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는 세상
침몰하는 세상
2023년 8월 2일 본문 말씀: 스가랴 1:7-11
(1:7)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1: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I saw at night, and behold, a man was riding on a red horse, and he was standing among the myrtle trees which were in the ravine, with red, sorrel, and white horses behind him.
(1:9)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1: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1:11)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공간적으로 천사가 사는 세상과 이 세상과 차이나지만 시간적으로도 차이납니다. 시간상으로도 이 세상은 더는 인간들에 의해서 꾸려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즉 이 자연세상은 인간의 의도대로 움직여지는 현실이 아니라 천사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입니다.
곧 자연은 이제 다 무너질 날만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대자연을 뭉개기 위해 천사를 이 땅의 세계에 파견시켰습니다. 선지자는 하늘의 말씀만을 듣고 전하는 자가 아니라 실제로 천사와 대화하는 그런 공간에 놓여진 존재입니다. 천사들은 세상 구석구석 다니면서 모든 것을 파괴할 기능을 행사하는 피조물입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일어난 일, 곧 애굽나라의 모든 장자를 다 죽이던 그 냉혹함을 적용시키는 그 기능을 실시하던 자들도 천사입니다. 이는 곧 이 인간 세상이 의지하는 이 땅의 세계에서 대해서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기대를 갖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땅에서 풀풀 일어나는 그 저주를 인간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땅 위에서 사는 인간이 이 대자연 외에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대자연이 원리에 준해서 목숨을 버티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대자연을 하나님께서 뭉개버리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및 이방민족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난 이 세상에 대한 남은 조치는 다 불에 태워버리는 것 외에 없습니다. 이러한 천사 활동의 배후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왕되심을 버렸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셔야 되는 왕으로 업무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어 땅의 형편을 살피려 보내신 겁니다.
‘성전을 지어라’는 지시를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통해서 전달했는데 과연 그 지시한 대로 이 땅에 성전을 짓고 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자연이나 인간보다 성전이 우선입니다. 성전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과 만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가랴 선지자는,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현실과 더 초과는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지자가 본 것을 ‘환상’이라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환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참된 현실이 그곳 뿐입니다. 인간들은 자연 전체를 가지고 현실이라는 것이 환상입니다. 거기에는 ‘천사와 및 활동’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늘에서 보는 땅의 형편과 땅에서 보는 하늘의 형편, 둘 다를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차가운 거울, 두꺼운 얼음으로 꽁꽁 덮혀 있는 호수에는 거울 낚시하다가 얼음이 깨어져 빠졌다고 칩시다. 밖에서는 물에 빠진 자를 찾고자 하지만 두꺼운 얼음판 때문에 정확하게 소재를 파아되지 못합니다. 반면에 물에 빠진 당사자는 얼음장 위에서 자신을 찾고 있음을 알아도 자신이 다시 얼음 위에 올라설 수 있는 구멍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역사 속에 ‘천사’가 내려옴으로서 이 대자연은 자체적으로 하늘나라와 막혀있고 땅의 세계에 갇혀 있는 형편임이 들통나게 된 겁니다. 대자연 안에서 파악되는 이 현실 세계에서 아무리 몸부림치고 온갖 경건한 구색을 갖추어도 인간은 이 대자연 세계에서 빠져 나갈 구멍은 없습니다.
그저 천사의 기능을 따라 대자연과 더불어 망해야 합니다. 인간이 바르게 사는 것과 선하게 산다고 해서 이 세상 밖에 있는 천국 현실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인격이나 인품이나 재산과 지식이나 그 어떤 조건도 통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신자나 불신자 가리지 않고 대자연과 더불어 무너져야 합니다.
