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 설교요약
대전-오전설교요약 20230925
주일 낮 설교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주일 낮 설교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선택의 개념. 주님의 선택은 나의 선택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선택이에요. ‘나의 선택을 포기하라.’ 내가 선택한다. 네 선택은 포기하라. 그렇게 되면 내 인생, 내 몸이 무엇이 작동하느냐 하면 주님의 선택성이 작동하게 돼 있어요. 이게 요약하게 되면 그때 안 한 게 막 나와요. 주님의 선택이 작동하게 돼 있어요.
그러면 주님은 선택했다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 방식으로 너를 선택해요. 다른 사람을 배제한다는 뜻이에요. ‘다른 사람은 나는 안 찾아 가. 너에게 찾아 갔어.’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거예요. 주님의 선택이 우리 안에 작동한다면 우린 어떻게 됩니까? 주님 외에는 다른 것을 찾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 인생이 전개되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의 선택이 그냥 나는 다른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너를 선택했다. 요한복음 6장에 다른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 방식으로 너를 선택했다고 돼버리면 주님이 선택한 나의 선택이 그대로 유효해버리면, 주님도 좋지만 부처도 들을 게 있고, 소크라테스도 되고 내 선택이 계속 작용을 해버려요. 주님 역시 좋은 분이죠. 하지만 주님 말고라도 다른 좋은 분 있을 수 있잖아요, 라고 내 선택을 계속 해버려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의 선택은 너를 선택할 때 네가 다른 사람 선택하지 말라고 선택한 거야, 그 내용으로 우리에게 찾아와야 돼요. 주님께 선택받았다고 해놓고 다른 데 기웃거린다? 이거는 말이 안 되죠. 그렇게 선택을 함으로써 우리 선택을 포기하게 만들죠. 거기서부터 시작이 된 겁니다.
그다음에 이야기 전개로 언급한 게 뭐냐 하면 본문에 보면 유대교 나옵니다. 스바냐 2장에 나온 것은, 이방민족 종교의 특징은 나만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아무나 만나보세요. 본인만 제일 중요하지요. 근데 유대교는 그것과 차이가 나요. 어떤 차이냐 하면 유대교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환경이 제공됐기 때문에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인데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나는 나만을 위해 산다’ 그게 정신병자입니다. 사실은 정신병자에요. 세상이 나만 있으라고 준 세상이 아니잖아요. 남들 있잖아요. 자연인이라 해서 산 속에 들어가 살지 안 그러면 못 살아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사실은 이 세상에 제일 중요한 게 난데 그 나라는 사실을 타인으로부터 확인 받을 때 확실히 보증이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분명히 나는 내가 최곤데, 하고 싶은 이 이야기를 남이 이렇게 해줄 때 우린 얼마나 안정감이 있을까? ‘역시 나는 옳게 살아가는구나’ 보장받지요. 그걸 보장받기 위해서 많은 돈을 아낌없이 씁니다. 심지어 가족기금 칠십만 원 날려서라도, ‘나봐. 가장답게 잘하잖아’ 이게 보장받는 거예요. 주위 사람들을.
그래서 옆에 누가 돌아가시면 그렇게 섭섭한 이유가 있어요. 개 한 마리 다 돌아가실 예정……. 누가 섭섭한 이유가 그 개든 고양이든 사람이든 공을 들였고 공들인 만큼 내가 뽑아낼 게 있어요. ‘역시 형님은 훌륭했었었어요’ 이런 것 있잖아요. 그걸 뽑아내기 위해서 몸이 바스라 지듯이, 일 년에 2박3일 밖에 안 하거든요. 그것 참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가족끼리 너무 안 만나도 문제가 되는 게 안 만나면 자기가 외로워져요. 외로워지게 되면 나를 보증할 타인이 사라지게 되면 이것도 일종의 자살이고 죽음입니다. 아무도 없을 때. 그래서 옛날 남편들 두 가지를 원해요. 내 지시받기 원하면서 나한테 지시받는 너는, ‘나한테 지시하는 게 훌륭했어요, 남편님’라고 두 가지 이야기를 해주길 바라서 옆에 붙어두길 원하는 거예요.
