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패는 하나님

아빠와 함께 2022. 12. 28. 22:22

설교노트

 

패는 하나님 

2022년 12월 28일                  본문 말씀: 하박국 2:18-20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2:19)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인간 세상에서 내세우는 신은 모조리 우상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이미 악마로부터 농락당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 본인이 관리하거나 주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신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인간들 세계에서 인간 끼리는 ‘무엇이 바른 신이고 무엇이 거짓 신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우상인 것과 참된 신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야 판단해줄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거저 공감되어 묶어진 인간들만의 세계를 선호합니다. 그 안에서 힘을 한데 모아 이상적(理想的)인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따라서 어느 신이 옳은 신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속해 있는 단체에서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이는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나타나셔야 비로소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이 우상인 것으로 밝혀집니다. 십계명에서 제일 된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근거는 출애굽기 20:2에 나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즉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오게 됨으로서 비로소 참된 신과 거짓된 신이 이 세상에 구별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속해 있는 애굽의 신이 왜 우상인지를 그들의 집단에서 벗어나면서 발견하게 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상은 나무나 돌로 만들었기에 말을 못한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들이 만든 신들은 순전히 인간쪽에서 일방적으로 신에게 말하기 위해서 만든 겁니다. 마치 사람이 혼자 상대없이 탁구나 테니스를 치면 본인에게서 나간 공을 되돌려 받는 식으로 반복해서 시합합니다.

이는 곧 인간 내부에 말하는 상대가 들어 있고, 그 상대를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외부에 마련한 것이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상의 본질을 알려면, 인간은 스스로 누구하고 이여기하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 게신 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1:1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니까 세상 모든 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대자연 속에 인간들은 자연이 자신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악마의 사주를 받아 지칭 신처럼 살고픈 인간의 마음과 자연 현실 사이에 갭이 생겨버린 겁니다.

매사가 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연을 통해서 매일같이 억울하게 매맞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착하고 선하고 반듯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아서 나름대로 이만하면 행복할 자격있다고 자부하고 싶은데 이런 착한 나를 누군가 사정없이 패고 있는 겁니다.

어느 누군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울화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그것은 현실 돌아가는 것과 자신의 기대의 불일치로 인한 겁니다. 따라서 화는 어떤 식으로든지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뇌가 터질 지경이지요. 미쳐버리기 전에 타인을 향하여 울분을 퍼붓는데 이것이 범죄입니다.

이 분풀이를 순화해서 스포츠로 풀면 이것이 바로 ‘게임하는 세상상’입니다. 정치를 지켜보는 것도 양패로 나뉘어서 벌리는 게임에 승부를 걸어보는 겁니다. 이도저도 시원찮으면 만만한게 자기 자신이겠지요.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면서 화를 자기에게 풉니다. 그것도 성에 안 차면 자살해버립니다.

교회와서 신을 찾는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그 사회가 인정한 우상을 사용하므로서 대외적으로 (교회 내에서) 신앙심 좋다는 인정받는 것으로 자신의 내부 울분을 다소 달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와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울분을 신을 상대로 해서 일방적으로 자기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즉 “착하기 그지없는 나를 왜 그리 못잡아 먹어서 괴롭히십니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전 앞에서 잠잠할지어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잠잠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전에서 실시되는 심판을 감을 잡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즉 인간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성전 가치 앞에서 무가치하다는 겁니다.

성전은 끊임없이 이 세상을 향하 심판을 쏟아내는 곳입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비멜렉이라 족장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고 싶어했을 때, 그 종족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떨어졌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언약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족장이 사람을 잘못 건드린 대가입니다.

이처럼 성전이란 하나님의 언약이 작용하는 곳입니다. 신약에서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양은 사람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양마저 빈 무덤 남기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내력에는 인간의 거침없는 하나님에 대한 울분을 홀로 다 받아내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겁니다.

따라서 우상이 아닌 참된 신은 예수님 뿐입니다. 이제는 그분마저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인간들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분의 보좌에서 뿌려대는 심판으로 인하여 자욱한 연기가 여기저기서 피어오릅니다. 요한계시록 5장과 6장에 걸쳐 일곱인을 떼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전이 보일 때마다 재앙이 이 세상을 향하여 쏟아집니다. 요한계시록 8장에서 일곱 나팔이 시작됩니다. 일곱은 개시용이요, 일곱 나팔은 경고성 재앙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일곱 대접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심판성이 전면적으로 다 적용된다는 겁니다. 그 끝이 일곱 대접이며 거기서 지옥문이 열립니다.

일곱인과 일곱나팔과 일곱 대접은 서로 물려있는데 그것은 이 심판의 이유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창에 찔렸기 때문이라고 요한계시록 1:7에 나옵니다. 따라서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압니다. 이런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근거는 요한복음 5:24에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즉 예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주의 일이니 그 앞에서 우리 자신의 주장을 내놓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