인간이 운이 없어 죽는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운 자체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천사와 말은 화석류, 즉 척박한 환경을 뜻합니다. 바위산에 간신히 피어나는 꽃과 같이 이 세상은 하늘나라에서 볼 때에 이미 황량해야만 하는 공간입니다. 마땅히 침몰하는 거대한 여객선 같은 운명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일을 해야 하는 기능적 천사는 말을 탑니다. 이는 인간 세계와 천사의 세계 사이에 격차를 드러냅니다. 간격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친히 불태우고 기근이 있게 하고 전쟁이 있게 하고 오염으로 세계가 무너지는 그 일을 있게 하는 천사는 땅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말 타는 천사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인, 이 대자연 세계가 마땅히 무너지고 망하고 불태워져야 하는 정당성이 무엇인가입니다. 마태복음 5:17-18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게 인간들을 죽이십니다. 인간들이 온전히 지켜서 하늘나라로 빠져 나갈 수 있는게 아닙니다. 이미 종말에 들어섰기에 인간은 자체 노력으로 대자연으로 살릴 방안이 없습니다. 땅과 그리고 땅의 저주와 더불어 모든 인간이 다 같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의 백성이 되는겁니까?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저주받은 문둥병자가 등장합니다. 이 자는 율법이나 선지자나 산상설교를 다 지켜서 깨끗함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의 그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서 문둥병자는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피입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의 생명을 주는 젖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성전은 예수님의 피를 수유하는 수유실 건립입니다. 얼음 밑의 공간에서 천사가 사는 공간으로 나오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 피 뿐입니다.
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 피 제공에서 인간의 공로, 즉 땅의 일이 개입하는 것을 차단해서 오로지 하늘의 일로만 성사됨을 알리는 식으로 주님께서 성도를 다루십니다. 세상의 침몰성이 다급하지만 귀하디 귀한 예수님의 피를 개나 돼지 같은 인간에게는 줄 수가 없습니다(마 7:6). 따라서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자신보다 예수님의 피가 우선이고 핵심이고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기묘하기 짝이 없는 현실 앞에서 우리의 현실관을 늘 무너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스가랴 1장 7~11절(침몰하는 세상) 23080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장 7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스가랴 1:7-11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紫馬)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화석류(花石榴)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靜穩)하더이다“
선지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간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와 땅의나라 그 경계선 위치에 선지자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보통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 이스라엘에게 전하고... 그렇게 그동안 말씀으로서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의 경계선 위치에 있었는데, 오늘은 특별히 그 말씀에서 더 나아가서 여기에 밤에 직접 무슨 어떤 현상이 일어났고, 그 현상 속에서 선지자가 하늘의 이야기와 땅의 이야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말’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착각일 수가 있는데, 직접 눈으로 그 새로운 공간, 새로운 공간 속에 선지자가 사로잡혀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선지자가 있을 때에 그 선지자는...세상 사람들은 이걸 보고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선지자 입장이 아닌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그것은 환상일 수는 있지만, 선지자 입장에서는 도리어 세상이 환상이에요.
오히려 하나님이 알려주신, 허락해주신, 경험하게 하신 이 천사와 함께 있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현실 감각보다 더욱 더 확실한 현실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세상 사람들은 선지자가 봤던 진짜 있는 이 실제 세계에 그들은 가로막혀 있는 그런 처지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음이 꽁꽁 얼었는데 얼음낚시 하러 갔다가 얼음이 녹아서 푹 꺼졌습니다.
자기가 판 구멍으로 얼음이 깨져서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은 빨리 헤엄쳐서 다시 얼음 위로 올라가야 되는데 빠지고 난 뒤에 정신이 없어가지고 자기가 빠진 구멍을 찾지 못해가지고 계속해서 ‘동인가, 서인가? 아래쪽인가, 위쪽인가?’ 헤매고 다니면서 바깥에 얼음장 위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저씨, 어디에요, 어디에요? ”하면서 자기를 찾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데, 자기는 차가운 물속에 빠져가지고 얼음장 밑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네요.
차라리 안보면, 죽었다고 안보면 좀 마음이, 속이 편하겠는데 뻔히 보고 있는데, 말해도 얼음장이 가로막혀서 말이 안통하는 거예요. 지금 이러한 것이 인간의 현실관입니다. 선지자는 안타깝죠. 뭐, 선지자는 누구 하나 말해가지고 교회로 데려오고 그런데는 관심이 없어요. 이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것, 또는 복음 전도자가 이야기 하는 것은 세상 인간의 모든 세상 사람들이 얼음장에 갇혀 있고, 그 얼음장 두께 너머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문제는 통하는 길이 없다는 겁니다. 둘 사이에.
