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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영

아빠와 함께 2023. 11. 5. 10:22

심판의 영

2023년 9월 27일                       본문 말씀: 스가랴 4:6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선지자는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을 듣게 됩니다. 스룹바벨이라는 존재는, ‘실패한 이스라엘’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일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등장된 인물입니다. ‘성전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뜻은 전에 있던 성전은 이웃 나라의 불의함으로 불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해서 철거하고 철수시킨 것이었습니다.

즉 ‘성전이 없는 이스라엘’이라는 뜻은 인간들이 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는 처지에 있는가를 보이기 위한 모델이었던 겁니다. 그 대표자 입장에서 스룹바벨이 등장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통고를 받고 있습니다. 스룹바벨이 들어야 될 내용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입니다.

그리고 성신께서 인간과 대조가 되면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인간에게 전달할 내용은 이러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못하게 하고,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것을 저지하라”입니다. 스가랴가 들었던 이 예언은 결국 하나님의 신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분리작업은 곧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작업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하나님을 하겠다는 것이나 구원받겠다는 것은 모조리 성신이 하시는 일로 인하여 거부당합니다. 성신의 일을 간단히 말해서 “인간들이 주제 파악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인간과의 만남의 장소인 성전을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쳘폐시킨 이유를 알아라는 겁니다.

그것은 평소에 인간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나 힘이나 재능을 투입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싶었던 겁니다.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단절’을 전제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와 단비를 주시는 분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참새를 왜 친히 기르시고, 들풀의 하찮은 꽃도 왜 굳이 입히시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충분히 도와주시면 좋겠다는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으로도 하나님 사랑하고 찬양하는 이유로 넉넉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아닙니다. ‘그의 나라와 의’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와 ‘입을 것, 마실 것, 먹을 것’을 염려하고 최종적으로 여기는 자들을 구별하고 계십니다.(마 6:32-33) 이 구별 경계선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투입시키신 겁니다.

마치 스룹바벨의 존재에 이런 메시야성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실패해야만 하고 심판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다른 인간 존재를 등장시킬 때까지 성신(성령)의 활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4:29-30에 보면, “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성령받은 자’과 그렇지 않는 자를 구분짓는데 놀랍게 성령 안받은 자를 ‘육체에 속한 자’로 규정합니다. 즉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사는 자가 바로 천국에서 당연히 내어쫓김을 받는 대상자들이라는 겁니다. ‘육체에 속한 자’는 곧 모든 자들을 뜻합니다.

육체로 태어났기에 당연히 ‘육체에 속한 자’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자들이요 성신으로부터 ‘∼ 아니요’라는 평을 받아야 될 자들이라는 겁니다. ‘육신에 속한 자’와 ‘성령의 속한 자’ 사이에 예수님께서 끼어들므로서 인간은 그 어떤 시도와 기대와 바람에도 ‘성령의 속한 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분이십니다. 내어쫓김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바로 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아버지의 심판을 알려오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무효화 할 수 없듯이 그 어느 누구도 심판의 대상자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인생이 있어 가장 영광스럽고 소중한 순간은 심판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접하게 되면 기존의 인간 만남이 모두 시시해지고 별 의미를 줄 수 없는 모임이 됩니다. 중간에 끼어드신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품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이 죽음의 상처를 제공합니다. 죄된 몸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앉게 되시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성령을 예수님의 역할이 필요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즉 ‘잃어버림을 당한 예수님의 자기 경험’이 성도들 모두의 경험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비유’, ‘동전 찾기 비유’, ‘탕자 비유’가 그것입니다. 모두가 잃어버린 처지에 있으면서 그 처지를 마땅하게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존엄성에 도취되어 자신의 정당함을 나열하고 고백하지만 바로 그 모습이 자신을 괴멸시키게 됩니다.

자신이 품고 있었던 그 천국에 대한 꿈은 여지없이 침노당해 망쳐져야 합니다. 그런 자만이 천국을 새롭게 얻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칭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여겼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그들은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리어 쫓겨나는 꼴이 된다는 겁니다. (마 8:11-12)

마태복음 21:28-31에 보면,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소개하시면서 순서를 바꾸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내부의 순서가 그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마 19:26) 인생에 있어 성공이나 실패도 없고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죽여서 그 죽이시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나라와 의’를 드러나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지 않으려는 옛 부대에 새 술이 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 심판의 영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4장 6절입니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아멘.

