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고통을 느끼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과거가 아니고 지금 현실에 작동하고 있기때문이다.
언약적 고통입니다. 나의 고통이 아니고 언약적 고통, 장차오실 예수님의 고통을 체험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언약이 실시되는 현상, 그 순간이에요. 하나님의 십자가가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나의 고통과 겸비해서 주님의 고통을 아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왜 고통이냐, 왜 아픔이냐? 딴 건 다 의심해도 내 몸이 아프고 내 마음에 불안한 것은 내가 속일 수가 없어요. 내가 유발한 사태가 아니거든요. 내가 만든 사태가 아니에요.
이것에 대해서 자기에 대해서 의심합니까, 의심하지 않습니까? 자기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지요. 이런 자기 PR, 자기를 의심치 않는 세계를 무슨 세계라고요? 경건치 않은 세계, 다른 말로 불의한 자가 되는. 이 사람 이거 48시간 고아서 망하려고 하는 것 아니잖아요. 어쨌든 간에 내가 안 망하는 쪽이 어느 쪽인지 탐구하고 연구하는 게 경건치 않은 세계에요.
그런데 내가 누굴 믿느냐? 하나님을 믿잖아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잖아요. 그 하나님, 그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이라고 내가 의심하지 않는 거예요. 이게 바로 불의한 자에요. 이게 불의한 자라고요. 지금 사달이 어디서부터 사달 났느냐 하면 왜 나는 나를 의심 안 하고 있느냐 그게 사달이거든요.
왜 나를 진짜 하나님 앞에 내가 망해버려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 받아들여요, 왜 수용을 못합니까? 왜 수용하면 안 되지요? 왜 나는 아프면 안 되고 건강해야 되고, 나는 왜 망하면 안 되고, 그런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뭡니까?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 몰라요. 그 이유가 바로 그룹, 이 세상 자체가 경건치 않은 세계, 지옥이죠.
지옥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의 파생물로서 이 땅에 출생한 겁니다. 지옥 사람으로 태어난 거예요. 세상은 그런 거예요. 지 고생한 것, 지 성공한 것, 어려운 가운데서 극복한 것 그런 이야기만 하지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남이 피해본 이야기는 완전히 다 날아가 버려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네가 속해 있는 나라가 왜 지옥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평생을 살게 만들어요.
평생을 살게 만들어서 우리가 마주하는 우리가 접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그 티를 내게 만들었어요. 우리 속에 있는 관심사.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수치스러움을 더 깊숙이 감추기 위해서 보상으로 인하여 내가 힘들고 어려운 것에 대해서 자꾸 보상을 원하는 거예요.
고통의 세계니까 여기서 보상을 기대하면서 뭘 하느냐? 마르둑 신, 신 같은 것, 나한테 잘해주면 나는 신에게 잘할 용의가 돼 있다. 내가 원하는 걸 주면 하나님을 섭섭지 않게 해주겠다는 마음이 우리 속에 있어요.
시편 43편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 자체를 경건치 않은 세계라고 규정을 해버려요. 이 신앙인은. 규정을 하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소속이 어딘지 보는 거예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이런 내용이 참 중요해요. 경건치 않은 세계에 여기에 어떤 고정된 위치를 갖고 있다, 자리를 갖고 있다 했지요.
이걸 무슨 자리라 했습니까? 이게 무슨 자리? 여기서 고정된 제단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신앙인은 두 개의 세계를 알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두 종류의 세계가 내 안에 구성돼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누구 이야기에요? 예수님 이야기에요.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언약적으로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어요. 그러면 어디에? 세상 안에 있는 거예요.
성경을 봐야 될 이유는, 내가 이 세상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게. 세상이 끝나고 시작대로 가는 이것이 내가 거기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는 거예요. 다만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그건 이 세상의 주관자에 의해서 그냥 주어질 뿐이에요. 내 인생을 내가 결정 안 해도 되는 거예요.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시편 43편 세계 속에서 빼도 박도 못하고 있습니다. 허우적댄다고 해결책 나오는 것 없습니다. 우리 현재 살아온 자체가 해결책이 되게 하세요. 그거는 주께서 되게 하십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하면 주께서 네가 주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렇다 하고, 지옥 갈 사람한테는 지옥 가려고 고생한 거예요. 똑같은 고생을 해도 평가가 이거는 오야 마음대로 에요. 우리 주님 마음대로 에요.
