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오류의 운반체

아빠와 함께 2023. 2. 16. 21:26

오류의 운반체

2023년 2월 15일              본문 : 스바냐 1:4-6

(1: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1:5)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1:6)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우상이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드러내는 개념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신’을 섬긴다는 것은 모조리 다 우상이 되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율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제정은 인간이 배제된 채 성립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떻게 되든 모조리 우상숭배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상을 섬기만 망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곧 ‘인간이 반드시 망한다’가 되는 겁니다. 정말 성도라면 이점을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상을 안 섬기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상 안전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의 입장을 고려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입장을 먼저 챙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즉 “나는 그 어떤 경우라도 망하면 안 된다”가 마음 바닥을 늘 차지하고 있게 됩니다. 이것은 율법 정신에 위배됩니다. 율법을 모르는 인간으로서 자기부터 먼저 챙기는 것은 본성상 당연한 겁니다. 예레미야 44:17-18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사람들의 마음은 “우상을 좀 섬기면 어떠냐?”는 식으로 나옵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대로 삽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인간은 자존하고 자립하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신으로부터 농락당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자신은 ‘나’답게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일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기로 하나님끼리 결정지으신 겁니다. 인간에게 묻지도 않습니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그런데 인간은 악마의 유혹을 받아 먹지 말라하신 선악과 과실을 따먹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되는 조건이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 의사가 하나님의 뜻에 끼어든 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도로 흙이 되었습니다.(창 3:19) 하나님의 형상이 제대로 갖춘 사람은 나중에 등장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이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은 ‘먼저 나신 분’으로서의 자존성을 갖추고 계신 분입니다. 자기 보도 나중에 만들어진 모든 것에 대해서 심판하고 구원하시는 권한과 기능을 행사하므로서 ‘하나님의 형상’에 맞는 역할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최종 생겨나는 것이 지옥과 천국입니다. 지옥은 예수님의 저주 행사하심의 결과요, 천국은 예수님의 복 행사하심의 결과입니다. 이 두의 상반되는 결과를 낳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기능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다 자기가 품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끝’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인간에게 ‘끝’이 없다는 것이 절대적인 비극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인생 마감이라는게 없습니다. 지옥이든 천국이든 우리 주님께서 영원히 살려내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저주와 복의 기능의 영원한 발휘 때문입니다. 복과 저주로 오가시는 주님의 활동 영역에 모든 인간들이 소속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영원한 영벌에, 어떤 이는 영원한 복락에 들어가므로서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인간을 어제부로 죽여놓고 오늘, 또 살려내시고, 이 일을 영원히 반복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죽었다고 다시 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인들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그 율법의 내막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우상숭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잘못 행한다’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잘못’입니다. 잘못된 자가 복받을 자격없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저주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천국간 자들이 생겨날까요? 그 예가 사무엘하 11:14-15에 나옵니다.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즉 우리아 장군이 다윗의 편지를 배달하게 되는데 그 배달되는 편지의 내용은 우리아 장군 자신이 죽은 내용입니다. 이처럼 우리아 장군은 자신의 죽음을 운송하는 바가 됩니다. 우리아 장군은 본인이 죽고 싶어 죽는 것이 아니라 다윗 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다윗에게 ‘다윗 언약’이 주입됩니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시 51:8-9) 다윗 언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다윗에게 시켜서 우리아 장군을 죽이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입니다.

곧 근원적 죽음과 생명을 본인 안에 다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기능이 다윗 및, 우리아 장군까지 파급됩니다. 편지 배달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근원적 사실이 후에 만들어진 인간 내부에 삽입되어 들어오게 되면 다윗이나 우리아 장군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지 않는 자들에게는 오로지 자신이 벌리는 일 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벌리는 일 속에서 꼭 자기 의로움을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절대적으로 건사해야 하고 버텨야 한다고 우깁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행위가 우상 행위요 일원성신을 쳐다보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가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현대 과학은 하늘의 천체를 보기 위해 천문대를 만듭니다. 거기서 전 우주를 아우려는 질서체제를 구축하려 합니다. 그러나 대자연의 질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빼놓은 누락된 것이 도리어 기존의 모든 질서체제를 불바다로 삼켜버립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과 저주는 오직 율법(언약)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류들을 규합하여 집합체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안 망하려는 이 세계가 이미 지옥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강-스바냐 1장 4-6절(오류의 운반체)2302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1장 4-6절까지입니다.