‘너는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되고, 시킨 대로 한 그것이 참 옳은 시킴이었고 명령이었다’고 도로 훌륭하다는 그런 반응을 보일 때 비로소 그걸 남자들은 ‘가정’이라고 이야기해요. 자기 전체주의인데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사람은 가정이 있어야 돼.’ 이건 뭔 뜻이냐 하면 나만 있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나만 있어야 돼.’ 지금 전체주의가 여자로 바뀌었지만. 그건 양보할 수 없는 거예요, 평생.
그래서 유대교와 이방종교를 언급하면서 유대교와 이방종교의 공통점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포기를 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졌어요. 내 자신을.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야 되니까. 심지어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 없어지면 안 돼요. 굉장히 믿음 있어 보이지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 여호와는 없어지면 안 돼요. 그 정도로 자기 자신한테 몰입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옛날에 그랬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제 와서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 주의하라. 실은 그들은 짐승과 마찬가지다. 제가 설교에서 짐승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락관계가 끊어진 차에서 엔진부분이 없어서 이거는 겉모습은 차지만 엔진이 없으니까 소용없는 차지요. 언약에 연락할 수 있는 접촉점이 없어요. 그게 짐승이라는 거예요.
왜 짐승이냐? 그 이야기는 광주강의 때 다니엘 4장 23절로 언급했어요. 광주강의 보면 나옵니다. 인간 최고의 자리가 왕인데 왕이 졸지에 뭐가 됐느냐? 들짐승과 똑같이 돼요. ‘너는 짐승일 뿐이다.’ 그래서 환경이 달라져야 돼요.
그러면 기존의 환경에서 어떻게 신의 뜻을 알 수 있느냐? 제가 로마서 8장 언급했습니다. 8장 23절, 거기 보면 이미 피조물도 썩어가고 있어요. 전체가 썩어서 피조물이 자기의 신세에 대해서 애도하면서 피조물이 누가 나타나기를 그리워하는 데 그 나타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요소가 나타나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들, 성도들이 나타나기를 피조물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피조물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해결책은 안 나온다. 같이 무너지고 있으니까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새로운 환경은 뭐냐? 피조세계 말고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다른 세계, 숨은 세계가 나타나야 가능하죠. 그래서 제가 종이 쨌잖아요. 종이를 찢으면서 중요한 것은 거기서 종이 사이에 어떤 폭이 없다는 거예요. 어떤 숨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종이 안에.
그래서 이 세상은 인간들 생각하기를 별들이 있는 세계 바깥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밑에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천체에 별들이 있는 곳은 뭐냐? 막이에요. 막 자체의 폭은 없어요. 그냥 막이에요, 막. 그 막에 뭐가 있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찢어졌거든요. 하늘 찢어지니까 찢어진 그 이후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이 괜한 환상을 꿈꾼 거예요. 저 하늘에 하나님 있다. 없어요. 그 찢어진 사이에서 숨어있는 언약의 세계가 나옵니다. 천국이 나오고 거기서 지옥도 나오고 준비된 언약에 관한 모든 내용은 찢어지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그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없는 세계였어요. 오늘 강의도 하겠지만 예수님 자체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걸 어제 오후에 이야기했어요. 예수님 이름은 없는 이름이에요. 없는 이름이 있는 이름을 바꿔치기해서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없는 이름을 찾는데 그게 주의 이름이에요. 보고 믿는 게 아니에요. 없는데 믿어요. 그러니까 성령 없이 예수 믿으면요 결국은 제 풀이 지쳐서 지겨워서 ‘많이 했다. 고만 할란다. 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소용없더라.’
