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두 번째 거룩

아빠와 함께 2023. 6. 29. 12:50

두 번째 거룩 

2023년 6월 28일                본문 말씀: 학개 2:10-14

(2:10)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11)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2:12)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2:13)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2: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거룩한 율법을 현실화하는데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부정하고 더러운 것을 이스라엘에게서 제거하고 거룩한 것들만 남기는데 혼신의 노력을 하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를 통해서 거룩과 속됨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레위기 6:27-29에 보면, “무릇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그 고기는 지극히 거룩하니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먹게 되는 고기는 일반인들이 먹는 고기와 다릅니다. 제사 직무를 통해서 나오는 제물의 고기입니다. 이 고기는 일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고기들입니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먹게 되는 양식은 하나님의 음식물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으시는 음식의 일부를 먹는 것조차 제사 행위의 일부입니다.

제사장과 하나님의 음식과의 관계법은 레위기 21:6-8에 나옵니다. “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그는 네 하나님의 식물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니라”

즉 제사장이 활동하는 곳은 일종의 하나님의 부엌인 셈입니다. 이때 제사장은 옷을 입는데 이 옷조차도 요리사가 입는 옷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제사장 사이에는 ‘먹는 행위와 음식물’을 통해서 같이 계심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제사장 사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일반 백성들에게도 음식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조항을 내려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다”(레 11:2-5)

제사장을 일반인들이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여살리고, 일반인들도 하나님의 거룩이 먹여살리십니다. 원래 인간은 살지 못합니다. 선악과 과실을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 과실을 따먹는 바로 그 행위로 죽음과 저주가 주어졌다면 생명이라는 것도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는 행위로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6:53-55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무슨 수로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제사장이 먹게 되는 음식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통해서 만족하신 후에 주어진 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는 것은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의 연관성이 제대로 구현되었다는 말입니다. 선악과 훼손의 결과를 통해서 생명나무 결과를 생성하시려는 겁니다.

그것은 곧 심판을 완성하므로서 나타나는 거룩을 거룩으로 획득하시려는 겁니다. 선악과 나무의 취지가 온전하게 구현되는거니까요. 제물이 바쳐지는 제사 행위 속에 하나님 자신이 뛰어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온전한 심판을 달성되고 난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거룩으로 기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내부에서 선(先) 심판, 후(後) 구원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홀로 하시는 일에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이점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3:12에서는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3:19에서는 주님께서는 “은혜 줄 자에게는 은혜를 주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는 긍휼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거룩은 어떻게 성사되어 그것이 선물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지는 겁니까? 출애굽기 33:21-23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일을 처리하시면서 전과 후로 나누십니다. 일은 하나님께서 홀로 하시고  그 결과에 자기 백성을 참여시키십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속죄제를 지켜봤자 그 거룩의 결정은 속죄제 윗층에서 내려집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즉 속죄제 자체가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속죄제는 인간이 드려질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 내부의 거룩절차에서 거룩이 확정되는 겁니다. 거룩과 속됨(더러움)은 철저하게 분리되게 되며, 그 분리성은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그 차이를 확정짓습니다.

따라서 거룩과 속됨이 확정됨 자체가 묶어서 두 번째 거룩으로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심판하시고 구원이라는 이런 모습은 마치 짐승의 되새김과 같습니다. 이미 완료된 거룩과 속됨을 합쳐서 거룩의 완성으로 하시고 그 거룩에 입각해서 더러움과 속됨을 분류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거룩과 속됨을 구분할 그 어떠한 권한도 없이 있는 그대로가 더러운 모습입니다. 이사야 6:1에서 천사는 두 날개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하지만 이사야 6:5에서는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노출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완료된 거룩을 받아들여 자신의 더러움을 아는 그들이 거룩한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심판의 결과로 구원되었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학개 2장 10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다리오왕 이년 구월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아멘.

