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피쉬
닥터피쉬
2023년 3월 19일 본문: 예레미야 7:1-3
(7:1)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7: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7: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집은 여호와가 계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들이 사는 동네에 하나님의 집이 있어야하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죽음을 걸고 벌리시는 일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28에,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하나님의 자기 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피가 없는 곳은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피 흘러 죽고자 하지만 인간은 피 흘러 죽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소중함을 간직하는 방식이 하나님 방식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장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4-5)
이 말씀 안에 피에 관한 어떤 언질도 없습니다. 그냥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니 그냥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의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22:2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약속을 인정하는 것으로 ‘믿음’을 확답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믿음의 내용에 아브람이 빠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빠지는 것은 아브람이 죽는 그 현장에서는 ‘의가 되는 믿음의 내용’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바쳐야 될 것은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즉 ‘최종 대상의 대상체’입니다.
인간은 장렬하게 그 무엇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단 그 무엇이 자기 목숨과 동등되게 더 사랑하는 대상일 경우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이삭을 죽이는 것은 곧 아브람의 자기 존재 의미를 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연한 사고나 강도에게 당해 아들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본인이 본인의 자식을 죽여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이 일을 지시하시는 이유는,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아브람’ 때는 없는 자입니다. 아브람이 죽어야 그 현장에서 비로소 등장 자가 아브라함입니다.
이를 통해서 자기 죽음을 경유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인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이 원칙을 출애굽 당시에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애굽에 사는 이스라엘에게 왔을 때, 바로 히브리인들을 건져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져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틈을 만드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출 11:7)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구분짓습니다. 그런데 그 구분짓는 방식으로 들어가는 그 틈에 하나님께서 계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곧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아브람이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그 현장을 하나님께서 계속 보존하시는 취지에서 이 방식을 살리는 집단을 이스라엘쪽로 정하시는 겁니다. 이는 곧 이런 원칙이 성립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쪽에서 나오는 그 율법대로 사는 자만이 하나님 계시는 곳에 합류할 수 있다”는 원칙 말입니다.
출애굽기 32:19-20에 보면,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율법, 곧 하나님의 뜻이 나옵니다.
이 뚯을 온전히 행한 자만이 하나님 계신 곳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 자체가 지상의 이스라엘로 인하여 깨어졌습니다. 이러한 언약이 사라진 버린 것이 됩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율법을 온전히 못지키면 필히 죽어야 한다는 율법 저주의 효과가 계속 유지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상 섬긴 이스라엘을 죽이기 위해 나선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레위지파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출 32:27-28)
이 레위지파의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헌신’이라고 표현합니다.(출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능한 공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죽음의 참여함’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신약에 와서 그 예가 마태복음 20:34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두 소경이 예수님을 발견해서 긍휼히 여겨달라고 부탁했더니만 예수님께서 그들의 소경을 낫게 하시니, 어때부터 두 소경은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소경은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자랑거리를 내세울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인생 자체가 망가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쪽에게서 내세울 것이 아에 없음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유월절밤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을, 애굽 사람에게 예외없이 주어진 장자죽음으로 드러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행위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행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탁터피쉬에 비유하겠습니다. 하반신 발에서 숱한 잔고기들이 출몰해서 피부조직을 뜯어먹습니다. 하지만 상반신에 해당되는 자아의식에서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시원합니다.
하나님쪽에서 내세운 율법의 온전함은 이 지상에 속한 부분에서 닥터피쉬처럼 뜯이는 경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하나님께서 4 천사를 보내어, 전쟁, 기근, 전염병, 사망이라는 환경에 처하게 만듭니다. 그것들을 사정없이 성도의 지상 생활을 불편하게 합니다.
하지만 성도의 상반신은 이미 천국에 와 있습니다. 속이 시원해하는 이유는 어차피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은 율법은 온전한 사랑을 달성한 겁니다. 그 사랑 속에 성도가 놓여져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작용하는 예수님의 피흘리심과 대신 죽으심만을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3강-예레미야 7장 1~3절(닥터피쉬)23031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7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61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나온 그 율법, 그 율법대로 살 때만 바르게 하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양심에서 나오는 법, 그것 가지고는 여호와 집에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에게 나오는 그 율법은 어떤 경우에 그것을 온전히 지켰다거나 안 지켰다가 결정될 수 있는가. 주님의 율법으로 인하여 거기서 두 부류가 결정됩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11장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6~7절에 보면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출애굽기 11장 6~7절에서 두 가지를 끄집어내면 이렇습니다. 애굽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분하는 하나와 구분하는 데 있어서 큰 곡성이 들릴 것이라는 겁니다. 우는 소리가 성립되는 거죠.
