼마나 신기합니까? 이 세상 이런 인간이다니. 악한 목자도 알고 선한 목자도 알고. 나는 악한 목자 출신인 것을 한패인 것을 알고, 거기서 주님께서 우리를 양으로 만들어냈던, 죽음에서 생명이 와서 죽음을 삼켜서 양이 되게 해주신 그 능력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니 세상에 이러한 신기한 일이 있습니까?
오늘 두가지 신기한 일, 하나는 이 세상이 지옥을 눈으로 매일같이 목격하는 신나는 일과, 그리고 그 지옥인 것을 알게 된 그 인식을 허락해주신 그 신기한 일. 이 신기한 일을 품고 남은 세계를 주님께서 구원해주신 증거를 찾으면서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스가랴 말씀이 들어와서 요한복음 말씀이 들어와서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증거하는 증거로서 저희들을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때가 이때가 추수 때라는 사실이 그렇게 신나고 즐겁기를 원합니다. 어떤 것도 구애받지 말고 아무 값없이 구원받는 이 자유를 만끽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