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겸손
교만과 겸손
2023년 11월 1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3:15-19
(13:1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13:16)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13:17)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13:18)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13:19)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교만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이스라엘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교만이 뭔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선적으로 보여주시려는 겁니다. 즉 교만이란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이 주입되어야 비로소 등장되는 겁니다.
즉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교만을 들추어내기 위함입니다. 죄가 죄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이 이 세상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죄로서 드러나기 위해 인간을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로서 인간은 죄의 기계에 해당됩니다. 여기에 일체 인간의 자율성을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교만이 드러나는 현장에 ‘겸손’도 같이 드러납니다. 유일하게 겸손을 위해 나타나야 하실 분이 교만한 인간들 속에서 나타나시는 겁니다. 인간의 교만은 개인적 자질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인간들이 다 교만한 겁니다. 창세기 11:1에 보면, 노아 홍수 이후에 인간의 마음이 연합되어서 시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 건립입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1-4)
집단적으로 교만합니다. 특정 인간이 덜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자들은 마음이 일치된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는 것’입니다. 이 ‘우리’ 속에 각 개인이 다 포함됩니다. 즉 인류 전체가 다 교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지면으로 다 흩어져서 그 흩어진 전체에서 다 교만의 징후들이 돋아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창세기 12장에 보면, ‘복의 근원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자신과 아브라함의 차이성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일반성 속에서 집어넣지 않고 따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복을 받는 자가 되는 겁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나는 당연히 저주받아야 될 교만한 자”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렇듯 오늘날의 교만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보편적입니다. 국가에 속하여 연대감 속에 놓이게 됩니다. 국가는 대외적으로 물리적 군사력을 갖추어야 하고 내부적으로 치안과 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교육이란 동일한 의식의 정보망으로 국가내부의 정신을 구현하는 체제작업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성격상 겸손해도 타국의 입장에서는 교만한 국민들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따라서 절대적 겸손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출생 자체가 교만한 공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요 받은 교육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8:12에 보면,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겸손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없음’에서 나옵니다. ‘있음’에서는 진정한 겸손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17:24-27에 나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이 대목에서 베드로가 실수한 게 아닙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자에게 성급하게 “우리 주님도 내실 마음이 있다”고 말을 건네버렸습니다. 이제 주님은 성전세 거두는 자에게 직접적으로 상대할 마음은 없습니다. 문제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주님께서 성전의 주인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6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도리어 성전세를 받아야 될 분인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성전세를 받는 자에게 반 세겔의 성전세를 주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결과입니다. 겸손이 무엇에서 나오는 걸까요?
없는 돈이 없는 방식으로 나옵니다.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하다 걸려든 물고기 입에 베드로와 자신의 성전세를 들어있게 하셨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의 요구를 충족하십니다. 이것은 곧 모든 ‘있음’은 겸손과 무관함을 밝히시는 방식입니다. ‘있음’ 자체가 교만의 모습으로 ‘있음’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있음을 자신이 관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왜 내가 여기 있는지, 왜 사는지를 모릅니다. 이유도 모르면서 시간만 갉아먹고 보내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있음’에서 출발하면 이런 성질을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없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 들어오면 이것이 가능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여기서 바람을 언급하면서 끝에는 ‘성령으로 난 사람’으로 연결됩니다. 즉 바람의 특징은 실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기능으로 설명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바람처럼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느냐로 봐야 합니다. 마치 한 세겔의 성전세를 물고 나타난 바다의 고기와 같은 존재인 겁니다. 인간은 자신을 안 무너지게 하려고 합니다. 이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살기 때문입니다. 교만이란 자기 자신을 시작점으로 혹은 끝점으로 여기는 겁니다.
성령으로 난 자는 마치 바람같아서 ‘어디로 가며 어디로 가는지’ 본인이 알 필요가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주님의 기능이 나의 생애를 주도하기 때문입니다. 전에서 죄의 기계였던 자들이 이제 의의 기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체가 교만한 세상의 일부가 되어 거기서 교육받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7강-예레미야 13장 14~19절(교만과 겸손)23111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3장 14~19절입니다. 구약성경 1069페이지입니다.