하박국 1:4-6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우상과 여호와 하나님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우상이란,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줘야 비로소 우상이 우상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인간에게 그냥 맡겨서 제대로 된 신을 섬기라, 하면 인간 쪽에서 나오는 모든 제대로 된 신은 다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우상 섬기지 말라, 가 아니라 하나님 나름대로 일한 것이 있어요. 그 하나님의 일한 것은 율법대로 일하십니다. 그러면 율법은 뭐냐? 율법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과 주님 사이 예수님 사이에 형성된 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그 원리원칙으로 일하고, 인간은 그 뒤에 태어나서 그것도 범죄한 아담 이후에 태어난 인간이 뭔가 일을 벌이면 전부 다 우상 됩니다. 율법이 갖고 있는 내용과 틀리기 때문에 이것은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에게는 우상이라는 게 없어요. 없는데 이스라엘 에게만 우상이라는 것이 돋보이게 되어 있어요. 저것은 우상이라는 것, 그 우상이라는 게 뭐냐 하면, 창세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누락 된 것, 언약이 포함되지 않은 신을 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우상을 섬기게 되면 내가 멸절하리라, 되어 있는데 인간에게 있어서의 모든 저주와 모든 복은 숨겨져 있는 율법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그 내용에서 저주와 복이 나오지요.

그런데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이 말을 바꾸겠습니다.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이 말을 바꿔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저주받기 위해서 하나님 섬기는 사람은 없어요. 복을 받기 위해서 섬기지요. 그런데 이 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율법에만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율법에 대해서 모릅니다. 인간은 율법을 만들고 난 그 뒤에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율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저주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학교에서 시험을 친다 해서 시험지와 답지를 미리 빼돌려서 달달 외웠다고 칩시다. 달달 외웠어요.

문제 나오면 백 점 맞게 준비를 했는데 막상 시험날에 시험 치려고 보니까 출제시험지가 바뀌었어요. 달달 외운 것, 본인이 외운 그것으로는 백 점인데 출제한 입장에서는 빵점이 되는 겁니다. 복과 저주에서 인간은 저주받지 않고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 와서 달달 외웠어요. 성경을 외우다시피 하면서 지키라는 것을 다 지켰는데 출제된 시험문제가 달라요.

어떻게 다른지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권투선수를 사각의 링 위에 올려놓고 링 바깥에는 코치가 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요. 코치가 말합니다. “맞지 마! 맞지 마!”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선수는 실력이 없어서 상대방에게 계속 얻어맞아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코치가 “맞지 마! 맞지 마!” 하는 것은 더 정확히 말해서 맞으라는 이야기에요. “우상을 섬기지 마! 섬기자 마!”라는 말은 “우상 섬겨라, 섬겨라!” 그 말이에요. 왜? 그래야 인간은 맞아 죽기 때문에, 저주받아 죽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줄 때 율법을 지키는 방법이 뭐냐 하면, 율법에 위반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율법을 지키는 존재가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믿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 되어 있지요. 그리고 구약에 보면 ‘율법 지키지 않는 자에게 저주가 온다.’고 되어 있잖아요. 너에게 벌이 온다.

스바냐도 마찬가지예요. “너희들 우상 섬기면 내가 진멸하겠다.” 이 말은 링 밖에서 코치가 선수한테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아요. “맞아서 빨리 죽어서 링에서 내려와.” 그런 뜻이에요. 그게 너한테 딱 맞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전부 다 성경을 보고 또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생각해요. ‘어느 것이 나한테 이익이 되고 어느 것이 내 인생에 유리할까? 어느 것이 고생 덜하고 복되게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갈까?’ 그걸 미리 예상을 하는데 그렇게 예상한 자에게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제발 저주받아서 그냥 지옥 가. 이게 내가 너를 만든 취지야.”라고 성경은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스바냐도 마찬가지예요. 네가 이런 우상……, 여기 우상들이 나오잖아요. 바알, 그마림, 이건 바알 제사장 이름인데 여기 바알이 있고요, 그리고 5절에 보면, 지붕 위에서 뭐하느냐? 옛날 유대인 집 지붕은 평평하거든요.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 여기 ‘말감’이 나오는데 몰록이라는 암몬의 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솔로몬 때 수입했어요.