오늘 본문 내용에 레위기가 핵심 자리에 차지하고 있습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말씀은 제사장들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전공, 제사 지내는 일에 전념해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하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지 못할 부정적인 것이 제사장들로부터 이미 비롯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체가 더럽고 부정하게 된 것은 제사장들이 다루고 있는 레위 언약, “레위 말씀 율법에 관해서도 너희들이 제대로 그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그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제사장들에게 어떤 잘못된 문제가 있는가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근데 그 지적하는데, 그 지적하는 것이 제사장들이 먹을 양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대신 다른 백성들이 제사장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데요. 제사장들은 그걸 자기가 먹을 것을 준다고 해서 얼른 받는게 아니에요. 백성들이 제사장에게 주되 어떤 절차를 밟아서 주는데 그게 뭐냐하면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의 제물의 방식으로 제사장에게 음식이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장에게 준다.’ 가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들이 부여받는 식으로 제사장들은 음식물을 얻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면 제사장들은 ‘이거는 백성이 나를 먹여 살린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여 살린다’가 되는 겁니다.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거든요.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먹여 살린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서 먹여 살린다.’ 그런 나라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먹여 살리십니까?

큰 회사 가서 먹여 살리십니까? 자신의 노동으로 자기가 사는 겁니까?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절차를 경유하지 않을 때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지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유해서 식사가 주어진 음식물이 주어지게 하느냐? 그거는 창세기 3장에 보면 거기에 하나의 나무, 훼손 되지 않은 나무가 있어요. 생명 나무입니다. 선악과 나무는 먹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생명 나무 먹으면 영생 얻습니다. 문제는 그 먹는 방식이 그 생명 나무 과일을 따먹고 싶은데 그 나무 과일은 차단 돼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인간은 생명 나무 따먹을 수 없다.’라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겁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생명 나무 과실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주셔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에 보게 되면 “율법을 지키면 너희가 생명을 얻으리라.” 이래 되어 있어요. 생명을 얻지 못한 걸로 돼 있는데 “니가 이 율법을 순종하고 지키면 생명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너는 저주가 있다.”라고 새삼스럽게 생명과 저주를, 축복과 저주를 율법을 통해서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방식이 또 주어져요.

그래서 ‘인간이 이미 망했구나가 다가 아니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입니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한 이후로 다 저주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선악과의 취지와 생명 나무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거든요. 근데 이제 선악과 취지는 따먹어서 죽게 된다는 취지는 분명해 졌고 이제 남아 있는 하나의 나무, 생명 나무라는게 인간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생명답게 나타날 수 있는가? 그 기능에 대해서 하나님은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숙제고 자기 과업이에요.

생명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왔을 때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선악과 나무와 생명 나무에 둘 다 과실이 있어요. 과실은 ‘먹는다’에 있습니다. 따먹는다. 선악과 과실을 따먹었더니만 죽었다. 그러면 생명 나무 과실은 어떻게 따먹어서 따먹은 자가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문제는 생명 나무 따먹으면 영생을 얻는 것은 인정되는데 따먹는 방법이 없네요. 왜냐? 생명나무를 차단시켜놨기 때문에 따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51절 쭉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누구든지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라고 돼 있어요. 52절, 53절, 54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이게 먹는 방법. 예수님의 살과 피가 영생을 주는 양식이라도 먹을 수가 없어요. 먹는 방법에 대해 몰라요.

과일은 바나나 파인애플 그냥 먹으면 되잖아요. 입이있으니까. 근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어떻게 먹는다는 겁니까? 못 먹으면 또 영생 없고, 먹는 방법은 모르겠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예수님께서 “내 살과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할 때 그 살과 피를 어떤 식으로 먹느냐에 대해서 이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제사장이 대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그 제사장 기능, 제사 기능을 제사법을 유지하며 지키기 위해서 그 기능을 하면서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음식을 먹는 개층이 돼요. 제사장이 제사장이 먹는 그 음식과 제사장 말고 일반인이 먹는 음식의 차이가 난다 이 말이에요. 그럼 제사장들은 어떻게 하는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행위의 일부로서 제사장이 제사 제물을 먹는 것 조차도 제사의 일부가 되는겁니다.

그러면 제사의 진행 과정은 뭐냐? 제사장은 제사가 원활하게 제대로 하나님 앞에 응답이 되면 제사 음식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처음과 나중이 있다면 처음에는 뭐냐? 제사의 완성입니다. 두 번째, 그 완성된 것에 근거해서 그 다음에 제사에 참여한 제물의 음식을 제사장은 먹을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먹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사장이 살아난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살아나는 겁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이 의해서 생명이 부지된다면 이스라엘도 부지되는 거에요. 그게 제사장 나라에요.

그러면 제사장은 그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그 근거는 어떤 경우에 그러냐? 제사를 통해서 제사가 완성이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식물이 돼요. 하나님 자신이 식사가 된다 이 말이죠.

