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사면
폭력과 사면
2022년 10월 26일 본문 말씀: 하박국 1:5-11
(1: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1: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1:8)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1: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10)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1:11)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특별한 조치를 호소합니다. 이스라엘을 우상 섬기는 나라로 그냥 방치하지 말아야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선지자가 모르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조치가 이스라엘을 곱게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와해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는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선입견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잘 어르고 달래주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더는 자신을 스스로 지켜낼 염두가 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부셔버리는 것도 사랑의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아니하면 인간은 스스로 갱신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짜 이스라엘이 부셔져야 비로소 그 현장에 진짜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인간은 본인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 환상은 기존의 자신이 안 다치고 건재해야만 한다는 기대를 바탕으로 깔고서 나온 겁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그동안 큰 이방민족을 선망했습니다. 자신도 그들 나라처럼 많은 힘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 힘으로 지탱하는 나라가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런 것이 이방민족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차이점에서 시편 52:7-8을 통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이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즉 이스라엘은 결코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힘을 축적하면 아니되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본연의 모습을 벗어나서 이방민족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제 하나님게서는 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힘이 얼마나 폭력적이냐를 알려주십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선망한 바벨론 민족의 난폭함으로 체험케 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바벨론(갈대아 사람)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게 하십니다. 이방민족의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옥답습니다. 요지부동 그들은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큰 소리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가짜 이스라엘에서 진짜 이스라엘이 뽑혀져 나와야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미리 예고토록합니다. 이스라엘은 치고 있는 바벨론은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 신 중 하나로 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폭력의 폭풍 속에서 말려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공한 폭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나오는 가인과 아벨부터 시작된 폭력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조성된 현장과 같습니다. 이게 계시요 진실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진실을 곱게 받아드릴 마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세계의 진실도 잘 지내던 사람이 헤어질 때 드러납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귈 때는 절대로 진실을 말해서는 아니됩니다. 진실은 서로를 가깝게 만들지 못하고 미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두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역사를 끌고 가십니다. 왜냐하면 그들 만큼은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상 나라들은 변화될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일관되게 지옥이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2:15-16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즉 이 세상에는 아버지께서 온 것이 없습니다. 가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모세가 애굽의 바로 앞에서 서서 하나님의 지시를 전하니, 바로왕은 다음과 같이 대꾸합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
인간들은 자신에게 복음을 거부할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죽고 난 뒤에나 압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일개 종교 교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 되심이 죽고 난 뒤에 안다고 그 죽음을 앞당기는 겁니다. 이것은 곧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망하기는 기적을 받아야 합니다.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바벨론에 포로잡혀가는 것도 복음이요 계시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알던 자신이 가짜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죄라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자들에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사면입니다. “더는 죄없다”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무엇이 죄였고 무엇이 의였습니까? 주님께서 시키는 것이 의이요, 본인이 본인에게 지시내리는 것이 죄였던 겁니다.
이 사면을 위해 주님이 준비해두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0:30-36의 내용에서 예수님은 강도에 대한 지적이나 비난이나 책임추궁이 없습니다. 강도는 언제나 악한 강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변화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변화로 이어져야 하는 겁니다. 악한 자의 횡포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자를 불쌍히 여기고 조치를 한 자는 이스라엘로부터 불신자라는 소리를 듣는 사마리아사람입니다. 결코 제사장도 아니요 레위인도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내놓아서 치료가 되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사면을 거부할 권한은 성도에게 없습니다. 사면을 받은 자의 태도는 감사와 가벼움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이 사면을 사면되게 드러나기 위해 일어나는 일인 것을 압니다. 따라서 마땅히 무섭고 두렵고 근심되고 걱정되는 것이 없지요. 왜냐하면 ‘다시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롬 8:1,3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진리를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미 죽은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