결국 그게 뭐냐 하면 유대교에서 불교로 바뀝니다. 교회 처음 다닐 땐 유대교, ‘말씀 지켜서 복 받자’ 하다가 교회 한 오십 년 다닌 사람들, 특히 장로들 전부 다 불교신자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에요. ‘나 교회 봉사 많이 했다. 교회 지을 때 땅 바치고 집 바쳤다. 됐다. 이 정도 하면 칠십만 원보다 더 많이 냈다. 더 어떻게 해야 되는데……’ 결국은 나만 남지요. 자아가 멀쩡해. 그대로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준 세례에 대해서 언급을 해도 세례 요한도 이해 못했고요. 당연히 제자도 이해 못하고 결국은 제자들이 이해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령세례가 중심이, 어제 낮 설교 중요한 것 하나 뽑으라면 이것 뽑아요. 내시와 빌립 사이의 이야기에요. 성경을 보는데 국어시간이 아니에요. 성경 그냥 읽어줄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성경이 뭐로 전체가 하나로 꿰이느냐 말이죠.
이단들은 그냥 성경 읽고 내 잘못 없지요. 성경 그대로 읽었습니다. ‘태초에 말씀 있느니라, 믿습니까? 은혜 받으세요.’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믿습니까?’ 교인들은 뭣도 모르고 ‘믿습니다.’ 왜? 그걸 지식으로 받아들이니까. 그거는 국어시간에 얘들, 국어시간도 고3 말고요. 초등학교 일학년 국어시간 있잖아. “철수야 놀자. 영희야 나와라.” 하는 것 있잖아요. 멍멍이는 ‘멍멍’하는 그것, 개. 옛날 교과서에 그림이 있어요.
이건 딴 이야기지만 옛날 교과서에 나오는 엄마가 했던 짧은 파마머리 있잖아요. 난 그게 아니면 엄마 아닌 줄 알았어. 파마해야 돼요. 그리고 출근할 때 양복 입고 가방 안 들면 아빠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아빠라면 출근해야 되고, 엄마라면 반드시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야 돼, 나갈 때. 요샌 앞치마 두른 것 못 봤는데, 명절 때면 몰라도. 교회 식당에 밥할 때면 몰라도. 하여튼 앞치마도 옛날 앞치마 아니야. 이쁜 앞치마에요.
어쨌든 그건 그거고 국어시간처럼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글자 써진 것 보면 알지요. 이렇구나 하고 넘어가고, 이렇구나 하고 넘어가고, 마태복음 이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그래서 뭐? 여기에 성령이 임해요. 성령이 임하니까 성령은 뭐냐? 모든 말씀을 단 그분, 다 그분에게 모이게 돼 있어요. 이분 누구고? 이분 누군데? 그 외에 성령께서 놀랍게도 빌립 집사를 사막까지 그냥 붕 날아서 왔고, 그 내시를 접합시킨 거예요.
그래서 어제 낮 설교 처음에 하나님은 아무나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 선택한다면 모든 시공간은 거기 따라 맞춰서 움직이게 돼 있어요. 아아, 철두철미하지요.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감춰진 하나님이에요. 그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나온 하나님은 기존의 모든 신을 가만두지 않고 다 쳐냅니다. 털어내요.
상상한 하나님, 하나님도 맞고, 십자가 지신 주님 만나게 되면 온전한 하나님, 이것 다 쳐냅니다. 이것 다 가짜에요. 다 거짓말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성령이 와서 십자가 중심으로만 모든 것이 엮여지게 돼 있어요. 그 말은 성경 말씀이 형식으로 돼 있지만 형식은 반드시 십자가 피를 적시는 그런 내용을 담아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노아 홍수이야기하면서 세례 이야기했지요. 같이 동승한 정결한 새의 피를 낼 때 비로소 그다음부터 방주는 떠나갔지만 피 중심으로 세상이 재편됩니다. 방주 보고 하나님께서 다시는 비 내리는 홍수로 심판하는 게 아니고 그 피 보고, 노아가 내려서 피를 흘릴 때 피 보고 다시는 내가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 하고 바로 무지개가 그때 피는 거예요.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피 중심으로 재편돼 있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핀 겁니다, 안에서.