스룹바벨에게 스가랴가 받은 예언 안에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스룹바벨이라는 자에게 하는 말을 스가랴가 엿듣는 그런 형식이 됩니다. 그런데 이 스룹바벨에 관한 이야기는 그 스룹바벨 안에 장차 오실 우리 예수님의 본질이 스룹바벨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하는 이야기를 선지자가 엿듣고 그걸 전파하면 되는거죠.

스룹바벨에게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은 스룹바벨의 계획도 아니고 스룹바벨의 요청도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스룹바벨 속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메시아 보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촐합니다. 내 이야기 끊어버리고 주님께서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의 영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그걸 엿들어서 그것을 대외적으로 전파하면서 또 자신의 것으로 자신의 들리는 말씀으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거에요.

스룹바벨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이제 힘과 능은 이거는 사람에 관한 겁니다. 여기 사람을 집어넣는거에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이르시되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능으로, 재능이죠. 사람의 능력, 지혜죠. 사람의 능력으로 아니한다.

누구보고? 스룹바벨보고. 그러면 스룹바벨은 뭐냐하면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이 “왜 인간들은 이렇게 실패할 수 밖에 없는가?”를 스룹바벨을 세워놓고 언급을 하는거에요. “이 실패자야” 또 다른말로하면 “니 능력으로 살려고하는 자야.” “니 능력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 하는 자야.” 또는 “니 힘으로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하는 자야. 그거 다 실패했다.”

스룹바벨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성전이 이스라엘에서 성전 깨어진 것은 이것은 다른 이방나라가 힘이 세서 깨진 것이 아니고 성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징벌의 차원에서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불태워 버린거에요. 벌 내리신 겁니다. 이스라엘 심판 받은거에요. 성전이 없다는 것은 ‘성전이 없고 이스라엘이 다 해체가 되었다’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성전없습니다. 만남의 장소 없어요.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 끊어졌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어있다는 그 사실을 그 뒤에 오는 스룹바벨을 통해서 통고 해주는거에요.

성전이 불타버렸다.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성전 불탔다. 따라서 너희들이 하나님 찾아봐야 소용없다.’라는 사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세운거에요. 그렇다면 이게 스룹바벨은 이스라엘을 대표할 수 있다는데 그러면 스룹바벨은 인간의 대표. 못한다, 힘으로 안된다. 근데 그 뒤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나의 신. 또는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그러면 여기서 이 말씀을 통해서 스룹바벨과 그다음에 나, 여기 나라고 하는 나의 신이니까. ‘나’, 이 ‘나’가 둘이 이렇게 분리되었어요. 떨어져 있는거에요. 각자 다른 위치로 갈라서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심판 또는 단절이 거기에 개입되어있고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다 하신다. 맞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아닙니다. 그거 맞는 이야기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짝을 이루어서 대비를 이루는 그 요소가 거기에 앞에 마딱뜨려줘야돼요.

사람은 못한다. 전제해야 돼요. 사람은 못한다. 할 수가 없다. 그게 전제로 해서 너 못하지 너 안돼 그런데 이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이렇게 되어야 이게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 25절에 보면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이게 반드시 동원 되어야 돼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에요. 그러면 이 사람속에 누가 포함되는가? 저와 여러분들이 포함이 돼야 되는거에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어요? 그러면 그 믿는 다는 내용속에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이것만 들어가면 안되고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나는 못 한다’가 그 안에 우리가 믿는 내용 안에 그게 포함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거든요. 이스라엘 역사는 그냥 있다 마는 있다 없어졌다, 끝난다, 이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 인간들이 파악하지 못한 진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등장하는데 이제 우리 오늘 본문을 보니까 진짜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사람의 능으로 안되고 사람의 힘으로도 안되게 하시는 하나님.

