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2023. 5. 7. 18:30

뼈들

2023년 5월 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8:1-3

(8: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 방백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거민의 뼈를 그 묘실에서 끌어내어

(8:2) 그들의 사랑하며 섬기며 순종하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 쬐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8:3) 이 악한 족속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잔인한 세상 전쟁의 양상, 상대를 심하게 굴욕감과 모욕감을 안겨주는 것으로 자신의 전쟁 피로감을 달래서는 시도가 이 인간 세상 전체에 퍼져있습니다. 이는 전쟁을 통해서 인간들은 어떤 보상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만 살아야 정의요 타인이 잘 살면 용서가 안되는, 인간 내면의 불안정을 전쟁을 통해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세상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할지라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 전쟁 방식에 내맡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난 날의 조상님까지 묘가 모독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런 식으로 몰아세우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입시켰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이 있어주어야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접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전쟁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 도달점은 ‘뼈’입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뼈로 환원되어야 합니다. 일상 상활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왜 일상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질 접근을 가로막는 겁니까?

그것은 율법의 방향성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기쪽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이 멀쩡하다고 자부하고 그 멀쩡한 자신이 자기의 본질이라고 우기고 삽니다. 이를 위하여 인간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타인을 본인이 골라 만나게 됩니다. 이런 해ᅟᅦᆼ위들이 과오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떤 미국 사람이 군인으로서 아프리카에 가서 착실하게 맡은 군 복무를 합니다. 나이들어 군대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싶어서 그는 퇴역하고 본토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본인이 아프리카에서 병원균을 갖고서 들어온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집에 살다가 그만 어린 자기 딸이 그 병원균에 의해 병 걸렸습니다.

희귀병이라는 치료비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근처 은행에 대서 대출을 받고자 했으나 은행 지점장은 담보없이는 대출 못한다고 했습니다. 젊은 날을 나라 위해 희생했건만 본국으로부터 어떤 혜택이 받지 못하게 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는 총을 들고 그 은행을 털기로 합니다.

무사히 은행돈을 털고 나오는데 성공했지만 그동안 바닥에 엎드려 있던 그 지점장이 종들고 이 강도를 막아섭니다. 이 퇴역 군인은 어쩔 수 없이 이 지점장을 죽이고 맙니다. 원치 않게 살인을 한 겁니다.

이 퇴역군인은 탄식합니다. 도대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퇴역 군인이 자신이 원하는 타인들만 골라 만난 겁니다. 즉 그는 율법을 정면으로 만나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에게 도움되는 사람만 만나는 것으로 자기 인생 설계를 갖추어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이방나라, 곧 인간 세계의 실정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이 통째로 이방나라에 유린되게 하십니다. 이 유린의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이 경험할 수 없는 중차대한 경우를 접하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뼈이다”는 겁니다.

곧 이스라엘로 하여금 인간의 본질, 곧 죽음을 접하게 합니다. 이처럼 내가 죽는 이유를 밝혀주는 분이 진정한 타인이요 이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죽는 것은 율법을 위반해서 저주받아 죽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은 안 죽는 수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이 주어진 이상, 이스라엘은 인간들의 끝장을 드러내야 하는 겁니다.

율법의 맞이한 결말들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한 예언으로 전달되게 하셨습니다. 에스겔 37:1-5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최종으로 무엇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 인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 에스겔의 뼈 골짜기에는 뼈들은 그냥 잠잠히 있습니다. 뼈가 스스로 살기 위해 적절한 타인을 골라서 상담을 받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냥 뼈는 바짝 말라있으며 자기를 살기 위해 그 어떤 시도도 뼈에 부적절합니다.

대화는 하나님과 ‘인자(人子)’라고 불리는 에스겔 선지자 사이에만 이루어집니다. 뼈는 이 두 분의 대화의 결과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습니다. 뼈들은 자신의 결말에 대해서 본인들이 어떤 식으로도 개입될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인간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율법을 제거해 버립니다.

율법이 들어가게 되면 율법은 예언을 고대해야 하고 그 예언 달성에는 인간의 소망이 끼어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법이 빠져버리면 남는 것은 타인과 타인 사이의 힘 겨루기만 남아 있게 됩니다. 착실하고 건실하고 바르고 살고 싶은 것이 인간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내가 이 세상이 굳이 살아야 되는지 모호합니다.

