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진리의 단독성

아빠와 함께 2023. 11. 22. 09:45

453강-YouTube강의(진리의 단독성 요한복음 1:17)20231121-이 근호 목사


제453강, ‘진리의 단독성’. 진리면 진리지, 진리의 단독성이라. 단독성이라는 말을 왜 붙이는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에 대한 진리를 줬어요. 그럼 진리를 줬으면 그 율법을 지키면 진리는 단독성이 아니고 집단성,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지키는 대로 진리가 된다,라는 것이 우리네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예레미야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이거 마치 아브라함 기도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는데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단 열 사람이라도 의인이 있으면 내가 취소시킬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징벌을 취소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말은 열 명도 없는 거예요. 그럼 열 명도 없다면 댓 명은 있을 게 아닌가. 댓 명은커녕 한 명도 없어요. 왜냐하면 기도를 할 때 50명부터 출발했거든요.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그 다음에 10명, 10명에서 아브라함의 기도가 멈췄습니다. (창 18:22-33)

그러면 그다음 기도를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 기도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자, 의로운 자 단 한 명이 없다면 당장 불심판 내려도 제가 아무소리 안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열 명까지 내려왔잖아요. 열 명까지 내려왔는데 주께서 심판의지를 꺾지 않았다는 말은 그다음 기도는 하나마나에요. 열 명도 없어요. 단 한 명도 없어요, 소돔과 고모라에. 단 한 명도 의인이 없습니다.

롯이 구원받은 것은 자기가 의인이라서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본인이 알아서 나온 게 아니고 강제조치로 롯과 두 딸이 나왔어요. 그때 투입된 자가 누구냐 하면 천사 2명인데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손을 잡고 강제로 끌어내었어요. 강제로. 네가 미련이 많은데… 여기에 애착이 많지, 응? 이 소돔과 고모라, 설마 하나님이 심판할까 생각 들겠지. 나 너 안 믿는다. 그래서 강제조치할 거야.

믿지 않기 때문에 강제조치 한 겁니다. 롯이 믿음이 좋은 게 아니에요. 천사가 와서 강제로 질질 끌다시피 강제조치 한 거예요.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창 19:16)

심지어 롯의 아내는 믿음이 있었습니까? 없었잖아요. 천사가 나오라 하니까 자기 남편 따라 나온 거예요. 남편과 롯이 헤어진 것은 어떤 조항 때문이었냐면 구원받기는 구원받는데 뒤돌아보지 말라는 그 조항에 걸려서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된 겁니다. (창 19:17,26)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한다’ 이것을 기정사실이라 여기고 구원받은 자에게 당부하기를 ‘하나님의 심판은 기정사실이라는 사실을 네가 의심하지 말라’가 단서였어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습니까? 주께서 심판하시는 이 일에 의심하지 않는 자만이 구원받는다는 뜻이에요.

심판은 요지부동, 이미 확정 났어요. 하나님 결재 났어요. 확정 났어요. 그런데 뭐 ‘이 세상에 착한 사람도 많고 훌륭한 사람도 많은데 이순신 장군도 있고 세종대왕도 있는데 설마 지옥 갈까?’ 이렇게 생각하는 그것은 의심하는 거거든요.

그 본문을 예수님도 이야기했어요. 뒤돌아보지 말라.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롯의 처처럼 그렇게 당한다. (눅 9:62,17:31-32) 이건 방향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에 대한 이(뒤)쪽 방향 말고 준비한 하나님의 본향을 바라보라. 바라봐야 된다. 저(하나님의 본향)쪽 바라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이쪽, 세상에 대해서 일어난 일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일이 돼요. 심각한 일이 아니에요. 저쪽에 마련된 게 심각한 일이지, 이 세상 일은 별로 안 심각한 거예요. 그 조건이었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없었다? 단 한명도 없었어요. 자, 그 이유를 알아야죠. 이상하다. 율법을 줬으면 많은 사람이 율법에 대해서 신경을 쓸 텐데 왜 사람들은 그다지도 진리와 율법에 관심이 없었던가?