다행히도 스갸랴는 그 얼음장 위에서 얼음장이 꺼져버린 그 근처에서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천사하고 이야기해요. 천사하고 이야기하는 스가랴 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천사하고 이야기하느냐? 그것은 네가 말씀을 너무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까 네 두뇌의 전기 작용에 의해서 네가 환상을 보는 거다.” 뭐 이런 식으로밖에 해석을 못해요. 과학적으로.
“전기 작용이 뭔가 부작용을 일으켜가지고 헛것을 네가 봤다” 헛것이 환상이잖아요. 환상을 봤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천사 안 봐도 나 정상이야” 자꾸 자기 정상인 것을 지탱하기 위해서 “천사를 본 것은 그것은 착각일 거야” 라고 하는데 천사는 반대입니다. 너희들이,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세계가 환상이고, 착각입니다. 그리고 실제 세계는 천사와 함께 이야기하는 이것이 유일한 실재 세계입니다.
이 얼음장에 갇혀 있으니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선지자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거는 선지자 네 세계관이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죠. 인간의 세계관이 무너지는 게 아니고, 세계가 무너져요. 세계에 관한 어떤 이론이 무너지는 게 아니고, 이 세계 자체가 타이타닉 여객선처럼 침몰 중이에요.
그리고 오늘 본문 내용은 이겁니다. 그렇게 침몰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 침몰시키는 그 전문가, 그 기능자가 누구냐? 바로 천사들이에요. 여기 오늘 선지자가 봤던 내용에 보게 되면,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홍마 탄 사람 한 사람 나옵니다. 천사지요.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화석류라는 것은 나무 사이에 핀 꽃, 나지막한 척박한 환경에서 바람 불고, 알프스 산 정상 에델바이스 비슷한 그런, 돌밖에 없는데 간간이 피어나는 꽃들, 황량하죠?
그렇니까 이 천사가 선 곳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다른 말로 하면 ’척박한 환경 안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紫馬)와 백마가 있기로” 붉은 말과 갈색 말과 하얀 말이 있고, 일단은 천사 하나에 말 네 마리죠. 한 사람은 말 타고 있었기 때문에, 탄 말까지 다해서 네 말인데, 거기 말고 또 천사가 스가랴하고 이야기하는 천사가 있어요.
그러니까 스가랴하고 이야기하는 그 천사는 말 타지 않았고, 그냥 서 있는 천사고, 그 서 있는 천사와 붉은 말을 탄 천사하고는 이야기를 하고, 붉은 말을 탄 천사는 선지자 보고 이야기 안하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스가랴하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카페의 주인이고, 붉은 말 탄 천사는 거기 손님이고, 손님이 탄 말 외에 세 마리 말 갖고 여기 카페라는 진짜로 있는 현실 속에서 나타난 걸 스가랴 선지자는 보았습니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 그들에 왜 거기에 나타났는가? 그들 천사는요 그가 하는 기능이 대단히 중요해요. 기능이. 기능으로 천사를 말하는 겁니다. 천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어떤 일이 있을 때에 천사 보고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때 사람보고 시키고, 어떤 때는 천사보고 시키는가? 천사보고 일을 시킬 때는 하나님께서 이 땅, 땅 자체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천사에게 일을 맡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땅은 진작에 하나님께서 포기한, 포기시키기 위해서 저주를 내린, 저주가 피어나고, 저주가 늘 매일같이 발생되는 곳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서는 땅을 버리는 조치를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침몰하는 배‘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자연에 적응하는 것을 그들의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거예요.
인간이 산다는 것은 보다 자연에 효율적으로 잘 적응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인간들은 생각했고, 그것이 인간들이 보는 현실관이고, 세계관입니다. 땅에 잘 적응하는 거요. 그런데 천사의 일은 뭐냐? 그 인간들이 유일하게 의존하는 자연, 자연을 뭉개버리려는 거예요. 자연을 찢어버리는 거예요. 자연을 궤멸시키려고 합니다.
