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싸움
공간 싸움
2023년 5월 17일 본문 말씀: 학개 1:1-6
(1:1) 다리오 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1: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1:4)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1: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사람이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겁니다. 무슨 의미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의미가 있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살다 죽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발 날 건드리지 말라. 그냥 내버려둬”라고 호소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전’과 나랑 무슨 상관이 있으며, ‘여호와’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이나 교회에서 뭐라고 말해도 그냥 살아가는 이 살아감에 대해서 일체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무의미한 인간 삶에 복음이 전해지만 이때 본능적으로 인간은 복음에 대해서 적개심을 나타내게 됩니다.
사람들이 말씀 전하는데 나오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따로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나는 그 어떤 상황이 들이닥쳐도 ‘그래도 내가 사는데 치중한다’라는 마음에 변함이 없이 초지일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기거하는 땅이 어떤 땅이냐?”라고 말입니다.
창세기 3:17-19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인생이란 징벌적 차원에서 지내는 기간입니다. 벌받고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것은 이 땅이 인간이 정당하게 살려고 제공된 땅이 아니라 도리어 왜 땅에 사는 인간들이 필히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는, 하나님의 의미가 제시되는 곳이 땅이라는 겁니다.
그 의미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너희들은 왜 하나님께서 성전을 자진해서 불타버린 줄을 아느냐. 둘째는, 성전을 다시 지어라는 이유를 아느냐, 셋째는 너희들이 성전 지어라는 것을 지체하는 이유는 아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불태우시는 이유는, 모든 전체 의미가 성전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이 땅에 살면서 아무런 의미없이 살아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의미를 다 쥐고 계십니다. 그것이 성전에 근거하고 있는데요, 이 성전을 출처로 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 쏟아진 율법에 의해서 인간들은 계속해서 죄가 밝혀지게 됩니다. 그 밝혀진 죄에 의해서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징벌 받는 것이 참으로 합당함이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간들은 그 땅에서 호화롭고 안일한 자기 집 짓기에 빠져서 성전 건축에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곧 자기 만의 사적인 공간을 따로 챙기며 삽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양의 죽음이 어떻게 죄사함이 되는지’ 전혀 이유를 모릅니다. 어린양의 죽게 되면 하나님의 의미를 함축한 새로운 공간이 발생됩니다.
이 공간이 인간들의 개인적인 공간을 덮칩니다. 왜냐하면 사적인 공간은 하나님의 의미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불태웠다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에게 행하신 가혹은 자기 징벌입니다. 바로 이 의미만이 성전 존재에 담긴 궁극적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에 보면,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정이나 의리로 통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미와 관심사는 오로지 아들에게만 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 전체 의미로서 인간들의 사사로운 의미를 뭉개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은 가혹한 하나님의 폭력성입니다. 이 폭력성은 받게 되면 이는 더는 개인적 의미가 하나님의 전체 의미에 전혀 통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9:5-6에 보면,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구원을 받겠다더니 혹은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불쌍히 여겨달라하시면 불쌍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좁은 개인적 아지트를 다치지 않을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삭개오는 본인이 구원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원이 자기 공간에 쳐들어와서 더는 그에게 자기 공간이 없이 되어버린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모래가 깔려 있음을 모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따라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은 욕을 한다고 비난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렘 6:10) 욕을 얻어먹는 그 길이 천국으로 인도받는 길입니다. 자기 아지트가 망가지지 않고 개방되는 나의 아지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형성한 공간이 바로 성전입니다. 이 공간으로 인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의미로 덮여집니다. 자기 공간이 다 망가려고 버티는 것이 바로 자기 의(義)입니다. 이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로 덮혀져야 합니다. 약속의 땅의 70년이라는 기간은 곧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기간입니다.(대하 36:21)
이 성전이 없이 무너져버린 사태가 하나님의 폭력적인 심판이 생생하게 살아있게 되는 땅의 본래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므로서 이 세상을 향해 가혹하게 심판하시는 땅의 본래의 취지를 드러내시려고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의 공간이 어린양의 취지가 계속 살아나는 공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학개 1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다리오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찌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찌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찌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찌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오늘 본문은 인간이 산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일함이 수월하게 좋게 만나지 않는 형편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사람은 그냥 사람 사는게 뭐냐? 사람 사는게 그냥 사는거지요. 그거는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냥 사는거죠. 거기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뭐 의미있다고 더 잘 사는 것 아니잖아요.