열왕기상 11장 5절에 보면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암몬 또는 밀곰, 몰록 다 같은 말이에요. 7절에도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오늘 본문에 ‘바알’ 나오지요. 그다음에 지붕 위에서 ‘일월성신’ 섬기는 것 나오지요. ‘말감’이라는 우상을 섬겼던 거예요. 그 섬긴 것에 대해서 “그냥 섬기고 나한테 멸절당해라.”라는 이야기가 선지자 이야기에요. 쉽게 말해서 “우상을 끊을 재주나 능력이 너한테는 없다.”는 겁니다. “네가 인간이냐?” “인간입니다.” “그러면 너는 꼭 우상 섬겨야 돼.” 이게 주의 뜻이에요.

인간에게는 여호와 섬길 능력이 없다는 말을 우상을 섬김에 관한 율법을 가지고 설명하는 겁니다. 율법이니까, 십계명의 제1계명이 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은 인간으로서는 여호와를 섬길 능력은 없고요,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길 능력들은 다 있는 거예요. 그래야 이게 범죄한 아담의 자손의 값을 하는 겁니다. 티가 나는 거예요. 그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우리들이고.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우리에게 주의 이름을 믿을 능력이 없다는 말을 하시는 거예요. 코치 이야기 한 번 더 할까요? “맞지 마, 맞지 마!” 그게 코치의 율법이잖아요. “맞지 마, 맞지 마!” 하면 그 선수는 코치 말 듣고 맞으면 되는 거예요. 맞으면 1회전 끝나기 전에 조기에 KO 되어서 빨리 내려올 수 있는 겁니다.

교회를 50년, 60년 다니고 성경을 백 독을 해도 이거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뭘 모르냐 하면, 율법은 인간 만들기 전에 이미 있는 거예요. 율법이라는 것은! 그런데 율법 이후에, 그 뒤에 태어난 인간이 율법의 내용을 알 리가 없지요. 율법의 내용도 모르니까 지킬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는 것을 가지고 주께서 후차적으로 율법으로 때릴 때는 뭐냐 하면, 맞아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복음 기대하지 말고 저주받고 맞아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놓은 취지라는 거예요. 참 쉽죠. 전혀 어려울 것이 없어요. 뭐가 지금 어려우냐 하면, 지킬 수도 없는 게 지키는 흉내 내려고 하는 이것이 더 어려운 거예요. 예수 믿을 재주도 없으면서 예수 믿는 흉내를 내려니까 이게 참 주님 보기에도 같잖고, 같은 인간은 속아 넘어가지만 성령받은 인간은 안 속아 넘어가지요.

인간에게는 우상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길 능력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못 섬깁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이렇게 나오지요. “우리가 우상 좀 섬기면 어때서?” 바로 그거지요. 선지자가 와서 “우상 섬기면 이 나라 망합니다.” 스바냐든 하박국이든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우상 섬기면 이 나라 망합니다.” 하면 저쪽에서 하는 말이 “좀 섬기자, 왜!” “일월성신 섬기지 마세요.” “왜? 좀 섬기고 싶은데! 네가 뭔데?” 이게 인간 내부의 본래 들어 있는 본심 아니겠어요?

말씀에 보니 “우상 섬기면 저주받고 망한다, 지옥 간다.” 하니까 “예, 섬기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본인의 본심하고 다르지요. 이것은 위선자지요. 진짜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우상 좀 섬기면 어떤데?” 이게 인간에게 맞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 살고 있어요. 인간세계는 인간들 만에 의해서 생긴 게 인간세계잖아요. 율법이라는 게 없어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게 없습니다. 이미 범죄한 인간들 집단에서는.

창세 전의 사정에 대해서 인간들은 전혀 몰라요. 인간은 자기 사정밖에 모릅니다. 창세기 1장 26절부터 하나님께서 줄곧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원래 인간이어야 하는 절대적 요소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 사람이 ‘우리’ 속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우리의 형상’이라는 것은 사람 빼고 ‘우리’입니다.

