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5 공은주 녹취록 댓글
임청일 200315
공은주집사님 화이팅! 빨리 올려주셔서 감사! 기록입니다.
공은주 200316
내 위주로 말씀을 다뤘습니다. 내 팔 안으로 여겨서 긴박하게 녹취했고, 내 팔의 밖이라고 여김으로 안일하게 녹취를 했던 겁니다.
“거봐! 진작 시인했으면 이런 해프닝은 벌어지지 않았잖아.”
모눈종이에 사방이 찍혀져 너덜너덜 구멍이 나야 주님의 사건이 보이는군요. 요번에 코로나 사건으로 새롭게 주님의 하시는 일을 알게 됐습니다. “믿음 없음을 보여주자!” 라는 식의 죄가, 죄가 아니라 말씀대로 지키고자 했던 것도 예상 밖으로 뭉개서 그것도 내 의라는 죄를 발생시키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죄 속에 인간이 갇혀있어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일로 여겼습니다. 한방에 훅 갔습니다. 전염병도 주께서 보내심으로 결국에는 말씀 앞에서 지킬 수 없음을 드러내심으로 말씀 속에 주님의 죽음 희생이 흐르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주에게로 와서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면서 인간의 모든 의는 파괴시키고 주님의 의만 십자가만 높이시니 합당합니다. 감사합니다.
안양20200312a야고보서5장9절 :선(先)-미래-이 근호 목사
지금부터 안양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입니다. 야고보서5장부터 보겠습니다. 지금 안양강의 야고보서를 다 마무리한 가운데서 총 정리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정리하는 가운데서 야고보서 전체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어지고 어떻게 연관되느냐를 우리가 살펴보면 되겠지요. 이 야고보서4장에 보게 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누구로부터 간섭받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 야고보서4장11절에 보게 되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라고 해서 인간 대 인간만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 중간에 율법이 개입되고 있어요. 인간 대 인간이 마주보고 있는 그런 상황. 그런 상황에 있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서로가 서로를 마주본다. 이게 현실의 전부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니까요. 인간 대 인간의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야고보는 뭘 강조하느냐 하면 여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율법을 집어넣어요. 율법이니까 율을 가로 하니까 법을 집어넣는 겁니다. 이 법의 특징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에서는 서로 융통성이 용납이 되지요. 융통성은 합의 또는 협의에 의해서 조정 가능합니다. 이렇게 조정 가능한 것이 뭐가 되느냐 인간의 미래 또는 인간의 역사로 계속 이어질 수 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융통성.
그러니까 이 미래나 역사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 대 인간끼리 잘 의사만 조정이 된다면 거기에 따라서 미래와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서4장에서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인간하고 협상하거나 타협할 의사가 전혀 없어요. 그러면 인간들은 평소에 사람하고 상대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인생을 유리하게 가져가려고 하는데 전혀 융통성이 없는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차고, 치고 들어오게 되면 율법 같은 것은 이건 안보면 그만 아니냐. 치워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TV뉴스나 이런데 율법내용이 안 나오지요. 이건 걷어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야고보서5장에 들어오면 이 율법이 뭘 하느냐 하면 인간은 강제로 율법을 걷어내고 싶어 하지만, 율법이 인간 전체에 심판자로 개입한다는 거죠. 율법이 인간 세계에 심판자로 개입해버리면 인간과 인간들이 정답게 협의하고 잘 마무리 되었던 인간의 그 합의체가 그 조정한 것이 인간의 미래와 역사가 이건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심판에 의해서 완전히 파탄 나는 겁니다.
율법은 조정이 되지 않고 인간들은 인간 눈에 보이는 인간들과 협의하고 싶고 그런데 율법은 눈치코치도 없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관여한다 말이죠. 자, 율법의 이러한 관여는 인간들이 이 율법의 개입을, 개입에 대해서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그러한 방식은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인간하고 협의하고 하는 대신에 율법과 의논해서 뭔가 자기 인생을 따로 꾸려나가겠다는 이러한 모든 시도를 한다 할지라도 율법이 주는 심판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에서 제외되지를 않지요. 율법은 아주 단호한 겁니다.