이유없는 삶, 목적으로 모르는 인생, 상황 따라 주어지는 질서의 원친은 과연 어디일까요?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지정해 놓았다는 겁니다. 율법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십자가 사건의 중력에 의한 그물구조망 안에 모든 인간들이 다 갇혀 있습니다.

이렇게 살든지 저렇게게 살든지 인간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위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군말 못하고 뼈들이 되어야 합니다. 각자 인간의 운명은 자기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십자가 지신 예수님 손에서 놀아납니다. 바로 인간들의 현 세계는 이런 복음을 가리고 감추고 핍박하는데 급급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모두 엉터리입니다. 죽어있으면서, 혹은 죽어가면서도 율법과 예언과 말씀과 십자가를 쳐다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뼈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고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0강-예레미야 8장 1~3절(뼈들)23050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8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62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 방백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거민의 뼈를 그 묘실에서 끌어내어, 그들의 사랑하며 섬기며 순복하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 쬐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이 악한 족속의 남아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있는 자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전쟁의 잔인함을 묘사하는 가운데서 잔인함의 극치가 뭐냐 하면 산자를 죽이는 정도가 아니고 죽은 자의 무덤을 파내서 후손들이 선조들을 장례 치르면서 기대했던 바가 있잖아요. ‘이제 아버님, 어머님 편히 쉬세요’라는 그 편히 쉬시라는 그것마저 적군들이 와서 편히 못 쉬게 만드는 방법이 뭐냐 하면 묘를 다 파헤쳐서 이미 죽었던 선조들의 뼈를 뜨근뜨근 열기가 높은 대낮에 태양 볕에 노출 시켜서 정복당한 백성들에게 우리 힘에 굴복하지 않으면 조상들도 이렇게 욕먹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런 방식의 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런 것이 발생 됩니다.

상당히 잔혹하고 잔인하죠.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은 신체적 전쟁이지만 사실은 그 배경에는 심리적인 것이 굉장히 많이 깔려있어요. 상대방을 정신적으로 굴복시킴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복수하겠다고 반란 일으키는 것을 싹을 잘라버리는 그런 의도로 전쟁이 진행됩니다. 이와같이 잔인한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을 유린하는데 아모스 2장 1절에도 비슷한 것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회를 만들었음이라” 모압과 에돔이 서로 전쟁하면서 모압이 자기가 잠시 승리한다는 그 자신의 능력을 찬미하고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했던 방법이 뭐냐 하면 상대방 왕을 비참하게 만드는 거예요.

상대방 왕이라는 것은 백성의 대표자, 그러니까 상대방 대표자의 뼈를 불살라서 가루, 회(灰)로 만들어버리면 이것은 우리 민족이 너희 민족보다 우위에 있고 우월한 민족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마음으로 각인시키는 겁니다. 이것까지 승리해야 인간들은 온전한 승리라고 하는 거죠. 제가 말씀드린 바로 이것이 세상이 유지되는 질서이고 방법입니다.

그 질서 속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집어넣고 결국 그 잔혹한 전쟁방식에, 인간의 질서를 잡는 그 방식에 이스라엘도 여지없이 희생되게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로 이것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벨론 나라가 쳐들어 와서, 그것이 산 사람만 학살하고 죽이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은 비록 전쟁은 졌지만,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은 우수한 민족이라는 그 전통마저 말살하려는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전쟁하도록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이끌어가시는 거예요.

