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405강-YouTube강의(상처 스가랴 13:6)20220920-이 근호 목사
제405강, ‘상처’. 상처라 하는 것은 어떤 뉘앙스를 갖고 있느냐 하면, 아파서는 안 될 사람이 억울하게 육체에 손상 입었다는 그런 의미가 있어요. 상처 그 자체는 그런 의미가 아니지만 이상하게 누가 상처 받았다 하면 안 아파야 될 사람이 아팠어, 라는 뉘앙스가 굉장히 강해요.
‘나 당신 때문에 마음에 상처 입었어.’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원래 깔끔하고 깨끗하게 한평생을 보내야 마땅한 그런 건전한 사람인데 네가 들어와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했다, 라 할 때 상처라고 하죠.
그런데 이 상처라는 말보다 더 심화시키는, 상처를 더 키우는 용어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라는 게 있어요. 그냥 마음의 상처 같으면 한때 지나가는 감기 정도가 되는데 트라우마 같으면 이건 못 고친다 라는 뉘앙스가 강하죠. 이건 못 고친다. 틈만 나면 발작을 일으킬 요인이다. 이건 내 운명처럼 같이 간다. 트라우마. 그리고 트라우마라는 말을 하면서 너무 깊숙이 박혀서 이 트라우마 뽑아내려하면 내가 죽어야 뽑아내지, 그 전에는 트라우마 못 뽑아낸다, 그런 뉘앙스가 커요.
성경에서도 상처는 두 가지의 의미방향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누구로부터 억울하게 공격당했다는 느낌이 하나 있어요. 또 하나는 공격당한만큼 공격한 자의 실체, 정체, 본질 이런 것을 철저하게 끝까지 추적해서 처벌하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내 상처를 지우지 않겠노라 하는 뉘앙스가 있어요.
너 때문에 당한 상처를 내가 계속 안 지우고 그 흔적을 남겨두는 거예요.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냥 너는 몰라. 네가 나한테 한 짓으로 인하여 내게 생긴 상처와 서로 연결지어보면 비로소 네가 누구인지를 알 거야. 할 때 그 때 상처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스가랴 13장 6절에 보면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스가랴는 마지막 때 예언이잖아요. 성경에서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중심으로 설명되는 겁니다.
좀 더 설명해드리면 세상 끝 날이 마지막 때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께서는 언약 상대자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하는 그때가 마지막 때에요. 이스라엘 망하면 나머지는 원래부터 망해져 있으니까 망하든 말든 그건 신경 안 쓰고 내 백성이 망하면 그게 마지막 때에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 망하면 그게 마지막 때에요.
역시 이 세상에는 인간 같은 인간 없구나, 그것이 판정받는 데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면 그걸로 내 백성 하나도 없는 셈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만큼은 내 백성이라 했으니까, 내 백성이라 했는데 내 백성이 전부다 배신했으니까 그건 뭐 세상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있는 건덕지가 없죠.
이스라엘을 택한 백성 만들기 위해서 해와 달과 별과 모든 자연 질서들이 이스라엘 중심으로 돌아가거든요. 여호수아 전쟁할 때 해가 멈췄잖아요. 해가 멈췄어요. 하나님께서 해를 멈춘 것은 이스라엘 전쟁에 보탬 되라고 지시내린 거죠. 대자연도 이스라엘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깔끔하게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뭐가 남느냐? 그 이스라엘의 마지막 때에 가짜 선지자들이 설쳐대요. 가짜 선지자들이 설쳐대게 되면 누구의 존재가 희미해지느냐 하면 진짜 선지자가 소멸되어버려요. 가짜 선지자에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전략은 뭐냐? 진짜 선지자로 하여금 상처가 나게 해버리는 겁니다, 두 팔 사이에. 그것도 친구네 집에서. 아니, 친구네 집에서 상처받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 친구네 집인데. 이것은 친구라고 여겼는데, 아하, 이게 원수였다는 것으로 드러날 때.
친구 사이 같으면 서로 상처 줄 일이 없어요. 서로 보듬어주고 위로하죠. 상처는 어떤 경우에 생깁니까? 저 인간을 죽여 마땅할 때 원수지간에 생기잖아요. 그런데 친구로 모였는데 친구인줄 알았는데 그 친구가 얼마나 불만이 크고 분노가 심했으면 친구가 친구에게 두 팔 사이에 상처를 남기겠습니까.