옛날 출애굽 할 때에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나올 때에 그 어린양 피를 바른 자들만 맏이가 죽지 않고 살아나온 거 그걸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시면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언급할 때에 인간들은 그냥 아무 맹탕으로 율법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방금 제가 설명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어떤 자기 자신에 대한 미래, 역사, 자기의 운명 같은 것을 스스로 그것을 만들려고 시도하겠지요. 미래 역사는 우리 손에 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는 우리가 정해진다. 라고 하지요.
거기에 대해서 율법은 뭐냐 하면 율법은 선(先)미래라고 할 수 있는데 선(先) 미리, 미리 미래를 현재 속에다가 율법 안에 담아서 미리 줘버리는 거예요. 확정된 미래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주는 확정된 미래와 인간들이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서 미확정된 미래를 꾸려나갔던 그 미래상하고 여기서 의견충돌이 일어나겠지요.
내가 생각하는 미래와 율법이 이미 정해 놓은 미래 사이에 마찰이 일어난다 말이죠. 당연히 사람들은 율법이 정해 놓은 미리 상을 좋아하지 않고 본인이 유리하도록 조정된 미래에 대해서 좋아하겠지요. 그러면 율법이 선 미래라고 여겼던 그 미래는 그걸 율법 쪽에서 먼저 제시를 해주게 되면 인간들은 그 율법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내가 알아서 하겠다. 우리가 보통 이런 식으로 또 율법에 대해서 대처하려고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돼요. 왜냐 하면 율법이 말하는 선 미래는 감추어져 있어요. 감추어져 있고.
그것이 나타나는 경우는 인간이 자기 욕심대로 자기 소원대로 일을 꾸려나가는 그것을 계속해서 저지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미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미래는 이렇게 전개된다. 이렇게 알려주면 좋겠는데, 그런 방식이 아니다 말이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주식을 샀다. 주식이 오를지 내릴지를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을 보니까 ‘야, 한 달 후에는 주식 값이 오르겠다.’ 이렇게 미리 알려주게 되면 ‘오, 그러면 많이 사놓으면 되겠네.’ 라는 이게 대체가 가능하지요. 그런데 율법의 미래는 그런 것을 주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있다가 ‘아, 주식을 샀으니까 내 주시만 다 오르고 남의 주식은 다 떨어져가지고 나만 떼돈 벌어야 되겠다.’라고 시도하는 순간 그것을 방해하고 훼방하고 그러한 목표가 되지 않도록 아주 부정해버리면 작살내버리면 그런 방식으로 율법은 작용한다 말입니다.
초치기죠. 다 된 밥에 초치기 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가 인간들의 하는 의도대로 되지 않게 하는 방식이 율법 안에 들어있는 미래입니다.
미래라 하는 것은 나중에 올 것이라 하지만 율법의 이런 선 미래는 인간에 의해 뜻대로 되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이미 우리 속에 율법의 선 미래가 우리 인생 속에 또는 이 세상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이 그런 식으로 나오느냐 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 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충분하게 우리가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 여기 있고, 여기는 지상의 인간들의 세계입니다. 인간들의 세계인데, 그동안 인간들의 세계 가운데에서 유독 특이한 민족이 있다면 그건 이스라엘이 되겠지요. 이스라엘을 인간들 속에 핵심으로 여기 있다고 치고, 그동안 하늘나라에서 조용히 계신 게 아니었지요. 하늘나라에서 계속 이스라엘에게 뭘 줬느냐 하면, 언약을 준 겁니다.
율법은 바로 그 율법을 그 언약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야고보서에서의 선지자나 모세 전체를 언약이라고 또는 이걸 같은 말로 율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을 계속해서 주셨다 말이죠. 주셨는데 마지막 때는 누굴 보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오셨지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 아들이 하나님이 되시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 땅에 왔다. 말이죠. 이 아들이 왔을 때는 율법 따라, 언약 따라 오신 거예요.