“너희는 들을찌어다, 귀를 기울일찌어다, 교만하지 말찌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 자신이 만들어 놓고, 자신이 이스라엘을 철회하십니다. 다 잡혀가게 만들어버립니다. 잡혀갈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만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아예 안 만들었으면 왜 안 되는가. 그러면 교만이라는 것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드러내고, 교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겁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인간이 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많은 학문이 있지만, 그들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해준 사람도 없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왜 존재하는지, 왜 없지 않고 있는지, 그들은 똑같은 답을 내놓습니다. 답이 뭐냐. 모르겠다. 모르면서 시간만 갉아먹고 있다는 겁니다. 계속 모르겠다. 또 하루 살고 나면, 모르겠다. 한 10년 살면 또 모르겠다. 100년 살고 나도 또 모르겠다. 나중에는 ‘에이~모르겠다’
아무도 모르니까, 자식에게 이야기할 것도 없어요.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알아서 다 챙기겠지. 뭐, 동물도 아니고, 뭐 못 먹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그저 너 밥 먹고 살라는 거죠. ‘어머니, 이것이 진정 인생 사는 이유입니까?’ ‘몰라, 그런 건 나에게 묻지 말고, 목사님에게 물어야지’ 뭐 목사는 압니까? 지난 강남 모임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저녁 식사 중에 이명직 목사님이 전화가 와서 통화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앞에 있던 분이 목사님이 통화하니까, 이렇게 좋게 생각을 해주었어요. 본인 들으라고 한 건 아니죠. 다른 사람들이 듣고 있는데 이렇게 말해요. ‘어떻게 목사가 복음에 관심이 있느냐. 세상에 목사가 복음에 관심이 있다니’ 상당히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그 질문을 좀 더 깊숙이 바늘을 꽂아서 질문했으면 좋을 텐데.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해요.
‘어떻게 목사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없을까’라고 질문을 해야 해요. 어느 정도로 관심 없느냐 하면, 복음에 관심 있다는 말은 이제는 나 죽고 사는데 관심이 끊어졌다는 뜻이거든요. 죽고 사는데. 내가 안 죽으려고 사는 것이 이유가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이유가 아니고, 이유는 딴 데 있어요. 내가 얼마나 교만한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정리되셨죠? 인간은 죄짓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죄짓는 이 몸을 통해서 죄짓지 않는 몸과 대조하고 비교하라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다윗의 고백처럼.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네가 지은 교만은 네가 해결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 사람 보면 전부 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인간들은 이미 교만이 생활화되었어요. 교만이 확정되었습니다. 교만이 뭐냐. 교만은 내가 안 무너지는 것이 교만이거든요. 내가 안 무너지는 거.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이 무너지는 것이 십자가예요. 그렇게 오병이어 행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많은 사람의 귀신을 쫓아냈지만, 정작 본인은 죽음에 그냥 무너진 거예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도 나 따라서 그냥 죽음에 무너져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에 무너져라. 그렇지 않으면 이건 전부 다 교만이 되는 겁니다. 살기 위해, 사는 이유도 모르면서 살겠다는 그것보다 더 교만한 일이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이유도 모르잖아. 이유도 모르는데 왜 살아야 해. 우리는 교만을 위해서, 교만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은 교만의 대가, 처절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어요. 계속 교만해라. 내가 죽여줄 테니까. 그런 뜻이죠. 인간이 자기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님을 믿는다면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무너졌느냐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러면 오늘 본문에 교만하지 말라고 나와 있거든요.
잠언서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오는데, 18장 12절입니다. 어디 보면 이걸 액자로 해놓은 데도 있어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 이게 교만이면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 교만하지 않겠다는 이것도 교만 아닙니까? 마동석이 영화에 보면 이것에 대해 좋은 예가 나와 있어요.
마동석이 영화에서 형사인데, 깡패들이 있는 소굴로 가서 “야, 너 이름이 뭐야?” “까불인데요?” “이게 어디서 까불고 있어?” 원래 이름이 까불인데 까불었다고 주먹으로 한 대 맞아요. 그럼 이름이 원래 그런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 이름이 뭐야?”라고 물으시니까 “저 까불인데요”라고 할 수밖에 없고, 그러니까 맞아야 하는 거예요. 쥐어 터져야 하는 거예요.
교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교만을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어요. 교만을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면 그다음 질문이 이거예요. 교만이 어디서 만들어졌는가예요. 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만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공동의 연대감에서 만들어졌어요. 창세기 11장 1절에 보면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라고 나와요.