인간이 운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때 울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울게 만드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감안한 겁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 자식이죠. 밖에서 까불고 있는 자식. 부모는 어느 정도로 각오가 되어있느냐 하면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프고 내가 대신 죽는 것도 각오가 되어있어요. 일종의 바꿔치기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자식을 위해서라면 대신 아플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 손으로 자식을 죽일 수는 없어요. 이거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왜냐 하면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는 되어있지만 가장 소중한 그 자체를 내가 잃어버리면 나의 전부를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아시고 아브라함에게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타인이 아니라 네가 죽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죽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람과 아브라함을 구분 지으려고, 그것을 갈라놓으시려고 그러는 겁니다. 아브람은 육신의, 육적인 아브람이고 아브라함은 육이 죽고 난 뒤에 죽은 육에서 그 육을 잊어버리고 건너온, 새롭게 하나님께서 마련한 약속의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차이점이 뭐냐. 아브람 때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어요. 그래서 내 소중한 것을 하루하루 지키는 쪽으로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그것을 없애는 현장에 주님의 약속을 거기에 집어 넣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내 약속이 소중한지 너의 자식이 소중한지 묻는 것으로 두 인간 간에 차별을 지어버리는 겁니다. 어찌 하나님이 무섭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인간이 해낼 수도 없는 것을 요구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할 수 없는 한계를 주께서 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한계를 넘고자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친숙한 것을 원합니다.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하기 싫어해요. 그래야 자기가 잘나고 의롭다는 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같은 동족을 수천만 명, 어떤 사람은 5천만 명 정도를 죽였다고 하는데, 공식적으로 죽인 것은 약 천만 명 정도 죽인 사람이 있어요.
푸틴의 선배 되는 스탈린입니다. 스탈린이 사람을 죽이는 지도자로 있으면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뭐냐 하면 ‘나는 인민의 종이라는 점을 정당화하겠다’라고 했어요. 내가 인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고 인민을 섬기는 종이라는 점을 나는 고수하겠다는 겁니다. 뭐가 잘못되었는가. 바로 ‘내가 인민의 종이다’라는 그 자체를 정당화한 거, 의롭게 한 것이 문제가 된 거예요.
이것은 바로 아브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자식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거라고 하니까 아브람은 뭘 생각했느냐 하면 종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낳게 되면 내가 할 도리 다 했고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하늘의 별처럼 크게 번성케 하실 줄 알았죠. 그거는 자기가 하는 행동에 정당성을 아브람 조차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으로 찾아온 하나님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변신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구원받는 아브라함도 어쩔 수 없이 동조할 수밖에 없어요. ‘어쩔 수 없이’라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구원은 내가 희망하는 자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이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자석이고 우리는 거기에 쇳가루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성도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신약에 나온 표현이 있습니다만, 제가 말을 바꾸어서 쉽게 표현하겠습니다. 방울토마토. 신약에서는 그것을 열매라고 하죠. 그걸 제가 방울토마토라고 표현한 이유가 동글동글한 것이 한입에 들어가거든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방울토마토는 그냥 우리 주님 먹기 좋으라고 있는 것이지, 자기가 어디 폼 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열매예요. 내 작품 아닙니다.
그러면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기의 작품이고 열매이고자 아주 애를 쓰고 연출을 하고 연기를 합니다. 모든 노력을 하죠. 나 좀 봐달라고. 내가 이만큼 인생 멋지게 살았다는 것을 봐달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정당화죠. 스탈린의 잘못은 뭐냐 하면 ‘나는 인민의 종이다’라는 것을 정당화하는 거죠. 이 정당화가 문제였던 거예요.
