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주체 박탈

아빠와 함께 2023. 5. 20. 08:23

서울강의20230518a 요한일서 1장 8절(주체 박탈)-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10절까지 하겠습니다. “(1:5)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1: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1:7)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8)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성경말씀은 우리를 무능하게 만듭니다. 성경말씀이 여기 10절에 보면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다 했는데 말씀이 있는 경우라면 어떤 경우냐? 다음 문장을 보게 되면 어떤 경우에 말씀이 있다, 라고 할 수 있는가가 드러납니다.

[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하늘이 있다.] 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비로소 하늘이 거기에 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보입니까? 안 보이죠. 하늘이 안 보여요. 하늘은 공간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새가 하늘에 있다가 떨어질 때, 사람들은 새는 하늘을 날고 다녀야 그게 새다운 거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새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우리는 이것을 이상스럽게 여깁니다. 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이상스럽게 보는 일은, 하늘이 하늘다워야 된다는 생각에서인데 하늘이 하늘답다는 생각의 내용이 뭐냐? 새가 안 떨어져야 돼요.

갑자기 새가 떨어지면 ‘저 새가 병들었나? 무슨 약을 먹었나?’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배경으로 할 때냐 하면 하늘을 배경으로 할 때, 새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는 하늘의 존재가 자각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새를 우리 인간으로 보자 이 말이죠. 인간으로. 인간으로 봐버리면 인간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냥 인간이 있다고 해요. 누구와 같이 있는 존재로 인간이 아니고 ‘인간은 그냥 인간으로 있다. 평소에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수요일에 설교하면서 제가 초반에 굉장히 강조한 게 있어요. [사는 것은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거예요. 산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데 하나님까지 챙겨야 살지 않느냐?’ 그런 생각은 이 세상사는 사람에게 거의 없어요. 그걸 요구해서도 안 되는 겁니다. 존재의 이유도 사는 것이고, 사는 목적도 사는 것이고, 살아야 될 원동력이 제공되는 것도 그냥 사는 그 자체가 사는 것의 원동력, 하나의 추진력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산다’ 해버리면 그걸로 인간에 대한 평가는 끝이에요. 끝났습니다. “너 요새 어떻게 지내?” “그냥 살아. 됐냐? 그 정도 하면 제대로 사는 것 맞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산다는 것은, 인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더는 필요치 않은 최종적인 평가 기준이 뭐냐? “너 살아?” “응. 살아.” “됐네.” 끝났어요.

“사는데 좀 재미나게 살아보지.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고.” “아니, 좀 바빠, 나.” 하나의 액세서리죠. 떨어져나가면 그만이에요. 왜냐하면 산다는 그 자체가 완료기 때문에 거기다 좀 감미료 치듯이 ‘사는데 심심하니까 교회나 나가보자. 하나님 믿어볼까? 예수 믿어볼까?’ 이거는 하나의 조미료 탁탁 치는 거죠.

하나님 믿는 것이 굳이 할 필요 없고 해도 뭐 별로 나쁜 건 아니지만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행여나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것이 진짜 내 존재 이유, 사는 데에 요만큼이라도 지장이 되면 우리는 분노합니다. 우리는 화를 내죠. 하나님이 뭔데, 내 사는 데에 지장을 주냐. 분노하죠. 내가 인간성이 좋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믿는 게 불편해도 내가 워낙 인간성이 좋기 때문에 교회 나가주는 거죠. 워낙 인간성이 좋으니까. 워낙 배려심이 많아서. 하나님에 대한 배려심이 많아서 하나님 믿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교회 안다니고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 우리들은 전혀 분노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하죠. 세상에, 하나님도 안 믿는데 우에 저렇게 잘 살지? 하나님 믿지도 않는데 애들 공부를 왜 그리 잘해. 하나님도 믿지 않는데 비트코인 좀 하니까 40억씩 팍팍 들어오고. 세상에, 아이고 부러워라. 우리 능력 있는 하나님 뭐 하노? 나한테 그런 혜택 줘야지.

이 모든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내가 산다는 우리 존재의 배경 색깔은 ‘나는 살아야 돼. 그리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어.’ 그걸로 종결됐습니다. 그걸로 끝났어요. 그러니까 오늘 요한일서에서는 그 배경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우리가 ‘살아있냐?’ 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네가 ‘네 배경이 빛이냐?’ 고 묻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거죠. 그런데 이 당황스러운 것도 이거 뭐 요한일서에 대해서 관심이 좀 있어야 당황스럽지, 사는데 바쁜 사람한테는 성경이 뭐라고 하든 전혀 never never 전혀 당황스럽지 않습니다. 참 잔소리도 되게 많다, 뭐 그런 걸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나온 사람들은 빛을 배경으로 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고 나 살아가는 데에 지장 없기를 바라면서 교회 다 나오죠. 살아가는데 지장 없기를. 이왕 사는 거 풍성하게 살 수 있는….

그러니까 사는 데에 하나님 쪽에서 뭔가 보탬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그러한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 나오잖아요. 교회 자취하려고 나오지는 않죠. 교회 하숙하려고 안 나오죠. 자기 살 집은 교회가 아니고 자기 살 집은 어디냐? 자기 집, 아파트 따로 있어요. 일주일 동안 어느 쪽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지, 자기 아파트에 사는지 교회에 사는지 한번 구분해보세요. 자기 아파트에서 살죠.

‘나는 이제 교회 갈 필요 없어. 왜? 우리 집이 교회니까.’ 뭐 이정도 신앙 같으면 그건 뭐, 짝짝짝 칭찬을 해줘야죠. 그렇게 생각안하고 ‘교회는 한 500m 떨어져 있어. 여기는 내 살 집이야.’ 말을 무심코 내뱉지만 이미 저울에 달아보면 교회는 시답잖고 내 사는 곳은 이만큼 무게감이 거기로 기울어져 있어요. 강력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궁금할 거예요. 여기 성경 요한일서에서는 빛이 배경으로 되어 있고 우리는 그냥 일상적으로 사는 게 배경으로 되어 있을 때에, 일상적으로 사는 게 배경으로 되어 있는 내가 빛을 배경으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겠는가? 성경대로. 그 방법은 우리 성경에서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새가 떨어지면 되죠.

새가 안 떨어지면 새는 하늘을 생각하지 않고 날고 있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아이, 신난다. 오늘 공기 기분 괜찮네. 오늘 나는데 굉장히 가볍게 날 수 있네.’ 하는 것처럼. 새는 바람이 불어주게 되면 자기 사는 데 수월했다는 것 때문에 한껏 자기 산다는 것, 공중을 난다는 것에 대해서 대만족을 하고 있죠. 하늘을 생각하지 않고 날고 있는 자기 새 본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완전히 새 됐어. 인간은 완전히 새 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새보고 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떨어지게 되면 비로소 ‘아, 내가 저 하늘에 있어야 되는데 내가 왜 얼굴 터져가지고 피나면서 땅에 빌빌 기고 있지? 나는 새 아닌가? 공중을 날아야 될 내가 벌레도 아니고 왜 땅에 떨어져?’ 했을 때 비로소 하늘의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새가 땅에 떨어졌을 때요.

그게 8절에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우리가 범죄하지 않을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하나님보다 내가 우선입니다.’ 이게 우리가 범죄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지만 나보다는 덜 중요합니다. 내가 더 중요해요.’ 이게 인간에게 범죄하지 않는 경우에요. 왜냐하면 평가하는 주체자가 여전히 나로 쥐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에요.

거짓말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인간은 누가 평가하기를 원하느냐 하면 내가 나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고집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인간도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게 되면 자기가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죄인 아니죠. 의로운 자죠.

이 험악한 세상에서 이만큼 살아내는 것도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한 일입니까. 인간이 새처럼 피곤한 인생을 살면서 그 피곤함을 이겨내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대견하게 계속 느끼면서 스스로 자기를 훌륭하다고 느끼면서 버티는 것, 그것만이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그러면 교회 가서 할 일은 뭔데? 교회 가서 할 일은, 내가 지금 나에 대해서 좋게 내리는 그 평가에 대해서 주님이 격려해주면 되죠. 하나님이 격려해주면 된다는 거예요. 장하다. 잘했다. 하나님은 내 편 되어줄 경우에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내가 나를 계속해서 평가하도록 후원해줄 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하나님께 소정의 사례금을 제시할 수 있어요. 내가 나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정당화해줄 때.