아침에 눈떠서 일하고 직장가고 집에오고 애 뒷바라지하고 키우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냥 사는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이 찾아오게 되면 인간속에서 어떤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요. 그게 뭐냐하면 사는 것은 아무의미 없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일이나 복음이 전달되게 되면 갑자기 적대적 의미가 우리 인간쪽에서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시기가 되었다” 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사람들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드느냐하면 “하나님의 전하고 나랑 무슨상관이있는데?” 이렇게 돼요.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 1장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에 이렇게 돼있죠. 여호와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우리는 그냥 살아요
여호와하고 아무 상관 없습니다. 여호와까지 신경을 못써요. 사는데 신경을 거기다가 전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말씀이 우리하고 상관없듯이 학개하고 무슨상관이 있으며 여기 1장 1절에 이 다리오왕 아저씨는 무슨 아저씨인지 내가 왜 굳이 이 아저씨까지 챙겨야되느냐? 거기에 1장 1절에 보면 유다총독 스룹바벨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 이분들하고 내가 사는데 애들 키우고 사는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 말이죠.
그게 뭐냐하면 제가 말한 적대적 반응을 나타내게 돼있어요. 그냥 사는건 인간이 사는건 의미없어요 그냥 살아요. 사는데 성경말씀이나 복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게되면 사람은 그것이 나를 공격한다고 느껴져요. 나를 공격하는. 가만히 있는데 나를 시비거는 것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인간은 그 복음이 옴으로써 인간은 그냥 “사는건 사는것이다” 라고 말들하지만, 실제로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공격 성향을 가득하게 담고 살아간다’ 라는 것이 말씀을 맞닿으면서 말씀을 만나면서 그게 들통이 나버립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귀신 들린 청년이 있을 때, 그 귀신이 그 예수님 앞에서 참으로 우리 인간의 본심을 본성을 그대로 다 보여줬습니다. 예수여,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심지어 주일날 교회에 나와도 우리의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 자식하고 나하고 상관있고 내 남편과 아내는 상관이 있는데 ‘예수하고 나하고 무슨상관이있다고. 나는 살기 바빠. 제발 사는데 좀 간섭하지 말라고 복음가지고 시비걸지 말아주세요. 당신과 나와 그다지 그 깊은 관계 아니에요. 나는 당신과 별 큰 상관 없습니다.’ 라는 생각이 꾸준히 우리의 내부에 자리잡고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 전하는데 왜 안 나오느냐? 사람들이 왜 말씀 전하는데 나오지 않는 이유가 뭐냐하면 내가 있을 곳을 따로 정해놨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있을 곳. 그런데 오늘 본문 내용이 그거에요. 니가 있을 곳은 없다는 거에요, 오늘 본문 자체가. “니가 있다니, 어디에?” “저는 이땅에서 삽니다.” “그 땅이 누구땅인데?”
너는 그 땅에서 너는 징벌 받아야 돼.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뭐 서울이든 대구든 터 잡고 산다는 것은 너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해요. “너 지금 징계받고 있는거야. 너 이제 벌 받고 있는거야. 너 지금 산다는게.”
이게 벌인 줄 알고 살아가는게 아니고, 살아가면서 아무 사는게 의미가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징벌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에요. 나이만 먹어요. 관절만 안 좋고, 어깨만 아프고 높은데 가면 피곤해가지고 갓바위만 올라가도 헥헥 거리고. 사는게 우리는 그냥 내버려도 좀 건드리지마 조용하게 살게. 그런데 이 조용하게 사는게 징벌이에요.
