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자아 주

아빠와 함께 2023. 7. 19. 23:05

자아 주(酒)


2023년 7월 19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3

(1:1)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2)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진노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상은 인간들에게 기피 대상의 신입니다. 하나님에게 얻어맞을려고 자진해서 찾아오는 인간은 없을 겁니다. 그 대신 인간들은 ‘착한 신’을 원하고 선택합니다. ‘착한 신’을 차라리 인간들이 무수하게 만들어내고 있어 왔습니다. 그 중에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본래의 하나님을 버리고 진노없는 하나님을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보내어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도 인간들로서는 거부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하나님도 거부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생각에 의할 것 같으면 ‘착한 신’은 인간들과 함께 있어 살펴주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떨어져 있음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되는 관계입니다. 더 어렵고 불가능한 일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에 대해서 난감하다는 점입니다.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 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게 ’된다는 원칙을 하나님쪽에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정당성에 동감해야 ‘하나님께 돌아옴’도 성사된다는 겁니다. 즉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의 그 어떤 의견차이도 없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평화로운 공존이 성사되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이 처음 헤어진 시점은 선악과 나무 과실을 따먹을 때입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행한 일만 내가 책임진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 이스라엘 조상에 대해 진노한 것이 후손인 너희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전체를 단일성으로 집체화 하십니다. 한 덩어리로 여기시는 겁니다.

과거 조상이 한 일들이 지금 후손들이 하는 일로서 쉬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때만 진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선악과 따먹은 그 본질 안에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 뭉쳐져 있는 겁니다. 선악과 따 먹을 때에,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인간을 내쫓아버렸습니다.

이 버림받게 하시는 원칙이 이스라엘 역사 내내 살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렸다는 그 조치의 정당성이 유지되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의 삶이 보장되는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조건을 와해되는 경우가 바로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경향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정당성’보다 자기 생존의 정당성이 앞설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과실 따먹을 때, 하나님께  궁극적인 ‘버림받음’의 진수는 ‘악마를 버림’입니다. 바로 이점에 이스라엘이 참여하는 조건하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동행해주셨던 겁니다. 이런 조건으로 하여, 이스라엘은 타민족과의 차별을 보여주게 됩니다. 시편 44:3에 보면,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전쟁을 하면서, 활과 창이나 군인들이나 말을 준비한다는 것은 그 전쟁의 대상이 같은 인간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은 곧 ‘인간 대 인간’을 상대로  삶을 영위해 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활과 칼과 말과 군사의 수가 우선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민족과의 전쟁에 나섰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사람대 사람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나라만큼은 하나님과 상대하면서 존재하는 나라였던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한계에 봉착합니다. 이방신을 도입하면서 이스라엘도 사람대 사람으로 상대하면서 자기 존재를 지켜나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그들을 버려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정작 진짜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받아야 될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악마임을 들추어냅니다. 악마에 대해서 영원히 버려야 한다는 바로 이 정당함을 체험시키려고 이스라엘을 데리고 다니신 겁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정당함을 유지시킬 수 없는 자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아야 될 자들이라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정당하게 증명되는 겁니다. 이점을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성립됩니다. 세례요한이 행하는 세례에 예수님께서 끼어드셨습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4-15)

이 대목에서 ‘모든 의’ all righteousness 라는 말이 나옵니다. 곧 하나님의 진노하심 자체가 충분히 의롭다는 겁니다. 여기에 참여하신 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확고부동하게 늘 죄인이어야 합니다. 요지부동 죄인이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한결같이 인간은 죄인이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21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성립하는 조건에 그 어떤 인간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인간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당연한 이유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그 누구도 죄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죄를 제대로 아는 자는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완성시키는 일에 한결같이 죄인인 자가 죄인의 자격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마치 알콜 용액에 인삼을 담그서 인삼주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인삼 성분은 알코 용액속으로 녹아들고 나중에 인삼 자체는 너덜너덜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성도는 자신의 일체 의로운 가치는 너덜너덜해야 합니다. 곧 아무 것도 지킬게 없어야 합니다. 만약에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지키려고 하는 순간 온 동네 귀신은 다 찾아듭니다. 예수님 피 속에 주님은 인간 자아를 담아서 ‘자아(自我) 주(酒)’을 담그시는 격입니다. 인간의 죄와 만나 오직 진노하시는 주님의 피의 의로움만 드러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피값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정당하신 진노를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오늘 본문에 두 가지의 불가능성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심히 진노하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진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은 진노하는 하나님을 거부하죠. 싫어합니다. 사랑해주는 하나님을 좋아하는데 진노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의 선택지에서 빠져버립니다. “그런 하나님 안 믿겠어. 진노를 가지고 사람을 기다리는 하나님은 나는 선택하지않겠다.”