제가 아까 처음 강의할 때 성경에서 상처란 분명히 억울한 면이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보존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치료되면 안돼요. 계속 유지되어줘야 상처에 근거한 처벌과 심판이 성립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좋은 사람끼리 모여서 하하호호 웃으며 자기들끼리 상처 없는 깔끔한 삶이 되기를 원해요. 마치 저쪽에서 하얀 옷을 입고 왔으면 이쪽도 하얀 옷을 입어줘야...... 둘 다 하얀 옷을 입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때 묻히지 말자, 라는 뜻이거든요. 우리 흙탕물 튀기며 그런 장난치지 말자는 뜻이죠. 둘다 깔끔 떨자.
그런데 인간들의 희망은 인간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지혜롭고 얼마나 도덕적인가를 서로가 합의하에 단결해서 그걸 증명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인간들 사회는. 심지어 깡패 사회에도 의리가 있는 이유가 그거에요. 남들은 깡패라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우리끼리는 절대로 의리, 의리 하나로 뭉치자. 그렇게 양아치들 모여서 짜장면 먹으면서 형님 하나 드세요, 그래 들자. 이러다가 마 형사 나타나면 얻어맞고 그렇게 되죠. 마동석 나타나면 한 대씩 맞고 하잖아요.
인간들끼리는, 상처받는 것은 그들이 어쩔 수 없는 경우는 모르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상처는 안 남기고 싶어요. 그걸 누가 아시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의도적으로 상처받는 일을 벌이신 거예요. 그럼 진리는 뭐냐? 그 상처가 진리에요.
상처가 진리입니다. 내 옆구리의 창자국과 내 손의 못자국이 진리에요. 멀쩡한 인간들이 강연하는 게 진리가 아니고! 필즈상 받고 노벨상 받은 사람이 서울대학에서 외친다고 그게 진리가 아니고, 인공지능 발명한 게 진리가 아니라 상처가 진리에요.
시편 38편 5절에 보면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11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까 스가랴하고 비슷한 말씀이죠.
인간들이 추구하는 최종 진리는 너나할 것 없이 다 그래요. 우리가 얼마나 멀쩡하고 우리가 얼마나 착하고 훌륭하고 인간이 어느 정도로 깨끗하게 살 수 있냐는 쪽으로 그 최종적인 것, 진리가 그쪽 방향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점점 더 향상되어가는 거요.
이런 것은 우리가 꼭 말 안 해도 여러분들이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에게서의 자녀다움, 역시 나는 네가 될 줄 알았어, 이건 뭡니까? 자기 아들보고 “역시 나는 네가 그렇게 될 줄 알았어.” 어디 싸워서 상처받고 오면 그런 소리합니까? 아니잖아요. 상처받는 게 아니고 상처와는 너무나 저 반대쪽에 있어서 노벨상 탄다든지...... 노벨상은 너무 거창하다. 개근상 하나 타더라도 우수상이라든지 성적 우수상 그것만 타도 속으로 엄마가 시상식한다고 학교 강당에 가면 속으로 뭐라 하겠습니까. 내 그럴 줄 알았어, 하잖아요. 너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저게 바로 진리지. 뭐가 진리겠어, 하잖아요. 그런데 상 받고 내려오다 엎어져가지고 트로피 다 깨지고 상처 나보세요. 주님, 왜 하필이면 이 좋은 날에...... 이렇게 하죠.
진리는 모든 인간의 진리성을 피해갑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는 내 자식 잘되고 내가 잘되고 이게 아니라 어떤 특정 분의 손과 옆구리에 상처 난 것, 그게 all입니다. 상처의 all입니다.
그 때 도마가 뭐라 했습니까?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다. 진리를 처음 안 거예요, 진리를. 뭐보고? 내가 행했던, 나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주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를 염두에 둘 때 이 죄 많은 나를 염두에 둘 때 주께 일어나는 일이 뭔가?
그것은 새 언약입니다. 내 피와 내 살을 마시라. 이것이 유일한 최종적인 하나님의 계약이고 그것이 바로 상처입니다. 십자가가 상처이고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