그걸 전제로 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하나님. 그리고 난 뒤에 그것과 단절되어서 하나님은 다 하시는 하나님. 앞에 것도 놓치지 마시고 빼먹지 마시고 뒤에것 만 챙기면 안돼요. 하나님이 다하십니다. 이러면 안돼요. 앞에것을 반드시 이렇게 연결 시켜야되고 결부시켜야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왜 ‘모든걸 다했습니다.’ 이거 먼저 성급하게 좋아하지 마시고요. ‘왜 우리는 안됩니까?’를 생각해야 돼요.

왜 나는 안됩니까? 왜 나는 안된다는 쪽에 내가 이미 포함되어있습니까? 그것을 파악해야 돼요. 상당히 이게 굉장히 따져보면 엄청나게 난해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에요. 왜 우리는 안돼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모자라지. 부족하지. 어려운거없어? 내가 도와줄게.” 이렇게 나오면 하나님도 좋으시고 우리도 기분좋고 이럴탠데 하나님께서 딱 끊어서 “너 안돼” 내치시는 거에요. 그리고 그 하신다는분이 누구냐하면 성신, 나의 신. 성령께서 하신다는거에요.

그러면 성령은 뭐냐? 성령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에요. 스가랴가 하나님이 하나님보고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 내용의 핵심은 뭐냐하면 “인간은 하지 못하게 만들어라.” “인간이 구원되는 것을 막아라.” “인간이 구원받고 싶은 사람들이 구원받고자 노력하는 것을 막아버려라.” 이것이 바로 인간은 못 하고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신나지 않습니까? 즐겁지 않습니까? 뭐 절망적이라고요?

그럼 이거를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할 수 있는데 자기한테 기대와 희망을 갖고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못마땅하고 짜증나는거에요. 분노가 일어나고. 이게 왜 엄청나게 어려운가 하면은 결론 부분이 뭐냐하면 이거에요. 갈라디아서 4장. 그 스가랴에서 인간은 못 한다. 하나님의 신, 그러니까 신이라는 것은 성령이죠. 인간은 못 한다, 성령은 하신다. 이걸 그 내력이 갈라디아서 4장 28절 29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성령의 반대말이 있어요. 성령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육체, 성령의 하시는 일의 반대말이 육체가 하는 일이에요. 오늘 스가랴 본문하고 똑같잖아요. 똑같으면서 완성을 보고 있어요. ‘성령을 따라난 자’라는 것은 육체로 따라 난 자가 아니라는 것이 오늘 스가랴 예언에 최종 핵심 내용이 그거에요. 마지막 도달 지점에 다 밝혀지는 내용은 성령의 일은 육체가 못한다.

육체는 못하는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육체를 내어 쫓아버려야 된다는거에요. 인간은 쫓겨나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그러면 모든 인간은 쫓겨 나가면 천국은 텅텅 비겠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네. 이렇게 되지요. 이게 어려운게 성경에서 ‘인간은 못한다. 하나님의 신이 한다.’ 이렇게 하시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자기가 택한 백성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택한 백성 자체, 그 자아를 본인을 본인에서 본인을 분리시키는 그 작업을 성령께서 해 주시는 겁니다.

나가 하나라고 여기는 것을 두 개로 나누어 가지고 육체로 된 나와 성령으로 새롭게 된 나를 두 개가 발생 되도록 그렇게 주께서 조치를 하시는거에요. 그렇게 되게 되면 처음에 육체로 그러니까 인간이 육체로 된 나. 육체로 된 나부터 출발을 해요. 육체로 된 나부터 출발을 해서 그거는 아니야, 그거는 내쫓겨야되라고 해당 육체 보고 하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그동안 이 세상에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그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 두 개의 차이가 나와요. 여러분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좀 난해할 수 있는데요.

마태복음 6장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라고 되어있어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그 나라 의를 구하라. 그 나라 의를 구하라. 그렇다면 여기서 이방인 따로 있고 그 나라의를 구하는 하나님 백성 따로 있다는 것은 이거는 결과적이에요. 결과적. 좀 어렵지만 더 이상 쉽게 갈수가 없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능으로 안되고요. 인간의 힘으로 안돼요. 그런데 그 인간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께서 전체 인류를 대표해서 이스라엘을 뽑았고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스룹바벨이 나왔는데 그 스룹바벨보고 하는 이야기가 “그래서 인간은 안되지? 봐. 인간이 힘으로 안 되잖아, 능으로 안 되잖아, 지혜로 안 되잖아. 그 봐. 확실하게 역사를 통해서 체험했지?” 이렇게 되는거에요. 그렇다면 그 인간의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된다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하면 바로 우리들이 이미 포함되어있어요.