근데 오늘 스가랴에 의하면 진짜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이에요. 또 한가지의 불가능성.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을 때 가능한 것은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을 가능한 하나님으로 여겼는데 오늘 본문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피대상이죠. 두 번째 불가능성은 뭐냐하면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간다라는 거에요. 이것 역시 불가능성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돌아가고 말고 할 것 없이 인간 위에 하나님이 계셔서 항상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있는 하나님, 포근한 하나님, 감싸주는 하나님, 인간이 갖고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보호할 마음자세가 돼있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안심 놓고 믿고싶어해요. 그런데 “돌아오라 그러면 돌아가겠다”는 이 말씀은 지금 인간이 사는 그 세계와 하나님 계시는 곳과 떨어져있다는거에요.

연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그리고 더 불가능한 것은 그 떨어져 있는데 다시 돌아오라는 거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둘이 만약 두 사람이 이렇게 연락을 취할 때 돌아오라 할 때는 그냥 돌아오라하면 안되고요 돌아와야될, 다시만나야될 지점을 알려줘야 돌아옴이 성사가 되는겁니다.

“돌아오라.” 무작정해서는 안되고 두 가지 요소가 들어가야돼요. ‘언제까지 돌아오라’ 시간 요소와 돌아오는 장소는 ‘거기로 돌아오라’ 공간 이야기 두 가지의 조건을 제공해서 인간은 “아, 그 시간대 돼서 돌아가고 또 어느 돌아가느냐?” 하나님이 만나고자 하는 그 지점, 그 지점으로 돌아가면 돌아간다는게 성사가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냐하면 아무 시간과 공간 지정된 장소도 이야기하지 않고 시간도 이야기하지 않고 무조건 “돌아오라”. “어떻게? 어떻게 돌아갑니까?” 터무니없이 들리는 이야기죠.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나님이 어디계신지 알고 돌아갑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는데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떳다하면 그 앞에 바글바글 할거에요, 사람들이.

방탄소년단 만나려고 소녀들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 만나고 싶을때는 뭐 KTX 타고 만나기 위해서 갈거에요. 근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지점, 장소를 언급한 적이 없는데 언급해 주지도 않는데 무슨 수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냐? 그래서 이 오늘 스가랴의 말씀은 굉장히 맹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어요. 인간으로 하여금 한계에 부딪히게 만드는 거에요. 그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전달될 때 인간 쪽에서 “어떻게 말씀 한 번 지켜봐?” 라는 것이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요건을 갖추고 그 말씀이 인간에게 찾아온다는거에요. 아무 인간으로서는 말씀 지킬 대책도 없고요, 방안도 안서고요. 지킬 생각이, 가능성이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 말고 어떤 지정된 장소에 가면 자동적으로 하나님 만나고 그리고 거기에 가게되면 “아이고 왔나? 아이고 많이 덥제?” 하고 선풍기 틀어주고 에어컨 틀어주는 하나님. 그저 못 보듬어줘서 안타까운 어버이 심정. 고향의 어진 부모님 심정. 그런 하나님을 사람들은 잘 선택했다. 하나님 하나는 잘 선택했다 하는 자기 선택에 자기가 만족을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같이 “내 하나님의 진노 갖고 있으니까 진노 받으러 이리와.” 하나님께 진노를 받기 위해서 오라는데 그 누가 가며 또는 가는 방법도 없어요. 그래서 이거는 진노와 오라는 것은 두 가지의 불가능성을 앞장세워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근데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예언이에요. 예언은 뭐냐. 실제 현실이 되는 계획서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 스가랴 예언이 아닌 내용이 포함되지 않는 현실은 가짜죠. 사람들은 진짜 현실을 외면하고 늘 이렇게 자기에게 유리한 현실을 조장하고 그걸 조작해내서 현실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스가랴 선지자는 일언의 양보도 없고 협상과 타협없이 그냥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그대로 외쳐버립니다.