그 이유가 요한복음 1장 17절에 나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되어 있죠. 이 본문에서 율법으로 온 것은 모세가 대표자로 등장하고 은혜와 진리에 대해서는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죠. 그래서 제목이 ‘진리의 단독성’이에요.

그러면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은 은혜 줄 자도 아니고, 진리를 받을만한 자도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예수님 오시지 않았다’ 그러면 은혜 없고 ‘예수님 오시지 않았다’ 그러면 진리가 없는 거예요. 왜?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 진리에 관심 있는 사람 있으면 내가 멸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사람들은 진리에 관심 없습니다. 진리가 뭔지 알아야 관심 있죠. 진리 자체를 모르는데요. 율법? 율법은 진리가 아니에요. 이것은 모세로부터 온 거예요. 진리는 따로 오는 거예요. 인간들이 아는 것은 율법인데 그것은 모세로부터 온 것이고, 모세 말고 예수님이 와야 비로소 은혜와 진리가 거기에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은 모세가 아니고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이름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에요. 예수님 뒤에 은혜와 진리가 같이 있으니까요.

그럼 이렇게 왔으면 뭐합니까? 오면 예수님이 진리다. 그거하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에베소서 4장 21절에 보면 어떤 식으로 예수님의 진리가 단독성이 우리 진리가 되는가가 나옵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 여기 보면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진리는 단독성이에요. 우리 인간에게서 철학자에게서 어떤 유명한 강사, 목사한테서 진리 찾지 마세요. 진리는 오직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목사한테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언어는 한계가 있어요.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은 인간의 영이 아니고, 주님의 영이에요. 성령이에요. 진리 알아서 고맙습니다, 할 게 아니라 주께 고마워해야 돼요. 왜? 진리는 주님께 속했기 때문에.

앞으로 신학교 갔을 때는 이 점을 명심하세요. 교수가 진리를 주는 게 아니에요. 진리는 주님이 주는 겁니다. 물론 그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해서 밉보이면 곤란하겠지만. 진리는 단독성이에요. 사람이 줄 수 없어요.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예수님께만 있는 진리, 우리한테는 없잖아. 어떻게 하나? 소용없는 게 아니겠어요? 2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이게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하면, 우리가 목사한테 배운 게 아니에요. 어느 목사한테 배운 게 아니고 이 본문 보면 진리를 누구한테 배웠느냐 하면 진리를 갖고 있는 예수님한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거예요. 누가? 에베소에 있는 성도님들이.

그걸 어떻게 아나? 내가 저 목사나 저 장로나 집사한테 배운 게 아니고 사람에게 배운 게 아니고 주님께 직접 배웠다는 것을 우리는 그럼 어떻게 아나? 그걸 고백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건 바로 진리의 단독성에 대해서 변하지 않는 사람의 바로 그 고백입니다.

진리는 주님 혼자 만들었고 만드신 분이 혼자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자기 증인들을 통해서. 증인은 진리를 만든 게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십자가 안 졌습니다. 십자가 지신 것은 예수님만 십자가 졌어요. 그걸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거죠.

택배 받은 사람이 택배 선물 준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되지, 택배 기사한테 고맙다 하면 안 되죠. 물론 수고는 했지만. 택배를 보낸 사람이 있는데 왜 전달한 사람에게 고맙다 해요?

진리를 전한 사람은 철저하게 내가 전하게 한 것도 주님이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말을 듣는 그것은 내가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서 듣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직접 여러분들을 가르치고 집어넣었기 때문에 이 진리가 전달되어지고 여러분들이 진리를 알아듣는 거예요.

끝까지 진리의 단독성은 예수님도 단독성이지만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도 단독성이 살아있어야 돼요. 이것이 바로 진리의 단독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