사람 빼고 ‘우리’기 때문에 인간은 그 ‘우리의 형상’에 인간이 가담하거나 의견을 제기할 수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그냥 있어 줘야되는데, 인간 말고 우리 하나님끼리 만든 인간형상이 있다는 조건 하에 인간으로 딱 규정을 했는데, 잘 알다시피 창세기 3장에서 따먹지 말라,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인간의 뜻이 개진되지 말아야 될 곳에 인간이 자기 뜻을 삽입시킨 거예요. 집어넣은 겁니다. 그러면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날아가 버려요. 하나님의 형상이 날아가게 되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고 흙이 되는 겁니다. 흙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어놨는데 형상이 빠지니까 흙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가 흙이니까, 너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 말고 진짜 인간을 계획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4, 15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은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완벽하게 다 구현된 상태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가 없지요. 이미 범죄했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 입장이 되면 율법의 완성자입니다. 율법의 완성자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율법에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저주와 복이 나오지요.

저주와 복이 나오는데 저주와 복을 결정짓는 것은 심판 주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은 심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 복과 저주, 저주와 복을 결정짓는 그 권한을 가진 분이 바로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이고, 심판 주고, 구원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들을 거기다 집어넣은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이걸 아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끝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게 인간에게 절대적 비극입니다. ‘살다가 힘들면 죽으면 되지.’ 아니에요. 죽음이 하나의 순환구조 안에 들어가 버려요. 인간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지옥 가도 끝이 아니에요. 계속 지옥의 저주를 받아야 돼요. 천국에서 한 5백 년 살다가 그냥 자는 게 아니에요. 천국은 잠자는 게 없습니다. 물론 불면증도 없고요. 영원히, 끝없이 천국에서 살아야 돼요.

천국에 가는 인간과 지옥 가는 인간 두 종류로 나눠서 두 종류를 순환시켜 버려요. 지옥과 천국의 취지를, 지옥을 보면서 저주를, 천국을 보면서 복락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주님께서는 주님이 결정한 일을, 본인이 스스로 그걸 순환해서 바라보면서 찬미와 찬양을 받으시는 겁니다.

인간은 주님이 벌이신 일인 저주와 복, 복과 저주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끝이 없어요. 이게 율법안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범죄 하고 난 뒤에 하나님을 섬기는데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모조리 다 우상입니다.

하나님 섬길 때 이미 범죄 한 상태에서 섬기거든요. 그러면 인간이 범죄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존하고 자립하겠다는 의지를 말합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벌여놓은 그 순환구조에 농락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나 스스로 시작해서 나 스스로 모든 것을 자립하는 쪽으로 움직이겠다.’ 그런 취지에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겁니다.

말로보다도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사기 17장 1-2절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엄마가 은화 천 백 개를 잃어버렸어요. 엄마가 화가 나서 저주를 한 모양입니다. “내 은 천 백 개 가져간 인간 저주받아라.” 이렇게 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아들이 들었던 겁니다. 아들이 듣고 난 뒤에 “엄마 그거 내가 가져갔는데.” 이렇게 된 거예요. 내가 가져갔다고 한 겁니다.

그걸 보고 엄마가 놀라버렸지요. 저주는 해버렸지, 그래서 그 저주가 아들에게 가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뭔가 빨리 조치를 취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조치를 취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2절 끝에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여호와를 거론합니다.

형식은 여호와지요. 3절에 “미가가 은 일천 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미가가 엄마에게 은을 돌려주니까 그중에서 은 이백을 취해서 신상을 만들어서 우상을 섬긴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우상이라 하는 것은 저주받지 않고 복 받기를 바라서 인간은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인간의 우상의 용도가 뭐냐? 자기가 자기를 살리고자 우상을 섬기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지키고자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우상이라고 제가 표현했는데 그 우상이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 또 여호와, 예수 집어넣어도 괜찮아요. 인간들이, 교회 교인들이 예수 믿는 이유가,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저주받지 않고 복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걸 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제 감이 오시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과 저주를 결정짓는 순환구조에 집어넣기 위해서 피조물을 만들었는데 인간들은 악마의 유혹에 빠져서 이제는 단독적으로, 자존적으로, 자립적으로 내가 나 잘되는 쪽으로 나는 하나님을 섬기겠다, 그게 뭐 명칭이 여호와가 되든 뭐든 관계없어요. 그게 바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거예요.