“내 너한테 진노할테니까 날 만나러 와라.”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 위해서 가고 싶어도 “그게 주의 뜻이니까 순종하자” 가고 싶어도 어디를 가면 되는데요? 동사무소 갈까요? 언제 몇시에 가면됩니까?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상당히 우리가 흔히 아는 편한 하나님이 아니고 생소한 하나님의 생소한 제안에 대해서 이것은 어떤 식으로 우리 하나님을 이해해야 되는가 여기에 그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2절에보면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이래돼있어요. 그래서 진노의 하나님이에요.

여기 열조라 하는 것은 너희 조상들에게 진노했다 조상들에게 진노했다는 겁니다. 화를 내었다는 겁니다. 분노하셨다는 거에요. 사람들은 조상한테 한 것은 조상한테 해라고 일을 끝내야지 애꿎은 후손한테 굳이 이 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죄는 조상이 지었는데 그 조상한테 덤터기를 씌워야지 벌을 줘도 그들에게 벌을 줘야지 우리한테 굳이 조상에게 진노했다 그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지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이 많아요. 할 말이 굉장히 많습니다.

자기 방어체제가 아주 견고하지요.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은 뭐냐하면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단일성으로서 집체화시켰다고 보셔야 돼요. 집체화. 흩어진 것을 뭉치면 덩어리 만드는 것을 집체화라고 합니다. 단일, 하나로 집체화시킵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과거에 잘못한 것이 이것이 너희들은 이미 열조, 너희 조상의 덩어리와 떨어져 본적이 없고 거기에 그 덩어리가 계속 안에 너희들이 시간 따라 이동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그 과거의 덩어리가. 과거는 과거고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은 지금이다가 안되고 과거에 형성된 그 덩어리 안에서 너희들은 지금 그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조상에게 진노한 그 진노가 여전히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다 사람들에게 똑같이 진노가 주어져야 된다는겁니다. 흔히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따먹어서 하나님께서 추방했다고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이 집체화, 한 덩어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나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어요 그거 내 탓 아니잖아요. 하나님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탓해야지, 나는 구경도 못 해보고 선악과 어떻게 생긴지도 몰라. 나 자두는 알고 에추는(자두) 알고 사과는 아는데 선악과 생명 나무 구경도 못 했습니다. 그 책임을 우리한테 짊어지면 안되죠” 라는 생각을 인간들은 갖게 돼요.

그러니깐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고 있는거에요. 같은 덩어린데 그 같은 집체화된 덩어린데 그 덩어리를 속했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 사람들은 그 사람이고 따로고 나는 나 따로라는 거에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 후손들, 이스라엘 후손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어요. 여기 분명히 오늘 본문에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하는데 아까 초반에 말씀드린 것은 돌아가는 장소도 모르고 시간도 모르고 어디로가야 만나는것도 몰라요. 이 모른다는 말은 뭔가 나 자신이 이미 어떤 집체 덩어리 거기 이미 한 일부로 소속됐다는 생각 없이 내가 단독적으로 따로 내인생을 살 수 있다고 그렇게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그 이전에는 아담이죠. 아담과 우리가 집체화되어있고 같은 덩어리에 있다면 주님께서 돌아오라 하는 것은 어디로 돌아오라 하냐면 하나님의 진노를 내가 진노의 하나님이다 돌아오라는 말은 너희 조상이 하나님께 진노를 유발한 그 사건 그 사태로 돌아오라 이 말입니다. 어디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는가? 그 지점이 돌아올 지점이에요. 그 지점에 가야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정당성이 거기서 밝혀지는 겁니다. “아 하나님은 충분히 화낼만 하시네.” 거기에 그 하나님의 뜻에 동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한 지점에 가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정당성을 체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가짜 하나님을 붙들고 “용서해 주세요, 은혜 주세요”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고 있는데 아무리 후손들이 되고 또 우리 후손 해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그 한 집체화 되어있기 때문에 진노가 계속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진노 내리는 그 장소에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지금 감을 못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에 갔다 칩시다. 갔다. “그러면 하나님 뭐 저보고 어쩌라고. 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선악과 따먹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버려버렸습니다. “나가라 이 생명 나무 있는데서 나가라.”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는 사람은 어떤 체험을 해야 하나님 마음과 일치된 마음을 갖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굳이 버려야 될 그 심정을 이해할 때 그게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되는 겁니다.