이미. 이미포함되어있다고요. 근데 마태복음 6장에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이거는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여기에 해당되어요.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요 뭘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들풀도 입히시고 참새도 키워주셨듯이 주께서 키워주신다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이 햇빛도 주시고,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햇빛 주시고 공기 주셔서 이 자연 세계를 지켜주시는 참 좋은 분이라는 겁니다.

이 말 속에는 사람의 능으로 안 되고 힘으로 안 된다는 그 내용이 부정적 내용이 여기에는 들어있지 않아요. 빠져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햇빛 공기 주듯이 계속 우리를 먹여 살렸으면 참 고맙겠습니다’라는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한계에요 그게. “하나님 덕분에 살았지, 하나님 아니면 어떻게 살았겠어.” 이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게 하나님의 일, 성령의 일이 그게 끝부분이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는 것은 인간을 죽이기 위함이에요.

이게 어려운거에요. 그 나라 의는요, 어떻게 얻어지느냐 하면 너를 죽여서 그 나라의를 드러내도록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너를 죽여서. 왜 갑자기 논리가 획 비약됩니까 라고 한다면 바로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예수님이 죽여서 그 나라 의를 이루었거든요. 예수님이 죽지 않는 예수님은 그 나라 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지 아니하면 “인간의 능으로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성취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된다는 것을 몸소 몸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버지께 버림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제자들. 따라갔다 따라갔다가 결국은 예수님께 못 따라가고 유턴해가 자기에게 되돌아갔잖아요. 대전강의에서 그렇게 두 번째 강의에서 그랬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랍비에요. 스승님이에요. 언제까지? 성령 오기 전까지. 언제까지? 악령이 있을 때까지, 악령이 주어졌을 때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나라” 했듯이 베드로가 마귀한테 매여있을 때 베드로와 그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님으로 여겼던 거에요.

왜 스승님을 따라다닙니까? 그분에게 있는 이야기, 말 내가 안 죽는데 도움 된다고 생각한거에요. 내가 안 죽는데. 여러분들이 말씀이 어려울 수 밖에 없지요. 말씀을 볼 때 이 말씀이 글로 되어있는데 보고 은혜받으면 되지, 할 때 뭐가 빠져있느냐 하면 그것도 니 능력이고 니 지혜인데 그거는 안된다니깐. 말씀 보고 은혜받아서 구원받는 것 그건 너의 노림수고 니가 지금 안 죽을려고 하는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거에요. 그동안 교회 다녀도 아무 소용 없어요 그게. 허송세월만 보낸거에요.

이렇습니다. 하나의 무대에서 인간이라는 것은 뭐냐, 하나의 무대에서 하나의 역할을 잠시 등장했다가 자기 역할 끝내고 무대에서 사라지는 단역 배우들.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역할이라니까요, 역할. 자기 맡은 역할이기 때문에 이것은요 제가 아까 기도 할때도 이야기했지만 인생 실패라는게 없습니다. 인간 성공이라는것도 없고요. 이기는 자도 없고요. 진자도 없어요. 그냥 역할이에요. 그리고 어떤 역할? 사라져야 될 역할. 사라져야 될 역할. 그것도 못합니까? 맡은 단역배우 엑스트라역도 못합니까? 다들 하고 계시잖아요. 문제는 자기가 전설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해서 그게 문제인거에요. 짧은 역할을 맡았다 그 말이죠.