아버지 집에 아들 둘이 있는데 나중 되면 두 아들 같이 살아요. 한쪽은 천국백성으로 살고 하는 지옥백성으로 사는 거예요. 탕자가 돌아왔을 때는 자기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기쁨을 갖고 돌아온 거죠. 왜? 집을 나가봤으니까. 물론 여러분들이 가출하기를 추천을 해드리겠습니다만 가출하는 것도 주님의 허락이 있어야 가출이 되지요. 그렇지 않고 그냥 돌아다니는 것은 가출해봐야 지옥에서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말씀으로 침을 놔서 우리 자아의 테두리가 있어요. 안에 휑하니 내용물이 하나도 없게 만드는 일을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나는 있는데 I am noting, 그러니까 나는 있어요. 나는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나. 복음에서는 나가 없다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하지요.
하나님께서는 경악스런 사태를 일으켜서 인간을 버려버립니다. 자, 인간을 버렸는데 어떻게 해서 희한한 현상이 시편 43편 끝부분에 왜 시인은 찬송합니까? 왜 그것도 악기를 동원해서 찬송하며 수금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기쁨의 찬송을 드리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바로 이거에요. 하나님께서 천국에 나를 오는 것을 막아주셨기 때문에 찬양! 나 같은 것 천국 가면 나는 좋지만 천국이 배려버립니다.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출발점이 자기부터 아니라 천국 생각부터 먼저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바로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가 하는 고백이죠. 나는 죄인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짓말만 하느냐? 우리 안에 악마가 거짓말하는 영이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은 거짓말로 대응할 수밖에 없어요.
ⓐ악령은 우리 인간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진리를 이야기해요. 거짓이 아니고 진리를 이야기해요.
ⓑ진리로 이야기하는데 놀랍게도 우리가 납득을 해요. 이게 진리라고. 그래서 한 통속이에요. 마귀와 우리가 한 통속이에요.
ⓒ그런데 악령의 진리가 근거가 뭐냐 하면 선악체계에서 선악 지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 다 우리한텐 진리로 도달됩니다.
ⓓ내 성경지식으로 납득이 되는 복음은 거짓입니다. 앞에 출발점에 내가 들어가니까. 내 성경지식으로 납득이 되는 복음은 거짓이에요. 복음은 성경지식을 많이 확보한 나를 막아버린다. 그러니까 이 말을 왜 하냐 하면 성령에 사로잡힌 자와 악령에 사로잡힌 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성령이 오게 되면 무엇을 문제 삼느냐 하면 네가 바로 예수님을 불필요하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그룹, 그 무리의 일원이라는 것을 우리한테 고발하지요.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는, 성도는 자기 안에서 마귀가 무슨 소리하는지 계속 듣게 되는 거고, 불신자는 이게 마귀가 없고 내가 한 거라고 정당화하는 그 차이점이에요. 주변이 조용할 때 비로소 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주변이 고요할 때. 주의 성경말씀은 우리를 주변을 지워버려요. 네가 속해 있는 곳이 경건치 않은 세계에요. 오늘 말씀대로 경건치 않은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아주 개 무시해버리죠. “내 꿈을 펼치고 있습니다, 주님이여.” 지가 주님 가르쳐. “내 희망이 아직 남아있는 곳입니다, 주여.” 이런 식으로. 아직 변화의 여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이곳에 십자가 사건을 일으킨 이상 변화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한 고정적인, 제단은 고정된 거예요. 그 제단에 누가 기다립니까? 나를 이 땅에서 잘라내 버린 분이 기다리죠.
잘라내실 때 주께서 나기 때문에 잘라내고 새로운 주님의 하늘나라까지 이 세상과 이중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람을 주께서는 성령으로 자기 나라에다가 집어넣어버리죠.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을 집어넣죠. 아브람은 죽이고 아브라함을 살리죠.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야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바로 그 하나님이 이 땅에 말씀으로 오신 분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할 때 이거는 확정되고 고정되고 더 이상 변동의 여지는 없습니다. 왜 예수님으로 모든 것이 완료가 됐는지 알리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통해서 변화를 자꾸 유발시키지요. 마귀가 뿜뿜 마귀 생각이 막 튀어나오게 하고요. 그걸 전에 노폐물이라고 했지요. 노폐물의 특징이 있어요. 노폐물의 특징은 무차별적이다. 구분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목욕탕 가면 옷 벗고 나면 똑같지요. 기침할 때 똑같이 기침하고 하지요. 처음부터 인간은 원래 차이가 없어요. 다 육이고 육이에요. 왜? 육에서 낫기 때문에 똑같은 육이 번진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이상하게 자꾸 선악지식을 강조하는 거예요. 선악지식으로 네가 선악에 대해서 많이 아니까 너는 훌륭한 사람이고 천국 가고, 선악에 대해서 모호한 인간은 지옥 간다. 그런 식으로 자꾸 강조하는 데 사람이 선악에 대해서 예리해지는 것은 이미 배부를 만큼 잘 먹고 잘 산다. 여유가 좋다. 이런 뜻이거든요. 형편이 좀 숨쉴만하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일일 노동자가 철학을 생각합니까? 책 볼 시간이 언제 있어요? 바쁘고 힘들면 인간은 자기 생각만 합니다. 여유가 있으면 신을 생각해도 신을 생각하나 예수 생각해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소위 예수님 당시에 계급이 일곱 단계 있었거든요. 바리새인들이 일곱 단계를 정해놨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곱 단계를 그대로 이용해요. 밑에서부터 올렸죠.