그러면 이건 인민의 종이 알아서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시키신 것이 아니고, 수천만 명 죽여서 만들어낸 거예요. 제가 부산강의에서 사람 많이 죽인 사람 1등부터 20등까지 이야기했는데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거기에서 몇 등 되지도 않아요. 2등이 스탈린이고 1등이 모택동입니다. 중국공산당이죠. 그런데 그걸 지금 누가 밀어내려고 하느냐. 이게 정치적 발언이 되겠습니다만 앞으로 같은 중국끼리 뭘 또 하겠지요.
그 사람에게 ‘당신은 왜 그런 짓을 합니까?’라고 물으면 뭐 여러 가지, 인민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이런 객소리 다 치우고 ‘나는 정당하다’라는 겁니다. 나는 정당하다는 이것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법원에서 불법시위를 18번 했다고 재판하려고 불러냈어요. 참석도 안 합니다. 누구냐 하면 전국 장애인 연맹 회장인데 자기들이 몇 명 모여서 만들어낸 자기들의 단체에서 회장이죠.
그 사람은 자기들은 장애자라는 거예요. 제가 보기엔 인간치고 장애자 아닌 사람은 없어요. 자기들만 장애자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정신적으로 장애자입니다.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목사들 당회장 임직 식 하는데 뭐라고 하느냐면, ‘이제부터 저는 여러분의 종이 되겠습니다. 딸랑딸랑’이라고 하는데 제발 좀 ‘종’ 되지 마. 그냥 네 식대로 살아.
종 된다고 해놓고 어차피 자기식 대로 살 건데 왜 자꾸 자기 정당화를 갖다 붙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통해서 애굽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분하는데 정확히 말해서 계속 영원토록 애굽사람 될 사람과 앞으로 이스라엘 될 사람을 구분 짓는 그 틈, 그 틈이 죽음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 그 죽음으로써 둘로 가름함으로 말미암아 진짜 이스라엘은 이 죽음에 동참하는 사람들이에요.
어린양이 죽어서 내가 살았다는 그건 아니에요. 이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왜 굳이 죽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 그냥 믿으라고 하면 될 걸 왜 굳이 죽어야 하는가. ‘아브라함아, 나를 믿느냐?’ ‘예, 믿습니다!’라고 그러면 될 걸 왜 굳이 자기 손으로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왜 죽입니까? 그게 왜 필요하냐는 말이죠. 그게. ‘아브라함아, 너는 내 말 잘 알아들었느냐?’ ‘예, 다 알아들었습니다’ ‘열심히 할래?’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들을,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을, 그것도 남이 아니라, 강도 만난 것이 아니라, 살인마에게 걸린 것이 아니고, 교통사고 급발진도 아니에요.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니까요. 자기 손으로. 내가 자식을 죽이는 것은, 나의 소중한 것을 죽이는 것은, 내가 주님이 지시해서 내가 내 가슴에, 심장에 칼을 꽂아서, 더는 내가 내 소중한 것을 내세울 어떤 의로움도 너에게는 발생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나는 이런 소중함, 이런 꿈과 소망으로 살겠다는 그런 소리 자체를 주께서 살해해 버리시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하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애굽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의 틈이 있잖아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 그 틈을 확산시켜서 그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하나님인 내가 내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해서 들어오게 한다는 그곳이 하나님 집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0장 29~34절에 보면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여리고를 지나가고 있으셨는데 소경 둘이가 소리를 지른 거예요. 31절에 보면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그 당시 소경은 거지였고 특히 그 당시 소경의 등장이 중요한 것은 소경 본인들이 하나님께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지하철에서 데모하는 사람들 아닙니다. 자신들은 그냥 이 땅에서 차별대우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준해서 합당하다고 인정했던 사람이 그 당시 소경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소경으로 사는 것은 우리 팔자라고 받아들인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자기가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지요. 나는 이렇게 자랑스럽고 이런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이 일체 없어요. 이미 그들은 자기가 자기 의로움을 찔러 죽였습니다. 자기가 자기 소중함을 없애버렸습니다. 그 소중함을 없애니까 이제 남아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냥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냥 빈 백지죠. 빈 그릇을 내놓고 제가 담을 수 있는 것은 제 것으로는 아무 의로움도 여기에 담기지 않는다는 것을 내놓는 거죠.