남 일좀 부러워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요. 이런 뜻입니다. 어렵다고 해도 할 수 없어요. 어렵다는 말도 하기싫어요.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에요. 이 땅의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하나님께서 이 땅과 더불어서 내어버린 자에요. 이 땅의 인간들의 잘못된게 뭐냐 하면 이 땅의 인간들이 하나님하고 말씀 듣고 율법 지키면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는게 이게 예수님과 비교해볼 때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는 버림 받을려고 왔어요. 그것도 장렬하게. 주저없이. 버림받기 위해 오신게 예수님이에요. 우리는 바들바들 떨어요. 버림받을까 싶어서. 내 인생 실패할까 싶어서. 남한테 질까 싶어서. 매일 생각하는 것이 남한테 지면 안되고 내 인생 파토나면 안된다고 바들바들 떨어가지고 더워도 더운 날도 얼굴 파래요. 부들부들 떨어요. 너무 무서워서. 뭐가? 내 인생 조질까봐. 그것은 뭐냐?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안중에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인생 내가 알아서 건사해보겠다고 아주 발악을 하고있는겁니다.

그 발악 중에 하나가 우리가 말씀 지키면 천국간다는 거에요. 그 천국에 대해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해버렸어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게 얼마나 난해한 말씀입니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은 빼앗긴 자, 천국은 빼앗김을 당하는 자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천국에 갈 수도 없고 간 적도 없고 가고자 하는 그것도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 그러니까 침노 당하고 빼앗고 침노 당한다는 그러한 진짜 천국은 그러한 속성과 내용을 담고 있는 자만이 천국을 이해하는사람이에요.

그중에 한사람이 오늘 본문에 스룹바벨이에요. 스룹바벨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자기 나라 이스라엘에 분명히 70년 전에 성전있었어요. 그런데 성전을 세웠던 그 하나님에 의해서 성전이 불타버린거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한 성전이 불탔다는 말은 불 탈만 해서 불탔다는 뜻이거든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연결이 되어야 되고 연락이 되어야 된다고 그런식으로 하나님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 자는 아직도 니가 니자신을 모른다는 거에요.

하나님 쪽에서 관계를 끊었다는 말은 관계를 끊을만 해서 끊은 분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인생을 인간으로 살면서 제일 영광스러운 순간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나를 심판하는 하나님을 만날 때 가장 최고의 순간이에요. 나를 심판하는 하나님을 만날 때. 나를 심판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인간을 상대해도 그거는 시시한 일이 되는거에요.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만났는데, 사람이 어찌하리요? 하나하나 말을 다 바꾸려 하니까 정말 힘든데요. 나를 구원하시는데 사람들이 어찌하리요 이렇게 이해하잖아요. 그렇게 이해하시면 안 된다는 거에요. 사람은 능으로 못하고 사람은 힘으로 못하는데 우리는 은근히 노리는게 있어요.

내가 하나님의 천국을 원하면 은근히 노리면 주께서는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주께서는 해주시겠지. 그런 꼼수는 쓰지마세요. 그런 꼼수는. 그거는 불타버린 성전을 지금 성전이 불탔다는 그 심판을 쏙 뺀 사고방식이에요. 그동안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찾다보니깐 성경근처도 안 간거에요. 진짜 성경은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자, 심판의 하나님의 취지가 뭐냐 하면 아까 말씀 다시 말씀드릴게요. 너를 죽여서 그 나라 의를 내가 드러내고자 한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죽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나 하나 죽어서 그 나라 의를 뽑아내겠다는데, 왜 우리 목숨 빼앗으소서 라는 그렇게 느긋한 마음을 왜 못갖느냐 이말이죠. 뭔가 노리는게 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닙니까? 분명 그런게 있지요?

저를 죽여서 그 나라 의가 나온다면 아낌없이 드리겠습니다. 왜 이렇게 심판의 하나님에게 심판하소서 하고 못 드립니까? 자기 이익을 자꾸 챙기는거에요. 하나님 이용해서.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의 꼼수가 나옵니다. 뭐라하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평을 했어요. 8장 10절에,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 쫓겨 난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천국 갔다가 쫓겨나는가? 아닙니다. 천국 간다고 여기다가 쫓겨난 거에요.