만날 때 그냥 만나면 안되잖아요. 만나라 하는 그 분과 만나주시는 그분과 만나야 될 우리가 동일한 심정을 갖고 있을 때 비로서 만남이 성사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순전히 뭐냐? 일방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너희들은 내 심정을 알아야 돼” 하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지금 주장하시는 거에요. 그 주장에 대해서 우리가 거역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왜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마음이 있다라고 할 때 피조물 주제에 “그건 하나님 마음이고 나는 내 마음 따로있습니다” 이렇게 고집부릴 수 없어요. 그럼 따로따로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그때 그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의 분을 냈던 그 지점에 가면서 그럼 어떤 체험을 해야되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렸다. 인간을 나는 너희를 버렸다는 체험을 하라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인간을 버렸다는 이 말씀은 어떤 순서가 있어요. 그 깊은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순서가 있습니다. 그 순서가 뭐냐하면 간단하게 이렇게 설명하면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인간들은 모든 인간은 인간과 인간을 만나요. 인간 대 인간이 만납니다. 시편 44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3절에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이래돼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한 것은 저희들이 칼로 땅을 차지한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칼로 차지한게 아니다. 시편 44편 3절에 나오는 이 말씀 이게 뭔 뜻이냐하면, 인간이 칼을 소지하고 전쟁할 때 활을 소지하고 말을 준비한다는 것은 이건 뭔 뜻이냐하면 사람이 사람하고 상대해서 이기면 땅을 차지한다는 생각으로 인간은 살아가고 있어요.

칼과 활과 말이 어디에 먹히느냐하면 같은 인간들끼리 먹히는 겁니다. 같은 인간들끼리.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을 나서게 할 때 이방민족들은 뭐가 준비되어있냐하면 활과 창과 말이 준비되어있어요. 그리고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군인들이 준비되어있어요. 왜 그들은 활과 칼과 많은 말과 군인들 요새 같으면 총과 미사일 초음속 미사일에다가 패트리어트 방어체제 왜 그런거, 대륙간 미사일. 왜 그런걸 준비하느냐하면 그들은 인간 대 인간의 싸움에서는 이게 먹힌다고 생각한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싸움에서는.

그러니까 인간은 벌써부터 지금 하나님의 심정이 뭐냐는 것을 알 수가없어요 왜냐하면 평생을 살면서 사람하고만 상대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하고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하고 상대하지않는 특수한 민족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전쟁할 때 활과 창과 말을 그것이 전쟁에 이기는 동인 원인 하나의 동력이 되지 않는 특수한 나라를 만든거에요.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은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이스라엘만은 하나님하고 상대하는 독특한 민족을 만든 겁니다.

참 이 구약에 나오는 사람은 활과 창으로 또는 말로 이 땅을 차지했다. 이 간단한 이야기지만 오늘날 그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야 마땅하죠. 왜냐하면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보람과 가치 내 존재 의미 이런 것들을 계속 지키고 확장하고 그걸 키워나가기 위해서 인간들은 뭘하느냐하면 사람하고 상대해요. 사람하고. 대표적인 것이 전세 사기 아닙니까. 전세 사기 하나님하고 사기치는 겁니까? 사람하고 사람이 사람 상대로 사기치는게 사기잖아요. 우리는 그걸 가지고 나쁘다고 이야기해요. 그렇다면 성경적 입장에서 사람이 사람하고 전세 사기 치는게 나쁘다면 그럼 그 나쁘다하는 너는 평소에 일상을 살아갈 때 누구하고 상대했어? 그 사람은 그럼 누구하고 상대했는데. 그럼 너는 누구하고상대했기에 사람하고 상대하는게 사기치는 것인가?