그 시대 사람에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뭐냐 하면 미래가 아니고, 선미래. 미래보다 일찍 앞서 온 미래. 현재 속에 삽입된 미래로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인간들의 세계는 자기만의 세계가 구축되어 있고, 예수님이 메시아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 같아서 계속해서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우리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품고 있는 장래 계획에 대해서 궁금해 하면서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항상 심판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내가 온 것은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고 이 땅에 불을 질러버리러 왔다.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심판에 대해서 왜 선 미래적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어떤 세계를 단호하게 거절하느냐 하면 우리 세계가 심판받는 세계다. 라는 사실만큼은 그들이 극구 거부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렇게 길을 가는데 마지막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절벽으로 떨어진다면 누가 이 길을 가겠어요? 이 길이 천국으로 이어진다고 여길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길 따라 산 넘어 천국이 있다면 이 산속으로 가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오신 분이잖아요.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이 이야기하기를 그쪽은 아니고 이쪽이라는 겁니다. 그쪽은 니가 알지를 못하고 바로 너희 세계는 지금 천국이라고 여기는 그 세계가 사실은 지옥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세계로 너희들이 가고 있다고 언급을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왜 그런데, 왜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심판받아야 하는가, 에 대해서 납득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왜 그러면 안 되는데?” 라고 나오는 거예요. “왜 그러는데? 니가 지옥 안가야 될 이유가 너한테 있느냐?” 라고 되묻지요.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왜 우리는 심판받아야 됩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니가 왜 심판 안 받아야 될 건데?”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차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기적과 행위와 말씀은 이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는 겁니다.
인간들에게는 차이를 이렇게 나타나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어디에 갇혀있는데 출생에서부터 쭉 가다가 어디에 막혀있다 또는 갇혀있다. 어디에 막혀 있느냐 하면 이 죽음이라는 것에 인간은 출생에서 막혀있어요.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지금 계속해서 야고보서4장에 나오는 율법이야기하고 거기에 5장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협의해서 이루어지는 이런 평화스러운 인간세계에 대해서 그냥 무단으로 개입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율법 따라 오신 분이 예수님인데 예수님 역시 율법을 가지고 무단으로 개입하고 성령께서도 무단으로 개입하는 겁니다. 개입할 때,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차이나기 때문에 개입하는 그 모습이 무슨 모습이냐 하면 아니다, 틀렸다, 하는 평가하겠다는 심판의 모습으로 오게 되어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더 진도 나가게 되면 인간들의 세계가 어디에 문제 있는가 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죽음에서 항상 쭉 세계에 대해서 관찰하다가 죽음 문제에 와서는 되돌아가는 거예요. 죽음 문제에 대해서. 좀 상세히 설명하면,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유리한 것들은 다 정보들을 모아서 삶을 영위하는데 도움 되라고 온갖 지혜를 끄집어내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죽음 뒤가 불확실하다. 무조건 뒤가 불확실하다, 에요.
남은 것은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고 있으니까 확실하다고 우길 수 있는데, 문제는 죽고 난 뒤에 불확실한 거예요. 죽고 난 뒤에는 선배들 보니까 그냥 구더기하고 한패 돼가지고 썩어 가고 있더라 말이죠. 그렇다면 흙이 되어가는 모습만 볼 뿐이지 죽고 난 뒤에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면 문제는 살아있을 때, 살아있는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죽음 문제를 나중 문제로 돌리고, 죽을 때는 죽더라도 지금은 산 사람이나 살아야지. 하는 식으로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개입할 때, 이 죽는다는 것은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에 완성의 일환으로서 하나의 절차로서 인간에게 죽음이 왔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계획에 이미 계획이 포함되어있다고 보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이 자기가 죽음이 오던 자기 일이 뜻대로 안되던 그건 자기 자신에 계획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할 게 아니라 그걸 좋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자기에게 어떤 일이 발생되더라도 이미 요지부동 확정된 율법이 제시한 그 미래의 선 미래. 미래가 일찍 현재화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4장에서 후반부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4장 13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익을 보겠다. 그건 자기가 생각한 아까 말한 자기 미래지요. 자기 계획이고. 자기 운명이고.