망가지거든요. 하나님의 오늘 본문의 뜻은 간단합니다. 그 땅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땅이에요. “그 성전이 있는 땅에 성전에서 뭐가 나오는지 알아? 율법 나와. 율법 왜 나오는지 알아?” 율법이 율법 위반작용 작업을 인간을 대상으로 해왔던 겁니다. 성전이 있고 성전에서 율법나오고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가면서 너는 왜 이 땅에서 저주 받고 죽어서도 저주받아야 될 이유를 성전에서 나온 성전이 원천이 되어서 나온 율법이 찾아가서 그들을 그들에게 고발하고 있는거에요.
니가 안일하게 그냥 사는건 사는것이라 하면서 끊임없이 너는 나의 분노를 유발하고 있다. 하나님의 분노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 세상의 전체를 다 보고서 나온 분노에요. 근데 그 하나님의 궁극적인 전체. 하나님의 전체가 어디에 집약돼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에 집약돼있어요. 이 땅은,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약속의 땅은 성전을 짓기 위해서 하나님이 터잡은 곳이에요. 그것을 약속의 땅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신명기 11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니가 들어가는 그 땅은 내 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주할 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인이 살만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자꾸 오해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나 그 땅은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히 거주할 땅으로서 약속의 땅을 터잡아 놓은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했는데 그 성전을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불태워 버렸어요. 하나님이 자진해서 불태워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폭력성입니다. 단호한 폭력성
하나님의 성전을 불태웠다는 것은 성전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만남의 장소에요. 만남의 장소를 불태웠다는 말은 너희들은 이 땅에서 살 권한이 없다. 나가라. 이말은 뭐냐하면 과연 처음부터 애초부터 인간은 땅에서 살 권한이 있었느냐를 하나님께서는 묻는겁니다. 너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땅에서 살 때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니까 마치 너희가 살 권한이 있는것처럼 그렇게 오해하는데 창세기 3장에 보면 그 땅은 인간이 살기 위한 땅이 아니고 인간이 저주받아야하는, 저주 받기위해서 거주하게한 땅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사람이 한때 살았지만 남는 것은 흙으로된 땅밖에 없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 “니가 한때 70이고 80이고 90이고 한때 살았냐? 니가 살았던 그 죽고난 뒤에 니 뒷자리에 한번 뒤돌아봐 그 자리에 흙있다. 땅있어. 너는 없어”
저주가 뿜뿜 뿜어나오는 땅에 너는 거기에서 잠시 몇십년 살아온거에요. 연금받고 국민연금받고 몇 년 산거에요. 그래놓고 인간들은 말합니다. “내 그냥 조용하게 살게 좀 건드리지마. 내 복음이고 다 귀찮고 학개? 뭐 학개하고 나하고 무슨상관인데. 여호와? 여호와 무슨상관이 있어요. 예수? 예수하고 나하고 무슨상관이있느냐”
나는 나와 상관있고 내가 평생토록 터 잡은 내 아지트 내 집과 상관이 있다는 겁니다. 그 집이 어디에나오느냐 오늘 본문 1장 4절에 나옵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판벽한 집이라는 것은 호사스럽고 안락한 자기 집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오늘 본문 내용은 뭐냐하면 사적인 공간과 하나님의 공간과의 싸움 투쟁에대해서 언급하고 있는거에요. 인간은 성전의 의미 성전이 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기 위해서는 땅 위에 그게 하나님이 땅에 주어진 의미거든요. 의미인데 인간은 하나님 쪽에서 주어진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내 집 짓고 내가 사는데 그게 하나님 니가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나와요.
하여튼 하나님의 분노를 아주 자극을 해요. 성경 전체에 내용을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겁니다. ‘하나님의 피에 대해서 모욕하면 하나님이 가만히 있는줄 아느냐?’ 이게 성경의 주제입니다. ‘내 아들의 피에 대해서 모독해놓고 니가 살기를 바래?’ 이거에요.