그런데 내가 하는 내 평가를 만약에 하나님이 빼앗아간다면 하나님은 나를 모독하는 하나님이에요. 모독하는 하나님. 나를 모독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 주먹을 딱 쥡니다. 한번 해보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나오는 거죠. 한번 해보겠다는 겁니까.

십일조를 딱 하면서 자, 내가 하기 힘든 십분의 일, 요새 교인들 십일조 하는 사람 없는데 나는 합니다, 던지면서 십일조까지 해줬으니까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계속 추천해줄 거죠, 하나님? 이게 교회 나오는 이유에요.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이런 인간들의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그런 자세를 가지고도 나와 사귄다고 지금 우기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1장 5절-10절에서 몇 가지 중요한 단어를 끄집어내라면 첫째는 ‘사귐’입니다. 둘째는 ‘속인다’는 것이고. 첫째는 사귐이고 둘째는 속인다는 것이고 제일 마지막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빛’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선포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빛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 빛이 되느냐? 너희들이 나를 속일 때 비로소 나는 빛으로 나타난다. 너희들이 나를 속일 때.” 새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하늘은 하늘답게 비로소 제 가치가 드러난다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인간아, 네가 태어난 이유는 딱 하나, 나를 속이는 자가 되는 바로 그 기능을 위해서 너희들이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나를 속여라.

이것은 창세기와 좀 다르죠. 창세기는 뭡니까? 악마가 인간을 속여서 그때부터 하나님과 인간은 결별됐죠. 갈라서게 한 겁니다. 악마가 인간을 속였다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이 빛이 빛으로 드러나기 위해서 악마로 하여금 인간을 속이게 했는데 하나님께선 그걸 허락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속임이 없으면 빛이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그걸 달리 하게 되면 ‘너희들이 범죄하지 아니하면 나는 너희에게 빛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뜻이에요. 너희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여러분, 이 소리 듣는 순간 진짜 제대로 이 소리에 대해서 알아듣는 사람 같으면요. 이 이야기 듣고 여러분 이 자리에서 만세 불러야 돼요.

그동안 수십 년 살아오면서 내 인생이 힘든 이유가 밝혀졌어요. 내가 안 속으려고 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거예요. 바르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거예요. 바르게 사는 것은 인간이 태어난 이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할 몫이지, 인간이 할 몫이 아니에요. 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할 몫이거든요.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숙제지, 선악을 아는 그 테스트를 인간 네가 왜 훔쳐가냔 말이죠, 쓸데없이. 선생님 임용고시 치는 시험지를 학생이 왜 갖고 가요? 그거는 선생님의 승진시험이지, 왜 애가 자기 승진시험도 아닌데 자기가 치를 숙제도 아닌데 자기가 왜 빼앗아갑니까? 빼앗아가놓고 야, 이거 문제 어렵네. 안 풀리네. 안 풀리지 그럼. 그건 네 담당이 아닌데. 선악은 예수님 담당이지, 자기가 왜 남의 시험지를 빼앗아 가가지고 자기 능력을 테스트한다고.

그럼 저한테 이럴 거예요. ‘목사님, 그럼 우리 인간은 뭐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그냥 빛 안에서 아무것도 안하면 돼요. 아무것도 안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하는 것.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속 편한데요. 이게 속 편한데 왜 아무것도 안하기가 힘드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평가해서 그런 거예요.

평가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빛 되신 분이 평가하는 거예요. 어디서? 빛 안에서. 빛 안에서 평가할 때 ‘바르게 살았냐’를 평가하는 게 아니고 ‘네가 빛 안에 있나, 아니면 빛이 없고 네 혼자 사느냐’ 지금 그걸 평가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오해를 해가지고 빛 안에서 빛답게 살려는 거예요. 빛답게 하는 그 담당자는 그 역할은 주님이 빛답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빛답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어두움답게 살면 돼요! 갑자기 흥분해서 일어났는데… calm down. 마귀와 결별하는 방법은 내가 나를 평가 안하면 되는 겁니다. 평가할 능력도 없고요.

그러면 어쨌든 간에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고 자기 의 잘난 체하고 그렇게 돼버렸는데 이제 와서 뭐 어떻게 주님의 빛과 사귈 수 있고 그런 형편이 되느냐? 우리도 한 고집 하는데…. 처음에 했잖아요. 인간의 사는 목적은 그냥 사는 거예요. 항상 밤에 잘 때 평가는 뭡니까? 오늘도 잘 살았나? 이거잖아요. 그 외에는 없어요. 오늘도 잘 살았어? 오늘 무탈하게 잘 살았지? 그것뿐이라니까요. 그 외에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왕 버린 몸인데 우리가 스스로 빛으로 들어가고 자시고 할 그럴 능력도 없는데 하나님이 주신 조치가 뭐냐? 그것은 사귈 수 있는 상대를 만나게 합니다. 사귈 수 있는 상대.

아까 했죠? 첫 번째, 사귄다는 것, 두 번째는 속이는 것, 세 번째는 빛 개념. 이게 중요하다 했죠. 사귄다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이 본문에서. ‘사귄다’로부터 들어가지 않으면 빛의 세계로 나올 수가 없어요. 사귀는 것부터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혈육과 사귀었어요, 혈육과. 누구냐 하면 자기의 가족 될 사람이나 자기와 이미 가족이 된 자기 자식이나 이미 태어나면서 알게 된 가족, 자기 부모와 사귀었습니다. 그 사귐을 교체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가족끼리 혈육과 사귀어버리면 여전히 내가 주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고 평가도 내 행동의 점수를 내가 채점해요. 그러니까 빛을 배경으로 내 삶의 환경으로 해서 거기에 있고 싶지도 않죠. ‘나는 내 안에, 외톨이가 되든 내 안에 있으면 그만이지. 그냥 사는 거지, 세상사는 게 뭐 있어? 이렇게 외롭게 사는 거죠.’ 하고 은둔생활, 도피생활, 피신, 그렇게 되는 겁니다.

피신이라 해서 어디 뭐 산속에 들어가서 자연인 되는 게 아니고 군중 속에서 인간은 고독이에요. 아파트 옆집도 사귀기 싫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식이고 우리 부모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귀는 관계를 끊어버려야 돼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한 것은 또, 인간이 가능치 않은 이야기가 또 나올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기존에 사귄 것을 왜 끊어버려야 되는가? 기존에 인간이 우리가 사귀었던 그 모든 사귐들이 내가 나를 평가하는 데에 더욱더 기여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나보고 무조건 좋게 해달라는 그 이야기가 아니고, 좋게 하고 나쁘게 하고 뭐 비난해도 좋은데 어쨌든 최종 평가는 내가 어떤 존재냐 어떤 인간이냐 평가는 결국은 내가 나에게 내린다는 것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동조하고 그걸 긍정해준다면 그 사람은 나와 사귀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물론 친구가 그럴 수 있지만 친구는 돈 떨어지면 날아가요. 그렇잖아요. 친구 아이가? 다 이거 술값 나올 때나 친구지, 술값 떨어지면 친구 다 떨어져 나가잖아요. 어떤 경우라도 끈질기게 내가 나를 평가하는 데에 대해서 그걸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은 부모님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이고 형제고 그리고 자식이고. 그러니까 그 혈육과 헤어질 수 없죠.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뭐 교회에서 갑자기 목사가 돌발행동을 하는데, 옆에 사람들하고 여러분, 교회라 하는 것은 코이노니아, 뭐 또 헬라어도 모르는 게 헬라어 하나 떡 해가지고, 서로 교제가 되어야 교회고 예배도 있고 에클레시아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우리가 교제하니까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노래 한번 부릅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 그 사랑하는 형제, 돈 문제 개입하면 다 떨어집니다. 그 이벤트 소용없어요. 이벤트 소용없습니다.

옆에 있는 김 집사나 옆에 있는 박 집사가 사랑하는 형제~ 하면서 할렐루야 했죠. 그런데 그 박 집사가 내 가족, 나의 자식에 대해서 험담을 했다. 끝났습니다. 사랑이고 뭐고 끝났습니다. “내 새끼 왜 건드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 새끼 왜 건드려?” “애가 너무 폭력적이라서 당신 애가 내 애 건드렸잖아요.” 이걸 학폭이라 안하고 교회폭이라 하는 거죠. 주일학교 때 건드렸잖아. 그러면 “바보 등신같이 얻어맞기는 왜 얻어맞노? 체력이나 키워라. 우리 애한테 얻어맞지 말고. 가자. 야, 앞으로 주일학교 안 나와야 되겠다.”