’자연 없이는 못살겠다.‘라는 그 사상으로 등장한 게 뭐냐 하면 바로 바알과 아세라라는 우상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라는 우상을 요즘 말로 하면 그냥 ’하나님‘이에요. 알라, 여호와, 그냥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대자연을 주셨다.‘ 그게 인간들이 신과 자연 사이에 친화성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뭐라 하시냐 하면, “내가 만든 이 땅, 자연은 내가 무너뜨리리라” 이게 진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왜 땅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지 않았는가? 땅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거기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성전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스가랴시대 때는 이미 성전이 불타고 없습니다. 성전 없어요. 하나님은 성전에 있다가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떠난 세상이에요. 그러면 남은 절차가 뭐냐? 이제 뭉개야죠. 부숴야죠.
아파트 지하 주차장 기둥에 철근이 없다. 사람들은 뭐 하냐? 보강 공사를 하죠. 하나님은 아파트 부숴버립니다. 아파트 자체를 없애버려요. 인간들은 이 대자연에서 어쨌든 간에 살아남아야 돼요. 어쨌든 간에..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땅은 내가 무너지게 하기 위해서 땅이 있다.”는 거예요. 무너뜨리기 위해서 땅이 있는 거예요.
이게 얼음장 밑의 세계와 얼음장 위의 세계의 격차입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의 격차예요. 그럼 누가 무너뜨리는가? 모든 인간들은 이 땅이 안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살기 때문에 인간에게 무너뜨리는 심판의 기능을 인간에게는 맡기지 않습니다. 인간 말고, 인간과 더불어 살지 않는, 인간 외의 하늘에 살던 피조물에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일임했어요. 그들이 바로 천사입니다.
“애굽나라 좀 손봐야 되겠다.” 이걸 히브리인들에게 칼 줘가지고 “네가 애굽나라를 이겨라”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지 않아요. 둘 다 무너져야 될, 얼음장 밑에 둘 다 자연에서 못 벗어나고, 자연에 의존하고, 자연을 믿고, 자연에 기대고, 대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항상 민감하게 일 하면서 목숨을 연연하는 자들에게는 일을 맡길 수가 없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때 인간들을 치는 건 누구한테 맡겼습니까? 천사한테 맡겼지요. 하늘의 사무라이, 인정사정 보지 않는 사무라이, 천사, 융통성 하나도 없는 사무라이, 인정사정 없는 냉혹한 사무라이, 어린양 피 없으면 다 죽이는, 맏이 다 죽이는.. 맏이 죽였다는 건 그 가문은 이제 대 끊어져서,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지어서 ’네 가문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확정짓는 거죠. 맏이를 다 없애버리죠.
하나님 믿는 자, 안 믿는자 소용없어요, 다 죽여 버리죠. 이 말은 이 땅에서 바르게 사는 것, 선하게 사는 것, 이런 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시킬 수가 없습니다. 바르게 살고 선하게 산다고 해서 이 세상의 얼음장 밑의 이 땅이라는 세계에 사는 사람이 하늘로 옮겨질 수가 없습니다. 성격, 지식, 성품, 인품, 재산, 기술, 어떠한 것도 무너지는, 침몰하는 이 땅의 생리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믿는다? 믿고, 안 믿고 다 자연과 함께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믿든 안 믿든. “하나님, 제가 하나님 일 하겠습니다.”, “손내려”, “왜요?”, “그 일은 천사한테 맡겨놨어.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그러면, 저는요?”, “무너지면 되는 거야, 무너지면” 이 세상과 더불어서 무너지면 되는 거예요. 성도의 삶이 참 쉽죠? 굉장히 쉬워요. 무너지는 세상과 함께 깔끔하게 마음 비우고 무너지면 되는 거예요.
일은 천사가 하니까요. 그럼 천사가 무슨 일을 하는가? 천사들은 말을 타고 왔어요. 말. 척박한 땅에 발을 딛지 않습니다. 인간은 보병이라면, 천사는 기병이에요. 발을 딛지 않습니다. 위에서 그냥 내리치는 거예요. 이랴~해가지고. 이 말들은 네 필인데, 동서남북 사각형으로 세상을 사각형으로 각 지게 보는 것은 어느 구석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 되는 공간은, 그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동서남북.