그러면 사기는 나쁘다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나도 사람하고만 상대하는데 착하게 상대한다는 거에요. 착하게. 지금 착하게 상대하느냐 사기쳐서 상대하느냐 주께선 묻는게 아니에요. 어떻게했든 사람과 상대하면 그건 이방민족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지 않아요. 그래서 그 인기 있다는게 그 문제가 있다는 거에요. 사람들에게 인기있다는 것이 문제 되는 것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니가 화가있을지로다.” 이게 뭐냐하면, “성도야? 너 성도맞아?”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을 상대로 살아가는 이방민족과 신자는 달라야지”라는 뜻이에요.

참 이 교회라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곳이에요. 하나님 상대한다고 와놓고는 교회 모든 문제가 뭐냐하면 사람과 사람과 상대하는 그런 친목 단체가 되고 만 거에요. 그래서 어떤 목사는 좀 큰교회 목사는 화가나서 설교시간에, 그 뭐 믿음이 한것도 아니에요 하여튼 그냥 교회적으로 이야기한거죠. 어떻게 한 교회 한 교우라 하면서 교회가 어떻게 좌파하고 우파하고 나뉘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강남에 있는 교회에요. 큰 교회. 그럼 좌파 우파 안 나뉘면 그들이 하나님과 상대합니까? 택도 없는 이야기죠.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을 알 때는 첫째는 출발점이 뭐냐? 사람과 사람을 상대하는것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상대해야한다.

근데 그걸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더 갑니다. 첫째는 사람과 사람하고 상대하지 마라. 두 번째는 하나님과 너하고 상대한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부에 이스라엘을 버려야될 원칙을 거기다가 심어놓고 그걸 끝까지 자크 열리듯이 끝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끝내버립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상대한다고 자부심을 가진 이스라엘이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그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민족이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항상 하나님이 진노했던 하나님과 인간이 헤어졌던 그 지점에 머물러 있어야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사람을 버렸던 것이 사람을 버린 그 체험을 하라고 그 버린 체험을 준게 아니에요. 세 번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뭐냐? 하나님께서는 악마를 버렸습니다. 악마를 버림의 대상으로 삼은거에요. 그 체험을 이스라엘이 그 체험에 합류되어야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악마를 버리기로 작정된 그 버림의 원칙에 이스라엘이 참여함으로써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는 그 순간에 악마하고 인간이 단짝이 되었잖아요. 한패가 되었다고요. 그 한패가 되었던 그 경우를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역사속에 그걸 담아버렸어요. 담아놓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버림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가리워 졌던 진짜 하나님이 버리고싶은 악마의 그 본질, 그 정체, 실체가 드러나는데 이스라엘 역사를 활용하신 거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옵니다. 싸움은 진짜 싸움은 메시아와 뱀의 싸움이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 메시아와 뱀의 싸움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 체험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게 만들었습니다. “니가 이스라엘이냐?” “네.” “그러면 하나님이 악마를 영원히 버려버리는 그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함에 니가 합류 해야되고 참여 해야된다.” “하나님, 어떻게요?” “니 나라의 역사가 날아가 버려야된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할 때 하나님에게 “얻고자 하는게 뭡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익이 뭡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선악과 따먹는 이 선악과를 모독한 이 죄에 대해서 영원히 용서하지 않는 공의로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그런 하나님 하나님 것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어길 때 영원히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이 살아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 체험을 해야 돼요.

“아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정당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버림받는 인간은 버림받는 것이 합당하다”라는 것을 그걸 아는 조건부로 삶이 허락된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스가랴에 보면 그들이 뭘 놓쳤느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정당하다”가 아니라 “나는 살고보자”로 체험이 바뀌어버린거에요. 우상을 섬겨서.