그런데 그 다음에 14절에, 내일 일은 너희들이 알지 못한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 대 인간세계 같으면 미래라 하는 것은 인간이 결정한 개입만 하면 되는데, 여기에 누가 개입했다고 하는 겁니까? 율법이 그냥 개입한 거예요. 율법이 개입하니까 세상은 율법 따라 가게 돼있지.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어가는 거 아니다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한다고 인간들이 또 자기 계획을 철회할 그런 위인들이 아니잖아요. 오기가 있어가지고 고집대로 밀어붙이지요.
그러면 주워지는 것은 뭐냐 하면 점점 뭐가 가중되는가, 율법이 준 심판이 가중되는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살게 될 것이냐, 하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이미 율법이 다 결정지어져 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율법대로. 말씀대로. 이미 결정지어진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러면 율법만 공부하면 되느냐, 그게 아니고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하면서 그것이 좌절되고 또는 좌절의 비슷한말 예상 밖의 어떤 일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참 많이 있지요. 아주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이게 기적이라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사는 것 자체가 당연한 것이 아니고 기적이라는 거예요. 안 살아도 되는데 지금 내가 살고 있으니까 이 어찌 신기하지 아니하리요,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는 거예요. 내가.
그런데 정답은 뭐냐, 신기한데 정답은 뭐냐, 율법이 여기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율법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게 야고보서에서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성도의 인생관입니다. 내 인간으로 자체를 생각할 때,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몰라요. 내가 왜 있어야 하는지. 없어도 되는데 왜 있어야 되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하지만, 율법이 개입되게 되면 바로 율법이 품고 있는 그 미래 또는 그 과거, 지금 현재 그 운명을 위해서 성도는 율법과 연관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정답이 나오는 겁니다. 그 정답에 대해서 야고보서4장에서는 끝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5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도 한다.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그 뒤에 말은 주의 뜻이면, 이것저것 하다가 죽을 때 되면 죽기도 한다는 것도 포함되는 거지요.
주의 뜻은 주의 뜻으로 선 미래이기 때문에 지금 선 미래라는 말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두 주의 뜻에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주의 뜻이 벗어난 적이 없는 주의 뜻이 이 성도에게 도달되게 되면 성도는 주의 뜻에 포섭이 되어서 어디에 합류하느냐, “주의 뜻대로 되었음을 감사하나이다.” 로 이렇게 감사하는 것으로 포섭이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이 하는 가운데서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할 수도 있고, 장사 성공할 수도 있고, 주식 투자할 수도 있고, 말아먹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마저 주의 뜻의 일환으로서 이미 그런 일이 꼭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뜻이면 주의 뜻 앞에서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여기에 16절에 보면 허탈한 자랑은 하지 마라. 허탈한 자랑.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 있어서 이 현재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자랑거리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내세울 것은 전무하다는 없다는 거예요. 어떤 자랑거리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래도 고집스럽게 자랑한다면 이것은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인이라, 라고 되어있어요.