그래서 어제는 제가 그런 이야기를 안 한 것 같은데 중요한 이야기를 내가 안 했어요. 다른 주제 때문에. 그게 뭐냐 하면 노아 홍수 이후의 땅은 피를 머금은 땅이에요. 굳이 이야기 안 해도 여러분 감은 잡을 거예요. 새 하늘과 새 땅은 피를 머금은 새 하늘과 새 땅이에요. 창조 때 그 땅이 아닙니다. 그리고 천국도 어린양의 피를 머금은 세계가 천국이에요. 우리 살기 좋은 데가 천국 아닙니다. 그건 이슬람이 말하는 천국이고, 예수님의 피를 머금은 거예요. 피 중심으로 오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피를 복 인간은 더 이상 ‘나 이것 했잖아요. 나도 얼추 뭐 했잖아요’ 이 입이 쑥 들어가지요. 그게 천국이에요. 면류관도 그냥 던져 반납해버리죠. 피 중심의 나라,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세례였고 그것을 세례 요한의 물 심판으로 그것을 다시 반복시킨 겁니다. 너희들은 이미 심판 중에 있다. 골라잡을 게 아니에요. 천국, 지옥 골라잡을 게 아니고 이미 너는 심판 가운데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는 말은 심판 날이 이미 가까운 거예요.
세례 요한이 도끼 언급한 이유가 이미 도끼 맞아도 마땅한 자들이에요. 세례 요한이 오해한 것은 세례 요한의 물 심판받는 가운데서 어떤 선한 열매를 맺어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심판받아 마땅한 자세에서나 나올 열매, 그러니까 세례 요한 입장에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뭘 몰랐느냐 하면 자기가 ‘나는 분명히 물세례 주지만 내 뒤에 오실 분은 성령세례 주신다’ 할 때에 내용은 동일한 데 형식이 다르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내용도 달랐어요. 바통이 세례 요한에서 예수님에게 오면서 선한 열매 맺는 것 있잖아요. 그것마저 인간의 소관이 아니에요.
그것은 누구 소관이냐? 예수님께서 천국에 합격할 모든 선한 열매를 주께서 홀로 다 이뤄내십니다. 그게 해놓고 성령의 열매는 다 이뤘을 때나 주어지는 세례가 성령세례에요. 확실하게 저주받는다는 게 명확해졌고 인간은 더 이상 내놓을 게 없다는 게 명확해졌을 때에 ‘이젠 입 다물어. 너희들은 할 말 없지, 알았지? 할 말 없는 거야. 구원 안 시켜줘도 너는 끽소리 못하는 거야’ 해놓고 주시는 것이 뭐냐? 성령세례를 주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세례 받으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피, 피 때문에 우리가 살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거기서 발견하는 거죠. 피 때문에. 그렇게 해서 설교를 마감하면서 중간에 들어간 방탄소년단이 왔을 때 얼마나 소녀 팬들에게 방탄소년단은 신이잖아요. 방탄소년단도 없는데 기념하자 해서 물건 팔고 하는데 거기 현장에 황송스럽게도 정국이가 멤버가 등장해보세요. ‘내가 회비 다 거뒀나’ 이런 것도 생각 안 날 거예요.
그냥 있음 그 자체로서 모든 근심 걱정 다 지나가면서 동시에 실실 뭐가 나와요? 웃지요, 그냥. 여기서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냥 웃음이 나와, 그냥 웃는 거예요. 그게 현장성, 주와 함께 있는 현장성 그걸로 족한 거예요. 주께서 기획하셨잖아요. 저 알지요. 끝. 더 이상 할 것 없습니다. 이것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