하나님이 어떤걸 원하든지 그럼 그게 우선적인 시급한, 다급한 문제가 아니고 내가 지금 어떻게 생존하느냐 이게 다급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체험에 합류되지 못하고 이게 버림받게 되니까 떨어져 나간거에요. 떨어져 나가니까 스가랴를 보내서 하는 말이 “내가 준비된 진노가 있으니까 빨리 진노하신 하나님 이 자리로 돌아오라” 이말이에요. 그러면 내가 너희를 내사람 만들어줄게 내가 너희에게 돌아갈게 그뜻이에요. 처음 비극이 발생되었던 그 지점. 그 지점을 새겨주는 그 대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그걸 하나님의 자기 백성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김으로써 지독하게 하나님의 진노하심. 끝까지 시비거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다정하게 대해주는 착한 하나님을 자기의 신으로 바꿨죠. 그걸 우상 섬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 그럴 줄 알았다. 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역사를 파괴시키는 그 정당함이 확실하게 주어진 겁니다. 끊어진거죠. 버림받은거죠. 하나님의 예언대로 버림받은거에요.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확고 부동하게 죄인이 되어야돼요. 확고부동하게 죄인되어야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안에 하나님의 조치가 계속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확고하게 죄인되고 죄인되는데 어느 정도 죄인이냐 하면 나한테 어떤일이 일어나도 마땅하게 죄인 되어야 돼요. 어떤일이 일어나도 마땅하게 죄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내한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사랑과 용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확고 변동없이 확실한 죄인으로 굳어져야되요.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 안에서 비로서 구원이 나오는 체험에 동참된 사람이 되는겁니다. 하나님의 진노가운데서 구원이 있습니다. 진노 가운데 구원이있는데 그 진노가운데 구원에 내가 나서서 손들고 “제가 구원 받겠습니다” 따라 나설 수 없어요. 그거는 하나님에게 그런식으로 구원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확실히 한다는 것은 인간은 어떤일이 일어나도 죄인으로 확정되고 굳어져 버린거에요. 어떤 경우로 죄인입니다. 착한 일 해도 죄고 예수 믿어도 하나님 믿어도 죄인으로 굳어졌다. 그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뭐냐하면 바로 신약에 와서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신약에 두 가지 세례가 나와요. 하나는 세례요한이 준 물세례가 나오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받을 성령세례 불세례 피세례 두 가지 세례 나오는데 그 물 세례만해도 벌써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리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구원한다는 사실이 담겨있습니다. 우선 누가복음 3장 10절에서 1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세례에대해서 어떻게 표현되있느냐 이렇게 표현되어있습니다. 예수님 이제 세례요한이 세례 줄때에 물론 그 세례에 예수님도 합류했는데 먼저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백성들에게 세례를 줬죠. 세례 주면서 어떤 조건을 붙었어요.

누가복음 3장 10절에 마지막 때에 심판이 오고 하나님의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한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진다 할 때 10절에 “무리가 가로되 그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벌 있는자는 옷 없는자에게 나누어줄것이고 먹을것이 있는자는 그렇게 할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군인들도 와서 물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고 무소하지말고,” 함부로 고소하지 말고 이런뜻이죠. “받는 월급에 족한줄 알라.” 세례 요한이 이렇게 조언을 했어요.

“세례받고 난뒤에 우리가 어떻게해야 세례요한 당신이 말하는 불심판,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으니까 세례요한이 그러한 요건들을 설명한 거에요. “욕심내지 말고 있는 것으로 족하고 너희들이 욕심내면 그게 니 죄 씻은게 무효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진짜 물에가서 죄씻음 받았으면 이제부터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혹시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한 벌 나한테 줌으로써 선한일을 해라”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이게 세례요한의 잘못이 아니고 세례요한의 한계입니다.