히브리서 13장 모세가 있었던 그 시내산도 이렇게 두렵고 떨리거늘. 그렇게 돼있고요. 히브리서 10장 28절에 보면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라고 돼있어요. 이 대목에서 히브리서 10장 28절 29절 말씀드리는데요. 28절에서 여기에 정말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이 말은 구원 받고자 하는게 죄라는 것이에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 “니 무슨 권한이 있는데?” 니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불쌍히 여겨주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다른데 있다고요. 인간이 이땅에서 사는게 의미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의미는 성경에서만 나옵니다.
의미는 성전에서만 나오고 하나님의 이름, 성전에서만 나오고, 그 성전에서 나와가지고 의미도 없는데 자기 땅에 터잡고 산다고 의미있다고 여기는 그 의미에 그것을 죄로 규정하고 거기에 징벌을 내리는 그 하나님의 작업만이 의미있는거에요.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것, 참 뻔뻔하기 짝이 없는거에요. 니가 뭔데 불쌍히 여겨요.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냐 안 여겨주냐 기준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언약의 피 아들의 언약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불쌍히 여길자는 불쌍히여기고 그렇지않으면 불쌍히 여기지 않아요.
지나개나 소나개나 다 불쌍히 여기는 것 아닙니다. 언약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아들의 언약의 피에 있어요 그 피를 모독하는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지 않아요. 가만히 있지 않는 하나님. 분노하시고 저주하는 하나님. 제대로 매섭게 참혹하게 심판해주시는 하나님. 그게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자기 아들의 피를 모독하고. 자기 아들 피로 모독한 사람 대라하면 전두환, 노태후, 윤석열 다 마찬가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게 빈말이 아닙니다. 다 학개 구약 말씀에 근거한 거에요. 근데 아까도 말한 인간의 뜻은 이땅과 성경내용 관심 하나도 없고요, 교회 가도 성경 없고 교회 예배 참석해도 관심없고 관심은 뭐냐하면 “나 그냥 살래 좀 건드리지마 가만좀 놔둬 그냥 살래 나 사는것도 힘들어죽겠어 그냥 살래”
“실례지만 사는게 뭐 의미있습니까?” “아이고 의미도 나는 몰라 나 의미 그런 골치아픈 그런것도 안찾아 그냥 살래. 애키우고 그냥 내 목숨다하는데까지만 살래.” 인간은 그 자체가 의미가 없으니까 그 자체가 파괴되고 있는 중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파괴해요.
우리집 하고 잘 아시는 분이고 십자가마을에서도 열심히 복음알고 공부하고 복음알고 그리고 말씀 늘 생각하는 사람. 30대 후반인데 애 하나 놓고, 남편하고 헤어졌는데 있었다 이말이죠
그런데 나 없을 때 제 아내한테 찾아와가지고 하는 말이 이쁜 핀을 들고와가지고 “사모님 저 이 핀 열쇠 이 핀 이쁜 핀이 시중에 대박 떴는데 그 도매상 이 핀을 도매상 파는데 같이 일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찾아 온 거에요. 제 아내가 얼마나 화를 냈는지...... 내가 어디 나갔다가 그 이야길 듣고 미국에서 총기 규제 안한 이유를 알겠어요. 진짜 총있으면 그 뭐고 그 여자 쏴 죽이고 싶었어요. 그 배신감.
복음이 어떠니, 십자가가 어떠니 이렇게 해놓고, 막상 애 하나놓고 사는게 힘드니까, 혼자사는게 힘드니까 이거 핀들고 와가지고 이것 같이 도매급으로하면 대박나는데 이 이야기 하고 있는 거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지금 이 내용보다도 누구야, 그 사람 누군데 그게 더 궁금할 거에요. 어제 꿈이였습니다. 어제 꿈에 너무 생생한 거에요.