후손 잘못 만나서 조상까지 욕먹는 방법으로 전쟁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세우시는 겁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선지자의 말을 점점 더 거부하게 되겠지요. 우리 조상이 어떤 조상인데. 하나님과 함께 있던 조상인데. 그 조상까지 욕을 얻어먹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치하지 않고 지켜주실 것이라는 이런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가 도리어 지금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예언을 정면으로 거부하게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선지자께서 사람들에게 먹히지도 않는 이야기를 그렇게 계속하느냐. 바로 그것은 이스라엘의 본질을 이스라엘이 찾아가야 해요. 그 본질이 뭐냐. 죽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게 되어있고 그 죽는 데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죽는 이유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몰아세우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율법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 따라가면 인간의 본질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율법 중에 그 한 가지 예가 십계명에 나옵니다. “살인하지 말라” 십계명 가운데서 유일하게 죽음과 관련된 계명이죠. “살인하지 말라”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살인하지 않으면 괜찮은 거냐’ 사람이 살인하지 아니하면 내가 살인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죽음과는 연관성을 지을 수가 없어요. 평생 나는 남을 죽여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한 서너 명씩 죽여봤어요? 월남전 참전한 그런 거 말고 그냥 평소에 감정 나빠서 죽여봤어요? 없지요. 살인하지 않았는데 살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뭘 놓치느냐 하면 내가 왜 죽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 본질을,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살인토록 하시는 거예요. 사람을 죽이도록 하셔서 자신의 본질에 접촉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세계를 다스리시는 방법이에요.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예를 들면서 이게 뭐가 문제 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미국 사람인데 아프리카에서 용감하게 나라를 위해서 전쟁 군인으로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전쟁하다가 퇴역을 했습니다. 전쟁도 지겹고 군인도 지겹고 해서 평범하게 살려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제는 연금 받으며 좀 살만하다 싶었는데 아프리카에서 본국으로 오면서 전염병을 가지고 온 것을 몰랐어요.

모른 채 자기 집에 와서 멀쩡한 자기 딸이 전염병에 걸렸는데 이게 난치병인 거예요. 그걸 고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연금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요. 그래서 그 퇴역군인이 내가 나라를 위해서 명예롭게 살았는데 나라에서 좀 해줘도 되지 않느냐 생각한 거예요. 내가 아프리카에서 전쟁 참여하다가 병을 얻고 딸에게 옮겨서 딸이 아픈 건데 나라에서 좀 배려를 해줘야 하지 않느냐 생각해서 은행을 찾아갔어요.

은행에 가서 약값이 없으니 돈을 좀 빌려줄 수 있느냐고 하니까 은행지점장이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담보 없으면 돈 못 빌려줍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섭섭해서, 내가 나라를 위해서 아프리카 가서 그 험한 꼴 보면서 살았는데 결국 나라가 날 배신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총 쏘는 것이 전문이기 때문에 총을 들고 은행을 몰래 털기로 했어요.

사람 죽이려는 의도 전혀 없이 몰래 돈만 훔쳐서 딸의 병을 고치려고 돈을 훔쳐 나오는데 사람들이 있어서 ‘다들 엎드리고 가만히 있어’라고 위협만 하고 나오려고 했는데 그 은행지점장이 벌떡 일어나서 ‘그 돈 못 가져가’라고 총을 겨누니까 아프리카에서 군 복무했던 사람이 그 지점장을 죽이고 말았어요. 그리고 스스로 묻습니다. ‘도대체 내 인생이 왜 이리도 꼬였느냐?’

제 질문은 이겁니다. 그 사람에게 뭐가 문제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이끌 때 그 사람이 자기 인생 살아온 것을 쭉 보면서, 딸이 아프고, 군에서 건실하게 복무하고, 전혀 문제가 없어요. 문제없고, 문제없고, 문제없는 데 문제가 생겨버렸어요. 살인사건. 이게 현재 인간세계에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군인은 적과 싸우고 적은 살인했지만 내가 고국인 미국으로 가서 멀쩡한 은행지점장을 살인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죠.

상상에 없던 거예요. 자기 계획에 없던 거예요. 그냥 가만히 엎드려있으면 아무 일 없었어요. 잠시 돈만 빼앗아 가면 되고 사람 죽일 의도까지는 없었는데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건 바로 인간 세상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살인자로 몰아세운다는 사실을 그 퇴역군인은 감 잡을 수가 없었어요.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 나오고 말씀 안 보는 사람은 자기는 문제없다, 문제없다, 문제없다는 것에 최선을 다해서 반듯하게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금도요.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평생에 살인한 적이 없다고. 그런데 자기 죽을 때 살인죄로 죽이시는데요. 살인죄로 죽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이해될 듯하면서 이해 안 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재판할 때, 보통 이 세상 재판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판사가 앉아 있으면 ‘피고, 너는 무슨 할 말이 없느냐? 최후변론해라. 변호사, 할 말 없어요? 검사 할 말 없어요? 그럼 판결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인간세계 판정이잖아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검사, 이야기하세요’라고 하면 피고도 자기 이야기 하려고 막 준비하고 있는데 듣지도 않아요.