자, 율법부터 시작한 율법이 인간 세계에 개입해서 또는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니까 개입해서 결국은 나타난 그 결과는 뭐냐 이 세상에 왜 하나님이 인간하고 의논하지 않는가, 그것은 인간이 악하고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거예요. 죄를 죄로 드러나는 율법의 기능을 하나님께서는 멈추지 않고 충실하게 이행하시는 거예요. 주의 뜻은 죄인을 들추어내게 함으로서 우리가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원래 율법의 개입이 그러한 목적과 취지를 품고 율법이 이 땅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다 완성으로 찾아 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생각해야 될 것은 율법이 그런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도대체 우리 인간이 뭐가 잘못됐는데? 왜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왜 안 받아주는데? 왜 인간이 인간끼리 협동해서 협의해서 인간세계의 미래 이루는 대에 대해서 왜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그걸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먼저 율법이 여기 개입해서 하나, 하나 그걸 좌절시키는 이유가 뭔가’ 라는 그런 생각을 가질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야고보서5장에 보게 되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5장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 그 다음에 제가 요걸 크게 중요합니다. 까지. 그 다음에 5장 3절에 보면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너희가 크게 쓸게요. 말세에, 부자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요걸 큰 글자를 빨간 글자로 쓴 것을 네모지어 보겠습니다. 말세에, 까지, 또 하나 더 해볼게요. 8절에 보게 되면,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가깝다. 말세, 까지, 가깝다. 주의 강림이 가깝다. 그 다음에 9절에 보면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심판주가 문 앞에 계신다. 자, 여기까지만 하지요. 요 빨갛게 쓴 4개의 공통점은 전부 다 뭐냐 하면 시간에 관한 거예요. 시간.
아까 이야기한 선미래. 인간에게는 선 미래라는 건 없습니다. 미래는 아직 도달되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고 바라고 상상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미래, 미래에 일어날 것을 심판의 형식으로 인간의 시간대를 덮쳐버리지요. 뭐 뭐 까지, 가까우니라, 문 앞에, 말세에, 하는 이것은 두 겹이 있어야 가능한 거예요.
미리 아는 자에게만 이게 인내, 길이 참고가 성립이 돼요. 미래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면 미리 참고가 안 되잖아요. 미래가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통해서 미리 아는 자. 미리 내가 안다는 것은 그 미래에 가서 확인해 보는 것이 아니에요. 확인하나 마나 율법이 내 안에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 들어와 버리면 장차 일어난 일이 벌써 내 안에서 개시가 된 거예요. 시작이 된 거예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성경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성과 합리성으로 논리성으로 이해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큰 잘못이에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영이 오지 않으면 성경은 이해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미래라 하는 것은 그냥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막연함이거든요. 막연함. 한 번 해보고 없으면 그만이고.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죽어서 천국 있으면 좋겠지. 없어도 그만이고.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죽어서 꼭 주의 음성을 듣고 지옥에 갈 사람은 지옥가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 간다. 꼭 그렇다. 라는 것이 있어버리면 그것이 현재의 그 사실이 현재에 선 미래로 개입해버리면 현재 삶이 확연하게 달라진다는 거예요. 참고가 되고, 가까이, 말세에, 문 앞에, 이게 전부 다 말씀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리고 어디 가서 장사할 때 그냥 잘 되어야 할 텐데, 가 아니라 잘되든 못되든 이 장사하게 하신 것도 예수님의 하나님의 선 미래의 개입으로서 시작을 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랑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에 그렇지요.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기적이라고요. 낯설고 기적이고. 기적보다 더 같은 뜻입니다. 신기하지요. 신기한데 왜 신기하느냐, 그건 내가 꾸려나가는 미래가 아니라 율법의 개입으로 이미 그쪽으로 쏠려나가야 되고 몰아세워져 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신기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진도를 더 나가보겠습니다. 인간의 시간관에 문제가 있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이걸 알려면 인간의 시간관에 문제 있다. 문제 있어요. 왜? 인간의 시간은 어디서 나오느냐, 인간의 기억에서 나오거든요. 인간의 살아온 기억. 체험된 것 중에서 뽑아낸 기억. 그 기억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기억이 어떤 기억이냐, 지식 기억이 있어요. 또 하나의 기억은 뭐냐 하면 이런 용어는 잘 안 쓰는데요. 자서전 기억 또는 일화. 어떤 일이 있었다. 일화, 보통 이야기, 스토리라는 뜻 아닙니까. 자서전 기억.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자, 예를 들면 쉬워요. 내가 옛날 고등학교 졸업한지 아주 오래 된 사람에게 “당신의 출신학교 위치와 이름을 압니까?” 라고 물으면 알아요. “예, 알지요. 학교 이름은 무슨 학교고, 위치는 여깁니다.” 이런 것이 지식 기억이에요. 그런데 자서전 기억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좀 어려운데요. 그 때 그 학교 입학식 할 때, 또는 그 학교에서 운동장에서 축구하다가 발 다친 거. 또는 그 학교에서 청소하면서 왁자지껄 친구하고 청소하고 유리창 닦다가 유리창 깨지고 여러 가지 일이 있지요. 그걸 감정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때 감정 또는 감흥. 청소할 때 왁자지껄 하면서 나오는 그 소음뿐만 아닙니다. 손에 걸레질할 때 닿았던 그 손에 촉감과 냄새까지 그 어떤 친구와 짝이 되어서 당번이 돼서 물걸레질 할 때 물걸레의 그 냄새. 그 냄새마저 수십년 지나도 그 냄새가 잊혀지지 않지요.