그들의 의식,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동일했다는 겁니다. 동일한 것의 결과물이 뭐냐, 바벨탑이었습니다. 인간은 한결같아요. 바벨탑. 카스테라빵을 열 조각 낸다고 해서, 그 열 조각이 카스테라가 단팥빵이나 찐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카스테라가 열 조각으로 구분될 뿐이에요. 그 바벨탑을 하나님께서 언어를 바꾸어서 각 지방으로 흩어지게 했는데, 이 바벨탑 쌓는 것이 노아 홍수 이후에 80년쯤 후에 있었거든요.
이렇게 잘렸을 때, 온 각처에, 황허문명, 인더스 문명, 이집트 나일강 문명, 온 각처에 바벨탑 중심으로 흩어졌는데, 흩어져봤자 그 교만이 흩어진 거죠. 한결같죠. 바벨탑을 한 곳에 세운 탑이 여러 탑으로 확장되고 분산된 거죠. 마치 들에 불이 나면 불씨가 날아가듯이, 교만이 날리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복은 이제 없다는 겁니다.
복이 없다고 해놓고, 창세기 12장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해서 하는 말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린다고 되어있습니다. (창12:2)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아브라함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말은 곧 저주로 보편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저주 외에는 없고, 지옥 외에는 없다.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특별한 의미로 세워주지 아니한다면 이 세상에는 그냥 저주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 지가 뭔 데? 지나 나나 똑같은데’라고 한다면 그것은 저주가 그대로 있다는 뜻이에요. 그것은 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 교만은 어디 있는가. 교만은 공동, 연대감을 가지고 살아갈 때, 교만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를 조금 설명하면, 인간은 살면서 이유를 몰라요.
이유도 모르면서 살기 위해서 현실과 교류합니다. 그러면 그 시대의 변화라는 것은 개인의 인간성 변화와 관련해서 시대도 변하고 거기에 따라서 나도 변하고, 같이 한통속이 되어서 변합니다. 내 것이라는 것을 따로 딱, 핀셋으로 집어서 끄집어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건 나의 개성이야’라는 그런 거 없어요. 개성같은 거 없어요. 그냥 한 덩어리 시대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이런 예를 가지고 방금 설명한 거, 인간은 동일한 시대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2~23절에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이건 사람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죠. 보편적인 인간세계인 바벨탑 후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언급합니다.
그러고 난 후에 24~25절에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라고 물었어요.
이 본문이 약간 난해한 것은 뭐냐 하면, 성전세가 나오는데, 성인은 반 세겔을 내게 되어있어요. 그 시대상이니까. 유대 시대상이니까. 성전세 받는 사람이 베드로보고 ‘너희 선생님은 왜 성전세를 안 내냐?’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여기서 경솔하게 답했어요. “내신다”라고 답했어요. 그러니까 이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잖아요.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도대체 예수님에게 속했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반대하는 세상과 한통속인지, 베드로가 지금 헷갈리고 있어요. 혼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세상에서 다 ‘세금 내라’라고 하고, 안 내면 처벌받으니까, 처벌이 무서워서 세금 내는 거예요. 자진해서 세금 내는 사람 없습니다. 세상 자체가 성전세 내라고 할 때 사람들은 ‘이거 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고 베드로가 한 번도 고민한 적이 없는 게 들통난 거예요.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잖아. 그러면 하나님이잖아. 하나님은 성전세를 내시는 분이 아니고, 도리어 성전이니까 성전세를 받는 분이거든요. 마태복음에서 이미 내가 성전의 주인이라고 분명히 언급했으면, ‘아, 주님은 성전이시구나’라고 이해하면 되는데, 그건 그거고, 세상은 세상이라는 거예요. 세상이 더 무섭다는 거예요. 물어봤어야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세 내라는 사람과 상대를 안 해요. 그 사람과 상대 안 하고 베드로와 상대합니다. 베드로에게 물어요.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지금 세상 권세가 세금을 내는 것이 교만이고 나쁜 짓이라는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과 주님 세상을 구분 못 하는 베드로를 지적하는 거예요.
세상이라는 것은 두 그룹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건 상식으로 알아놓으세요. 국가가 구성되려면 대외적이고 내부적인 거, 이 두 기능만 있으면 국가가 돼요. 바깥에는 뭐냐? 국방력을 키우는 겁니다. 물리적인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이 국가예요. 하도 다른 나라가 넘보니까요. 다른 나라가 옆에서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저, 러시아 우리 땅인데, 우크라이나 우리 땅인데’라고 맨날 이러고 있다가 쳐들어 왔잖아요.