그러니까 이 평가, 내가 분노하고 싶을 때 분노하고 내가 되게 좋아하고 싶을 때 좋아한다는 그 평가의 잣대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라도 예수님이라도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시비 걸지 마세요. 이러한 고집으로 교회 4,50년 다녀서 장로, 권사 다 됐습니다. 그 고집으로 버티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그런 건 뻔하거든요.

10절에 보면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되어 있죠. 그럼 주님 쪽에서의 조치는 뭐냐? 주의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친밀한 혈육적인 관계를 말씀을 가지고 토막내버려요. 단단한 혈육, 도저히 내 힘으로 끊을 수 없는 혈육관계에 주의 말씀이 딱 들어와버리면, 빛이죠, 말씀이 딱 들어와버리면 이 관계가 혈육관계가 원수관계로 돌변합니다.

뭐 그런 예는 쉬워요. 어릴 때 형제간에 서로 강가, 바다 뛰어다니면서 또 집에서는 이불 위 뛰어다니면서 그렇게 장난치고 서로 친하게 지낸 형제들, 결혼해서 색시 만나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결혼해서 색시 만나면 그걸로 끝나고 거기다 더 끝나게 하는 방법은 ‘형님, 보증 한번 서주소.’ 하면 다 끝나요. 다 끝나버렸어. 그것도 안 끊어진다? 더 세게 끊는 방법은 ‘형님, 좀 여유 되는데 우리 애 공납금 한번 내주소.’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이제 와장창 다 깨져버려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할 때, 여러분들은 대부분 다 오해했을 거예요. ‘아, 우리가 교회 와서 복음을 알아들으니까 복음 안 믿는 형제간이나 동생들하고 다 끊어지는구나.’ 이렇게들 오해하셨죠? 나만 오해했나? 그렇게 오해하셨죠? 제 말의 취지는 그게 아니고, 어두움과 어두움, 둘 다 어둡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말씀이 들어가는 거예요.

둘 다 빛은 아니고 둘 다 서로가 서로를 속여 왔다는 것을 부자지간에 형제지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관리하십니다. 그러니까 누가 성도냐 하면, ‘난 복음 알았어. 난 빛이야.’ 이게 성도가 아니라 빛이 나로 하여금 내가 어둡다는 사실을, 그동안 내가 어두움 아닌 척했지만 사실은 어둡다고 폭로시킬 때 비로소 여러분들은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은 빛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빛과 사귀게 되었어요.

비로소 그 사람한테는 9절이 적용됩니다.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게 적용돼요. 뭐 죄를 지어야 불의가 깨끗케 되지, 죄도 없는데 깨끗할 건덕지가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빛을 알아서 내가 어둡다는 걸 아는 사람 같으면 요한일서 1장 8절이 확 가슴에 와닿죠.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주여, 저는 평생 주님을 속여 왔었습니다. 평생을. 내가 최종적인 나의 평가자로 나를 평가하고 싶은 이 평가를 나 말고 주님한테도 양도할 생각이 없었음을 저는 자인합니다. 내가 훌륭하고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이 보람에 내 최종적인 목적인 그냥 사는 것, 그냥 사는 데에 힘이 될까 싶어서 나는 열심히 나를 그동안 격려해왔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믿는 것은 내 격려에 하나님도 같이 힘 보태달라고 교회 나왔습니다. 십일조 드리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태초에 내가 몰랐던 악마가 나를 속였던 악마의 속임수였습니다. 속았어요. 속았어요. 악마한테 속았어요. 그래서 그 속임수에서 이왕 속인 것, 내 힘으로 그 속임수에서 벗어날 재주는 저한테는 없습니다. 없다는 거예요. 나한테는 그럴 능력이 없는 거예요.

거기에 반응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간단해요. [생각하지 말고 움직여라.] 생각하지 말고. 자꾸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면 계획이 나와요. 여기 목적이 나오죠. 목적(goal)을 향하는 것을 목표(aim)라 합니다. 하여튼 간에 생각을 하게 되면 계획이 나오고 목표가 수립돼요. 목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목표가 달성될 때 나한테 사는 재미를 더욱더 추가할 것이라는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생각함으로써 내가 살아있다. 살아있는 자는→생각한다→그 생각의 결과는→더욱더 살아있다, 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더욱더 살아있다. 완전히 빛이라는 배경을 내가 다 가려버리는 거죠. 내가. 이 잘난 내가 다 가려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논리에 의해서 내 생각은 결국 나한테로 귀환하는데요. 이러한 처지를 이런 문장으로 설명하면 여러분들에게 이게 더 쉬운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만 더 어려울 수 있는데 문장으로 써볼게요. [우리가 추적하는 사람(대상)은 늘 우리 자신이다.]우리가 추적하는 대상은 늘 우리 자신이에요.

범인을 잡는 형사가 잡고 보니 형사 본인이 범인이에요. 그러니까 악마가 얼마나 인간을 농락질 했는지 아시겠죠? 악마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목표로 잡아야 될 대상으로 악마가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회전목마 같아. 평생을 살았는데 제자리 뛰기에요. 평생을. 빌딩 짓고 뭐 대단한 사업하고 했는데 백날 해봐야 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을 올리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거기다 뭐라 하느냐 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어떻게 자기를 부인해요? 자기 십자가 지고. 자기 부인이 안돼요. 교회가나 집에 가나 추적대상은 나에요. 내가 나한테 닦달했다니까요. 똑바로 살아. 똑바로 살아. 남한테 욕 안 얻어먹고. 네가 행동 잘못하면 우리 집안 너 때문에 다 욕 얻어먹는 거야. 우리 집안의 명예를 생각해야지. 네가 아빠야? 그럼 너만 생각하면 안 되지. 네가 잘못하면 네 자식들이 너 때문에 욕 얻어먹어.

이러한 연결고리. 내가 사귀는 혈육적인 관계. 나를 귀히 여기기 때문에 귀하게 사귐과 만남의 관계를 갖는 그 관계. 그 관계 관리를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수색하고 탐색하고 추적하고. 그리고 닦달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놓고 세상 탓을 이렇게 합니다. 참 세상,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관심 있는데 관심이 들어올 수가 있어요?

여기서 예수님 방식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순환이죠. 내가 나에게 나에게 오는 거예요.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무는 것처럼. 자기 꼬리만 아파요. 앙 물었는데 자기 꼬리라. 꼬리가 좀 길어요, 뱀이.

그럼 빛의 세계는 뭐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버렸어요. 예수님이 예수님한테 돌아오는 거예요. 주로부터 시작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오는 거예요. 두 개의 공간이 생겼습니다. 이게 아까 낮에 안양 강의할 때 서로 다른 공간이라 했죠. 이 공간A(나의 순환구조). 이 공간B(예수님의 순환구조). 서로 다른 공간이죠.

이 공간인데 여기서 어떻게 되느냐? 이 둘이 합치지를 못해요. 이게 참… 부산 강의에서도 했고 여러 번 하고 있는데 이게 너무 중요해서 또 안할 수가 없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다른 편에 예수님이 있잖아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분석하고 탐구하고 연구했어요. 그 말은 뭐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간격이 있었던 겁니다.

간격이 있는데 예수님 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희생을 이야기하고 대속을 이야기하고 속죄를 이야기하고 사죄를 이야기하고 대신 죽으심, 대속이죠,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 이야기는 제자들이 간격을 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자기 몸으로 간주했을 때나 효과 있는 내용이에요.

예수님은 그런 이야기했는데 제자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런 효과를 내가 얻게 된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희생, 구원, 생명, 영생, 천국, 지옥가고 천당 가는 거 전부다 나한테 주어진다는 거예요. 어떻게? 주님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탐구하면.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신학이잖아요. 신학은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신학 자체가 이게 악마의 죄라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이 구원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에요. 신학을 하지 말라, 가 아니라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신학의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오면 안 되고요. 생각 없이 움직이면 되는 거예요. 신학 하는 움직임, 성경 보는 움직임. 그 움직임은 빛 가운데 움직이는 거죠. 주께서 움직이게 하는 거죠. 주께서 움직이게 하는 것.