자식은 찾아보면 되지만 그 감정은 내 몸에서 우러나는 거예요.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이 지식기억은 내 머리가 기억하고 있지만. 이 몸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그냥 하지 않고 자서전 기억이라는 말은 인간의 기억과 인간의 시간이 지금 현재 내 몸에 나의 자아에 장, 필드, 자아의 영역, 또는 자아의 숭고한 나만의 세계를 형성시키는 결과물로서 현재 이 인간의 시간은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나는 과거가 집대성된 지금의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과 경쟁하는 우상이 되어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심판 받을 만하지요. 연구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어요.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의논하듯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우리는 현재에 있는 나라는 것. 나에 대해서 그 율법과 같이 협의하고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면 만사가 잘 풀릴 줄 알았지요. 내가 어떤 상태인지 율법이 보시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 십자가에서 보시기에 나는 어떤 상태인가를 본인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모르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4장 끝에 나오지만, 자기자랑을 내가 자꾸 부정해야 되고, 거두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본인이 도통 그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아니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하는데 그게 무슨 문제이냐는 거예요. 인간이 결국 모든 시간은 어디로 흘러 들어가느냐 하면 현재의 나를 정당화하고, 현재의 나를 절대시하고, 현재의 나는 우수하다고 여기는, 대단하다고 여기는, 여기에 모든 기억과 시간을 여기에 다 투자가 되고 몰입된 거예요.
그러나 아까 했던 말세에 보세요. ~까지, 가까우니라, 참아라, 심판주가 문 앞에 있다. 이 말씀은 만약에 우리 자신이 우상화된 상태라면 이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자,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 자신에게 모든 미래를 안 맡겼다는 거예요. 안 맡겼기 때문에 미래에 결정한 것은 니가 지금 그 주님 오시는 미래를 니가 곱게 자라서 기다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 자신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자신을. 주님을 기다리겠다는 내 자신을 향하여 지금 주께서 심판을 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꾸준히 단순히 지식만 모운 게 아니고 나를 주인공으로 한 자서전을 꾸준히 써왔기 때문에 인간에서는 이러한 반율법적인 행위에서 스스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어느 인간이 말세를 좋아하겠습니까. 어느 인간이 주의 강림을 요청하겠습니까. 참고, 기다려라. 심판이 가까웠다. 주님께서는 어느 인간이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을 야고보서5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부유한 자라고 해요. 부유한 자.
그러면 반대로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냥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유한 사람에게 억울함을 당한 가난한 자. 다시 말해서 자신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 것은 누구나 그렇게 그런 속성이 있는데 그게 자기 마음대로 안됐다 이 말입니다. 자기가 절대화하고 싶은데 부자한테 호되게 당해버렸어요.
여기 5장에 나온 말씀대로 일은 했는데 품삯을 못 받았다 이 말이지요. 일은 했는데 품삯을 못 받았으니까 무엇에 차질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의 나 우상화 작업에 큰 차질이 일어난 거예요. 이건 자아의 붕괴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인생 망한 거예요. 부자 때문에. 품삯을 못 받았으니까. 자기 정당화, 우상화에 여기에 계획에 실패한 거예요.
