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산성과 반석

아빠와 함께 2022. 10. 5. 08:09

406강-YouTube강의(산성과 반석 시편 18:2)20221004-이 근호 목사


제406강, ‘산성과 반석’. 산성과 반석, 여기에 관해서 시편 18편 2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반석 나왔죠.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산성 나오죠. 산성과 반석이 전쟁용어입니다. 전쟁의 진지(陣地), 그리고 방어 및 공격용으로 설치되어 있는 건축물이라 볼 수 있어요.

전쟁하려면 적이 있어야 되겠죠. 그럼 전쟁은 누가 일으키는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실시되는 전쟁에 필요한 설치물, 이게 산성이고 이것이 반석입니다.

사람은 전쟁하기 좋아하지 않죠. 화평하고 사이좋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인간들은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아주 못마땅해 합니다. 인생 자체를 힘들게 살기 싫어하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빨리 평화가 오기를 바라고 있죠. 쉽게 말해서 제발 날 좀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에요. 혼자 건사하기도 힘든데 주변에서 날 건드려버리면 현재 내가 나다움을 견지할 수 없다는 거죠. 나의 존재가 유지될 수 없다.

그럼 나의 존재가 유지될 수 없는데 그게 왜 힘드냐? 나의 존재라는 것이 나를 대체하기 때문에 나를 대신해주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모양새기 때문에 내 것이 없으면 나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그래서 인간은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내 것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것으로 나다움을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전쟁은 원치 않습니다.

인간은 전쟁을 원치 않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벌였습니다. 벌이는데 시편 18편 2절에 보니까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이제 문제해결은 났습니다. 방금 제가 이 설교에서 줄곧 이야기한 것이 내가 나 하나 지탱하고 건사하기 상당히 힘들다 하는 것이 각자 우리의 형편입니다.

그러면 내 몸 하나 간수하고 지키기 힘들다면 거기서 건진다는 뜻은 무슨 뜻일까요? 지금 내 인생, 내 것, 나다움 이걸 누가 지킨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느냐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힘든 투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건진다는 말은 결국 우리 쪽에서는 더 이상 나를 지킬 필요가 없게 만드는 상황으로 나를 데려간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이러한 구원받은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전쟁을 통해서 건지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질문을 한번 던져보는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게 되면 구원받은 사람의 답변은 딱 하나이어야 됩니다. “할 것 없어 이 일합니다. 할 것 없어서. 뭐 별로 할 것도 없는데 너무 할 것 없으니까 심심해서 이 일합니다.”

이게 무슨 뜻을 갖고 있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 할 일이 더는 나한테 남아있지 않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나를 위하여. 고린도후서 5장에도 나오죠. 성도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나를 위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게 상식인데 거기에 대해서 부정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거기서 건진다는 거예요, 거기서.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지켜준다는 것이 마땅한데 거기서 나를 건져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일이 사라져버렸어요. 나의 일이 사라져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같이 덩달아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뭐하고 움직이고 하는 건 왜 하느냐? 그냥 손 놓고 있으려하니 심심해서 할 것 없어서 한다, 이게 정답이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나를 위한 성공, 실패는 더 이상 나한테 적용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쉽게 말해서, “나의 전쟁은 더는 없습니다.”에요. “나의 자존심과 나의 가치를 지키는 전쟁을 나는 하지 않습니다. 그 힘든 걸 왜 합니까?” 되받아 질문할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제 시편 18편에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든 사정, 저주받은 사정을 너무 잘 아시고 우리로 하여금 더는 나를 위해서 할 일이 없게 만드는가. 참 이게 성도한테는 굉장히 기쁜 소식이에요.

왜냐하면 나를 위해서 일을 꾸미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스케줄 짜고 프로그램 짜고 일년 계획 짜고 이게 힘들어요. 짜놔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 전혀 없고요. 그리고 이걸 달성해도 과연 결과에 내가 만족할지 안할지 그건 전혀 장담 못하고요. 뭔가 내가 노력했는데 노력한 결과에 대해서 내가 실망할까봐 걱정도 앞서게 되고요. 이런저런 걱정, 근심, 불안, 공포, 나를 이런 힘든 투쟁의 자리에서 좀 데려갔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겠죠.

그런데 여기 시편 18편 2절에 “나를 건지시는 분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입니다.”라고 그렇게 언급되어있어요. 그러면 이 전쟁을 하나님이 실시하셨는데 하나님이 실시하셔서 구원의 산성이라.

산성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설치물, 최종적인 전쟁에 승리했을 때 모든 승리의 성과가 다 집결되는 곳, 그게 산성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걸 시온성이라 이야기하죠. 그 산성, 그 산성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러면 우리를 산성에 데려가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나에 대해서 걱정, 근심이나 염려를 하지 않아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은 우리가 속해있는 우리 인생이 힘든 이유가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원수들이 만든 세계에 우리가 잠겨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절에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내 원수. 원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래야 전쟁이 되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우리가 발을 뺄 능력이 우리한테 일체 없습니다. 외부에서 우리를 건져주게 되면 빠져나오는데 내가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이 원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 원수의 대표적인 무기가 4절에 나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여기에서 사망의 줄, 죽음의 공포, 뻔히 아는 거고요. 그 뒤에 말이 더 중요해요. 불의의 창수, 이게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자기가 죄인으로 낙인찍힐까봐 그것이 모든 공포와 불안의 요인이 되었던 겁니다.

선악체계에 의하면 죄지은 사람에게는 필히 벌이 주어지고 심판이 주어지고 저주가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죄지은 것을 인식하는 순간, 언제 어디서 하나님으로부터 신으로부터 된통으로 얻어맞을지 우리가 불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스케줄 짜고 아무리 계획 잡아도 “너 죄지었잖아.” 한마디. 심지어 이 죄지었다는 말을 어떤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길가에 어린애가 이야기하더라도 우리는 움찔해요.

나에게 하자가 있고 내 인생에 하자가 있고 ‘내가,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일을 다 안다.’고 누가 지나가면서 그런 이야기만 해도 ‘지난 여름에 한 일 때문에 올 가을은 완전히 내 인생 여기서 끝장나는구나.’ 라는 불안감으로 본인이 시나리오를 짜요, 본인이. 본인이 극작가가 되어서 대사 같은 걸 본인이 써요. 5년 전에 했던 일, 8년 전에 했던 그 일이 지금을 어떻게 사단 낼지... 10년 지나도 10년 뒤에 그 전에 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길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뭐 위로하죠. 내가 이렇게 힘든 것은 옛날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아서... 내가 회개합니다, 백날해도 이게 그렇게 해서 없어질 것 같으면 그게 죄가 아니겠죠. 죄책감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예 ‘결국은 다 잊어버리고 사라질 일이다.’ 라는 것을 전쟁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전쟁이 바로 우리 여호와의 전쟁이에요. 지나간 것은 다 지나가버렸고 없어졌다는 겁니다. 왜? 넌 거기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네가 도착한 곳은 원수로부터 격리된 곳이에요. 불의로부터 격리되었으니까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만 가는 시온성이 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건져주심으로서 더는 과거 지나간 그런 죄나 죄책감에 얽매이지 않고 너는 이곳에 살 충분한 자격이 된다. 왜? 네가 착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건졌으니까. 너에게서 나의 원수를 사망을 발로 떼내었으니까. 이것을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어야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