제가 젊었을 때 그때 처음 교회 다닐 땐가 젊었을 때 본 영화의 영어제목이 에요. 우리말로 하면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였습니다. 데미 무어하고 남자 주인공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으로 나오는데 거기에 신기했던 게 뭐냐 하면 분명히 귀신인데 물리적 실체가 없어요, 그런데 동전을 움직여요, 동전을. 동전을 움직인다고요. 지하철 타는 대목도 나오는데, 동전이 공중으로 띄워졌어요. 보니까 아무도 가하는 직접적 힘은 없는데 동전이 원격작용 때문에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성도라면 주님의 원격작용으로 움직이면 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걸 가지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하는 거예요. 주께서 뭐하기 위해서? 내가 되기 위해서? 아니죠. 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주로 가면서 희생, 대속, 영생, 속죄, 사죄, 이것은 주님이 주님에게 돌리는 겁니다. 그 순환구조에 성도는 생각하는 게 아니고 움직임으로 거기에 휘말려 들어간 거예요. 하나의 움직임으로 휘말려 들어간 거예요.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내뱉은 자기의 말씀을 예수님 자기가 과정을 다 투입하고 성취시키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부터 10장까지 보게 되면 거기에 제사장들이 있어요. 제사장들이 제물을 드리고 하잖아요. 그 제사직이라는 순환구조가 제사장들이 실패해요. 그 실패하는 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연약해서. 율법을 지키는 데에 온전치 못했다 그런 뜻이죠.

율법의 내용에 대해서 율법 내용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출제한 법에 대해서 선생님끼리 치는 시험을 애들이 빼앗아가면 안돼요. 그런데 이미 악마가 동원돼서 시험지를 인간이 빼앗아가도록 악마가 했죠. 그 시험지를 딱 제시하니까 인간은 율법을 풀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 못 푸느냐? 출제의 취지를 모르니까 문제를 못 푸는 거예요.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저는 평생 사람 죽인 적 없는데요. 이렇게 푸는 거예요. 땡! 빵점이다. 간음하지 말라. 바람피운 적 없는데요. 땡이에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 말은 주님께서 로마서 7장에 보면 인간을 환자로 눕혀놔요. 일반 내과나 그런 데에서 환자들은 그냥 이야기하잖아요. 어떻습니까, 이러는데 치과에 가면 더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아예 눕혀놓고 아주 보지도 말라고 눈에다가 안대를 하는 치과도 있어요. 눈뜨지 마세요. 그냥 뽑아내는 거예요.

주께서는 율법을 왜 못 지키는지 그 이유를, 인간 속에서 율법이라는 기회를 통해서 거기 달라붙어 있는 악마, 죄의 속성을 그냥 들춰내는 거예요. 율법이. 여기 여기 붙어라, 이 악마야. 죄야, 여기 붙어라. 죄를 더욱더, 지남철에 철가루가 더욱더 많이 붙도록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믿씁니까, 해야 돼요. 믿습니까. 성경을 안 보면 자기 죄를 몰라요. 성경을 안 보면. 자기가 자기 꽁무니 쫓아다닌다고 바빠요. 자기가 지금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도 몰라요, 그냥.

속죄, 대속, 영생,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죄인의 몸으로 온 거예요. 죄인의 몸으로 와서 율법을 만났어요. 그러면 율법 안에 속죄, 대속, 이런 게 다 있거든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다 들어 있잖아요. 그것을 예수님 홀로 이루었다는 게 중요해요. 홀로 이룬 거예요, 홀로.

그래서 제자의 몸은 필요치 않아요. 예수님 몸으로 합세되어야 되죠. 그래야 한 몸이 되니까. 한 몸이니까 이제는 다른 몸이 필요 없어요. 몸과 몸 안에서 서로 사귐이 있으면 되는 거예요. 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내 자식과 부모 다 챙겨야 돼요.

그러나 이제는 사귈 수 있는 몸이 없어지고 주의 몸으로 대체되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몸이 됐어요. 그런 몸들, 몸의 지체들이 성령께서 찾아오심으로써 같은 성도들끼리 발생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어두우며 나는 떨어지는 새에 불과하며 내 쪽에서 생각을 해서 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을 쓴 사람이 요한일서, 이서, 삼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그 용어들이 유사하죠. 유사한 게 아니라 똑같죠. 여기 보면 요한복음 15장 17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혈육대신 새로운 사랑의 대상자가 나타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이야기하죠. 그게 다가 아니에요. 소유하고 싶은 욕망도 있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진짜 인간의 욕망은 뭐냐? 인간의 욕망은 누구하고 대화하고 싶은 거예요. 말하고 싶은 거예요. 말 통하는 사람끼리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일방적으로 잔소리 듣는 거 말고, 그 사람은 이야기하고 나는 듣고 이게 아니고, 나도 말 좀 하자.

사귄다는 것은 서로 말을 던지고 사귀는 거예요. 사귄다 해서 교인끼리 갑자기 이혼하고 둘이 동거하고 이게 사귀는 게 아니고, 복음이 나오는 것. 복음으로 서로 주고받는 게 이게 사귐이에요. 복음으로. 우리 둘이 얼마나 쪼다 같으면 주께서 죽으셨는가. 그 이야기를 하는 그게 사귐이란 말이죠. 사귐.

전에는 내가 주체가 됐는데 내가 주체가 되면 나는 그냥 내 중심이기 때문에 친구끼리 한 15년 사귀다가 돈 문제, 뭐 여러 가지 문제생기면 ‘우리 절교하자. 우리 헤어져.’ 하고 끝나버려요. 언제 뭐 너하고 사귐 자체를 위해서 사귄 적은 없어. 나 잘났다는 것을 네가 늘 동조해주고 후원을 해줄 때 우리 친구아이가? 하면서 친구인 줄 알고 했는데 어느 날부터 당신이 슬슬 그동안 너 잘난 척하는 거 내가 보조 맞춰줬으니까 이번에 뭐 하나 상품개발 했는데 우리 돈 좀 보태줘, 이렇게 나오면 끝나는 거예요.

돈 문제 들어가면 다 끝나는 겁니다. 이건 가족도 마찬가지고. 사람이 공짜가 없잖아요. 그만큼 비위 맞춰줬으면 비위 맞춰준 거 돈 이자로 계산해서 자기는 다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 생각이 문제에요. 내가 너한테 얼마나 해줬는데. 그런 거죠. 이거는 혼사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얼마나 해줬는데. 물어내. 반띵하자. 결혼해도 마찬가지죠. 친정에서 너한테 얼마주고 시가집에서 얼마주고 이거 다 계산하죠. ‘너 그거 다 기억하고 있었나?’ ‘기억하고 있지.’ ‘그걸 어떻게 기억해?’ ‘그것만 생각해. 나.’ 그것만 생각해.

그러니까 사랑으로 한다는 것은 둘 다 서로를 이용한 적이 없는 상태에서, 아니 이용할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 잘못했네. 말 잘못했는데 말 잘못한 게 굉장히 지금 기분 좋아요. 중요한 말이 나왔기 때문에. [서로가 주님으로부터 거덜나서 더는 서로 이용할 게 없는 상태가 사귐의 상태]에요. 사랑으로.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부부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부모 자식도 마찬가지고. ‘내가 너 공부시킨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한 달에 100만원씩 내놔.’ 이런 거. 그럼 자식은 더하죠. ‘어머니께 100만원이 뭡니까. 200만원 드리겠습니다.’ 이 짠돌이가 왜 이러지? ‘그 대신 애 둘 키워주세요.’ 이런 거. 애 둘 키우면 조선족도 250만원 받는다, 야. 가만있는 조선족까지 거론해요.

모든 관계가 더는 이용할 가치가 없기에 편하게 만나는 거예요. 서로가 그래요. 서로가 다 그렇게 거덜났어요. 왜냐하면 서로가,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서로가 하나님 앞에서 속은 자로 살아가다가 들통났다는 그러한 동창생, 그런 공유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누가 하느냐? 성령이 그렇게 하시죠. 너희들 다 죄인이야. 문제는 2분 넘었다는 사실을 내가 왜 몰랐을까.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30518b 요한일서 1장 8절(주체 박탈)-이 근호 목사
12.  "This is My commandment, that you love one another, just as I have loved you.
13.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one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14.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you.(NASB)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리고 말하기를 거기 나온 단어가 친구입니다.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 말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친구 될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말씀대로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사실,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 발생된 적이 없는 존재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친구가 새롭게 발생된 거예요. 예수님의 친구가. 그러니까 철저하게 예수님에게 종속되는 거죠.