자, 그 실패한 경우, 이 경우라는 말은 자기를 위한 시간에 흐름 자체가 결국 자기로 하여금 실패한 인생으로 몰아세웠다면 이건 내 시간, 인간의 시간 말고 다른 계획에 준해서 움직이는 시간이 따로 있음을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다는 것이 야고보서5장의 내용입니다. 전개과정이에요.
나를 위한 시간. 나를 위한 세상. 그것이 처참하게 망가지고 실패로 끝나고, 좌절될 때,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고 다른 분을 위한 시간일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거예요.
이 세상은 율법,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일하심을 위한 시간이지, 나는 이 땅에서 이렇게 성공 했니, 잘했니, 그것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까 제가 자서전적 기억이라고 했지요. 자서전 기억.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요. 지식기억도 이 자서전기억을 전부 다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걸 내포하는 이 순간,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진행시키는 이 세상의 의미, 예수님의 강림하시기 위해서 심판의 대상으로서의 이 세상을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들의 세상을 꾸려나가게 했다는 그 내용은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 야고보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사, 하늘의 은사 또는 성령.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이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특히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두둔하고 품삯을 받지 못한 두둔하는 모습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은 가난한 자가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가난하던 부자던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바가 이 세상이 추구하는 바가 스스로 절대화 되는 것. 부유한 존재를 자기의 미래상으로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사전에 언급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과 짝하는 자는 하나님께 원수라고.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가. 그건 부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자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부자한테 당한 자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마치 율법이 이 땅에 왔을 때, 당했던 그 모욕과 그 무시당함과 그리고 천대 받았던 그것을 이 가난한 자를 통해서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5장11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자, 인내하는 자. 이 인내하는 시간에 서로 다른 시간. 하늘의 시간과 하늘나라의 시간이라고 했지요. 이 땅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미래가 아니고 이미 미리 온 선 (先)미래지요.
이 하늘나라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 양쪽을 다 알고 있는 사람, 이게 바로 여기에 욥이라고 보고 그가 욥이 이 땅에 대한 어떤 기대나 부자 되겠다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은 전부 다 욥은 생각하지 않는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
다시 야고보서4장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도리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한다는 그런 마음을 가진 자가 욥이라는 이 말이죠. 어차피 어떻게 해도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의 소망대로 굴러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확정된 율법대로 굴러가기 때문에 욥의 입장에 있다면 욥은 기다림뿐이지요. 그걸 욥의 인내라고 하는 겁니다.
둘 다의 시간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여기서 뭐가 발생된다? 진정한 인내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 인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몸 딛고 있는 이 세상은 결국은 작살난다는 겁니다. 이미 작살나는 걸로 확정지어졌다는 겁니다. 미래는 심판 받는다가 아니라 미래가 심판받고 이 세상이 멸망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 심판과 멸망이 지금 현재로 느껴지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성도라는 뜻이에요.
7, 8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농부가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너희도 마음을 굳게 하라. 그 마음은 이게 두 개의 시간을 다 알고 있는 사람에 해당되는 마음이에요.
이거 하늘나라의 시간을 모르는 사람, 율법의 완성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끊임없이 그냥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뿐이지요. 주님께서 강림하시겠지 뭐. 나중에 세상 멸망하겠지. 그게 그런 식이 아니고 그리되면 그건 인내가 아니에요. 그냥 막연함이고 모호함이지요. 불확실한 믿음이지요.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삶 자체가 율법을 율법 되게 하기 위해서 선미래적 작품으로서 이 세상에 지금 박혀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꽂혀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자, 요점을 가지고 좀 더 개인적으로 이어져 가면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아까 그림을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협의해 살아간다. 그런데 어디에 막혔느냐, 죽음이라는 벽에 막혀있지요. 죽음이라는 벽. 더 진도 나갈 수가 없어요. 왜? 완전벽이니까. 죽었다 살아난 사람 없잖아요. 아무리 협의해도 전부 다 아직 죽기 전의 지식만 아는 사람끼리 자기들끼리야 그 정도 선에서의 정보를 교환할 뿐이지요.