여기 오늘 본문에 ‘일월성신’이라 나오잖아요. 제가 일월성신에 대해서 두 종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월성신이니까 해와 달과 별을 말합니다. 일월성신 섬기는데, 첫 번째 종류의 일월성신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걸 가지고 점성술이라고 해요. 첫 번째 경우는 점성술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 별과 달이 같이 있다고 생각한 거지요. 별들이 뚝뚝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한동네에, 같이 한 지역에 붙어 있다고 본 겁니다.

태양과 수성과 금성과 화성과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여덟 개입니다. 태양 빼고 여덟 개. 이것이 가만있지 않고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에서 해와 달과 별이 같이 움직이고, 화성, 목성, 토성도 움직이고, 그 바로 밑에 인간들도 움직이잖아요. 인간들하고 해와 달과 토성이 같은 영역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항상 태양과 수성과 금성과 달이 같이 운행하다 제자리로 반복해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 반복하는 법칙을 알아채면 우리 같은 동네니까, 같은 법칙이 적용되는 같은 동네니까 내 인생도 1년 뒤, 3년 뒤, 10년 뒤의 미래가 어떻게 되지 않겠는가, 다만 출생의 연월일시에 따라서 우리 운명도 고정된 코스로 간다고 보는 것이 점성술입니다. 방금 한 것이 수성, 금성, 달이고 별자리가 또 나옵니다.

열두 개의 별자리를 만들었는데 양, 황소, 쌍둥이, 게, 사자, 처녀, 천칭, 전갈, 사수, 염소, 물병, 물고기자리, 이것이 타로점이지요. 이걸 출생 점성술이라 하는데 출생을 통해서 그 사람의 사업 운, 결혼 운, 가정 운, 건강 운, 이런 것이 다 결정되는 겁니다. 서양식 사주팔자지요. 그게 첫 번째에요. 일월성신 섬기는 겁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이 ‘아, 일월성신 섬기는 것, 점성술이네.’ 뻔히 하는데 두 번째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한테는 ‘저게 일월성신이구나!’ 깜짝 놀랄 거예요. 왜? 그건 상상도 못 했으니까. 이런 점성술 보면서 과학은……, 특히 천문학, 천문학은 물리학, 특히 양자물리학에 기초해서 천문학 연구하고 있거든요.

현대과학은 이걸 미신으로 보고 현대과학을 기초로 우주의 체계를 만드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현대과학이 점성술, 일월성신 섬기는 것과 똑같아요. 왜냐? 현대과학에서 이 우주의 변화를 연구할 때 어떻게 하느냐? 공간적으로 픽셀(pixel)을 만들어요. 픽셀이라 하는 것은 격자구조를 이야기합니다. 모눈종이 있지요.

격자구조를 촘촘히 만들어서 거기에 하나하나 별자리를 다 집어넣어요. 공간적으로는 격자구조, 시간적으로는 프레임, 프레임이라는 것은 시간 단위로 끊는 겁니다. 현대물리학, 생물학도 마찬가지인데 물리학을 비롯해서 모든 과학은 이 우주를 조각조각 내요. 파편화시킵니다.

파편화시키고 그 파편과 파편, 격자구조를 쪼개 보면 누락 된 것이 있지요. 누락 된 것을 또 쪼개는데 쪼개는 방법은 뭐냐? 빛의 파장 가지고 쪼개요. 빛의 파장 가지고 쪼개면 인간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수학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아주 더 작게 더 쪼갰다고 치고 수학적 계산을 해요.

쪼개는데 무한대로 쪼갰다고 치는 것을 미분(微分)이라고 하고 그 쪼개놓은 격자를 다 끌어모으는 것을 가지고 적분(積分)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미적분으로 이 세상의 장래를 예측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과학의 방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등장하느냐? 이 세상에 하나의 거대한 체계, 시스템이 등장해요. 질서가 등장합니다.