한계는 잘못이 아니고 그 정도 세례가 인간 세례 그정도 내용밖에 보여주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 세례 요단강 세례에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누가 끼어들었냐 하면 예수님이 거기에 끼어들어서 세례를 받아버려요. 그러니까 인간은 물 세례받고 물 세례 받고 난 뒤에 물세례한계가 세례받고 난 뒤에 “합당하게 바르게 살자. 겸손하게 살고 베풀며 살자” 이게 끝이에요. 더 나아가질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받은 세례가 예수님께서 그 세례에 뛰어들어야 물세례에서 멈추지 않고 그 의미가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성령세례 불세례 마지막 불심판 까지 계속 그 효과가 예수님 세례만이 그 불세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효력을 발생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세례가 어떤 내용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못하는 인간들이 불가능한 어떤 내용이 예수님 세례에 추가되었기에 물세례의 한계를 넘어서고 장차 불세례 불심판까지 넘어설 수 있는 요소가 뭐냐하는 거에요. 일단 세례받는다는 것은 이미 인간은 죄인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말하는 인간들 세례같으면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 씻음 받았지만, 죄 씻음 받고 난 뒤에 또 지은 죄에 대해서 또 세례요한이 거기다가 규칙같은 것을 또 추가적으로 주는거에요.

그러면 그 규칙을 위반했을때는 또 물세례 두 번 세 번 받아야됩니까? 뭐 삼층갑자 동방삭인가요? 계속 불러야 돼요? 아니잖아요. 세례가 세례요한이 인간에게 준 세례같으면 결국 이거는 뭐냐하면 인간대 인간의 만남의 세례에요. 여기에 누가 임의로 뛰어들었느냐. 하나님이 뛰어들어야되요. 이 세례에. 그래야 완성이 돼요. 그러면 완성이 된 세례가 어떤 세례냐. 마태복음 3장 15절. 예수께서 여기 3장 13절에 보면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례 받는거에 대해서 이거는 세례의 대상 자체가 안된다고 분명히 언급해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모든 의를 이루는 거에요. 아까 누가복음 3장에서는 뭐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한 벌 남주고 너무 월급으로 만족하고 남 욕심내지 말고 이런 식인데 그런 의로서는 택도 없는거에요. 하나님의 불심판을 하나님의 저주를 저주에서 구원 받을 수가 없는거에요. 여기 누가끼는가? 예수님이 끼어서 예수님이 나한테 세례를 줘라. 주면 예수님 홀로 이루시는 의가 있어요. 남들이 옷 벗어주고 이것 말고. 바르게 살고 이것 말고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홀로 이루는 의가 있어요.

그 의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는 겁니다. 다 이루게 되게 되면 예수님이 이뤘다는 사실은 뭐냐 예수님 말고 모든 인간은 항상 견고하게 확고 부동하게 끝까지 죄인이 돼야돼요. 끝까지 죄인이 되어야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질때에 사람들은 그당시 유대인들은 신이 있냐 아니면 신이 없냐 그게 논쟁거리였어요. 모든 인류 역사의 논쟁거리였어요. 신이 있느냐 신이없느냐 그러나 주님보시기에 그 자체가 논쟁할 거리가 못돼요.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는 신이 죽었다 하는것도 그것도 신이 죽었다고 니체가 그런 이야기하는데 신이죽었다 그것도 하늘나라에서는 이슈거리도 문제거리도 안돼요. 중요한 것은요, “신을 죽였다”가 되어야 돼요. 신이 죽었다가 아니라 인간이 신을 죽인거에요. 그래야 인간은 확고부동하게 죄인으로 계속 죄인으로 남을 수가 있어요.

