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2022. 10. 19. 07:21

409강-YouTube강의(돈 누가복음 16:13)20221018-이 근호 목사


제409강, ‘돈’. 돈에 대해서 역시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언급하는가. 누가복음 16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여기 돈에 대해서 재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편을 뭐라고 이렇게 돈과 결부시키느냐 하면 섬기고 있다는 거예요. 돈을 섬기고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인간들은 섬긴다 할 때 돈을 섬긴다는 말을 사람들은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섬긴다는 말을 어디와 결부시키느냐 하면 하나님과 결부시켜서 하죠. 저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돈은 사용하고 활용하지, 돈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라는 식으로 자기가 그렇다고 여기면서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섬김의 라이벌로 섬기는 대상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딱 지정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너 하나님 섬기나, 안 섬기나?” “섬깁니다.” “오케이” 이게 아니라, “돈과 하나님이 있는데 둘 중에 어느 걸 섬길래?” 라는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 섬김의 판단을 내리겠다는 거예요. 이게 주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돈은 내 관리 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6장 13절 초반부터 보게 되면 그걸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의 그 주장을 거부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둘 다를 사랑할 수 없는 그 대상이에요. 나는 하나님도 사랑하지만 돈도 사랑합니다, 는 네가 돈을 몰랐기 때문에 마치 둘 다 사랑이 가능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나?” “사랑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돈을 미워할래? 돈을 미워하는 조건 하에 하나님 사랑한다는 걸 내가 받아줄게.” 이게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취지입니다. 주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그 주변에 뭐가 있느냐 하면 돈 사랑이 얼쩡거리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주시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13절의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해도 돼요. “너는 어느 것을 잃어버렸을 때 네 정신이 나갔더냐?” 이렇게.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 정신이 나갔더냐, 돈을 잃어버릴 때 정신이 나갔더냐?”

“저 하나님 생각이 안나요. 나 이거 더 살 가치도 없어요. 콱 죽을 거야.” 뭐 이런 거. 마포대교에 가서 뛰어내릴 때 “왜 자살합니까?” “나 하나님 생각이 나지 않아요. 지금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이래서 뛰어내리는 사람, 자살하는 가운데 몇 명 있어요?

그런데 마포대교에 가서, 그것도 대교에요 작은 다리가 아니고 큰 다리, 뛰어내릴 때 “왜 그렇습니까?” “돈을 잃었습니다. 돈을 잃으면 나의 전부를 잃은 겁니다. 그게 마지막 쌈짓돈인데 그것마저 날아갔어요.” 그렇게 뛰어내리면서 마음속으로 외치는 게 있어요, 공통적으로. 하나님 미워! 그것 봐요. 하나님 밉다잖아요. 누가복음 16장 13절 딱 그대로잖아요. 내가 원하는 돈을 내가 귀하게 여기는 돈을 계속해서 공급하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미워할 거야! 미워할 거야.

이런 상황에 대해 지금 누가복음 16장에서는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돈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고만고만하게 생활비도 겨우 되는 사람한테는 이런 이야기 안 하셨어요. 왜? 생활비만 겨우 벌고 한 달에 별로 저축도 못 하는 사람한테는 섬김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본인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이냐 돈이냐 뭔가 나 빼놓고 적체하고 쌓아서 대상으로 버젓이 가치가 있는 대상이 뭔가 뚜렷하게 이렇게 있을 때 ‘나 누구를 섬길까?’ 이런 게 되는데 뭐 하나님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돈도 좀 있다 싶으면 생활비로 다 나가버리고 기름값으로 다 나가버리고 없을 때는 누구를 섬기느냐가 성립 안돼요.

그럼 누가복음 16장에서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느냐? 1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거예요. 이들이 돈을 좋아한다는 것은 생활비 벌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빙자해서 하나님을 잘 믿었다는 축복된 증거물을 크게 크게 확장시켜서 자기 눈앞에 버젓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에게, 너 어느 것 섬길래? 뭐 섬길 여유가 있어야지. 뭐 있어야죠. 벌었다 하면 다 나가버리는데 섬길 대상이 없잖아요. 복 받았다는 확증이 되어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도 ‘참, 너 가치 있다. 너 참 대단한 의인이야. 넌 정말 인간다운 인간이야.’ 하나님께서 말로 하시지 말고 돈이 계속 쌓이는 돈의 분량이 늘어나는 것으로 저한테 실제적인 현상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런 식으로 가르쳤어요.

바리새인들은 그걸 율법 핑계대요. 네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율법대로 사는 사람, 우리 바리새인같이 서기관같이 이렇게 율법대로 사는 사람들은 부자 되는 게 마땅하기 때문에 세금 내. 너는 세금 내. 우리 귀한 줄 알고 율법 지키는 게 귀한 줄 알면 세금 내.

그러면 그들은 돈을 얻고 동시에 뭐를 얻느냐? 누가복음 16장 15절에 보면 돈이 많다는 것은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제가 남들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옳게 살고 있다는 그 증거를 돈이 계속 들어오는 것으로 확정지어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나는 옳게 되고 옳으면 내가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높임을 받는 것이 됩니다. 라는 그런 노림수를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딱 정확히 알아야 될 것은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차이나는 정도가 아니고 정반대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욕망에 따라서 욕망에 부응해서 본인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내가 나를 어떻게 처신하느냐, 와 똑같은 거예요. 내가 부자 된다는 것은 내가 옳게 살았다는 뜻이고 옳게 살았다는 것은 하늘의 복을 받았다는 뜻이고 하늘의 복을 받았으니까 나보다 복이 적은 사람, 돈이 적은 사람은 하늘나라 가는 길목에 내가 버젓이 하나의 모델로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나처럼 살게 되면 하나님께 사랑받아서 부자 되고 천국갈 수 있습니다, 라고 자부심을 가질 때 어느 인간이 그 인간을 부러워하지 않겠어요? 높임을 받지 않겠습니까. 이게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세상을 사는 목표요 목적이었던 겁니다.

이게 바리새인만 그럴까요? 평생을 그날 벌어 그날 다 써버리는 그런 인생을 목표로 해서 누가 살아갑니까? 나도 재놓고 쓰고 싶다. 나도 쌓아놓고 빼서 쓰는 좀 그런 재미 누리고 싶다. 누구도 그런 생각 들 거예요. 집에 한 백억 정도 해놓고...... 입생 로랑, 샤넬, 루이비통 하여튼 철마다...... 그리고 프랑스에 유명한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 그런 사람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들.

나도 즐겁고 내가 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에서 우리는 벌써 돈을 섬기는 것이 나를 섬기는 수단이 되고 방법이 된다는 사실이 은연 중에 우리 몸에 배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돈을 주십니다. 돈을 주시고 진짜 네가 하나님을 섬기는지. 그것도 푼돈 주는 게 아니고 재어놓고 주시고 어느 것을 섬기는지를 늘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측정케 하는 그 기쁜 날이 올 겁니다.

글쎄 그게 기쁜 날이 되는지 아니면 말씀이 말씀되고 현실이라는 그 자체를 아는 게 기쁜 날인지, 그것은 그 사람의 속성에 달려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