질서체가 등장하면서 거기서 운동법칙, 앞으로 이 물질이 어떻게 되느냐, 운동법칙 같은 것, ‘이 질량이, 이 물질이 장래에 어느 위치, 어느 속도로 움직이고 어떤 위치에 있겠느냐’를 계산해 낼 수가 있어요. 이 계산이 인간의 한계 때문에 정확하게 잘 안되고 확률로만 계산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불확정성원리’라고.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의 ‘불확정성원리’라는 게 거기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세상 모든 것을 해보니까 잘 맞아 떨어져요. 인간들이 만든 지혜가 하자가 없다는 겁니다. 타로점이나 점성술, 그들이 하는 주장들이 거의 하자가 없기때문에 지금 타로점도 돈 한 2만 원-5만 원씩 받고 장사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그들이 놓친 게 있어요. 뭘 놓쳤는가? 그들이 미분으로 쪼갰는데 거기서 무시하고 빼먹고 빠뜨린 그 작은 것이 현재 있는 인간질서를 모조리 불살라버린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오류였어요. 자, 우상은 뭐냐? 처음부터 오류의 집합체였습니다. 처음부터 오류의 집합체에요.

옛날 어떤 집 보면 오래된 주택에 석회로 하얗게 칠해놓고 거기에 알록달록 그림을 그려놓은 게 있어요. 서양의 중세식이나 바로크풍의 그림 같은 것, 그리스 로마 신화의 그림들, 서양풍을 낸다고 엔틱(antique)풍을 낸다고 서양의 석고상 비슷하게 해놓은 것들 있지요. 석회에 그린 그림들 있잖아요. 카페도 그런 장식품 더러 있고요. 여기가 유럽인지 분간 안 될 정도로 해놨는데 그게 오래되면 석회에 발라놓은 그림이 쩍쩍 갈라져요. 균열이 일어나잖아요.

인간들은 과학적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과학적이라는 것은 아까 말한 대로 일월성신입니다. 자연을 파악해서 나를 분석하고 자연과 더불어서 하나의 체제화, 질서를 잡았는데 이게 균열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파편화되는 거예요. 얼굴 그림을 그려놨는데 석회가 오래돼서 누렇게 뜬다든지 그렇게 되어버리면 균열이 일어나잖아요. 갈라지면 얼굴 모습이 흉측해져요.

그게 인간 모습입니다. 흙이 되어가는 인간의 형상이에요. 더 노골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캔버스 위의 그림 같은 것이 인생이에요. 그림을 열심히 그리듯이 인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캔버스에 해당하는 그 종이나 천 조각이 나중에 낡아서 찢어져 버리면 거기 그려진 나의 아름다운 추억, 내 인생의 가치 있는 것들이 같이 덩달아 다 찢어지는 거예요. 찢어진 그림처럼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런 거예요.

그릴 때 그리는 천 조각 자체가 문제 있으니까 거기서 어떤 인생을 충실하고 착실하게 살아봤자 소용이 없어요. 자식 잘 키우고 뭐 부자 되고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근본적으로는 천 조각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천 조각 자체가!

인간이 어느 정도 어리석으냐 하면, 이런 겁니다. 어떤 집에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데 선물한답시고 도마를 선물한 거예요. “광어나 한우 여기에 손질하면 됩니다.” 손질하면 된다는 것은 아는데 한우를 줘야지요. 문어나 광어를 줘야지요. 머리 다 빠진 사람에게 빗 선물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네 인생이라는 게 지금 바탕 자체가 찢어진 거예요. 이것은 마귀하고 한통속이 되어서 신을 섬기고 있는데 그 신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뭘 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의 바탕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데요?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되는 것은 ‘이렇게 저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데 인간이 어떻게 저주에서 벗어나는가?’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봐야 돼요. 그 관점에서 본다면, 제가 사무엘 하 11장 14, 15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다윗이 자기가 사랑하는 밧세바의 남편이 우리아 장군이거든요. 자기는 밧세바를 차지하고 싶은데 멀쩡하게 남편이 살아 있으니 처리를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처리하는 방법이 뭐냐? 우리아 장군을 불러서 장군으로 하여금 눈치채지 않게 미필적 고의로 그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서 편지를 써요.

편지를 써서 누구 손에 보내냐 하면, 죽어야 될 우리아 장군 본인 손에 운송합니다. 인생이란 뭐냐 하면, 죽어야 될 내용의 편지를 본인이 운송하는 역할이 우리 인생이에요. 내게 주어진 율법은 ‘얘는 지옥가야 돼’라는 내용의 편지를 우리한테 하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 편지내용이 율법이고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요, 그렇게 편지를 썼던 다윗이 어디에 예속되느냐 하면, 그 다윗이 다윗언약 안에 예속이 되어버려요. 이걸 쉬운 말로, 그 다윗은 누가 시켰느냐? 주님이 다윗에게 시켜서 그렇게 우리아를 죽게 한 거예요. 그러면 내 죽음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그 죽음을 죽기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잖아요. 그걸 누가 시켰느냐,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 시킨 거예요.