천국을 가본적도 없어요. 그런데 그들은 나름대로의 천국 개념이 있어요. 그게 침노당하는거에요. 인간이 상상하는 천국은 침노당하는거에요. 뺏앗긴다는 말은 뭐냐하면 의당 천국 간다고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겁니다. 아까 제가 갈라디아서 4장 29절 다시 한번 보세요.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니까 그다음에 30절에,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하잖아요. 내어쫓으라.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예수님이 등장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내어쫓김을 당하는 현상이 일어남과 더불어 그나라 의가 이루어지는거에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마라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뭘해라?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무엇을 입을까? 주께서 책임지시겠지 나는 그나라 의를 구합니다. 이렇게 된다고 해서 이게 그 나라의가 되는게 아니라 이 말이죠. 그렇게 해서 그나라 의가 되는게 아니에요.

왜그러느냐 하면 그렇게 “이방인은 이렇지만 나는 이방인 안될래. 나는 천국가는 백성 될래.” 이 사이에서 사람의 능으로 안 되고 힘으로 안 된다는 요소가 빠져있잖아요. 이스라엘이 성전이 불탔다는 것은 빠져있잖아요. 스룹바벨이 실패자의 대표자로서 지금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있다는 것이 빠져있잖아요. 어디 뭐 유대인들은 바봅니까? 그들은 자기 단도리 다 하면서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잘못한 것 우리는 회개하고 이제는 제대로 해보자. 그래서 우리는 바르게 정말 진짜로 율법 지켜서 천국에 가자. 그렇게 우리는 가는 백성이야.

이렇게 하다가 그들은 쫓겨나는거에요. 어디 그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개의 비유를 덩어리째 집어 넣어놨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99마리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거고, 또 하나는 동전을 하나를 찾기 위해서 온 집안을 다 휘젓고 다니는 여자 이야기. 세 번째는 유명한게 뭐냐 하면 탕자 이야기. 16장에 가면 더 유명한 이야기.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 이 4개의 비유 특징이 뭐냐 하면, 탕자, 잃어버림, 동전, 이거는 본인들이 은근히 구원받을까 생각해 본적도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주께서 찾아와서 건져내는 거에요. 그들이 어떤 상태였습니까? 구원 받은자들이? 잃어버린양이에요. 다시말해서 잃어버린 양이라니까요. “아이, 목자찾아오겠지.” 그런건 없습니다. 그냥 잃어버린거에요. 탕자도 마찬가지에요. 뭐 아들 아버지니까 아버지 사랑이 많으니까 아들 대우하겠지. 아닙니다. 오히려 탕자 이야기에요. 저를 아들로 대우하지 마세요. 동전이 자기가 기어가지고 여자 주인 앞에 여기 있내요 하고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절단 되어있고 끊어져 있어요. 구원되겠다는 자체가 욕심입니다. ‘햇빛 공기 주시고 먹을 것 입을 것 주시니까 구원하겠지.’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요 예수님 오시지도 않았고 십자가 죽지도 않았어요. “그냥 먹을 것 입을 것 햇빛 줘가지고 구원합니다.” 절대로 그런 복음은 없어요.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이건 약간 길지만 중요해서 전체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에서 31절까지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왜 주님께서 첫째를 거부하고 생각지도 못한 둘째를 건지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 본인이 이 땅에 기어이 이 땅에 심판 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말씀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구원 이전에 심판이 먼저라는 것을 그것을 예수님의 자신의 버림받은 몸으로서 드러내시는거에요. 주님 오셔가지고 “너, 너, 너 천국가.” 이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마저 버렸다니까요? 자신이 버림받는 그 자신의 몸이 진정 진짜 하나님 아버지의 진짜 모습이에요. 아버지의 뜻을 구현한 모습이라니까요. 심판의 하나님이라니까요 그게. 여러분 숨 쉬는것도 욕심입니다.

심판받는 주제에 왜 숨 쉴려고합니까? 자기 자신을 몰라서 그래요. 주님께서 천국 가는 백성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의 육체로 된 인간 이거는요, 맨날 자기 힘 자기 재능 이것만 생각하는 인간이에요. 하지만 스가랴에 예언 말씀에 “너는 안돼,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하는 거야”라고 하면서 너와 성령 사이에 버림받은 예수님을, 그 중간을 띄어놓고 그 가운데다가 아버지로부터 심판받는 예수님을 중간에 끼워 넣는 거에요. 그게 뭐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이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죽음 없는데 성령이 오실 리가 없어요. 베드로가 이걸 이해 못 한거에요. 예수님은 우리 랍비는 안 죽고 계속 좋은 일 계속 유지하면 아버지께서 도와주시겠지. 아닙니다. 베드로가 몰랐고 열두 제자 몰랐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을 집어 들어가야 돼요. 성전이 불타 버려야돼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이 건너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절단나요.