그런데 이 죽음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꾸 상상하는 거예요.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산다는 식으로 여기서 자꾸 자신을 끄집어내는데 문제는 죽고 난 뒤의 천국 있고, 영생하는 나라가 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갑자기 자기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느냐 하면 불멸의 존재로 자기를 인식하게 돼요. 불멸의 존재.
무슨 근거에 의해서 자기가 불멸의 존재입니까? 불멸의 존재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심판 받을 대상이 아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불멸의 존재에요. 심판을 받을 대상이 아니다. 나 원래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안 받을 거야. 뭐 이런 고집 같은 게 있다 말이죠. 이게 얼마나 마귀 적 입니까? 악마적이에요.
율법은 분명히 심판한다. 심판주가 계시다고 했는데, 심판이 없이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막연하게 죽은 뒤의 세계를 상상해서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서 그걸 믿겠다는 것이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종교라는 거예요.
종교를 갖겠다는 이것조차도 율법 앞에서, 주님 앞에서, 이것조차도 심판의 대상인 것을 인정해야지요. 자칫하게 되면 이 종교를 가진 본인이 자기 자신이 자랑거리로 여길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인내하는 것이 아니고 자꾸 대비하고 준비하는 식이 되어버리면 이건 율법의 뜻이 아닙니다. 이건 심판 받을 대상의 태도가 아니에요. 내가 뭘 얻겠다는 식은 안 된다 말이죠.
지금 이미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율법이 있기에 그 율법의 선 미래적인 증거물로서 내가 여기 있다. 그렇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여기 11절에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이 나와 있어요.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지금 강의한 것이 바로 결말을 보았느니라. 이걸 제가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선미래. 미래를 미리 여기 우리가 도달했다, 도착했다는 겁니다. 장차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대로 주께서 필히 그렇게 이루신다는 거예요. 따라서 인내라고 해가지고 울고, 불고, 짜고, 그게 인내가 아니지요. 그냥 막 사는 거예요. 막 사는 것. 왜냐, 막 살아도 내 뜻에 막사는 주께서는 허용을 안 한다는 것을 뻔히 아는 가운데 막 사는 거예요. 사람이 어떻게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게 아니거든요. 항상 미래를 예상하면서 나한테 유리할 것인가를 고려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엄밀하게 막 사는 게 아니지요. 나를 빼놓고 생각 안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성도는 나를 빼놓고 주님의 율법대로 되어 지기를 바라면서 사는 것. 이게 막 사는 거죠. 자기를 빼놓고 사는 거예요. 왜냐 하면 자기 자신은 주께서 몰아세우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입장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야고보서에서 이런 자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늘의 은사를 받은 자라. 성도가 되겠습니다. 이걸 야고보서1장에서는 마지막 때 나타날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4장 뒷부분에서 5장 11절까지 내용을 이렇게 언급을 했습니다. 5장 2절을 다시 보게 되면, 너희 재물은 썩었고. 부한 자들아, 너희 재물은 썩었다는 것은 분명히 부자 집에 있는 재물은 안 썩었어요. 하지만, 선 미래적으로 보게 되면 이미 썩은 것을 모으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말이죠. 누구 안목으로?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에 너희들이 모은 것은 쓰레기를 모은 거예요. 썩어질 것이 아니라 이미 썩은 것으로 단정 지어지고 규정된 것을 계속 집구석에 모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모았던 썩어진 것은 누구 것이냐, 바로 남들에게 돌아갈 몫을 본인이 다 횡령해서 착취해서 썩어놓았다. 이렇게 몰아세우는 이유는 어떤 사람이 특정사람이 그렇다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지향하는 방향, 그리고 소망, 이 모든 것이 부자 되기 위한 것으로 소망한다면 이 부자 됨이라는 것은 남의 것을 착취하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