제가 이 말씀이 아니라 34절 말씀을 드리려고 했어요. 32절부터 계속 보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34절에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이게 뭐냐. ‘야, 이제 나 눈 떴으니까, 이제 멀쩡하니까 아무도 나에게 욕하지 마. 내가 주님에게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기도만큼은 정당했었다. 내가 주님에게 뭘 부탁한 것은 옳았다’라는 것도 없어요.
그냥 전처럼 고침을 받기 전과 똑같이 그냥 따라가는 거예요. 빈 그릇으로. 이게 성도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나는 이제 내가 원하는 것을 챙겼으니 이제 독립적으로 한번 해 보자는 이런 거 없습니다. 그저, 당신 없이는 못 살아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을 왜 언급하셨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저주받음을 당하는 그 자체를 사랑의 행위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심판받고 저주받는 것을 저주라 여기지 않고 마땅함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사랑 행위입니다. 사랑은 곧 하나님이 때리시는 저주를 내가 품는 것이 사랑이에요. 이 두 소경은 이미 눈이 맛이 갔어요. 내가 육체에서 눈 떠서 뭔가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그것이 다, 애초부터, 소경 될 때부터 정지되어있어요. 그게 불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장애자는 불가능함밖에 없어요.
나의 불가능함이, 그 자체도 주께서 하는 조치에 편입되면 나의 소경 됨도 주의 가능함으로 내 안에 담겨있는 겁니다. 내 안에 내 것은 없고 나의 소경 됨조차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두 소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소경은 눈을 뜨나 눈이 감기나 신체적 달라짐은 의미 없고 이제는 나를 이렇게 만드신 분을 만나고 싶어 하다가 이제는 만났다는 식으로 달라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전에 중국에 백두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몇 번 가지도 않았어요. 2번밖에 안 갔습니다만, 호텔에 머무르는데 밤중에 닥터피쉬가 있었어요. 닥터피쉬를 보면서 제가 뭘 생각했느냐 하면 몸은 그대로 있고 발만 온천물에 담그는데 닥터피쉬가 달려들어요. 내 허락도 없이 그것들이 알아서 마구 달려들어서 각질을 뜯어먹어요. 그런데 기분이 썩 나쁜 것이 아니라 좋아도 너무 좋았어요.
어떤 시원함 같은 거. ‘뜯어먹어라. 뜯어먹어라. 배불리 뜯어먹어라’ 뜯겨나가는 거죠. 제가 서울강의 할 때 모아이(Moai) 석상 이야기했는데 윗부분은 바깥으로 나와 있지만, 하부는 땅에 묻혔거든요. 지금 하나님 집에 하나님이 계시는 방식이 모아이 석상 방식이에요. 위에는 하늘나라에 걸쳐있어요. 아래쪽은 ‘뜯어먹어라’ 닥터피쉬 방식이에요. 주님을 핍박하고 학대하는 방식으로 자기 아들로 뜯기게 만들고 위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는 겁니다.
그 작업이 오늘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그걸 적용시키는 겁니다. 뜯어먹을 때 닥터피쉬처럼 쬐그만 물고기 와서 뜯어먹으면 우리는 속이라도 시원하겠는데 성경에 보면 뜯어먹는 내용이 요한계시록 6장에 3~8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시간관계상 다 읽지는 않고 제가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3~8절에 보면 거기에 뜯어먹는 것이 나오는데, 뭐가 뜯어먹느냐 하면 전쟁이 뜯어먹어요.