절단. 끊어져 버려야 돼요. 다리가 끊어졌다 이 말이죠. “이제는 끝났어, 끝났어, 끝났어. 뭐 연락도안되고 구원도없고. 뭐 이거 회당에 나와가지고 뭐 말씀하고 좀 되지 않겠느냐.” “안돼.” 그걸 끝까지 가보세요. 끝까지 가보면 끊어져 있어요. 그래서 그러면 성령께서 뭘 하시는가. 성령께서 일단 성령께서 예수님을 이렇게 일하게 하셨고 그 예수님에 의해서 다 이룸으로써 이제는 아버지가 예수님이라는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을 줄 수 있는 것 처럼, 그 주는 자리에 예수님이 올라가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가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을 가진, 죄 있는 육신을 가진 그 죄인에게 성령을 줄 수 있는 그 자리에 가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죄 있는 우리에게 성령을 줄 수가 있는 겁니다.

성령을 줄 수 있을 때 그 성령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그 예수님의 상처가 거기에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다. 잃어버렸다는 그 사실이 들어있어요. 그게 바로 구약에서는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을 채택한 것은 “니 봐, 성전 없지?” “없습니다.” “왜? 누가 성전불태웠나? 바벨론이야?” “아닙니다.” “뭐야?” “하나님이 직접 불태웠습니다.” “왜?” “이스라엘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바로 그 기능, 그 기능을 바로 스룹바벨이 해야될 그 기능을 마지막 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에요 성령을 통해서.

너 천국 갈려고 했지. 그게 바로 죄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생살다가 다급한 일이 벌어지니까 뭐라고 외치느냐 하면 나 지옥가기 싫어. 예. 나 지옥가기 싫어. 박하사탕 그 마지막 장면에 “나 돌아갈래” 그걸 패러디해서 “나 돌아버릴래”하는 그 비슷한말인데. 나 돌아갈래. 나 지옥가기 싫어. 인간에게 그런 권한이 있습니까? 없지요. 없다는 말은 뭘로 우리는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그 사람에게 알려줄수 있습니까?

왜 나는 지옥가기 싫어라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돼요? 볼 것도 없으면서 천국은 왜 가는데? 놀러 갑니까? 천국은 예수님이 상처 입었고 버림받았다는 사실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의 자리를 마련했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자 만이 천국가는 거에요. “주님 좀 도와주세요. 아 참 불쌍히 여겨 좀 도와주세요.” 안돼요 안돼.

심판을 집어넣고, 그 심판을 집어넣는 있는자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보일게 있는 사람만이 천국에갑니다. 천국에. 그러니까 성령이 없이 어떤 인간도 내가 스스로 나 죽을래 나 잃어버릴래 지옥갈래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이 와야 가능해요. 나는 지옥가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성령이 와야 안다고요. 그러니까 인생에서 실패니 성공했니 이겼니 졌니 아무 의미가 없는 거에요. 그거는. 그렇게 보면 이왕 나는 잃어버리고 죽는데 나는 하나의 우리 몸을 통해서 그 나라 의가 나올 수 있도록 주께서 우리 몸을 예수님 몸처럼 잃어버리는 작업을 벌이면서 하는거에요.

