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
411강-YouTube강의(만족 시편 131:2)20221108-이 근호 목사
제411강, ‘만족’. 만족에 세상 사람들도 만족하고 성도도 만족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둘다 나와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만족한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모든 것이 자기의 권력 속에 권한 속에 놓여 있을 때 만족합니다. 이것은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면서 제안했던 제안 내용이고 너도 신처럼 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선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는 순간 인간은 마치 자기가 신인 양 행세하고 신으로서의 어떤 만족감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인간에게 유혹했던 그 점이 불신자를 통해서 당연히 인간세계에 드러나야 되죠. 이 불신자들, 성경 구약으로 하면 이방민족들, 신앙 없는 자들의 만족이 어떠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쪽의 태도를 보면 파악이 돼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이스라엘을 누가 공격한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원수, 적들이 갖고 있는 성질, 본성을 보여주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왜 있느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적이 누구인가를 이스라엘을 사용해서 보여주는 기능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가 내 행복과 내 기쁨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요. 주께서 쓰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적이 누구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거예요. 사적인 행복이나 사적인 만족 같은 것 가지고 너무 그런 쪽으로 고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다 헛수고에요. 주께서 주의 원수, 주의 적, 마귀에 속한 사람을 들추어내는 하나의 테스트기로서 우리를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불신자 같은 경우에 그들의 만족은 에스더 5장 13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여기 하만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쥐고 휘두르면서 굉장히 기세등등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만이라는 사람이 누구의 최측근 신하냐 하면 아하수에로 왕, 그러니까 바사 나라의 왕이죠, 아하수에로 왕의 모든 권세를 가장 많이 가진 신하가 하만이에요.
그 왕이 어느 날 밤에 하만을 특별히 불러가지고, “내가 칭찬하고 싶은 사람에게 어떤 것을 해주면 내 기분이 흡족하겠는가?” 그렇게 하만에게 물으니까 하만이 마치 왕께 총애 받는 자기에게 왕이 특별한 혜택을 주는 줄 알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왕이 정말 위하고 싶은 사람에게 왕의 옷을 입혀서 사람들에게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널리 광고하시면 됩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왕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그걸로써 왕이 하사하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그런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만이 왕에게 건의했죠. 왜냐하면 그게 자기한테 해당될 줄 알고.
그런데 하만이 이제 기분 들떠가지고 오는데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 만족하지 아니했다. 전체 다를 쥐어야 되는데 하나가 빠져있을 때는 그 빠진 것 때문에 온전한 만족이 되지 못해서 마음이 불쾌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완전한 만족, 완전한 행복을 추구해도 항상 일이 터지게 되어 있어요. 100% 만족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분명히 계획대로 되면 100% 만족해야 되는데 예상 못할 일이 터져가지고 마음 한 구석이 어둡게 될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 비해서 그럼 신자는? 방금 한 건 불신자에요. 불신자는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자기 휘하에 두어야 돼요. 그래야 만족스러운데 하나가 자기 뜻대로 안되게 되면 기분 나빠요. 그런데 사실은 세상 일이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게 당연하죠. 안되는 게 당연한데 뭔가 내 뜻대로 안되면 안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은 지식으로 알고 기분은 별로 안 좋아요.
“하나님 저한테 왜 이래요?” 이런 식으로. 그럼 하나님은 “뭐?”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네가 뭔데? 네가 뭐야? 줬던 거 도로 다 뺏아가? 줬던 거 한번 뺐아가봐?” 항상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불만스러운 투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에 만족하는 상태가 나와 있어요. 시편 131편 보겠습니다. 시편 131편, 이거는 정말 액자 걸어놔도 괜찮아요. 길지도 않아요. 짧아요. 이게 길면 그중에 131편 2절만 해도 괜찮습니다. 1절부터 보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갖게 하였나니”
성도가 어디에 만족하느냐? 엄마하고 같이 있을 때 만족해요. 보호자의 보호를 느낄 때 가장 만족스럽습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되어있죠. 이걸 요즘 말로 하면, 여호와는 나의 보호자시요.
그러니까 보호자가 보호하는 그 하나님의 체면과 위신을 건드리지 마세요. 우리는 보호받을 때 하나님도 만족하고 우리도 만족하는 거예요. 이거는 혼자 살지 말라는 뜻이에요. 젖 뗀 아이가 혼자 삽니까? 젖 뗀 아이가 젖 먹고 난 뒤에 동사무소 가가지고 투표하고 민원 넣고 이래요? 안하죠. 젖 뗀 아이의 자기 분수가 뭐냐 하면 엄마로 하여금 엄마 되게 하는 데에 있어요.
엄마는 젖 주는 기쁨이고 젖 뗀 아이는 젖 먹는 기쁨이에요. 이게 목자와 양의 사이입니다. 양이 자기 젖 가지고 목자 먹이려고 그렇게 애쓰지 마세요. 그것은 오지랖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이거 드릴까요 저거 드릴까요, 하지 마세요.
받은 거나 감사해라, 받은 거나! 내가 준 거나 감사하면 돼요, 준 것. 햇빛, 공기, 목숨, 생명, 심장 뛰기. 주께서 주신 것. 물론 가끔가다 간질이나 암, 위암 말기 이런 것도 받지만......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죠.
우리의 신분을 망각하면 안돼요. 우리의 신분은 젖 뗀 아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신분은 우리의 보호자입니다. 우리는 보호받음으로써 보호자의 위신과 명예와 영광을 드높일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가 만족하면 그게 우리의 만족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만족은 일차적인 나의 만족이 아니라 이차적인 만족이에요. 하나님 만족하신 것을 같이 그 안에서 공유하는 것, 그런 상태를 예수 안이라 합니다. 십자가 안. 하나님은 십자가 지셨잖아요. 그럼 십자가로 만족하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이 매치가 되고 하나가 되고 같은 생각으로 같은 공간에 놓여 살게 되는 겁니다.
특히 131편 1절에 보면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독자적으로 나대지 마시고 주께서 그때그때 하는 일에...... 주께서 시킨 일은, 네가 이거하면 너 잘했다 해줄게, 그게 아니에요.
그 일을 통해서 나는 젖 뗀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늘 각인시키고 확인시키는 그 일이 바로 주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