그 복음을 모독하는 어린양의 피를 모독하고, “그건 다 아는거고 믿고요, 그 믿더라도 살기는 살아야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할 때, 아, 그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동일한 배신감에 치를떠는 주님의 말씀이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 있는 땅을 성전이 있는 그 땅에 성전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불태워버렸어요. 이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에게 가혹한 징계를 내려버린거에요.
그게 성전의 의미입니다. 그 성전의 의미가 이렇게 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약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뭐 이렇게 여러분께 묻는다면, 양 잡으면 죄가 사해진다? 이게 말이 됩니까? 양 잡으면 내 죄가 사해진다. 다음중 어느것이 맞는 답입니까? 1번 양잡으면 양고기 맛있다 2번 양잡으면 맛있는 양먹으면 배부르다 3번 양잡으면 보신한다 4번 양잡고 고기먹으면 내 죄가 사해진다 몇 번입니까?
근데 이 말은 뭐냐하면 아이고 그냥 살래 하는 사람한테는 어린양이 죽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에요. 상관없다는 말은 “세상죄 진 어린양 믿으면 용서받겠지”라고 생각 하는데 그리고 관심은 지 밥먹고 사는데 관심이 있어요. 성경이 그런내용이 있느냐 이말이죠, 즉 믿습니다 해놓고 밥먹고 사는데 관심이 있어요. 어떤 원리로 어떤 논리로 어린양이 죽었는데 왜 당신의 죄가 사했는지 논리로 설명해보라 하면은 뭐 관심이 있어야 설명하죠.
관심도 없어요. 믿으라하니까 믿습니다하는 것 그걸로 다 때워 버렸어요. 몰라요 도대체. 정답은 이렇습니다. 어린 양의 죽음으로서 하나는 새로운 공간이 마련됩니다. 이 새로운 공간은 기존에 내가 이땅에 태어나면서 내가 평생 일구어낸 내 공간이 있어요. ‘내 거주지가 내 집이 있다’ 이 말이죠.
오늘 여기 본문 말씀에 ‘판벽한 집’ 멋진 집 화려하고 좋은 집이 있어 안일하게 쉴 수 있는 집이 있다 이말이죠. 그런데 양이 형성된 양 죽음이 형성된 공간이 내 아지트를 뭉게 버리고 부셔버려요. 이유는 단 한가지 그게 사적이라는 거에요. 개인적이라는 거에요. 그게 나의 이름과 관련돼있다는 거에요. 주님은 어린양의 죽음은 이 우주 세상 전체를 궁극적인 전체를 다 고려한 의미가 나오는데 인간이 이 땅에 살면 내가 한평생 애 키우고 잘 먹고 잘살진 않았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나의 의미가 나온 아지트에요. 집이에요.
누가복음 19장에보면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네 집, 삭개오야 너희 집에 내가 유할게. 너희 집에 내가 유할게.” 이것은 전체 의미가 삭개오라는 사적 의미를 뭉게버리고 그걸 접수하는 거에요. 전체 의미가 전체를 모르는 개인적인 나만의 의미를 강탈해 버리는 겁니다. 쳐들어온 거에요.
그래서 이 성전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사적인 의미를 사적인 공간을 거처, 처소를 용납하지 않고 그것을 부셔버리는 그 작업이 성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학개 이야기가 그거에요. 첫째는 ”너희 성전 부서지는 이유를 아느냐?” 두 번째 “내가 성전 지으라고 했지?” 세 번째 “너희집에 안일하게 너희 거처 자기 생활한다고 성전 짓는걸 너희들은 지체하고 있잖아” 이 세 개에요. 첫째는 성전을 부서지는 이유를 아느냐? 두 번째,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자기 집만 안일하게 있는거에요. 세 번째, 내가 재촉하는 이유를 아느냐. 이게 오늘 이야기에요.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 집이 있다는 그 자체가 전체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를 지금 모독하고 있고 하나님이 분노하고있는 이유라는거에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오늘도 자꾸 되풀이하게 되는데 어린양이 죽었다는 것은 어린양이 죽어서 생성된 새로운 공간이 있어요. 어린양이 죽은 것은 세상 죄를 지고가서 죽은거에요. 그러면 어린양의 공간 그 공간의 의미를 위해서 세상에 뭐가 자꾸 만들어지느냐 하면 세상 죄가 만들어져야돼요.