예수님 본인도, 아버지의 율법을 받고 본인도 자기 죽음을 실어나르는 배달부로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생명, 부활을 얻었거든요, 부활을. 그러면 이 편지내용을 주신 분이 이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리는 죽고 예수님처럼 다시 영생의 부활이 되는 거예요. 그게 성도 안에 작동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그 주님의 형상이 있는 자가 바로 인간입니다.

성도와 성도의 만남이라 하는 것은 이처럼 ‘나는 죽어야 되는데 예수님이 나를 살려줬다.’ 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제부로 죽었는데 오늘 또 살게 하고, 오늘부로 죽었는데 내일 혹시 또 살게 만들고, 왜 자꾸 죽었는데 살게 만드느냐?’ 하면 그 편지내용의 주인공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죽었다가 사신분이기 때문에 그 주님의 내용을 편지의 완성으로 담기 위해서는 우리를 맨날 죽였다가 살리시고, 죽였다가 살리시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운반하는 운반체고요. 따라서 예수님이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은 이 성경을 보면서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님, 제가 우상을 섬겼습니다. 제가 이 말씀대로 못살았습니다. 제가 거짓말했습니다. 살인했습니다. 제가 간음했습니다. 나쁜 짓 했습니다.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자기 안에 이미 성령이 오고 예수님이 오시면 뭐냐?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내가 잘못이다’가 돼요.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머리 나쁜 사람 이거 못 알아듣는다. 내가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가 아니라 ‘나 자체가 오류입니다. 나 자체가 오류기 때문에 더이상 나의 행함과 나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 내가 관심 두지 않겠습니다.’ 그거예요.

우리아 장군이 요압에게 전하는 편지, 자기에게 맡긴 그 편지 덕분에 우리아 장군은 죽고, 우리아 장군은 자기에게 편지를 준 그 다윗에게 준 다윗언약 덕분에 우리아 장군은 영생을 얻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우리아 이름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실어나르는 것은 ‘내 인생이 이렇습니다. 내 인생, 나는 저주, 혹은 축복받습니다.’가 아니라 내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식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그 작업, 하나님의 형상의 심판의 작업, 구원의 작업이 내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전달하는 운송하는 운송 존재가 바로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뭐든지 부지런히 행해요. 부지런히 행하는데 인간은 어떤 존재냐? 성령이 없으면 자기가 유발한 그 일속에서 어떤 경우라도 자기 의로움을 꼭 캐내요. 꼭 뽑아냅니다. 그게 바로 저주받은 짓이 되는 거예요.

어떤 일을 벌여놓고 그걸 다시 회상을 해보세요. 거기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그래도 나는 선방했다. 내 인생 괜찮았다.’ 본성대로 자기 잘남을 증거, 자기 증거를 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없으면! 그러면 자기 잘남을 운송하는 운반체로서 사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창세 전에 있었던 율법의 세계와 창세 이후 범죄한 이후 인간들의 세계가 이 세상에서 경합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내부에서도 경합하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면 멸절한다, 할 때 우상을 섬기지 말라, 가 아니라 ‘우상을 현재 네가 섬길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을 네가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멸절당하는 것이 마땅함을 네가 인정하라는 겁니다. 너는 죽는 것이 마땅하고 살리는 몫은 누구 몫인가? 바로 찾아오신 예수님의 몫으로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매일같이 죽고 주님의 살려내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릴 때까지 계속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렇게 오늘 살고 나 된 것은, 이것은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내 의를 뽑는 게 아니고 “주님의 행하심이 참 의롭습니다.”하고 주님의 의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스바냐라는 예언이, 율법언약, 언약이 이미 우리 안에 완성된 사람의 성경해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자신 잘 되기 위한 것이 우리의 끝장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앉게 된 이 자체가 주님의 결정인 것을 증거 하는 것, 살아 있을 때부터 인정하는 그것, 그게 우리의 할 일인 줄 압니다. 더이상 우리 행한 것에 대해서 우리의 잘남을 뽑아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