아예 이 세상을 칠 때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의 군대,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에게 벌써 반편성이 그렇게 들어갔어요. 반편성이. 이쪽 부대는 동쪽, 저쪽 부대는 서쪽, 한 구석도 놓치지 말고 철두철미하게 모든 땅과 모든 그 위에 사는 모든 인간을 다 죽여라. 왜? 땅은 저주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허락한 임시적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금 제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가면 또 여섯 인을 떼는데 말 네 필 나와요. 말 네 필이 나오는데, 말 네 필의 기능들이 좀 달라요. 기근, 가뭄, 전염병, 전쟁, 기능들이 다릅니다. 기능들이 다른데 도달 목표는 동일해요. 다 죽이는 거예요. 데쳐 먹든, 구워 먹든, 볶아 먹든 다 죽이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흰 말이 나오는데, 진두지휘하시는 분의 말 색깔은 흰 말이에요. 흰 말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일 다 끝냈다‘는 겁니다. 더 이상 인간 세계, 이 땅의 세계는 다 해체시키고 없애버리는 일만 남은 거예요.
무슨 일을 끝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살 공간은 예수님이 십자가로서 하늘나라에 이미 다 새 거처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의 거처에 집착하는 자들은 ’땅과 함께 망해버려라‘, 이게 사람은 못하고 천사들이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천사들이 가서 아주 융통성 없게 제대로 다 해버립니다. 다 하는데, 그 근거가 그렇게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천사들이 함부로 죽이고, 땅의 모든 것을 다 불태워 버리고, 지구도 불태우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마태복음 5장 17절, 18절에 보면, 이미 예수님께서는 그걸 알고 이야기 했어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되어 있거든요. 다 이루리라는 이 산상설교의 말씀을 그 듣는 제자들이나 거기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오해를 했어요.
이것은 인간이, 인간이 다 이룬다고 생각한 거예요, 인간들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스가랴에 나타난 것은 천사들이에요. 천사가 나섰다는 말은 인간은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거예요. 당하기만 하면 돼요, 당하기만. 그런데 스가랴서에서는 천사가 나타났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나타났어요. 심판주가 직접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더더구나 인간이 할 게 없어요. 다만 인간은 주님 앞에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됩니다. “네가 당하고 망하는데 망할 때 망하더라도 망하는 이유는 네가 알고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마태복음 5장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이야기 하신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걸 보고, 이걸 생각해 가지고 “그래, 온전해야지” 그러니까 맞는 거예요. 여기 스가랴에서 천사가 활동한다는 것은 이미 천사 배후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모든 예언과 율법을 다 이룰 것을 전제로 해서 천사를 보내신 거예요. 말씀은 누가 이룬다? 주님이 이루고, 부수는 것은 누가 부순다? 예수님이 이야기한 천사들이 부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왜 우리가 그토록 정들었던, 우리가 희망이라는 것을 다 걸쳤던 이 세상, 이 자연 자체를, 희망 자체를 왜 부숩니까?” 라고 물으면 “내가 너한테 한번 요구해봐? 하나님이 온전하지?”, “예, 온전합니다.” “너도 온전하면 내가 안 부술게. 온전할 수 있어?” 온전할 수가 있습니까? 율법으로 모자라서 산상설교까지 더 추가했는데요. 일점일획이라도, 99를 지켜도 소용없어요. 다 지켜야 돼요.
99 지킨 건 온전한 걸로 쳐주지 않습니다. 다 지켜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뭐라 하냐 하면,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 없겠네요?” 라고 질문이 당연히 나오죠. 그런데, 산상설교를 끝내고 난 뒤에 구원받은 사람이 있어요. 뭐냐? 마태복음 8장에 문둥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그럼 문둥병자가 산상설교 어느 대목을 지켰습니까? 문둥병자는 원수를 사랑합니까? 아니잖아요.