그러면 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할 때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간격을 띄우고 분석하고 탐구를 했어요. 주님, 제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주시겠죠?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주세요. 어떤 거래를 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쑥 들어온 거예요. 뭐가?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와버렸어요.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오니까 이 말은, ‘예수님 내 죽음에 합세하면 비로소 나의 친구가 되고 그러면 사랑하라는 계명도 완성이 된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럼 이게 간격이 있는 사람 같으면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기 바쁘죠. 그렇게 도망친 사람이 누구냐?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마태복음 16장에서 분명히 이야기했는데(마 16:24) 막상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고 십자가 져버리니까 그 십자가에서 전부다 도망치기 바빴죠. 허겁지겁 다 내뺐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게 되면 속임에 대해서 독특한 개념 하나가 수입되어 있어요. 여기 마태복음 27장 64절에 보면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속임)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십자가 죽음으로써 속였다. 누가? 제자들이. 누굴 속였는데? 일반 대중들을 속이는 빌미로 십자가를 끌어당길 것이 분명하다. 십자가에다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끌어당길 것이 분명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인간들은 속지 않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 태세를 한 거예요. 군인들까지.

그러면 결국은 속지 않으려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으니까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하지 않았다면 인간들이 인간을 평가하는 이것은 옳았다, 가 돼요. 진리가 돼버려요. 그런데 문제는 이건 큰 도박인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해버리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속임수는 이 땅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은 그 인간이 얼마나 착한 일을 하고 바르게 하고 테레사 수녀처럼 남들을 구제해도 지옥 갑니다. 그 사람은. 왜? 속임수인지 아닌지를 본인이 판단할 능력도 없이 그냥 십자가 입장에서 볼 때 세상 자체가 십자가에 대적하는 속임수의 세계에서 그들은 못 빠져나오는 게 아니고 빠져나올 생각이 없어요. 전부다 한 통속이에요. 전부다.

사도들이 성령 받아서 스데반 집사나 빌립 집사나 사도들이 과감하게 외쳤던 이유가 있죠. 오기로 외친 게 아닙니다. 같잖아서 외친 거예요. 이 세상 전체 돌아가는 것이 같잖아서 웃기네, 하고 그냥 외쳐버린 거예요. 이렇게 하면 저들이 공격할 것이고 나는 어떻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거 필요 없어요. 세상 자체는 아예 전체가 속임수에요. 세상 자체는. 그들이 속임수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확연히 드러난 겁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훌륭한 게 아니에요. 제자들은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었죠. 제자들이 세상 권세에 대해서 도전할 정도로 그렇게 용감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 권세에 도전한 자들이 아니잖아요. 살기 바쁘지, 뭘 도전해. 내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뭘 도전해요.

그런데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가지고 일반 평범한 인간들인 사도들이 과감하게 이 세상이 속고 있다고 과감하게 외쳤습니다. 속고 있다고 외친 거예요. 마귀한테 속고 있다고. 바르게 살아라, 그 말한 게 아니고요. 훌륭하게 살면 천국 보내준다, 그 이야기한 게 아니고 근본적으로 속고 있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리고 요한일서 우리가 오늘 보는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너희들은 속고 있다는 거예요. 속고 있으니까 속고 있다는 사실만 알면 구원된다는 겁니다. 속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구원된다는 거예요. 왜? 속고 있는 내 뒷배경이 빛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빛 가운데 빛이 빛으로 드러나려면 어두움이 더 확실하게 어두워져야 돼요.

그렇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들 속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제자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른 거예요. 요한복음 9장 같은 경우에, 예수님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요한복음 9장을 예수님이 이야기했다 하지 말고 여러분이 말로 남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요한복음 9장 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렇게 하지 말고 “내가 가라사대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굉장히 말이 어렵죠. 너희가 소경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더 많아지느니라, 가 아니라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저 있다는 이 말은 너희들은 그냥 사는 대로 살면 내가 보장해줄게. 지옥 가는 거 보장해줄게. 그런 뜻이에요. 악마한테 속은 상태로 그냥 쭉 가는 거죠. 그냥. 그냥 가는 거야. 그냥 속은 채로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셨다 하면 우리는 뭐 그럴 잽이 되냐 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성령을 보내서 이제는 예수님의 말을 우리를 통해서 이걸 발설하게 만들어요. 왜? 네가 내 안에 있으니까. 나의 스피커가 되면 되잖아. 꼭 나만 이야기해? 너희들도 이야기할 수 있잖아. 성령 받았으니까.

“우리는 소경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아아, 마이크 테스트. 아이고, 마이크 잘 나오네. 우리는 소경입니다.” 이 말을 하라 이 말이죠. 우리는 속았습니다. 속았어요. 속았어요. 이 말을 여유만만하게 하는 거예요. 이걸 아주 뭐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 이것을 요한복음 13장, 15장에서 ‘사랑’이라 해요. 사랑.
사랑은 거리낌이 없는 거예요. 이거 하면 나한테 어떤 이익이 오고 이거 뭐 얼마하면 헌금이 들어오고 이거 지금 다 아니에요. 이렇게 하면 저게 화나서 나 패겠지. 패면 난 아프겠지. 아프면 내가 파스 발라야 돼. 이거 계산하는 게 아니고 그냥 거리낌이 없는 거요. 거리낌이 없는 게 사랑이고 같은 말이 뭐가 되겠어요? 같은 말이 ‘자유’에요. 자유의 반대말이 자율입니다, 놀랍게도. 철학에선 이걸 똑같이 봐요. 자율이 자유잖아. 아니에요. 자율은 내가 주체가 되는 거고 자유는 내 주체가 박탈된 걸 자유라 합니다. 새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게 자유에요. 추락하는 이유가 뭐냐? 날개가 있기 때문이에요. 아, 오랜만에 이문열 나온다.

지금 요한복음 9장 41절만 이야기했는데 이것을 확대해서 범위를 한번 넓혀보세요. 요한복음 전체가 다 그래요. 자, 그럼 요한일서 3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여러분한테는 유명한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유명한 구절이죠. 어느 정도 자율이 아니고 어느 정도 자유인지 한번 보세요. 3장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신나지 않습니까? 이게 자율로 하면 신나는 게 아니고 이거는 짐이 돼요. 아, 옆에 있는 김 집사가 돈 20만원이 없어가지고 부도나게 생겼는데 도와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아, 성경말씀… 갑자기 성경말씀이 왜 자꾸 기억나는 거야? 거저 주라. 거저. 평소에 생각 안 나던 성경구절이 왜 그 타이밍에 또 생각나는 거야.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 이야기는 왜 기억나는 거야. 미치겠어, 정말. 이거는 자유가 아니고 뭡니까? 자율이죠, 자율. 내가 생각해서 행동하는 거죠. 내가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

박 집사가 와가지고, 여기 박 집사 안계시니까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박 집사가 와서 “김 집사, 갑자기 애가 난치병 걸려서 수술해야 된다는데 200만원 없어? 200만원 좀 빌려주면 내가 이자 쳐가지고 돌려줄게. 좀 도와주세요.”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오늘 지금까지 공부한 걸 응용해봅시다. 이건 실제 문제에요. 이론이 아니고. 응용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그 응용문제에 대해서 마태복음 9장 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부담 느끼지 마세요. 성경에 응용문제랑 해답까지 다 나와 있어요. 이건 수학 정석보다 해답이 더 상세히 잘 되어 나옵니다. 2절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자, 여기에 친구들이 중풍병자 친구를 데리고 오죠. 여기서 비겁하게 새치기해가지고 지붕 뚫고 들어오는 대목입니다. 순서표도 안 뽑고 그냥 들어오는 거예요.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병이 나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뒤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네 병이 나았느니라’ 되어 있어요, 어떻게 되어 있어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박 집사 아이가 아플 때, 박 집사는 생각했어요. 수술하면 나을 수 있는데 돈이 없어 수술 못한다. 그럼 김 집사한테 돈을 빌리면 수술하게 되고 수술하면 병이 낫는다. 이게 뭐냐 하면 계획이죠. 생각을 한 거예요. 생각을.

그러면 돈 빌려달라는 말을 들은 김 집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와 네 아픈 자식의 죄는 사했느니라” 이러면 되는 거예요. 네 죄는 사했느니라. 확인 작업 들어가죠. 네가 자율로 하는지 자유에 의해서 하는지.

