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뒷편
존재의 뒤편
2022년 8월 31일 본문 말씀: 2:1-7
(2: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2: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2:3)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2:4)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
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2:5)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2: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2:7)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세상 나라 전쟁들은 서로의 힘과 군사력을 견주는 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자신이 확보한 그 영토나 제국을 자신들의 가치와 합치하려는 겁니다. 즉 자기 위치나 자리가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하고 계속 키워보려는 차원에서 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을 해봤자 그 결과는 존재의 막 위에서 옆으로 펴질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앗수르라는 막강한 제국이 후대 등장한 바벨론 나라와 메대의 연합군에 멸망당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의 영광은 승자인 바벨론과 메대 나라에게 가는 것이 마땅한데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영광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영광을 얻기 위해 두 나라를 조장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제국들의 전쟁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다같이 망하는 식으로 상쇄되는 전쟁을 계속할 뿐입니다. 어부지리로 남는 것은 이스라엘 뿐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구경만 하다고 구원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의 영광성이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본인을 살리기 위한 그 어떤 전쟁에 가담할 필요가 없이 구경만 해도 구원받는 겁니다. 그것은 원래 이스라엘이 본질에 부합되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자체가 가만히 구경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들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키우기 위해 주변의 힘이 센 나라에 조공 바치고 아부하는 식으로 버텨왔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이스라엘이 이 지상에 존속해도 ‘이스라엘의 영광’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본인이 생존할 땅을 가질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살 땅을 얻었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한 행로를 떠올라 보세요. 황량한 사막길을 통과하는 유일한 족속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민족은 처음부터 정착했지만 이스라엘은 ‘자기 땅이 없는 민족’입니다. 따라서 사막길을 가는데 있어 주변 나라들이 얕잡아 보면서 피곤한 이스라엘 행렬을 공격하는 모습은 마치 날파리들이 들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알아서 그 날파리들을 날려 보내었습니다.
사람들만이 살 땅 같으면 자기네들 입장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나님과 같이 살 곳이라면 그 땅을 접수하는 방식에 있어 인간들의 방식과 다름을 그들 이스라엘은 감안했어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미리 장착해 있던 토착민족들이 아무리 건장하고 강하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날파리 정도 밖에 안되는 겁니다.
이점을 갈렙과 여호수아는 알았던 것이고 다른 이들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자신이 살 땅만 생각한 겁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른 이방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위주의 현실막’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에서 나와 내 식구는 어느 정도의 안정되고 확정된 삶의 자리를 확보하느냐에 최우선적으로 신경쓰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라는 조건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당연히 이방민족에 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망해버린 야곱의 영광성을 어떻게 생겨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방법은 ‘떨어내는 방법’입니다. 즉 이스라엘 주변에 얼쩡거리는 모든 이방민족들을 다 떨궈내십니다.
이와같은 방식은 요한복음 8장에서도 나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이 본의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에게 끌어왔습니다. 이들 바리새인이 분노하는 것은, 간음이라는 율법 위반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더욱 더 징벌 내릴까봐 염려한 겁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도 이런 죄인들을 두둔하는 소문이 과연 사실인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땅에다 글을 쓰니 나이 많은 자들부터 젊은이까지 손에 든 돌들을 놓고 하나둘씩 현장을 떠나버립니다. 즉 여인 주변에 많은 자들을 주님께서는 다 떨궈내신 겁니다.
그리고 난 뒤, 여인은 직접 예수님만 만나게 된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인으로서는 자신을 방어할 그 어떤 방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여인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즉 ‘죄사함’을 받은 겁니다. 이것이 여인은 본인의 인생에 있어 구경만 한 경우를 당한 겁니다.
즉 자기 손으로 자기 존재를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자기 위주의 현실막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 뒤편에서 여인은 예수님의 세계에 강제로 끌려들어온 겁니다. 구원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기 존재에 대해서 본인이 손을 대는 식이 아니라 일체 손을 댈 수 없이 구원되는 겁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안식이 완성이 되는 세계에서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장소 제공용으로 천국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독자적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자는 이 천국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인간의 모든 존재를 다 제거하기 위한 전쟁입니다.
무너지게 하시고 부서지게 하시는 찢어지게 하시고 망하게 하시므로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존재에 의미를 두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가신 길을 가도록 이끌린 자들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빈 말이 아닙니다.(요 11:25-26)
즉 인간은 지킬 자기 존재가 아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로 인해 인간은 평생을 속아가면서 자기 인생을 지키는 현실막을 스스로 조성했던 겁니다. 그 존재의 막 뒤에 끌려들어온 자만이 예수님과 더불어 죽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에서는, 어두움이 빛을 영접하는 경우라고 보는 겁니다. 자기 존재가 자기 위주로 꽉 차 있으면 그 누구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곧 하나님의 전쟁을 무기요 병기입니다. 엘리야가 죽을 때에 선지 생도들은 선생님의 시체를 사흘 동안 찾았지만 엘리사는 압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하늘로 불수레 타고 간 것을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늘의 담는 그릇으로서 이 어두운 세상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옥 체험이지만 그 끝은 천국체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킬 것도 없는 것을 지키지 말고 복음이나 지키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나훔 2장 1-7절(존재의 뒤편)2208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2장 7절까지입니다.