문둥병자의 특징은 이미 저주를 몸에다가 뒤집어쓰고 간 사람이에요. 이 말은 ’율법, 선지서, 주의 말씀은 어느 것 하나라도 나는 지키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문둥병이라는 모습으로 완벽하게 드러낸 존재가 문둥병자에요. 그런데 이 문둥병자가 별 한 것도 없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마태복음 8장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이 연약함에다 문둥병을 집어넣으세요. 산상설교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선지자도 모르고, 그냥 문둥병이에요. 그냥 저주를 짊어지고 가는 자에요. 그 저주를 짊어지고 가는 자와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서 병이 나아버렸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이 세상이 망하고, 네가 망한다는 것은 하늘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철회나 취소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너랑 같이 죽을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온전하게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온전하게 말씀에 의해서 온전하게 죽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에 누가 계시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러니까 온전한 말씀인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죽는다는 그 죽음이 말씀을 온전하게 이룬 것이 됩니다. 우리 성도를 통해서. 물론 그 문둥병 당사자는 좀 간지럽고, 눈썹 빠지고 해서 그동안 좀 불편했었지요. 불편했지만, 그것은 주께서 자기를 다루어왔던 한 방식이니까 주님 만나고 난 뒤에는 자기가 문둥병 된 그 자체가 온전함의 하나의 요건이 된다는 것을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하죠. 구원받은 상태에서.
“내가 괜히 쓸데없는, 문둥병이라는 아주 사소한 일 가지고 온갖 염려를 다 했구나. 내가 문둥병 되는 것이 지금 생각하니까, 그것은 이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으로써 참 적절했다.” 는 거예요.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은 무너질 만해서 무너지는 것이고, 무너지는 이유는 말씀에 온전하지 못해서 다 무너지는데, 자기가 문둥병자가 된다는 말은 이 세상의 한 일원으로서 나처럼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에 대해서 문둥병자는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마치 오늘날 성도처럼요. 매순간. 그렇다면 오늘 이 선지자가 위치하는 낯선, 낯선 현실이거든요. 이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천사에 대해서 뭐라고 하냐하면,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요. 천사에 대해서. 참, 천사가 같잖아 합니다. 침몰하는 주제에 이름이 무엇이냐고 그걸 왜 묻는데? 뭐 이름 불러서 구원받을라고? 그것은 천사가 용납할 수가 없지요.
침몰한다는 말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둘이 형제간에 바둑을 뒀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 친구 가정에 동생 둘이 공부는 안하고 농땡이라 맨날 노는 걸 좋아해요. 고3인데, 고3이 고1 동생 붙들고 맨날 바둑 두는 거예요. 두꺼운 바둑판 사가지고 바둑이 재미있다고. 세상을 재미로 삽니까? 그걸 보고 화가 난 형이 동생들 장래가 걱정이 돼가지고, 도끼를 들고 바둑판을 찍으려고 온 거예요. 이거는 실제입니다. 환상이 아니라 실제예요.
그런데 도끼 가지고 바둑판을 쪼개는데, 그 쪼개는 순간에도 “가만, 가만 있어봐, 오늘 이거 누가 몇 점 이긴 건데?” 지금 바둑판 자체가 작살나게 됐는데 그 시답지 않은 몇 점 이겨서 뭐 할 건데요? 그게..예? 이 세상에서 고소, 고발 그거 왜 합니까? 침몰하는 타이타닉 배 위에서 고소, 고발해서 뭐 할 건데? 고소, 고발해서? 다 같이 주저앉고 있는데, 무너지고 있는데요.
그것도 모르고 사사기 같은데 보면 천사가 나타나니까, 항상 천사는 박살내는 거예요. 천사가 나타나니까 사람이 물어요.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하니까, 천사가 참 같잖아서 “너 왜 내 이름 묻는데?”하고 나무라면서 이름을 이야기해요. 이름이 ’이름 없음‘을 말하는 이름입니다. 이름이 뭐냐 하면 ’기묘자‘예요. 영어로 하면 Stranger, 물리학자도 이 기묘함, 이 기묘함은 이사야 9장에도 나와요.
’전능하신 아들로 오신 이름이 기묘자라‘(“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기묘자‘라는 건 간격이 있다는 거예요, 간격. 인간들이 통용하고 있는 기호와 언어, 이름 부르기 하고 전혀 뚝 띄워진, 얼음장처럼 띄워져 있어서 인간들이 쓰는 이름과 언어가 저쪽의 천사한테는 통하지를 않아요.