국가가 되려면, 내 땅은 내 땅이라고 말로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걸맞은 군사력을 갖춰야 해요. 또 내부적으로는 치안과 교육입니다. 국방, 치안, 교육이 다 필요한 것이 돈이에요. 그래서 세금 거두는 겁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유대 나라에 인구조사가 있었어요. 그때 아기 예수가 태어나거든요. 인구조사를 왜 하느냐. 사람 수를 조사해서 세금을 매기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세금을 왜 달라고 하느냐. 세금을 받는 쪽이 지켜주는 쪽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우리 소속을 ‘너는 우리 소속이야. 지켜줄 테니 나에게 세금 내’라고 하는 거예요. 양아치 비슷한 거죠. 양아치죠. 여러분이 아는 궁예, 왕건이 보다 윗대 왕인데, 궁예 다음이 고려를 세운 왕건이 왕이 되잖아요. 최수종이 나오잖아요. 궁예가 무슨 짓을 했냐면, 양아치 짓을 한 거예요.
국가가 치안이 문란하니까 깡패짓하며 강도들 떼스리가 돌아다니며 ‘세금 내. 세금 안 내면 장사 못 해’라고 호떡집 발로 차고, 오뎅집도 발로 차면서 ‘세금 내. 아줌마 세금 안 내면 장사 못 해. 이 동네는 우리 파가 접수했어. 칠성파가 접수했어’라고 이런 식으로 한 거죠. 깡패들이에요. 원래 국가는 그렇게 깡패가 세우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도(道)나 닦지 뭣 한다고 칼 갈고 활 쏘고 돌아다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깡패라는 것도 먼저 그 나라를 선점한 왕이 뒤따라오는 사람을 깡패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도 깡패면서. 완전히 정권 잡는 쪽이 역사를 새로 쓰는 거예요. 정통성 있다고. 그게 뭐냐 하면 교만이거든요. 교만의 현장에 우리는 툭 던져지듯이 출생한 겁니다. 왜 우리는 이태리에서 태어나지 않았죠. 왜 러시아에서 안 태어났죠? 왜 우간다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조나단(방송인)처럼 콩고에서 왜 안 태어난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 속해도 주님께서는 전체를 바벨탑,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겁니다. 전체의 교만 덩어리를 하나의 나라로, 바벨탑의 후손들로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들 가운데서 세금 달라고 하고 깡패짓하죠. 특히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내부의 정보를 흩어내는 겁니다.
국가가 필요한 정보를 성장하는 아이들부터 해서 계속 교육하면서, 내부 정보망을 가지고 단속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한국에 태어난 사람은 한국말을 해야 취직하기 쉽지, 외국말만 해서는 취직하기 어려워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한국에 와서 귀화하고 싶어도 ‘애국가 4절 외워보세요’라고 하는데 못 외우면 탈락입니다.
모든 교육은 단속하기 위해서, 집결시키기 위해서, 힘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거기에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동의가 다 되어버린 거예요. 애국가 부르면서 손흥민이 한 골 넣으면 잘했다고 박수하고, ‘아~~대한민국’ 하면서 같이 거기에 합세하고요. 이미 정서적으로 순화되어서 우리가 속해있는 이 국가에 속한 것이 어딜 봐서 교만입니까? 전혀 교만하지 않다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평범하게 사는데 그게 교만이냐?’라고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복음이 들어와 버린 겁니다. 복음이. 진짜로 패망이 아니고 겸손은 영광이라고 했거든요. 잠언서 18장을 다시 보면 12절에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존귀를 받을 만한 최초의 분이 누구냐. 겸손한 분, 유일하게 겸손한 분이 누구냐면 예수님이 오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과 다른 사람과 철저하게 구분되고 비교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성전세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겸손한지 마태복음 한 번 보겠습니다. 25~26절에 “베드로야,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다른 사람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낼 필요 없다”
“그렇지?” 전라도 말로 하면 ‘그라제?’라고 하면서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낼게”라고 하시는 이게 겸손이에요. 겸손한데 그 겸손을 위한 동전을 어디서 동원 시키느냐 하면, 동원하는 재료가 없는 데서 만들어내요. 없는 데서.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갑자기 낚시하셔서 27절에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베드로 너 반 세겔, 나 반 세겔, 그 한 세겔을 성전세 달라는 인간에게 줘버려라. 왜? 성전세와 관련해서 너와 내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한 세겔을 주라고 하신 거죠. 이게 뭐냐 하면 없는 것으로 인해,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 겸손의 기능입니다. 방금 어려운 이야기 했는데, 우리의 존재는 존재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없는데 기능상 있어요. 실체는 있어도 무시되고요, 기능만 나타나는 게 우리의 성도, 인간의 존재 이유입니다.