자유에 의해서 하게 되면 주님의 지시가 너에게만 오는 게 아니고 나에게도 지시가 내려지겠죠.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날 때 천사가 양쪽 다 갔어요. 한쪽만 간 게 아니고 양쪽 다 갔다고요. (행 10:9-33) 그래야 그게 자율이 아니고 자유가 돼요. 주체가 빠지니까.

그런데 박 집사가 어느 날 그분도 성령을 받아가지고 김 집사가 있는데, “요새 우리 집에 일 있다. 주께서 일을 일으켰어.” “무슨 일?” “우리 애가 불치병에 걸린 일이 있었어. 내가 생각하기에 걔는 처음부터 죽은 앤데 제대로 죽일 모양이야, 하나님께서. 그런데 고맙게도 수술비도 없네. 이참에 우리 애 일찍 가게 만들었어. 우리 딸 좋겠다. 난 뒤차로 가니까. 내 인생이 서글프다.” 이런 소리할 때 옆에 있는 김 집사가, “네가 나한테 그런 소리하는 거 보니까 애 살리라는 주의 뜻 같아. 얼마 필요한데?” “500만원.” “나 500만원 주고 나 내일 굶어죽을게.” 이래가지고 500만원 주면, 둘 다 지금 미쳤어. 둘 다 뭐 이상해.

둘 다 생각을 안 해요. 뭔가 뒤에서 원격 작용하는 거 같아. 어떤 움직임을 가지고 하는데 그 모든 대화가 나라는 주체를 제거하는 식으로 움직여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요한일서 3장 16절,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으니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

문제는 그런 형제가 거의 없다는 거예요. 기뻐해야 될 일인지 슬퍼해야 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목숨 바칠 형제가 거의 없어요. 왜?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 했으니까. (눅 18:8) “딸 죽었는데 축하 좀 해줘. 우리 애가 나보다 먼저 제대하게 되었어. 아휴, 난 언제 제대해?” 이런 식으로 자기 딸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온갖 인상 찡그려가지고….

그런데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했다고 해서요. 또 이걸 꼼수부리지 마세요. ‘애가 아픈데 저 김 집사 돈을 빌려야 되는데 김 집사는 복음밖에 모르지. 그럼 복음식으로 대응해? 어떻게 하더라? 참, 그때 서울강의에서 배웠잖아. 그걸 그대로 주고받아?’

이제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원하는 사랑은 바로 뭐냐 하면 병이 낫고 안 낫고가 아니고 ‘대화’에요. 기적적인 대화. 대화 속에 다 이루었다, 가 들어있는 대화. 네가 어떤 형편에 있든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 관계없이 우리는 다 이루심에 이미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대화로 주고받는 거예요. 대화로 그걸 표출하고 표현하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증인되는 겁니다.

이 대화를 요한일서에서는 ‘사귐’이라 해요. 사귐. 지금까지 사귐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사귐.

그다음에 두 번째 중요한 게 ‘속임’이라 했죠. 속임에 대해서는 민수기 22장을 한번 봅시다. 속임에 대해서는 두 군데를 보겠는데 하나는 민수기 22장이에요. 민수기 22장 21절에 보면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 배웠습니다. 여기서 주체가 누굽니까? 발람 선지자죠. 객체가 누굽니까?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누구에요? 나귀죠. 안장을 지우고 갑니다.

22절,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봤죠.

하나님을 먼저 본 사람이 그 현장에서 주체가 되는 거예요. 주체라는 것은 뭐냐? 주체를 빼앗길 때 이 세상에서는 주체가 등장하는 겁니다. 나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내가 어쩔 도리가 없는, 나귀가 생각하는 그 주체, 하나님이 조치한 상황 속에서 빼도 박도 못하고 꼼짝할 수 없이 나의 모든 생각과 계획과 의도가 박탈당한 상태, 그것이 이 땅에서는 주님이 일하시는 주체로 등장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그렇게 다루어졌으니까요. 마귀한테 시험 당할 때나 어떤 일을 할 때도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 뜻입니다.’ 하고 철저하게 아버지 앞에 예속된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 주체가 아버지한테 박탈당한 거예요. 죄의 몸이니까요.

심지어 마지막 기도할 때도 반드시 집어넣는 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가 주체인 것을 주여, 박탈해달라는 거예요. 그 기도였어요. 그게 겟세마네 기도죠. 그럼 우리가 평소에 하는 기도는,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내 주체가 박탈되도록. ‘내 인생이 어떻게 살아왔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결되어야 되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내 문제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해야죠.

남들 들었으면 ‘참 무책임하게도 세상에. 어째 사람이 저렇게 뻔뻔스럽게 무책임하냐?’ 그렇게 이야기하겠죠. 무책임하다. 이왕 무책임하다고 욕 들어먹었으면 더 심하게 이야기해야죠. 이번 일 내가 일으켰냐? 이번 일 내가 안 일으켰죠.

성경에서는 주체 박탈 사건을 구약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도피성 이야기입니다. 도피성은 살인자를 되게 만들어요. 살인자 되게 만들어서 살인자 된 상태에서만 구원을 이해하게 만드는 방법. 이게 도피성이에요. 의도치 않게 내가 살인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의도적으로 죽였다, 안 죽였다 관계없어요. 결과가 살인자에요. 나는 살인자에요.

담 밖에 누가 있는지 몰랐고 나는 나무 베기 위해서 도끼질했는데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서 공중 세 바퀴 반을 돌면서 옆에 있는 애가 타이밍 맞춰서 그 자리에 있기는 또 왜 있어. 맞아도 어깨 맞고 그런 게 아니라 하필이면 정통으로 급소를 맞아서 죽어버렸다 이 말이죠. 그 모든 경로, 행적, 알고리즘, 세 바퀴 반 도는 알고리즘은 누가 개입한 거예요? 누가 조정한 거예요? 주께서 조정했죠.

그럴 때 본의 아니게 죽인 사람은 본의 아니게 예수 그리스도의 억울함을 그 시대에 미리 맛본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죄 없으니 너는 당당히 맞서라? 아닙니다.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은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어야 되는 거예요.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일이, 라는 말을 너는 입에서 내지 마라.
그런 일 안 벌어지면 내가 주인공입니까? 아니잖아요. ‘원래 내가 주인공 아닙니다.’는 그걸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의도치 않는 일을 발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고집이죠. 고집이다 이 말이죠.

그럴 때 ‘그럼 저 살인자 된 게 억울하지 않습니까?’ 네가 억울해? 그럼 네 죄를 사하기 위해서 제사장이 죽어야 되는데 그 시대 제사장이 너보다 더 억울한데. 제사장은 도끼 구경도 못했는데? 살인자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 과정을 알 때까지는 이 도피성에서 못 빠져나와요. 빠져나오면 안돼요. 제사장이 나대신 죽을 때까지 스톱이에요. 그 안에 있어야 돼요.
그게 갇혀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탈출에 성공한 겁니까? 이 더러운 세상, 거짓말밖에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탈출하는 방법은 내가 죄인이라고 누명 받는 그 방법밖에 없어요. 예수님처럼.
그럼 우리가 죄 안 지었다는 말인가? 우리는요. 죄를 지어도 죽을 만큼 죄 짓지는 않아요. 죄라는 것은.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말로 때울 수 있는 죄를 지어요. ‘제가 죽어 마땅합니다.’ 말로 우리가 퉁칩시다, 이렇게 나와요. 죽을 만큼 죄를 지었습니다, 라는 말로 처리가 가능한 죄만 지어요.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처리가 가능한, 선악체제기 때문에 처리 가능한 죄를 짓지만 이거는 맹목적으로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죄는 우리가 우리를 평가하면서 그건 우리가 거부해요. 왜? 완전히 죄인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죄인 되는 것은 우리 속의 악마가 극렬히 반대하고 나섭니다. 반대해요.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니까 저를 전적 죄인으로 몰아세우지는 마세요.

한번 물어봅시다. 병원의 책임자가 누굽니까? 의사입니까, 간호사입니까? 간호사가 책임자에요? 누굽니까? 의사죠. 그럼 간호사는 누구 명령받게 되어 있어요? 의사 명령받게 되어 있죠. 여기 무릎에 있는 뼈가 전체 척추의 중력을 받잖아요. 그런데 탈골돼서 뼈가 중간에 튀어나오면 어떻게 돼요? 주저앉죠. 갑자기 정치적 발언해서 이거 큰일 났네. 수습이 안 되네. 간호사 폄하하는 게 아니고요.