레위기 22장 4절에서 5절에 보면 제사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론 자손 중에” 아론 자손은 제사장들입니다. “문둥 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이런 부정한 자는 먹어선 안된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21장 6절에서 8절 되면 그 이유가 나와 있는데, 6절에 보면 제사장들은 이렇게 복장부터 수염 양편 깍지 말고 또 머리 모습이라든지 이런 것에 율법대로 머리카락도 대머리처럼 하지 말며 머리카락 까지 전부 다 하나님께 규정대로 해야 되는데 그 이유가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하나님의 음식물을 드리는 자인 즉 거룩 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음식물을 드린다고 돼 있어요.

8절에 “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그는 네 하나님의 식물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니라” 제사장들이 그 가족부터 개인적인 신체 모양까지 전부다 정갈 해야 될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음식물을 드리는 자기 때문에 그렇다’ 에요.

그 제사장들은 제사장들의 활동 영역은 하나님의 부엌이죠. 그들은 쉐프가 돼요. 하나님께 음식 만들어 드리는 것. 하나님께서 먼저 드시고 그 드신 것을 그 다음에 제사장이 먹고, 제사장이 먹어서 생존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어서 그들도 생존하게 될 때 그들이 제사장이나 그들이 도대체 뭘 먹었느냐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할 거에요. 다른 이방 민족들은... “그거야 뭐 우리 인간들 먹는 것 먹었지,”라 하잖아요. 아닙니다. 그들은 먹은 게 하나님의 음식물을 나누어 먹은 거에요. 하나님이 맛있게 만족해서 먹으시는 것을 그들도 같이 더불어 먹게 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생명 나무죠. 생명 나무 과일인 거에요. 하나님이 먹을 수 있는 생명 과일을 하나님의 율법이란 채널을 통해서 그들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혜택을 입게 된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학개에 돌아와서 보면, 학개에서 그 학개가 제사장에게 율법을 가지고 언급합니다.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이렇게 이야기 해요.

여기 나오는 고기부터 해가지고 국이나 이거는 음식물입니다. 거룩한 제사와 관련해서 있는 제사장이 먹을 음식물이에요. 근데 그 음식물이 거룩한 음식물이 어디에 닿았느냐? 사람의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거룩한고기, 성물이죠. 제물이죠. 하나님의 음식물. 이제는 설명길게 안하고 하나님의 식사. 하나님의 식사에 사람이 그런 옷자락 같은데 이런게 만약에 같이 묻혔다면 그것이 깨끗하겠는가 더럽겠는가를 묻는거에요.

그러니까 그 제사장들이 그 당시에 그게 마땅히 더럽다는 거에요. 레위기 6장 27절에 보면, “무릇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그 고기는 지극히 거룩하니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을 것이니라,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하게 한 속죄제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할찌니 불사를찌니라” 이래 되어있어요.

참 레위기가 복잡해서 무슨 이야긴지를 읽어도 감 잡지 못해요. 그래서 이런 것을 이해할 때는 간단하게 이해하실려면 이렇게 하면 돼요. 하나님 먹는 것과 인간 먹는 것을 구분한다. 더 나아가서 제사장 먹는 것과 일반인 먹는 것과 구분한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렇게 구분하는 의미가 뭐냐? 왜 그렇게 구분 해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거든요. 거룩하신 분의 이 속된 세상에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세상에 거룩하신 분이 드러날 때에는 반드시 거룩이 무엇이며 속된 것이 무엇이며 둘 사이에 접촉해서는 안된다는 것, 분리 돼야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거룩함을 드러내요. 나 하나님이고 너희는 더럽다는 겁니다.

문제는 나 하나님은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고 해서 자기 백성이 영생, 생명의 과일을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아하 우리는 더럽구나 하나님만 깨끗하네” 끝. 이래 돼버린다고요. “아, 깨끗한 분이 오셨는데 우리는 더럽기 한량없구나” 끝. 그리되는 거에요.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보고 속되고 더럽다고 이야기 할 때 그 거룩과 속됨을 한 묶음으로 묶어버려요. 거룩이 등장해서 비로소 밝혀진 속됨. 그 거룩한 속됨을 한 묶음 묶어버리면 그것이 뭐냐하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거룩이되는 거룩한 음식이 되는 거에요. 무지무지하게 어렵죠.