그런데 인간은 뭐라고 하느냐하면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피땀흘려서 열심히 살았는데 이게 무슨 죄냐’ 이렇게 해요. 성전에선 율법이 나오고 율법에선 죄 아닌게 없는데 인간은 내가 열심히 하루하루 사는게 이게 왜 죄냐고 나서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주님의 분노를 유발해가지고 주님께서 ‘다시는 니하고 같이 안 산다’하고 성전을 불태워버렸어요. 하나님이 자진해서 성전을 폭파시킨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폭력성이에요.
아 하나님의 성질이 굉장히 까칠해요 굉장히 폭력적입니다. 폭력적인 예를 한번 들어드릴게요. 열왕기하 2장 23절에서 25절 제가 한번 읽어볼 태니까 하나님이 어느 정도로 폭력적인가 정말 성격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그러니까 엘리사가 설교하는데 막 떠드는것하고 똑같은거에요. “대머리야 올라가라” 그아이들이 뭐 무슨 설교 의미를 알겠어요. 그러니까 대머리만 눈에 확 들어온 거죠.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암컷 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그냥 구타해서 죽인 것이 아니고 찢어죽였어요.
여러분들이 여호와를 기피하고 예수를 기피하는 이유가 너무나 성격이 인간의 성격과 융화될수 없이 난폭하고 폭력적이라서 무서워서 기피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런 무섭고 난폭적인 하나님을 받을 때는 그 하나님을 대할때는 간단해요. 처분만 내리소서 하고 이러면 되는거에요. 참 쉽죠잉.
암콤을 보내든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보내든지 안그러면 악어를 보내든지 뭘 보내도 찢을 만 하시면 찢기도록 머리 내밀면 돼요. 왜? 사는게 죄고 구원받고자 하는게 그 자체가 죄기 때문에. 왜 너무나 사적이기 때문에. 전체를 모르고 개인적인 이득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은 암콤이 찢어죽여도 할말이 없는 그런의식으로 살아가는거에요.
우리 안에 선악지식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선악지식이 있기 때문에 이거는 이미 주님께 선악지식 겨냥해서 “이거 니가 그거 왜 알아야 되는데?” 하고 공격적으로 나오시는 거에요. 우리안에 있는 선악지식을 우리가 빼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니 아지트를 개방해라. 아까 말씀드린 처분만 기다리는거에요. 아지트를 개방해라. 그럼 우리는 아지트를 이제 개방할 여호와니깐 아이 뭐 개방하자. 문제는 개방하면서도 자기 아지트를 안 다치고 흠집 안잡히는 조건 하에 자기아지트를 개방하려해요. 청소 깨끗하게 해놓고 정돈해가지고 주님 오실 때 아이고 착실하게 사는구나 아이고 훌륭하게 사는구나. 이 선악체제에서 칭찬받기위해서 그게 뭐냐하면 주님의 화를 더 돋우게 만들어요. 그게 자기 의이기 때문에.
나의 아지트와 주님의 아지트의 성전 공간의 싸움이라는 것은 나의 의와 주님의 의의 싸움이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자신의 의를 가지고 우리 의를 공격할 때 결국 우리에게 뭐를 기대하고 어떤 현상이 일어나기를 원하느냐 하면 우리가 나의 터전 내가 나의 바탕 다시말해서 모래와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26절에 보면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게 모든 인간의 바탕은 이 모래가 있어요. 헛되고 헛된 모래. 이 모래와 나와의 만남. 그걸 만남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뭐만 날려야 되는가. 그냥 욕만 해야되죠. 욕만. 우리를 욕설만 해야돼요. 그게 예레미야 6장 10절에 나옵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뭐 말씀하고 복음전하면 전부다 자기보고 욕한대. 그런데 그 주의 뜻은 그거에요, 욕을 먹는 그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에요. 그 다른길은 없어요. 욕 얻어먹고 가는 길이 천국 가는길이에요. 성령의 객관적 사역에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는 거에요. 왜 우리가 자꾸 욕을 얻어 먹어야 되느냐? 돌아서면 사적인 이익과 사적인 나의 잘남이 어느정도로 잘난지 그것 챙기는데 본능적이기 때문이에요.