기능이에요. 기능. 실체가 아니고. 특히 성도같은 경우에는 그걸 알아버렸죠. 불신자는 그걸 모르지만. 요한복음 3장 8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뭐 같다? 바람 같다.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뭐냐. 실체가 없고 기능만 있어요. 마치 바람 같아요.
나에게 네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느냐?’라고 묻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중간에 얻어걸린 거니까, 성령이 바람 불다가 ‘너’라고 딱 집어서 얻어걸린 거니까, 내가 이렇게 구원받기 위해서 준비했다든지 이런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내 인생을 주관할 수 없는 처지에서 구원받은 거니까요. 어디서 왔느냐? 주님에서부터 와서 주님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그냥 걸려든 거예요.
차 공짜로 얻어탄 것과 똑같은 거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예수님께서 성전세 낼 때, 누가 얻어걸렸냐 하면, 애꿎은 고기가 얻어걸렸거든요. 고기는 그냥 바다에서 노니다가, 합리적인 추론과 정교한 논리가 막 동원되어서 ‘가만있어보자. 성전세 물고 있던 고기가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장난삼아 세겔을 바다에 빠뜨릴 것이고, 바다에 세겔을 먹은 고기가 여러 마리 있는데 A라는 고기와 B라는 고기가 있는데 하나는 한 세겔을 물었고, 하나는 반 세겔을 물었다면 낚시할 때 주님께서는 “반 세겔 있는 고기는 저리 가”라고 해서 한 세겔 있는 고기가 아다리가 맞아서 딱 걸렸다’
지금 인간의 논리가 그렇게 진행이 될 때, 인간은 납득을 해요. 그러나 이것은 고기 자체에 기능만 생각하란 말이죠. 마치 우리 자신이 주의 뜻대로 움직이는 고기라고 보면 됩니다. 주께서 성전세 드리도록 하는 고기처럼, 하나의 기능자로서 살 뿐입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그냥 바람같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복음을 안다는 것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낮추자. 낮추자’라고 도 닦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주께서 주시는 하루하루 일을 하다 보면 남을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내가 주님에게 지시받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데, 다른 사람의 체면과 위신을 고려할 필요가 없단 말이죠. 다른 사람 만나고, 헤어지고, 우리 좋았는데 이별한다고 할 때, 바람같은 성도는 그런 말 하지 않습니다.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어. 슬픈 인연인가. 나는 이 순간을 이별이 성립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겠어. 무슨 이별이 있어요. 각자 너 할 일 하고 나 할 일 하고,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또 만나고 그러면 되지요. 죽음? 인간은 자기 죽음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기 죽음이 해석 안 된다는 것은, 인간은 불안에 떨 하등의 권한이 없어요.
내가 염려할 권한이 없습니다. 저는 이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하겠습니다. 인간은 인간존재가 아니라 그냥 사물이다. 기계다. 물건이다. 물건은 그냥 쓰시는 주인에 따라서 쓸 뿐이에요. 그러면 누가 쓰는가. 말씀입니다. 말씀의 세계에서는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말씀의 세계에서는 더이상 교만이 성립되지 않는 거죠. 성립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잠언서 30장 25~26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이게 개미잖아요. 개미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도 개미와 다를 바 없죠. 약한 종류이고 힘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약하게 오셨지만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유일하게 교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가 일하는 데로 그냥 따라갔을 뿐이에요.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이루려 함이 아니라”(요6:38) 우리는 그냥 바람 같아요. 출생부터 바람이고 죽을 때도 바람이고, 그 가운데서 교만하지 않은 분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분만이 아버지의 유일한 언약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예레미야에서 나타나지 않아요. 신약성경에 기름 부은 성도로써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오늘 본문은 구약이니까 먼저 ‘그건 아니야. 그건 다 교만이다’라고 단정 짓고, ‘기다리자. 교만이 아닌 겸손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못 간다’라는 이게 바로 어린아이, 자기 자신이 어린아이라서, 얻어먹는 재미, 날마다 얻어먹고, 날마다 시킨 대로 하는, 그들이 이미 천국에 들어온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도 모르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왜 사는지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기에 우리도 몰랐고, 그저 얼씨구나 좋다고 한통속 되어서, 내 배만 채우고 사는 게, 그게 인생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교만일 줄을 십자가를 통해서 깨달아서, 이제는 겸손이 뭔가를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