전, 후인데 오늘 학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하면 이미 깨끗하다 이말이죠. 이미 깨끗했어요. 시작은 깨끗해요. “깨끗한 것이 옷에 묻으면 깨끗하겠는가 더럽겠는가?” 묻는거에요. 이미 거룩한 것에 다른 속된 것이 와버리면 그것은 더러운 것이 돼버리죠. 깨끗한 것 99퍼센트 더러운 것 1이 있으면, ‘그래 1 그것 그냥 무시하든지 아니면 털어내 버리고 이렇게 하자.’가 아니라 거룩한 것에 조금이라도 속된게 묻어있어 버리면 전체가 거룩하지를 못하다는 거에요. 더러워진다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을 받아들인 자가 전과 후 가운데 후에 거룩한 사람이 되는거에요. ‘하나님은 거룩하다. 우리는 더럽다.’ 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거에요. 첫째 거룩과 두 번째 거룩, 첫 번째 거룩은 하나님만 거룩해요. 두 번째 거룩은 인간마저 포용할 수 있는 거룩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는 겁니다.

여러분, 내 이해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계속 한번 들어보세요. 히브리서 10장 26절 27절에 보게 되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라고 돼있어요.

속죄제 자체에서, 자체에 범위에서 거룩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행하는 속죄제 그 위에, 그 위층에 이미 거룩이 확정돼있다는 겁니다. 그 확정된 거룩에 대해서 그 아래층에 있는 속죄제를 지나고 난 뒤에 인간이 또다시 범죄 했을 때, “속죄제 저번에 속죄제 잘못 드렸는데 삼세판인데 다시 합시다. 다시 속죄제 드릴게요. 하나님 속죄제를 잘못 드린 그 죄에 대해 속죄제 또 드리겠습니다.” 하지 말라. 왜?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속죄제를 위반하면서 거룩해지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말해서 열심히 신앙생활 바른생활 하는게 가장 더럽다 이말이에요. 가장 더러운 것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거에요. 바른생활 하는 거고 거룩한 생활 하는게 가장 더럽다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거룩의 범주안에, 거룩의 위층에 있는 거룩의 확장된, 더 커져버린 범주안에는 인간은 이 거룩 앞에서 반드시 더럽다는 내용이 포함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룩과 속됨, 그걸 하나로 묶어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가 거룩한 자에요. 이게 뭐 고함지른다고 이야기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게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과의 인간을 그 당시 대표했던 모세 만남에서 나옵니다. 출애굽기 33장 12절 13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다” 이래 돼있어요. 은총을 입은거에요.

13절에도 모세가 은총입은 것처럼 주님이여, 내 백성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하옵소서. “입게 하옵소서.” 주의 은총을 입게 하옵소서. 덧입는 거에요. 주의 은총을... 자, 은혜입니다. 주의 은혜를, 긍휼을 입는거에요. 그래서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보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게 이제 생명 나무의 과실을 천국에 올 백성에게 전달하는 방법이 은혜와 긍휼이에요. 근데 이 전달 방법이 뭐냐하면 전달 방법에 있어서 “내 은혜 줄게 니 받아라” 이게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 하면, 모세로 하면서 여기에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모세가 긍휼과 은혜를 입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1 앞에 일을 온전히 주께서 먼저 한번 다 이루어 내시고

■2 그 후에 벌어진 은혜와 긍휼을 뒤에 모세가 받는 식이 되는 거에요. 앞에서 주께서 다 이루시고 뒤에 받는 거에요. 모세가...

얼굴은 보지못하고 하나님의 등짝을 보시는 거에요. 딱 니가 못보도록, 하나님이 보지못하도록 손으로 이렇게 딱 덮어버리는 거에요. 덮고 하나님이 홀로 하신 일에 대해서 모세가 관여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홀로 하신 일을 다 이루어 내시고 그 결과에 대해서 모세한테 은혜와 긍휼로 주어지는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게 그럼 모세가 “수그리” 해가지고 수그리고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때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 스스로가 희생 제물이 되는거에요. 심판을 받는 거에요. 하나님 본인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의 이름이 심판을 받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선 심판, 후 구원 이에요.