나를 두 개로 쪼개가지고 하나는 성령의 의한 나, 육체에 속한 나로 해가지고 성령에 의한 나가 육체의 나를 쫓아버리는겁니다. 우리가 진리에 초점을 맞춰야되지 결과는 무의미합니다. 진리에 초점을 맞추시고 결과는 무시하세요. 진리가 뭐냐? 심판하시는 주님. 심판에 초점을 맞추면 내인생이 어떻게 되느냐하는 결과는 충분히 무시할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망했느냐? 심판부터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 심판하시는 하나님부터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해석이 완전히 반대가 되고 말았어요.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아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 왜? 저를 저한테서 빼주세요. 빼버리세요. 삭제시켜버리세요. 자기가 자기를 설명하는 바로 그것이 바로 나를 괴멸시키는 방식이고 이유입니다. 자기 정당성을 고백하는데 그 정당성이 나를 망쳐버려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놀란 겁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습니까? 본색이 드러났어요 본색이. 은근히 예수님하고 붙어있으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에게 어떤 기대감을 갖고있었는가가 그대로 들키고 그대로 들켜버렸어요. 그 들킨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주께서는 꽂아서 말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신다. 어떻게? 니가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께서 다 준비하셨는데 그 준비한게 뭐냐? “내 너를 필히 죽여줄게.” 그런데 뭐가 나오도록? 죽는 너를 통해서 그 나라 의가 나오도록 주께서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 나라 의. 그 이세상의 인간의 힘, 능력. 인간은 거기에다가 몸바쳐서 삽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성령이 없는 육체니까. 천국에서 내쫓길 존재들이니까 기껏 뭐냐? 자기능력과 하는 것 다해서 살아있는걸 어떻게 살아보려고 애를 써요.

하나의 그 예가 크로아티아라는 나라가 있는데요. 크로아티아 나라에 그 국기가 체스 문양으로 되어있어요. 축구 잘하는 나라 있잖아요. 월드컵 준우승하고. 빨간 것과 흰색의 체크무늬. 체스 장기판 모양. 왜 그 나라 국기가 되었느냐 하면 왕이 이웃나라한테 전쟁해서 져가지고 왕이 포로가 되었어요. 근데 그 포로 잡은 왕이 그 크로아티아 왕이 체스를 잘 둔다는 소문을 듣고 내기를 해요. “너 내하고 체스해가 이기면 니 풀어주고 너희나라 침범하지 않을게” 해가지고 세 번 둬서 세 번다 이겼답니다. 그때부터 크로아티아가 독립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국가가 체스 무늬 바둑판 문양에 체크무늬가 된거에요. 그게 뭡니까? 하나의 국가고 인간의 능으로 되네요?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을 기념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 인생을 어떤 기념물로 생각합니까? 내가 행하고 내가 조심했고 내가 예수 믿었고 내가 훌륭했고 내가 십자가 믿었고 모조리 다 나에서 나오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천국간다하잖아요. 내어쫓깁니다. 우리는 천국 간다는, 가본적도없이 그냥 쫓겨나가는거에요. 마태복음 8장에서 주님께서 천국에 누가들어가느냐.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바로 그사람이 들어가요.

그 사람이 뭐냐? 하나의 역할로 보는 거에요. 가라 하는게 죽는 자리일수도 있고. 오라 하는 것이 망하는 자리에 있더라도 이미 나는 예수님과 똑같이 성령에 의해서 죽기 위해서 주님에 의해서 역할을 맡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는 것보다 더 실패가 뭐 있으며 죽는 것보다 망한게 더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어야 ‘니가 못하고 니 지혜도 아니고 니 능력도 아니고 오직 너를 다루었던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느니라’가 성립되는거에요.

끝으로 마태복음 9장의 말씀 보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16절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주의 뜻은 이겁니다. 우리의 자아도 성령에 예수님의 자아를 우리 속에 집어넣었어요. 그게 새로운 부대고 거기다가 예수님의 복음을 거기다가 넣어버리면 새 부대에 새 포도주가 담기는 거에요. 우리는 꼼수 써가지고 이 몸 천당 보낼려고 떡 내민다고요. 옛 부대 들이미는 거에요. 복음이 담길 리가 없죠. 심판이 담길 수가 없죠. 심판마저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자아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그 나라 의를 이룹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바로 스룹바벨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시 말씀으로 돌아보게 하옵소서. 아무리 꼼수를 써도 주님 앞에는 통하지 않고 예수님이 이 땅에 굳이 오셔야될 이유도 없이 그냥 좋은 것만 달라고 떼쓰는 그런 바리새인 같은 사고방식에 머물지 않고 이제는 그런 내 모습이 육체요 죽어 마땅한 것을 도리어 심판해주시는 주님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