이 세상 주체는 창조자는 주님밖에 없고 심판주는 주님밖에 없어요. 왜? 이유가 뭐냐? 잘나서가 아니라 모든 걸 다 아니까요. 전체를 아니까 그런 거예요. 우리는 부분밖에 모르는데. 부분을 아는 것이 뭘 자기를 평가해요? 전체를 아시는 분이 평가해야죠.

도피성에서 제사장이 도끼 들지도 않은 제사장이 살인 누명을 쓰고 죽음으로써 너의 누명도 풀렸다는 관계에요. 그러니까 그런 관계는 뭐냐 하면 이 도피성 밖의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그 세계에요.

결국 구원은 뭐냐? 탈출입니다. 탈출이 되지 않는 곳에서 탈출이 되게 하는 게 구원이에요. 주께서 우리를 한 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네가 이 땅에서 어떤 아픔을 겪었다고 위로하는 게 아니에요. 너는 네 죄 자체를 네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알거든, 네 죄를. 네가 ‘내가 뭘 잘못해서 죄입니까?’ 맨날 너는 그 소리하는데 그냥 죄에서 태어난 거예요. 죄에서 태어난 게 아니고 죄가 태어난 거예요. 말을 더 분명히 해야 돼. 죄가 태어난 거예요, 죄가.

물리적으로 철판에다가 모래 깔아놓고 밑에서 진동 1560Hz, Hz(헤르츠)라 하는 것은 1초에 진동횟수를 말하는 거예요, 1560Hz를 걸어버리면 철판 위에서 일정한 형상이 생겨요. 형상이. 진흙에다가 주님이 진동 걸어버리니까 인간의 형상 생긴 겁니다. 인간의 형상. 형상이 진동 멈추면 뭡니까? 도로 어디로 가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인간은 이미지거든요. 인간은 이미지에요.

그런데 악마는 이미지를 완전체로 만들어요. 인간은 그 자체로 고유하다고 너는 신이라고 그렇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선악을 아는 지식이 함유되었으니까 신답잖아, 라고 우리에게 합리화시킨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2장 22절에 보면 호흡을 취해버리면 진동 그쳐버리면 호흡 당겨버리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은 호흡에 있나니 호흡 당겨버리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도로 흙으로 가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야고보서 4장 14절에서는, 우리는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주님께서는 자기가 창조하신 인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하시는 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악마는 그 계획을 차단해가지고 인간은 끝까지 인간으로 밀어붙여야 된다는 거예요. 죽어서도 인간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죽어서는 내 인간 영혼이 가야된다고 우기는 거예요. 인간 영혼. 무슨 인간 영혼이 있어요.

죽음이라는 것은 뭔가 물질화된 게 아니고 관계를 이야기해요. 하나님 앞에 끊어진다면 끊어진 게 죽음이에요. 그래서 부자는 지옥 가도 살아 있잖아요, 부자가. 그러니까 잔소리하죠. 하지만 관계가 끊어졌으면 부자는 멀쩡히 살아서 죽게 되는 거예요. 차라리 죽어서 흙이 되면 속이 편하죠. 살아서 죽어버리면 이건 골칫거리에요. 영원토록 불의 고통을 당합니다.

그 사실을 아시고 주께서 “너 가만있어. 내가 알아서 다 할게. 네 몸 말고 내 몸이 완성을 시키지, 네 몸이 완성시키는 게 아니야.”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 몸을 인정하지 않는 게 믿음이에요. 주님 몸만 인정하는 거예요. 그게 주체가 빼앗긴 거예요.

그래서 민수기 22장에서 당나귀가 하는 말은 속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발람 선지자가 자기 당나귀에게 계약 위반을 제시했습니다. “법대로 하자. 너 내 종 나귀 되기로 했는데 나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가라 하면 가지, 왜 말이 많아?” 하니까, 당나귀가 하는 말이 “계약대로 했습니다. 평소에 내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이건 특별한 경우에요. 왜? 당신보다 더 센 주체가 등장했기 때문에. 날 때린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이 주인님.” 당나귀가 말하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현장에서. 집에 있는 개가 말해보세요. 기절할 거예요.

이사야 6장 13절요. 주께서 다 잘라버립니다. 이사야 6장 13절, “그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루터기가 말씀으로 교체되어버리는 겁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성전의 영광을 보고 난 뒤에 “누가 갈꼬?” 하니 “제가 가겠나이다” 했단 말이죠. (사 6:8) 제가 가겠나이다 하니까 이사야 6장 9절에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난해합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니까 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누가 갈꼬?”라고 했어요. “누가 갈꼬?”라고 하니까 이사야가 “제가 가겠나이다” 한 거예요. 이사야 뜻은 뭐냐? 누가 갈꼬? 제가 가겠나이다. 이때 이사야 생각은 뭐냐? 가라 했으니까 가면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낌새를 차리고 예측한 거예요.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라 해놓고는 뭘 구경하라는 말입니까? 네가 백날 전해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그 사실, 모든 인간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너희들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보내는 목적이다. 이유다. 그게 이유다 이 말이죠. 이사야는 바로 주님의 고난을 미리 맛보았던 거죠.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형제 만나는 것은 기적이에요, 이 땅에서. 복음으로 대화가 된다는 것은 이것은 횡재한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너나 나나 다 그리스도 안에 있구나, 하고 같이 얼싸안고 기뻐해야 돼요. 형제를 만나는 게. 둘 다 주께서 움직여줘야, 고넬료와 베드로 둘 다 움직여줘야 만날 수 있는 겁니다.

열왕기상 13장 18절 보겠습니다. 어떤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대로 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의하라는 말씀을 9절에서 이야기했어요. 13장 9절에서 “너는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당부를 했고 그 당부대로 합니다. 참, 어렵죠. 이름 없는 이 선지자가 주의 말씀대로 그대로 했어요. 자기가 엉뚱한 짓을 한 게 아니고 진짜 그대로 했어요.

했는데 여기서 뭐가 기다리고 있느냐? 13장 18절, 늙은 선지자가… 그러니까 사람이 늙으면 죽어야 돼. 지금 늙은 사람 없으니까 내가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아직 90된 사람 없잖아요.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이게 뭡니까? 속인 거예요. 원래 선지자는 그냥 가던 길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어요.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속임을 당해야 돼요. 지금 이게 위로가 되는 말인지 섭섭한 말인지 잘 분간 안 됩니다만, 자빠지고 엎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우리는 구원이 내 힘으로 안 된다, 가 아니라 아예 구원이 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 돼요.

내 속으로 어떤 꼼수를 부리고 성경말씀가지고 어떻게 이렇게 잘 조합해서 그것가지고 천국을 가겠다? 내가 아는 신학지식, 성경지식은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지, 내가 그동안 끌어 모았던 성경공부해서 정리했던 그런 성경지식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에요. 그럼 신학을 왜 하느냐? 속임수죠 뭐, 속임수! 그럼 신학하지 말까요? 해야지! 왜? 속임을 받으라고 존재하고 살아가는 게 나인데요.

제가 강의 처음에 했잖아요. 인간의 목적은 뭐냐?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것. 끝. 그뿐이에요. 수월하게 살고 싶으면 뭐 기도하든지, 라고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수월하게 살고 싶으면 기도하면 도와주니까. 중보기도하면 도와주니까요. 바로 이 땅에서는 모두가 짜가들이죠. 속이고 속는 세상~ 그런 노래도 나오잖아요. 디모데후서에도 나와요.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세상은 요지경~하고 흔들고 있는 간호사 있잖아요. 간호사 출신 가수. ‘세상은 요지경~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하잖아요. 그렇게 가짜라고 여겼던 너도 가짜가 되죠. 왜? 가짜라고 자기가 판단한 평가는 자기 자신에게 괜찮게 자기를 평가하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난 세상이 죄인 걸 안다. 그러니까 난 괜찮잖아. 이게 뭐에요? 주체가 그대로 있잖아요.

우리가 이제 요한일서를 통해서 하나 더 생각해야 될 것은 마지막으로 ‘빛’입니다. 빛. 첫째는 뭡니까? 사귄다는 것. 그것도 기적이고. 그다음에 속임. 우리가 속고 속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안 속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세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빛이라는 겁니다.