듣지도 않고 땅!땅!땅! ‘사형!’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예 듣지 않아요. 그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25장 11~12절에 보면 신랑을 맞이하는 열 처녀 이야기예요. 그중에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해서 신랑을 맞이했고, 어디를 주목해야 하느냐 하면 나머지 다섯 처녀에게 주목해야 해요. 그 남아있는 다섯 처녀에게 신랑이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들을 수 없는 가장 무서운 말을 듣게 됩니다.

10절부터 보면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이게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말입니다.

‘뉘기?~~너 누구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있어요. 그 퇴역군인의 잘못은 뭐냐 하면 자기가 원하는 타인을 자기가 찾아다녔다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남, 타인을 본인이 골라서 만났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결정적인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사람만, 내게 필요한 사람만, 은행지점장, 병원의 의사, 이렇게 내가 필요한 사람을 내가 골라서 만나놓고 내 인생은 그동안 착실하게 살았다는 거예요.

인간이 나보고, 너는 그냥 사는 것이 살인자고, 사는 것 자체가 살인 행위이고 너는 죽어야 한다는 그런 타인을 우리가 거부해요. 그런 타인 만나는 것을 우리가 거부한다고요. 하나님이 일방적이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일방적이에요. 주의 말씀이 두꺼운 성경책에 있잖아요. 안 봅니다. 안 듣습니다. 나는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싶어 해요. 왜? 그래야 내 건전함이 유지되니까요.

그러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죽어가는 이유를 몰라요. 왜 나같이 멀쩡한 사람을 왜 죽여야 해? 왜 내 딸이 아파야 해? 나는 아프리카에서 열심히 복무했는데 왜 내 딸이 아파야 해? 나에게 잠복 된 병균에 의해서 왜 아파야 하는데? 억울해. 너무 억울해. 맨날 억울해요. 그런 인간들, 자기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그렇게 자기의 우수함과 건전함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인생의 사는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주께서는 어떤 함정을 놓는가.

그 함정도 역시 미국 이야기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사람이 마네킹을 부쉈는데 살인미수로 걸려서 잡혔어요. 마네킹을 부쉈는데 살인미수인 거예요. 얼른 들으면 굉장히 억울해 보이죠. 사정 들어보면 억울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길거리에 누워 자는 노숙자들 꼴 보기 싫어서 남들이 안 볼 때, CCTV 없는 곳에서 쇠막대기 가지고 다니면서 노숙자들을 ‘저런 쓰레기같은 인간들은 내가 죽여 없애는 것이 낫다. 내가 세금 낸 거 사회복지에 괜히 허비된다’라고 생각해서 죽여버린 거예요.

노숙자에 대한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을 간파해서 경찰 측에서 함정을 팠어요. 노숙자 누워있는 곳에다 마네킹을 놔두고 허름한 이불을 덮어놨어요. 덮어놓고 걸려들기를 기다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에 있던 살인범이 와서 노숙자인 줄 알고 마네킹을 때려버렸어요. 법원에서는 바로 마네킹 때린 네가 전에 두 건의 노숙자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기소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마네킹으로 사용했어요. 마지막 때. 인간은 왜 그저 건실하게 사는데 죽어야 하는지를, 건실한데 왜 늙어 죽는지를, 아버지 죽고, 할아버지 죽고, 왜 계속 되풀이되는 죽음의 사슬에서 못 벗어나는지를.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마네킹을 사용하신 거예요. 예수님을 살짝 보냈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는 건실하다. 나는 죄가 없다. 나는 바르게 사는데 예수 당신 쪽에서 먼저 시비 걸었잖아’

나는 가만히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시비 건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때려죽였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남아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뼈가 됩니다. 뼈가 인간의 본질이었던 겁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잘 알아요. 에스겔 37장에 나오니까. 에스겔 37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자가 되는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어떤 골짜기를 데리고 가는데 그 골짜기에 가니까 온 사방에 뼈가 굉장히 많아요. 이 뼈에 대해서 선지자는 전혀 그 뼈가 조만간에 어떻게 될지를 전혀 알지 못해요.