주께서 우리아지트에 들어와서 우리 몸에다가 무슨 장치를 하느냐하면 시한폭탄을 장치를 해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소리가 들려야됩니다. 째깍째깍. 나중에 죽으면 펑. 하루를 살면 하루 사는 만큼 째깍째깍 계속해서 죽음을 재촉하는 그 소리, 그리고 거기에다가 주께서는 성전의 의미를 제공합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율법, 성전에서 나오는 말씀, 니가 왜 죽는 이유를 아느냐? 니가 죽는 이유를 아느냐? 니가 있는 그땅은 이스라엘을 너희들을 대표해서 이스라엘이 이미 그걸 나와 체험을 했는데 그게 뭐냐 70년 징벌받는 땅이 돼요. 징벌받는 땅. 약속의 땅과 그리고 70년이라는 시간 이걸 합쳐서 성전이 왜 파괴되었는지 그 의미와 이유를 밝혀주시는 겁니다. 여기 오늘 학개에서 성전 너 왜 자꾸 지체하느냐 이렇게 하는데 BC586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잡혀가요 바벨론에. 그리고 난 뒤에 516년에 성전이 완공이 됩니다. 그전에 진작 536년에 20년전에 진작 완공을 해야되는데 그때 고레스 왕이 여호와의 지시 본인은모르죠. 여호와의 지시에 의해서 고레스 왕이 바벨론 다음에 바벨론 무너지고 느부갓네살 무너지고 그다음 나라가 페르시아 바사나라에요.
그 바사나라에 고레스 첫 번째 왕이 고레스왕인데 그 고레스왕이 이상하게 유다나라에서 뭐 다른민족도 마찬가지지만 너거 여호와 섬기는데 성전지어야지 라는 제안을 해요. 그게 그 사람이 돌았나 왜 그런 남의 종교까지 이렇게 신경을 쓰냐 하는데, 이사야 44장 28절에 보면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이말은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권세를 다갖고 있거든요. 그 주님께서 게세마네 기도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와 있는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다 주셨다는거에요.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권력자의 권세를 다 쥐고 있으면서 오직 자기 백성에게만 영생이 주어지도록 권력이 조정단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적절할 때에 그들이 어떤 행위를 취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일은 예수님 안에서 아니고가 없고 예가 되는 거에요. 어떤 것 하나. 자기 백성에게 영생이 돌아가도록. 이렇게 되면 영생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에요. 주님 본인 숙제에요. 이걸 믿음이라 하는 겁니다. 내 믿음에서 내가 떠나는 것, 이게 믿음이에요. 내 믿음에서 손을 놓는 것 이걸 믿음이라 해요. “내 소관 아니고 주님 소관이지” 이걸 믿음이라고 하는겁니다.
믿음이라 하면서 내가 믿고자 하는 것을 이걸 행함이라고 하는거에요. 다시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체에서 어떤 의미가 나오질 않습니다. 의미는 바깥에서 주님으로부터 제공 되는거에요. 주님께 쓰여져야 의미가 되는겁니다.
그 성전을 재건하라 했는데 재건 하라는 이 말씀을 한번 들어보게 되면 성전을 주님께서 부셔버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성전이 재건하라 이 말은 그전에 니가 성전 부서진 이유를 아느냐 이 말씀하고 똑같은 말씀이에요.