천사는 인간에게 이름이 필요가 없어요. 천사는 그 이름 자체가 기능이에요. 마노아가 묻기를 ”이름이 뭡니까?“ ”왜? 나? 기묘자다“(”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13:17-18) ’기묘자‘라는 건 이름이 ’기묘‘라는 뜻이 아니고 너희들이 모르는 기묘한 일을 내가 실시하러 이 땅의 세계에 잠깐 왔다는 겁니다.
물리학자들도 쿼크(Quark)의 이름에 이 이름을 집어넣었어요. up/down, charm/strange, top/bottom, 위/아래, 맵시/야릇한, 꼭대기/바닥, 왜냐하면 쿼크가 너무 기묘하기 때문에. 있는지 없는지, 유와 무의 경계선상에 있는 가장 기본 입자의 이름에다가 Stranger, 기묘하다는 말을 했어요. 또는 야릇하다고 번역할 수 있는데, 어떤 특정 입자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없는데 이름 붙이기도 뭐하고, 그냥 이름 자체, 야릇한 이름, 이쁜 참한 이름, 그렇게 붙였습니다.
천사는 인간의 손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지시받는 것은 누구한테 받는가? 바로 왕한테 받습니다. 그 왕이 누구냐?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에요. 그럼, 이스라엘의 왕은 할 일이 있어요. 뭐냐 하면, 세상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통해서 성전을 만들어요. 그러면 인간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 성전이 우선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에요.
처음에 이스라엘이 나올 때, 그 만남의 장소에서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성전을 세운다 했어요. 그 말씀은 뭐냐 하면, 이 말씀도 인간들이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육신이 있기 때문에, 육신이 되려면 젖과 꿀이 꼭 필요해요. 그런데 그 젖과 꿀이 필요하다는 그 약속의 땅에서 성전을 지었지만, 성전은 불타버리고, 하나님도 떠나고, 하나님도 죽이고 떠나버렸거든요.
떠나버렸지만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기능도 떠난 건 아니에요. 따라서 이 땅에 다시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겁니다. 성전을 지을 때 그 성전은 젖과 꿀을 주는 성전이 아니에요. 주님의 피를 주시는 성전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수유실을 만드는 거예요. 애 젖먹이는 수유실.
신약에도 ’피‘라는 생명을 먹이는, 젖 먹이듯이 생명을 먹이는 수유실을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셔서 이미 망해서 죽어버린 자기 백성에게 피를 주어서, 생명을 주어서 그들을 소성케하여 천국 백성 만들어서 하나님과 같이 영원토록 만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공로를 찬미하는 자기 백성 만드는데 완성을 시키는 그 작업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미리 천사를 보냈습니다.
천사를 보내서 “뭐 하는 사람이냐?” 주의 천사가 말 탄 천사에게 물으니까 “땅을 살피러 왔습니다.” “땅 살펴보니까 어때?” “조용합디다.” 이 말은 평화롭다는 말이 아니고, 성전 만들지 않고들 있었습니다. 분명히 성전 만들라고 지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개 스가랴를 통해서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전에 관심이 없고 이 자연 세계에서 제 밥벌이 하는 데에 옴팡 신경 다 썼습니다. 마치 이 땅이 침몰하지 않는 것처럼.
마태복음 6장에 주기도문이 나와요.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주기도문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하늘의 것이 땅에 있는 것을 밀어내버려요.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의 뜻은 뭐냐? 주기도문의 내용은 예수님 본인의 과업이고, 거기에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과업에 끼어 들 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내용이 주기도문이에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고추가 있는데, 푸른 고추 싱싱한 고추에 씨가 있잖아요. 씨를 다 발라내요. 씨를 발라내고 거기다가 돼지고기 갈고, 당면 넣고 두부 으깨서 만든 속을 씨 빠진 빈자리에다, 관통된 빈자리에다 밀어 넣고 기름에 튀기면 고추튀김이 되는 겁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그 동안 땅에서 일을 했던 인간들을 주께서 거침없이 하이킥, 거침없이 밀어내버려요.
그럼 뻥하고 구멍이 뚫리죠. 구멍이 뚫리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그게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다 보여준 거예요. 구약 스가랴를 통해서, 그 전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천사가 나타났다는 말은 “인간아, 그냥 죽어, 그냥. 그냥 손 떼! 너에게서 손을 떼. 너에게서 손 떼고, 이 땅에서 손을 떼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서지 마라는 거예요.