근데 성도한테는 선 구원 나중에 심판받는 겁니다. 자, 심판 받는다는게 뭐냐하면 구원을 취소한다는 말이 아니고, 모든 인간적 요소를 제거해 나가신다 이 말이죠. “새집 줄게 헌 집 다오” 하고 똑같은 거에요. 이미 새집을 주고 오고, 구원을 줘놓고 그다음에 왜 인간이 거룩하게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이 왜 구원이 아닌 더러움에 해당되는가를 추후로 계속 알려주는 거에요.

좀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레위기 11장에보면, 이게 알기쉬운지 더 어렵게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제사장이 아니고 일반인 이스라엘 전체에게, “육지 모든 짐승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그니까 두 가지 요소가 다 겸비되는 땅에 있는 짐승은 너희가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것 다시한번 상기시켜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먹을 수 있다는게 자동적으로 먹을 자격이 있다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먹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식물을 그들이 그다음 차례에 그들이 먹는거에요. 하나님이 먹을수 있는 것을 제사장이 먹고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이 먹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일반인들이 음식을 먹을 때 굽이 갈라진 것과 되새김질 하는 그런 땅의 음식을 먹는다는 말은 그들의 음식이 그들의 배에 들어오기 까지 약속의 땅에서 살면서 그 음식을 먹기 까지 앞에 있는 절차가 뭐냐하면 하나님이 뭘 하셨어요. 하나님이 뭘 하셨고 그 하신 것에 대해서 제사장을 통해서 “나는 이런 일을 했다” 라고 제사장에게 알려 준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제물이었지요. 제물. 희생제물 제사 제물을 언급하는 거에요. 제물을 이렇게 어린양을 바칠 때 인간들이 생각하기를 양을 들고와서 제물을 바치면 ‘내가 주체가 되어서 양을 우리 집에 있는 양을 들고와가지고 제사장을 드렸고 제사장은 그걸 바침으로써 나는 죄를 용서받는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고 하는거에요. 하나님이 스스로 양이 되셔서 스스로 하나님 자신을 심판 했다는 것이 제사 현장에서 구현되는 거에요. 제사 현장에서. 인간들이 자기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뭘 바친게 아니고 하나님 본인이, 하나님 스스로 반추하는거에요. 하나님 스스로 자기 내부에서 되새김하고 굽이 갈라지는 겁니다. 그게 거룩이에요.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것을 먹으란 말은 너희가 먹을 거룩한 양식이 된다는거에요. 자, 거룩한 양식에 대해서 거룩한 조건은 뭐냐? 하나님에게 일어난 일을 그 일을 담고 있는 음식이라면 거룩한 음식이 되는거에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은 뭐냐? 제사죠. 제사. 하나님이 스스로 제사법을 주시고 그 제사법에 대해서 스스로 양이 되시고 스스로 제사장 되시고 스스로 희생 제물 되셔서 스스로 그걸 다 하나님 내부에서 완성시킨 거에요.

되새긴다는 것은 먹고 먹었는데 또 먹히는 것을 뜻하죠.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먹어라.” 이스라엘은 “예, 먹겠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내가 양식으로 또 먹을게.” 이중으로 먹는거죠.

굽이 갈라진다는 것은 거룩과 부정사이에 어떤 인간도 거룩으로 자기의 행함으로 합체될 수가 없다는 거에요. 갈라져야 돼요. 단절돼야 돼요. 인간의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가 되는겁니다. 철저히 구분되어야 돼요. 거룩과 부정으로 “이런 것은 먹어선 안된다. 굽이 안갈라진 것은 먹으면 안돼. 되새김 못하는 것 먹으면 안돼.” 라고 갈라짐. 이 갈라짐은 하나는 거룩이고 하나는 부정이 되는 거에요. 거룩과 부정을 묶어서 거룩은 거룩대로 살아있고 부정은 부정대로 살아있는 것을 그걸 한데 묶어버리면 그것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게 되는 거에요. 그걸 먹을 때 거룩한 백성이 되는 거에요.

■내 존재가 보여주는 것은 더러움밖에 없다는 것과

■주께서 보여주는 것은거룩은 주께서 홀로 하셨다와 그 거룩과 더러운 내가 결합이 되는 이 자체가 새로운 두 번째, 하나님이 일을 벌리고 난 뒤에 두 번째 거룩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먼저 부정한 것에 오셔서 심판 받으시고 그 심판을 다 완전히 이룰 때 하나님께 구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는 선 심판 후 구원이 되고, 우리에게는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그다음 부터는 “우리는 어떤 심판을 받아도 마땅합니다.”가 되는 선 구원 후 심판이 될 때 그 구원, 심판을 합쳐서 그게 거룩한 백성이 되는 거에요.