밑에 있는 쪽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I am nothing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이거는 그냥 예수만 찾아요. 물론 예수 찾는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지만 단지 이용하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이용한 거예요. 위에서는 뭐냐 하면 이거는 여호와만 찾아요. 이 말은 그들이 아는 여호와와 예수님하고 반대되는 모습으로 오셨다는 거예요. 단절이죠. 황당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율법도 모르고 귀신 들린 자라고 한 거예요. 귀신 들린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타해서 죽여 버릴 때에, 채찍 맞아 죽일 때에 그들의 자리는 정당화되는 겁니다. 바로 이 구조 전체를 오늘날 우리 안에 다 들어있어요. 왜? 마귀가 만들었기 때문에 다 들어있어요. 우리도 밑에서부터 저 높은 곳을 위를 바리새인 쪽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매일 삶이 그거에요.
그러나 이것이 한가하고 여유 있을 때는 이게 되는데 바쁘고 어떻게 갑자기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 교통사고 나 버리면 다시 주르르 꼴아 박아요. 꼴아 박아서 뭐 여유 있을 때는 사채업자들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다가 집안에 사고 나면 사채업자고 뭐고 간에 제발 오백만 빌려주시면, 사채업자 없으면 이 세상에 구세주가 없다, 이런 식으로 막 나오는 거예요. 간이라도 떼어줄 테니 당장 오백만 있으면. 그걸 보고 여유 있는 사람은 비웃지요. 그 독한 인간과 거래하다니, 이래 되지요.
결국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매순간 어떤 순간도 우리가 내가 나서서 주의 일, 성령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계기는 전혀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데 이끄셨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I am nothing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주실 때 성령께서 하신 거예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린 맨날 선악으로 하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제까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오늘 되면 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뭐 된 줄 알고 있어요. 또 오늘치의 사태가 또 기다립니다. 숙제가 또 있어요. 물론 내 숙제가 아니고 주님 숙제입니다. 숙제가 뭐냐? 시편 43편처럼 되기, 버림받았다가 되찾는 기쁨으로 회복, 그걸 다시 발생하기 되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십자가는 고정돼 있다는 것을 기쁨의 근거가 되기,
나의 요동침과 나의 맨날 흔들리는 감정은 그거는 십자가의 고정성 앞에 그거는 아무것도 아닌 의미 없는 거라는 것을 알게 되기,
마귀한테 맨날 휩쓸리는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기,
내 행동이 내가 평가하기를 내가 잘했다, 못했다, 내가 손자를 막 때릴 줄 아는 이것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기.
왜?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실제로 아무것도 안 되게, 실제로 암에서 나았다 다시 암 걸리는 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왜?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게 걸린 그 암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마귀가 왔다 머쓱하게 돌아서요. “아무것도 아닌 걸 건드렸구나.” “그래 아무것도 아닌 거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육이 있는 한 마귀가 자기 일하는 그 기능의 가치가 있어요. 그 가치를 제가 인정하라 했지요. 어제 낮 설교 때. 마귀 존재와 활동을 인정해주세요. 마귀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지 못해요. 날마다 안에 말썽꾸러기 있어줘야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나를 포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의 두 가지를 다 감각을 갖고 있는 예수님의 시체가 되는 성령 받았기에 육이 뭔지도 아는 그런 사람으로 주께서 친히 지금 일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우리 있는 신체고 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존재가 우선이 아니라 말씀이 우선이고 내가 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말씀이 말씀대로 다 완료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늘 우세가 되는 그런 삶이 되어서 예수님만 증거 되는 증거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