그냥 인간의 인식은 뼈에서 뼈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뼈가 어떤 뼈냐 하면 바짝 마른 뼈예요. 그러니까 이 뼈는 계속 뼈로 가는 거예요. 이게 인간 지식의 끝입니다. 어떤 양자물리학이니, 생물학이니, 그 어떤 것도 뼈가 사람 되지를 않아요.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지식의 한계예요. 인간 지식의 한계가 뼈는 뼈다는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죽는 이유를 몰라요.

자기 똑똑한 줄 알고, 자기 잘난 줄 알고, 노벨상 타면 천당 갑니까?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수건을 가리고 펩시콜라 판촉 행사하는 곳에서 ‘자, 둘 중에 더 맛있는 것을 골라보세요’라고 길가는 손님에게 눈 가리고 고르게 해서 맞추면 공짜로 콜라 1리터짜리 주는 거죠. 옛날에 많이들 판촉했잖아요. 눈감고 딱 고르니까 ‘예, 축하드립니다. 그것이 우리 회사 펩시콜라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일상의 생활이에요. 이걸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그 순간 뭘 모르느냐 하면 펩시콜라를 선택해도 지옥 가고 코카콜라를 선택해도 지옥 가고, 펩시콜라 해도 늙어 죽고 코카콜라 해도 늙어 죽는 그 펩시콜라와 죽음과의 연관성을 몰라요. 내 선택과 죽음의 연관성을 모른다고요. 그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나라 잘 되면 괜찮은 줄 알았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내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뼈들의 집합체로 만드신 거예요. 왜냐? 에스겔 37장 때문에.

역시 예언의 말씀이거든요. 골짜기에 뼈들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볼 때 뼈로 본다는 거예요. 인간은 거울 앞에 내가 살점이 있다고 우기지만 주님은 끝을 보는 거예요. 인간의 끝을 보게 되면 뼈 아닌 자가 없어요. 그래서 미스코리아 열면 안 돼요. 미스 뼈다귀코리아 해야죠. 뼈다귀코리아 하니까 거기서 뭐 수영복 입고 어쩌고 해 봐야, 삐그덕삐그덕 하는 행동들만 보여줄 뿐이죠.

여기서 하나님의 단호한 율법은 모든 인간을 뼈로 확정지어 놨습니다. 피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뼈에게 무슨 말을 들어요. 에스겔 37장이 그 이야기입니다. 뼈들이 많지만, 그 많은 뼈들이 궁시렁궁시렁 잡담하고 그런 거 없습니다. 조용합니다. 대화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인자 에스겔만 대화 합니다. 그냥 뼈들은 가만히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묻죠. “인자야, 뼈들이 살겠느냐”라고 물었어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이 마감되고 난 뒤에, 그러니까 인간이 설치는 거, 인간의 열심 내는 거, 그런 거 전부 다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뼈기 때문에 일체 피고의 말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은 인자, 인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죠,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보고 이야기합니다. “이 뼈들이 살겠느냐”라는 그 이야기가 뼈에게는 들리지 않아요. 바짝 말라 죽었으니까.

에스겔이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아실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4절에서 “네가 나 대신 이야기해라”라고 나오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버지를 대신하니까 인자예요.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무덤에서 뼈가 되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 와는 영영 헤어질 줄 알았죠.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이야기했죠. 그럴 때 예수님 말씀의 위력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말씀 전하는 예수님에게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필요했던 거예요. 우리가 뼈입니다. 뼈인데 주께서 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까? 주의 말씀이 내 능력을 제키고 일방적으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증명해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샘플(표본)로 뽑아 세우신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살 때 어떻게 살면 되느냐. 그냥 이미 죽은 뼈다귀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개 앞에서 막 들이 내밀지 말고요. 개는 사료를 먹어야죠. 이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는 중심을 잡아주는 거예요. 옛날에는 이러했어요. 지구와 태양이 그냥 돈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인슈타인 이후에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보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고 태양의 중력이 만든 고랑이 있어요.