복잡하다고 하지 마세요. 레위기는 이것보다 더 복잡해요. “이미 깨끗한 고기에 니가 더러운 옷을 묻으면 그게 더럽겠는가, 부정했는가?” 학개 선지자를 묻는다는 말은, 선 구원 후 심판이 너희에게 찾아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내부적으로 구원을 거룩하게 되었어요. 왜? 하나님 자신이 심판을 이 세상 끝날까지 운반시켰기 때문에, 이동시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면, 마태복음 11장에 오후 설교때 나왔던건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생각하는 심판은 이렇게 돼 있어요. “보라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고 이야기하고, 마태복음 3장에 보면, “그분이 내뒤에 곧 오시는데 그분이 이 세상을 타작마당으로 만들어가지고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했고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불에 보낸다.” 이것이 세례요한이 알고있던 한계, 메시아가 하는 심판이었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 입장은 급했죠. 왜? 심판 날이 몇 달 안 남았으니까요. 길어봤자 몇 년. 왜? 자기 뒤에 심판주가 오시니까 그 쭉정이를 지옥불에 보내시는 분이 곧 뒤따라오시니까.

세례요한이 모가지 날라가도 “저는 뭐 그거는 큰 문제 아니였죠.” 우주적 심판이 더 큰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 이제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조용해요. 지금 쯤 뭐 지옥불 되어야 되는데 조용하단 말이죠. 그래서 세례요한이 궁금해가지고 예수님께 보내서 “예수님 우리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됩니까?” 라고 이야기해요. 마태복음 11장 3절에서,“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 세례요한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한다’ 라는것만 생각한 거에요. 세례요한이 뭘 몰랐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자신을 심판한다는 선 심판을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죠. “㉮내 심판이 먼저있고 난 뒤에 그다음에 하나님마저 심판당했다. 이 세상은 끝났다.” ㉯하나님마저 심판했으면 이땅은 심판밖에 없어요. 이땅은 심판밖에 없다는 그러한 증인들이 나타나는데, 그 증인들이 뭐냐하면 바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이건 뭐냐하면 소경은 소경 자체가 심판이고 앉은뱅이 자체가 심판이고 문둥이 자체가 심판이고 귀머거리 자체가 심판이고 죽은 것은 자기 죄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되는 거에요. 마땅히...

그러니까 “세례요한아 이 땅이 니 말대로 심판받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다.”는 거에요. 마땅한데, 그 마땅한 자가 그 다음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받아졌다는 이 말은 이 인간의 심판 문제가 인간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체적인 자기 문제라는 사실을 밝혀지는 거에요. 이게 뭐냐면 하나님은 인간을 갋는게(갈구는게) 목적이 아니고 선 생명나무가 어때서 생명나무며 선악과 나무는 어떻게 선악과 나문가 그걸 나타내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거에요. 에덴동산의 중앙은 사람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중앙은 달랑 두 나무가 위치한 곳이 바로 에덴동산의 중앙이었고 거기서부터 물이 흘러가고 그 물 덕분에 사람들 아담과 하와가 살고있었던 거에요.

“선악과나무 따먹지 마라” 그 따먹고 난뒤에는 대번에 생명나무 못따먹게했죠. 왜냐하면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두 나무가 아니고 오직 하나의 나무로 연결돼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쪽을 못 따먹으면 저것도 못 따먹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아담은 선악과 나무도 몰랐을 뿐만아니라 생명나무가 선악과와 연관됐다는 것 조차도 몰랐던 거에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선악과는 없고 그냥 생명나무만 주렁주렁 달려있고 거기에 가로수처럼 시냇가에 양쪽에 생명나무 과일이 그득 있어요. “먹어라”, 영원토록 먹어라고 생명나무 그냥 줘버리죠. 왜? 이게 그 나라가 사람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 살기 위한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살기 위한 나라에 덤으로 인간이 그냥 염치불구하고 그냥 거기에 강제로 끼어 들어가게 된 거에요. 그니까 그 말은 뭐냐, 요한계시록 22장 그 말은 뭐냐? “오지마 인간은 이곳에.” 이런뜻이에요. “오지마. 너는 지옥가야돼. 이곳에 살면 안돼”.