인간이 죄인으로 남는다는게 뭔 뜻이냐? 인간은 의인될수 없고 죄인으로 남아야될 그런 필연적인 이유가 뭐냐? 그것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끼어들지 말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창세기 37장 26절에 보면 거기에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가는 대목이 나옵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그의 피를 우리의 손에 묻히지 말자” 이런 식이에요. 그의 피를 손에 묻히지 말자 하는 것은 성경에 보면요. 가인이 아벨의 피를 묻혔고요. 그리고 창세기 9장에도 사람의 피를 손에 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나왔어요. 그래서 요셉을 하나님께서 꿈을꾼 요셉을 형들에게 형들의 피를 묻히는 자로 만들어 버린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그렇게 만든거에요. 그렇게 해놓고 창세기 42장 22절에서 24절에 보게되면 요셉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가지고 국무총리 됐잖아요. 근데 형들은 그걸 몰라요 그 모를 때 자기들끼리 이야기한게 나옵니다. 창세기 42장 22절에서 24절에 보면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피값을 내게 되었다.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 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요셉이 국무총리 되가지고 화려한 옷을 입고 딱 이렇게 다 보고있는데 처음에는 요셉인줄 모르고 요셉은 이미 죽은자로 간주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형들 사이에 어떤게있냐? 하나님께서 우리가 억울하게 동생을 죽인 그 핏값을 우리에게 준다고 생각하는거에요. 바로 그 과정. 하나님이 우리가 동생죽인 피가 우리가 받아 마땅함. 그 하나님에게 진노받아 마땅함. 그 체험에 참여하는 자가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자에요. 그게 하나님께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에게 돌아오게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죽인자는요 용서받으면 안돼요. 그게 하나님은 확고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보면 분명히 성도는 하나님의 의인으로서 천국가잖아 그러면 그 의인은 뭐냐? 그 의인은 뭐냐는 말을 “우리가 새삼스럽게 죄인, 요지부동 확고하게 죄인이다”라는 입장에서 그 질문을 해야돼요. 그렇지않고 예수 믿어줬으니까 의인되었다. 이래돼 버리면 뭐를 놓치느냐 하면 우리는 확고부동한게 죄인이 아닌 셈이 되어버려요. 아닌 셈이 되어버리면 세례요한의 세례의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래 우리는 세례요한 요단강에서 씻었으니까 이제 바르게 살자.”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거는 하나님의 용서를 지금 장난치고 갖고노는 거에요. “참 하나님 고맙지 우리죄를 용서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 바르게 사는것만 남았어.” 이런건 없어요. 확고하게 죄인 되어야 되요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어디나오느냐.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는 자로” 이래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래 되어있어요.

우리가 의인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참여시키는 자가 되었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죄를 알지도 못하고 죄를 짓지도 않은 분이 그렇게 했다는 거에요. 그니까 그 하나님의 의에 죄지은 우리가 끼어들면 안되지요. “그래 나는 죄지은걸 알았어. 이제 반성해가 이 죄를 어떻게 하지 주께 피로 용서받으면 되지.” 지금 이런 수작을 하지 말라는거에요. 우리는 죄를 몰라요. 우리는 죄는 지었는데 죄가 뭔지를 몰라요. 유일하게 죄를 아시는 분만이 하나님의 의를 만드는데 우리를 끼어 잡아 당길수가 있습니다.

이걸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들 때 하나님의 진노라는 용액에다가 거기다가 뭘 하느냐? 인삼을 딱 두는 거에요. 인삼을. 알코올 성분에다가 인삼 넣으면 그걸 인삼주라 하지요. 하나님의 진노에다가 진노의 알코올에다가 우리 자신을 집어넣으면 우리는 이게 자아 주가 됩니다. 자사주가 아니고 자아 주. 자아 주가 되게 되면 그 자아의 특징은 뭐냐? 자기 자신에 대해서 희석이 되고 느슨해지고 너덜너덜해지고 푸석푸석해져요. 마치 알콜 한 10년 통에다가 있는 인삼. 그거 인삼 맛 나겠습니까? 그 용액에 다 녹아떨어졌지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도로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느슨하게 만들고 너덜너덜하게 만들어요. 푸석푸석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언제 악마에 시험 드느냐? 자기가 날카롭게 하나로 뭉쳐질 때 ”나는 내 인생 이거 내가 알아서 지킨다“ 할 때는 악마가 확 달려들어요. 주께서는 우리로하여금 술을 빚어 가지고 우리를 너덜너덜한 인삼으로 담궈서 오직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정당함, 하나님의 사랑만 마시기 위해서 이 천하의 확고한 너덜너덜한 죄인을 주님의 피안에다가 집어넣어서 피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께서 만족해 하시는겁니다. 이게 예언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우리 잘난 것을 예상할 때 주변에 떠도는 마귀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어서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저희들 깨닫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알아서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이미 이루어진 주님의 피의 능력이 우리로하여금 확실한 죄인으로 규정해주시는 이 놀라운 일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