“뭐, 주님이 좀 도와주시고 하면 안되겠습니까?” 주님은 너를 불도저로 밀어붙이는 자이지, 도와주는 자가 아니에요. “주님이여 제가 운이 없습니다. 어떻게 도와주세요.” 인간은요, 운이 없어 죽는 게 아니고요, 운 자체가 없어요, 운 자체가. 인간은 운을 거론할 자격 자체가 안돼요. 태어날 때부터 같이 침몰하라고 태어났는데, 왜 굳이 살려고 합니까? 그래서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다룰 때 이렇게 다가옵니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지 말라고 하시고, 하지 말아야 될 것은 해야 될 일로’ 만들어버려요. 이것은 뭐냐 하면, 매순간 인간의 의도를 매순간 비켜가는 것이 간격을 분명히 하는, 천사의 일과 인간의 일의 간격을 분명히 하는, 이게 천사의 일이고, 곧 배후에 있는 이스라엘의 왕, 시키신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침몰한다고 했지요?
만약 여러분들이 화재 현장에 우연히 화재 나기 전에 갔는데 갑자기 불이 났다.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고 있는데 불 난 걸 내가 목격했다. 가만히 혼자 나올 집사님이 아닙니다. 예? 권사님이 아니에요. 막 부인이 말립니다. ”당신 빨리 살아야 돼”, “아니야, 더 살려야 돼.” 이 세상은 그냥 다 무너지고 침몰해요. 왜? 천사가 등장했으니까. 천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미 포기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걸 안 성도가 하나라도 길에 가서 전도지를 주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붙들고 “무너집니다, 무너집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무너집니다. 빨리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하고 싶죠. 침몰함을 확실하게 인정한다면 아무나 붙들고, 박사학위 필요 없고, 인품도 필요 없고, 착한 일 필요 없고, 그냥, 그냥 ’예수님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다 죽습니다.‘ 말리고 싶죠. 이거 당연히 성도라면 이런 마음이, 진짜 제대로 침몰을 안다면 이런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요.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마라.” 하지마라는 거예요. 방금 얘기했잖아요. 우리가 하고 싶은데 주께서는 못하게 만들어요. 못하게 만드는 게 어디 있느냐 마태복음 7장에 나옵니다. 7장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그러니까 침몰하는 배에서 하나라도 건져야 된다는 이 정의감, 당연한 정의감, 성품이고 뭐고 이 세상 현실을 침몰하는 현실을 새롭게 발견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죠. 그것과 ’개,돼지한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두 개를 한번 합쳐보세요. 둘을 플러스해보세요. 플러스하면 이퀄(=),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전하는 너보다 더 귀한 것에 의해서 다루어져야된다.‘ ’네가 전하는 너 자신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이 두 개를 합치면. 개돼지한테 전하지마라. 왜? 개돼지한테 나도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너의 정의감과 너의 신앙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왜 우리 성도가 죽어가야 됩니까? 우리의 육신이 정말 귀한 것들을 육신 때문에 순간순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서서히 침몰해야 되고, 죽어가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에요.
따라서 이왕 늙어서 침몰하는 가운데서 개돼지한테 절대로 줘서는 안되는, 아니 나보다 더 중요한 그 예수님의 피의 수유, 피로 먹여서 생명 얻게 하는, 이것을 위하여 천사가 부수는 인부로서 아주 열심히 이 땅에서 지금 부수고 있습니다, 전 세상을. 온난화, 열대야 하여튼 오늘 또 열대야. 늘 이렇게 “이래도 살려고 하느냐? 미련두지마라. 천국은 시원해. 에어컨보다 더 시원하니까 빨리 죽어. 응? 전도한답시고 주의 피 가리지 말고.” 라는 식으로 주께서 지금도, 천사도 일하시고, 주님도 일하시고, 성도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과 하늘나라가 어느 게 진짜 현실인지조차 우리가 몰랐습니다. 우리는 착각했습니다. 대자연이 계속 지속되리라고 오해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의 피를 흘리게 했고, 예수님의 생명을 가리고 있음을 이제는 눈을 떠서 발견해서 주의 피가 지시하는 대로만 귀하게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