바로 그 이야기. 하나님만 거룩하고 우리는 더러워. 하나님만 거룩하고 우리가 더럽다는 것을 그걸 하나님의 자체적인 계획인 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사람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성도라는 거에요.

우리가 이 땅에 죽도록 되어있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 감사하세요. 그게 내 죽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입니다. 이걸 감사하는 사람은 이미 거룩한 사람이고, “어떻게 예수 믿고 열심히 십자가 믿어 구원받아보자.” 이건 주의 일이 아니고 자기 일이에요. 인간은 이미 자기 일을 생각하는 그 순간순간 이거는 더러워요. 부정해요.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전, 후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설정한 전, 후가 인간에게는 그것이 발생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뭘 제거하느냐 하면, 뭘 심판하고 제거하냐 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일이거든요. 다 이루신 일에 새삼스럽게 지가 거기서 끼어드는 것, 이미 전과 후는 결정했는데 거기에 새삼스럽게 끼어들 때 주께서는 그걸 제거해 나가죠. “그럼 저는요?” 이렇게 꼭 끼어들 때 “저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꼭 끼어들어요. 이걸 제거해 나가버리죠.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수그리. 보지마 너. 하나님의 일이야. 니 일이 아니야. 보지마” 라고 수그려 놓고 그다음에 다 일 끝나고 난 뒤에 긍휼과 은혜를 선물로 주는 것처럼요.

방금 뭐가 지나갔지? 주께서 다 이루심이 주어졌구나. 그래서 요한 1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요한 1서 4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 이거는 바로 우리의 한계를 두고 이야기 하는거죠. 예를 들어서 이런겁니다. 하나님 저 구원받았죠 라고 하나님께 물으면 하나님께서는 “니 내 봤나? 니 봤어? 니 봤냐고 실제로 예수님 봤던 사람도 다 버렸어. 내 봤어?”

인간들은 하나님을 내가 보고 만지고 그래서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존재로 해서 ‘내가 교회 나와서 예수 믿어야지.’ 이게 인간의 방식이에요. 왜 인간이 그렇게 하느냐하면 그게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인간의 생각은 이겁니다. 선 거룩, 후 거룩 이에요. ‘처음도 바르게살고 나중도 바르게 살면 나중에 결과도 바르게 사는 내가 된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난 방식과 전혀 반대에요. 하나님은 먼저 심판받고 나중에 구원되는 거에요.

인간은 내가 심판 받는 것을 본인이 용납안합니다. “니가 하나님 봤어? 안봤지, 안봐놓고 니가 뭘 안다고 구원을 어떻고 천국이 어떻고 그런소릴하느냐...”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요거 요대목.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안에 거한다는 말은 아까 처음에 제가 설교 초반에 얘기했죠 제사장이 하나님의 음식을 먹고 마셔요. 이게 뭐냐하면 같은 음식을 같이 나누는 것 이게 바로 거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일반인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같이 먹고 마시는 그 모습이 이게 거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거하게 되면 그 사랑이 거하는 거죠. 사랑에 거하게 되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요한1서 4장 18절에서 이걸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학개로 돌아와서 보게되면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율법으로 이것을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에게 지적하는거에요. 이게 뭐냐 율법시대가 끝 시대가 아니고 나중에 메시아가 와서 인간들이 왜 더러운가를, 제사장들이 왜 더러운가를 알려주는 겁니다.

끝으로 이사야 6장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웃시야왕이 죽던 해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는데 거기에 스랍들, 천사들이 어떻게하느냐, 행동이 여섯날개가 있는데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둘로는 발을 가리었고 둘로는 날개 치면서 찬양하는거에요. 여기서 천사와 하나님의 성도의 차이점이 뭐냐. 천사는 그 날개를 가지고 자기를 가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사야는 어떻게 되느냐. 이사야 6장 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더러운 백성중에 있다.” 따라서 이사야는 차라리 천사와 달리 가릴게 없어서 너무 좋은거에요. 가릴게 없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천사를 위함이 아니고 가릴 게 없는 노골적으로 더러움을 드러내는 자기 백성 될 사람을 위해서 주께선 세상 죄를 진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당할 심판을 미리 다 받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뭘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하신 일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성취했느냐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