곡률이라고 하는데 그 시공간의 곡률을 따라 홈이 파인 곳에 뺑뺑 도는 거예요. 남성의 모자 중에 중절모가 끝이 휘어져 올라가잖아요. 그 위에 탁구공 놓으면 탁구공이 뺑뺑 돌잖아요. 그처럼 공간이 휘어져서 휘어진 곳에 그냥 자연스럽게 지구가 태양이 만든 홈에서 도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 중심입니다. 우리가 왜 아프리카 가고 우리가 왜 지점장을 죽이는가.

본인의 죄가 아니에요. 네가 아프리카 가도 뼈였고, 지점장 죽이기 전에도 뼈였고, 죽고 난 뒤에도 뼈였고, 네 딸은 멀쩡해도 뼈였고, 아파서 죽어도 뼈였고, 기시다(일본 총리) 만나도 뼈고, 윤석렬 만나도 뼈고, 둘 다 독도는 우리 땅이냐 너희 땅이냐 해도 뼈들과 뼈들의 정상회담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뼈를 뽑아야 해요. 다른 뼈도 뼈예요. 말씀을 봐야지 왜 사람에게 기대합니까.

인간세계는 그냥 임시방편으로 덮어놓는 거예요. 쿠바 밑에 아이티라는 나라가 있거든요. 남미와 북미 사이에 카리브해 쪽에 아이티라는 나라가 있는데 이런 나라예요. 선출직 공무원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대통령이 암살당했거든요. 청소 트럭 멈추고, 식수공급 끊기고, 학교는 휴업하고, 병원은 폐쇄당했어요. 내 낮에 납치, 강도, 살인이 일어나고, 입법부는 임기 종료되어서 해산되고 200개의 갱단이 전 국토를 지배합니다.

그리고 선거는 치를 수가 없고요, 콜레라가 대유행했고, 대규모 탈출행렬이 있고, 재산은 육지로 빼돌려지고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다못해 국민이 이 갱단을 잡아서 경찰 보는 앞에서 화형식 하는 것이 동영상에 나왔어요. ‘세계는 지금’이라는 뉴스에 나왔어요. 그걸 보면 사람들이 그러죠. ‘나라 꼬라지 하고는’ 그 나라 꼬라지가 인간의 행정력이 없을 때 완전히 지옥이 되지요.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한 행정력으로 지옥을 잠시 어설픈 냄비뚜껑으로 잠시 덮은 거예요. 어느 나라, 좋은 나라 없습니다. 그 지옥같은 아이티 나라가 입법부 없지요, 공무원 없지요, 어떤 기반시설 다 무너져도 그게 인간의 날 것으로 그대로 노출되는 거예요. 그동안은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서 고만고만 지옥 가기 전에 질서가 뭐냐를 잠시 맛보게 하신 거예요.

질서라는 냄비뚜껑 들추면 똑같이 되는 거예요. 왜? 다들 자기중심이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달리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전부 다 속임수예요. 무주구천동에 가면 터널이 하나 있는데 그 터널 이름이 나제통문이에요. 신라와 백제 사이에 통했던 문이라 나제통문이라는 겁니다. 김유신이 말 타고 그걸 통과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주구천동에 상인들과 식당들이 그걸 가지고 장사해 먹는데 어떤 사람이 알아보니까 그 나제통문이라는 것이 김유신 장군 시대가 아니고 일제시대에 폭탄으로 터트린 거예요.

그러니까 전부 다 가짜뉴스예요. 그러나 지금 나에게 이익이 되니까 얼마든지 그게 질서를 덮는 뚜껑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전부 다 속임수예요. 내 뼈를 가리는 속임수. 그걸 내가 제작하고 빌려오고,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타인을 내가 만나는 겁니다. 내가 만나는 타인, 그 뚜껑을 들춰주는 거, 이게 바로 말씀이 주는 축복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주의 뼈인데 십자가를 증거 하고 주님 증거 하라고 영생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말씀의 눈으로 성령의 눈으로 똑바로 보게 하옵소서.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고 계속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고 굳이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