그다음에 기근이 뜯어먹습니다. 그다음에 흉년이 뜯어먹습니다. 전쟁, 기근, 흉년, 그리고 마지막에 사망이 뜯어먹습니다. 이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 같으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몸부림치면서 난리도 아닙니다. 하나님 보고 욕합니다. ‘혀 잘린 하나님’이라고. 광주사태 때 천주교 신부들이 ‘혀 잘린 하나님’이라는 노래 부르고 ‘귀머거리 하나님’이라고 민중가요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뭐 하시노? 전두환 대통령에게 당하도록, 우리가 이렇게 학대당하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인지,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가 이런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는 그 신부들이 몰랐던 게 뭐냐 하면 닥터피쉬를 몰랐던 거예요. 주님은 그것보다 더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뭔가 우리 자신의 것으로 남는 거, 그러니까 아브람의 하나님을 허용 안 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일도 다 하시는 거예요. 어떤 일이 뭐냐 하면, 오후니까 많은 것을 하지 않겠습니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던 거예요. 하나님의 계신 곳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율법이 나와요. 출애굽기 32장 20절에 보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밑에서는 우상숭배를 했거든요. 위에는 모아이 석상처럼 위에는 모세가 신령한 율법을 갖고 왔는데 아래쪽에는 백성들이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하면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그 둘 사이에서 율법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이제 깨어진 거예요. 돌판이 깨졌기 때문에 율법이 깨진 거예요. 깨지면서 남아있는 것은 저주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없으면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야 해요.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겠죠. 그냥 광야에서 다 죽어야 하죠. 그러면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살려낼 이유가 없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려면, 천상과 지상의 통합이죠, 계시려면 하나님의 율법대로 되는 조건 하에,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대로 되는 조건 하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합니다.
그런 인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여서라도, 아브람을 죽여서라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죽이느냐,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는데 여기에 죽여야 할 자를 죽이는 데 있어서 누가 등장했는가. 레위 지파가 등장한 거예요. 이 이야기는 안양강의에서 언급했습니다. 레위지파가 등장해서 레위지파가 누구를 죽이는가.
27절에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라고 나옵니다. 28절에 보면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그리고 그 뒤에 29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여기서 복이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유지 시키시고 보호해주시는 것을 복이라고 하거든요. 하나님이 복을 주려면 그만한 율법적 가치가 있다는 조건 하에 복을 주시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나 대신에 잘 죽였다”라는 것이 복인 거예요.
죽음을 죽음 되게 율법의 죽음을 죽음되게 보호했다는 점에서 나는 너희를 살리고 싶다는 이것이 복이에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복은 뭐냐. 바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아버지께 복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대신 죽은 자를 주께서 축복하셔서 그걸 살려서 천국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그 계획이었습니다. 율법에서 나왔기에 율법대로 지켜야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자기 백성과 만남의 장소가 형성되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 만나는 거, 이거 무서워서 못 만납니다. 죽음밖에 없어요. 그런데 죽으면 또 못 만나요. 만나고 싶어도 죽어야 만나는데 죽어버리면 또 못 만나요.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에 모세를 통해서 대신 죽어야 할 역할을 그들로 하여금 대신 죽게 하는 율법의 역할을 하나님께서 모세와 레위지파에게 안겨버린 겁니다.
너희들은 맨날 죽음과 함께 매일같이 함께 일상생활하는 그런 기능을 해라. 그들이 바로 제사를 담당한 레위인들입니다. 오늘날 성도를 왕같은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하죠. 그래서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함께 있음으로써, 아까 말씀드린 두 소경처럼, 주님이 함께 죽었다는 그 자리,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그 자리에 이미 우리는 주와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나의 의, 내 자랑은 물 건너갔습니다.
이제는 뭐냐,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은 이렇게 했다고 두 소경이 졸졸졸 귀찮게 스토커(stalker)도 아니고 따라다녔잖아요. 왜? 그게 예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 나 대신 죽은 사랑을 어떻게 내가 잊을 수 있습니까? 나로 나를 알게 한 그 사랑을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내가 망가지고 부서지고 해도 괜찮아요. 그건 닥터피쉬니까. 속이 다 시원하니까.
염병, 전염병, 코로나, 기근, 전쟁, 그리고 사망 그런 것들이 아래쪽에서 닥터피쉬처럼 뜯어먹어도 그게 바로 내 힘으로 안 되는 뜯겨나가야 할 것을 주께서는 사랑으로 염병 보내주고, 사랑으로 기근 보내주고, 사랑으로 전쟁 일으키고, 사랑으로 나를 결국은 죽게 만드는, 이것조차 사랑으로 승화할 수 있는 사랑밖에 없는, 주님의 사랑만 고마워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니 아버지, 하나님의 원칙은 철칙 같아서 율법대로 다 이루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없음을 너무 잘 알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오시는 그 죽음에 우리가 기꺼이 우리를 바칠 수 있도록 해주신 주님의 더 큰 사랑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