빛이라는 것을 제일 마지막에 둔 이유가 있어요. 빛은 없습니다, 이 땅에. 빛이 없는 이유가 이 세상은 어두움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빛은 이 세상 전부를 다 어둡다고 규정하면서 오실 때 빛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빛이 드러날 때 어두움은, 이게 어려운데, 어두움은 어둡기 때문에 빛을 빛으로 못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못 알아보게 되어 있어요. 빛은 없음이에요. 그러면 있음은 뭡니까? 어두움만 있음이죠. 주님께서는 이 있음의 세계에서 난데없는 없음의 사건들, 이벤트, 사건들을 여기서 일으킵니다. 이게 요한복음 다에요. 요한복음 다.

물은 물이다. 맞죠? 물은 물이잖아요. 사는 것은 사는 것이다. 맞잖아요. 물은 물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에 보면 물은 뭐가 됩니까? 포도주가 되죠. 그럼 이걸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사는 것은 곧 뭐다? 죽는 것이다. 이게 포도주 같은 복음이에요.

아, 내가 살다가 죽는 게 아니고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계속 살아야 되는구나. 사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는 악착같이 살고자 하는구나. 이게 어두움의 생리구나. 어두움의 속성이구나.

물이 포도주가 된다면… 요한복음 수련회 강의할 때 했어요. 처음부터 포도주 주면 되는데 처음부터 포도주 주는 게 아니고 물을 갖다 주고 난 뒤에 뜨니까 그게 포도주된 거죠. 처음부터 “네가 나를 믿냐?” “믿습니다.” “영생이다.” 이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 죽어 마땅한 이유, 지금 죽어도 우리는 원통하거나 분통하다는 소리를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대면서 영생의 길을 가는 거예요. 영생의 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없는 데서 생기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 요한복음 다 하겠다, 요한복음 4장에 물 길러와서 물 길러가는 것. 뭐 당연하잖아요. “어디 가느냐?” “야곱의 우물에 물 길러갑니다.” “네가 야곱인데? 네가 우물인데?” 이건 생각도 못한 거예요. 내 속에서 생수가 나온다는 것, 생각도 못했습니다.

내 속에서 생수가 나오는 경우는 주께서 내 죄를 날마다 의로 바꾸어줌으로써 그게 생수가 돼서 나오는 거예요. 날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왜 거품 같아. 왜 자꾸 의가 나와, 엄마.” 뭐 그런 자식도 없지만. ‘오늘은 5월 18일. 오늘도 하루 종일 의의 거품이 나온다. 맥주 거품인가?’ 뭐 이런 식으로. 자꾸 의가 거품이 되어 나오는 거예요. 거품이 돼서.

‘왜 자꾸 나는 내 뜻보다 주의 뜻이 강렬한가.’ 이런 식으로. ‘나 분명히 짬뽕 대신 짜장면 먹는다고 했는데 왜 하필이면 짬뽕인가. 왜 주께서는 내 주체의 뜻을 날마다 꺾는 것을 취미로 하시는가.’ 이런 거. 왜 내 뜻대로 안되는가.

주의 온전함, 주의 완전함이 계속 생수로 나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은 남한테 자랑거리가 못 되는 것이 본인이 나에게서 안 나온다는 것을 본인이 벌써 인정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자랑할 수가 없어요. 자기 망가진 것만 자랑하죠.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하잖아요.

‘내가 어디까지 망가질 것인가’ 이 말은 ‘어디까지 의가 나에게 왕 노릇 할 것인가’ 이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죠. 그러면 솜사탕 만들 때 뭐 넣습니까? 솜사탕 넣습니까? 그냥 설탕 넣죠. 설탕 넣어서 발로 페달 밟으니까 뭉게구름처럼 솜사탕이 생기잖아요.

왜 나는 죄만 넣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왜 나오느냔 말이에요. 왜 감사가 나오느냔 말이에요. 죄만 지었는데. 이 희한한 기계네. 의를 만드는 기계. 생수가 나오는 우물. 그것도 움직이는 우물. moving well? 생수가 나오는 우물. 움직이는 우물. 요한복음은 인간에게서 있을 수 없는 것, 나올 수 없는 것을 계속 연발 연발 주께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요한복음 5장 한번 봅시다. 지금 빛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5장 3절을 한번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5장 3절에 베데스다 못가죠. 그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리스트를 나열해보겠습니다.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있죠. 누워있죠.

그렇다면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유독 돋보일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어요. 그렇고 그런 환자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튈 어떤 의도가 없어요. ‘아이고, 아저씨. 몇 년 됐어요?’ ‘38년.’ ‘자리 양보할게요.’ 이런 거 없어요. 아픈 것도 자랑인가. 고참, 신참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거기는 전부다 먼저 다이빙한 사람이 최고에요.

그렇게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조건들로 봐서 어떤 조건도 하나님의 자비를 특별히 받을 조건은 전무합니다. 없습니다. 특징적인 것이 없으니까. 똑같으니까. 이게 뭐냐 하면 모두 다 어두움인 겁니다. 모두 다 어두움이에요.

나는 더 짙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거 없습니다. 더 많이 지은 죄인 없고요. 적게 지은 죄인 없습니다. 똑같아요. 모두 다 밤이기 때문에. 조명 시설 좀 있다고 덜 밤 그런 거 없어요. 밤에는 모든 것이 다 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래서 우리의 주체를 빼앗아가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뭔가 주체가 있어버리면 남보다 나를 더 우선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 찾아오게 되면 어두움은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이 어두움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내가 더 짙은 어두움이라고 더 많은 죄인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다들 똑같은 처지에 있었구나. 그런데 왜 특혜를 주시는 겁니까? 오히려 특혜의 기준에 대해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반응, 이것이 거저 주시는 사랑을 받은 사람의 표현방법이에요. 그리고 느낌입니다. 왜 하필이면 저를 이렇게 구원하십니까? 왜 하필이면. 주의 답변은 이거에요. 너를 통해서 이 세상에 율법을 가지고, 여기 안식일 나옵니다, 안식일가지고 자기가 안식일 지키는 주체인 줄 알고 얼마나 장난질 쳤는지를 내가 너를 통해서 보이기 위함이다.

보편화시키는 거예요. 죽음의 보편화. 어두움의 보편화. 그게 빛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보편화에서 건졌기 때문에 빛의 세계에 들어와도 특별히 더 빛을 쬐는 게 아니고 빛의 보편화 세계에서 자기만 돋보이는 식으로 하는 것을 성령이 가만두지 않고 허용하지 않습니다. 너만 은혜 받았냐? 너만 영생 받았어?

그러니까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나라는 것, 내가 스스로 나에게 특혜 주는 나는 천국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럼 내가 내 특혜 포기할게, 이런 인간은 없으니까 성령께서 좀 바빠요. 많이 바빠요. 똑같다는 사실을, 죄 지은 것도 똑같고 구원받은 상태에 돌입해도 너는 똑같고.

다만 여기는 너라고 하지 말고 우리라고 해라. 우리. 우리들이 구원받은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 이게 바로 사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누구 사귈까요? 기다려봐. 주실 거예요. 안 주면? 안 사귀면 되지. 뭐 배짱이에요. 이미 구원받았는데 꼭 굳이 사귀어야 돼요? 그런 사람 등장하지 않으면 안 사귀면 되죠. 굳이 교회 나가서 어깨동무해가지고 뭐 사랑하는 형제여~ 하면서 우리 교인 몇 명 나왔어? 오늘 교인 몇 명이야? 등록교인 몇 명이야? 그렇게 우리를 조작하지 말란 말이죠. 내 팬 관리, 나 좋아하는 사람 몇 명, 팔로워 300명… 아휴, 진짜 끝내야 되겠다, 강의. 왜 자꾸 그 짐 되는 주체, 내가 나를 평가하는 그 악마적인 것으로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르는 그런 짓, 나를 잡는 형사…

이제는 이미 성령한테 잡혔어요. 범인으로. 몇십 년 전에 부산에서 빨래 훔치는 범인이 잡혔어요. 기자들이 막 사진 찍는데 고개 푹 숙이고 이렇게 나왔어요. 누구냐 하면 원숭이에요. 원숭이가 빌라 돌아다니면서 빨래 훔쳤는데 잡혔을 때 사람 흉내를 내는 거예요. 꼭 범인들 검찰청에 소환될 때 고개 푹 숙이는 것처럼. 자기가 사람이라고. 우리는 사람도 아니고 원숭이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로부터 잘못 받아가지고 우리 자신이 뭔가 대단한 양 여겼습니다. 십자가 믿어주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십자가를 방해하는 자가 나라는 고백을 통해서 구원되었다는 사실. 주님의 구원이지, 나의 구원이 아닌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