역대하 36장 21절 23절에 보면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돼있어요. 예레미야 25장 11절에 바로 이 예언이 나와있어요.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이렇게 돼있거든요. 자 이 대목을 설명할 차례가 왔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뿌리와 만나야돼요. 제가 아까 자기의 모래 우리가 한평생 산게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 했죠. 우리 자신이 반석이 아니고 모래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우리가 모래 위에 지은집에 사는거에요. 그냥 사는거. 그게 모래 위에 집을 짓는거에요 모래 위에. 하나님 말씀과 아무 상관도 없어요. 말씀을 그렇게 분노를 유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야되는겁니다. 그런데 그 사는 땅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땅이 성전을 짓기위한 땅이지 인간 살려고 준 땅이 아니에요.
그러면 성전 짓기 위해서는 한쪽은 성전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어줘야 됩니다. 죽어줄 때 그냥 죽어주면 안되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오는 율법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죽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 사사 입다는 자기 뿌리가 자기 딸이 자기의 뿌리에요. 처녀가 시집도 못가고 억울하게 죽는 아버지의 객기 때문에 죽어버리는 허무하게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그 딸이 진짜 자기 모습이에요.
아브라함의 뿌리는 뭐냐 이삭입니다. 죽어야될 내 때문에 죽어야될 그 죽음을 안고가는 아들이 바로 나의 허무한 나의 모습이에요. 불타버리는 성전이 내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그 70년이라는 그 기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우리가 그 약속의 땅의 백성이면서도 살지를 못하고 추방돼서 바깥에 하나님의 약속도 없는 이방나라에 쫓겨났다. 그 상태가 하나님의 안식이 가리워지지 않고 모독받지 않는 그 상태를 두고 얘기하는겁니다.
바로 느그들 나가니까 봐라 내가 70년동안 땅이 안식하잖아.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동안 우리가 본의아니게 우리가 산다는 이것이 주님의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거에요 지금. 주님의 분노를 유발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거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앞으로 잘 살게요. 이렇게 나오면 그거는 더 화를 돋우는 거에요. 내가 잘 살게요가 아니라 나라는 것이 전체, 전체가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에 덮혀버리면 돼요. 전체 의미의 일부로서 그 전체를 전체로 드러내는 그 의미를 우리가 일부로서 드러내는거, 또는 증거하는 거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이유입니다.
나는 의미가 없어요. 주의 의미에 소속된게 바로 우리가 성전의 사람. 이 땅이 존재하는 이유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언약 안의 사람이 되는겁니다. 그러니까 학개에서 전을 다시 개축하라. 성령께서 하시는거에요. 다시 짓는거에요. 왜? 우리 힘으로 못지으니까. 우리 힘으로 지을 재주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처음에는 이것 내 인생이다 라는 이것을 이젠 ‘내 인생이 사라지고 주께서 성전 짓는 주의 틈이다. 주님의 틈이다’ 하고 내놓으면 돼요. 그게 바로 나의 의가 주님의 의에 의해서 잠식당하고 덮어지는 거에요.
끝으로 삭개오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집이 있어요. 근데 뽕나무 올라가가지고 눈이 딱 마주쳤거든요. 딱 보는데 주님께서 딱 눈이 마주쳤어요. 오늘 너희 집에 간다. 그때 삭개오 집에는, 삭개오는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삭개오 집에 구원이 이른 것은 구원에 삭개오의 사적인 가정이 구원 속에 이사를 하면서 삭개오 집은 구원의 집이 되었어요. 삭개오의 집은 날라가버렸습니다. 삭개오집은 율법이 실현되는 장소에요.
제가 남을 속인게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속건제에 나오는 법이죠. 내가 4배나 갚겠나이다. 우리를 통해서 율법의 완성. 그게 십자가잖아요.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주의 의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이 죄 많은 죄인을 통해서 주의 긍휼만 쏟아져나올 때 이걸 가지고 성전이라고 하는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 많은 우리를 주님의 성전으로 개척해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의미도 없는 주제에 나의 의와 나의 인생의 의미를 따로 챙긴 그것이 죄고 내식대로 구원받고자 하는 그 자체가 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