나훔 2:1-7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찌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철이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그 병거는 거리에 미치게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 저리 빨리 가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그가 그 존귀한 자를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예비하도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정명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며 그 모든 시녀가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나훔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은 그 앗수르라는 막강한 큰 제국 백 년 동안이나 행세깨나 한 그 제국이 망하면서 이스라엘의 영광, 하나님의 택한 나라, 야곱의 영광과 그 망하는 것이 관련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이 앗수르나라가 이스라엘을 많이 약탈했거든요.
약탈했는데 세상적인 드라마 같으면, 세상적인 사람들 생각 같으면 이 앗수르라는 나라를 피해를 받은 이스라엘이 공격해서 쳐부수면 더 신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여기에 이스라엘이 치는 것, 앗수르라는 나라, 그 악한 나라를 치는 것을 누가 하느냐 하면, 똑같은 이방 나라인데 그것보다 더 센 이방나라를 하나님께서 등장시켜서 앗수르를 친다는 것이 3절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그 앗수르 치는 용사들의 움직임을 보게 되면 이것은 거의 신적이에요. 3, 4절에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철이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그 병거는 거리에 미치게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 저리 빨리 가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기존의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한 강한 군대를 동원시켜서 이 앗수르 나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쳐부수도록 그렇게 일을 꾸몄습니다. 일을 그렇게 실시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통해서 2절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여기 왜 앗수르 뒤에 나오는 나라, 아주 강한 나라, 막강한 나라인데 그 영광을 막강한 나라가 차지해야 되는데 여기 보면 이스라엘 영광으로 회복이 된다고 되어 있어요.
앗수르 나라를 쳤던 그 나라는 바사, 영어로 하면 페르사(Persia) 인데 바사에다 메대, 바사, 나라가 두 개인데 연합을 이뤄서 바사나라의 나보폴리사르(Nabopolassar)라는 왕이 등장해서 앗수르를 멸망시킵니다. BC 610-611, 그 사이에 멸망해버려요. 그러면 그 영광은 바사나라에 가야될텐데 하나님께서는 바사나라에 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의 영광이다.” 왜 야곱의 영광이냐 하면 야곱의 영광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게재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그냥 이스라엘은 가만있어.” 내가 세상 나라와 세상 나라끼리 서로 붙어서, 서로 싸워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그래서 상쇄해 나가는 방식으로 오직 이스라엘만 이 세상에 남도록 하나님께서는 세상일을 그렇게 정리하시고 처리해주시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붙어서 다들 없어지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값없이 영광을 얻어버려요. 그냥 지켜보기만 했는데 마지막 남는 자는 이스라엘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그게 바로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셨던 그 방식입니다. “너는 멸망 당할 세상, 불신자의 세계의 전쟁에 너는 낄 필요 없어. 거기서 나와!” 하고 빼내 주는 거예요.
그동안 이스라엘이, 주께서 빼내 줄 때 이스라엘이 영광이 되는데 그동안 이스라엘이 영광을 못 누린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영광에 같이 하지 못한 것은 끼지 말아야 될 그 전쟁에 그들이 같이 끼어든 거예요. 낄 때 끼지 말고 빠져야 되는데 빠지지 못하고 같이 끼어드는 거예요. 빠질 때 안 빠지고 낄 때 끼고, 그렇게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나훔 선지자가 소개하는 앗수르와 그 뒤의 나라 바벨론이지요, 앗수르 다음의 바벨론 나라와 메대 연합군이 이 앗수르를 칠 때 이스라엘은 그냥 구경이나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이스라엘에게는 뭐냐? 구원이 되는 거예요. “성도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묻는다면 오늘 본문 식으로 하면 “구경이나 해라. 그냥 ‘구경 한 번 잘했네.’ 해라.” 끼지 말고 구경하면 그게 구원받는 겁니다.
여러분들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참 쉽다.’라고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이 구경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왜 불가능하냐 하면, 인간이 전쟁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람이 전쟁하는 이유는 자기 자리를 영구히 확고하게 확정짓고 고정하기 위해서 전쟁을 해요. 자기 자리, ‘이것은 내 자리이고 싶다.’ 하고 자기 존재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 그게 인간으로서 생존경쟁, 이 모든 전쟁의 이유입니다.
내 자리를 확보함으로써 내가 누구다, 하는 것을 확정 지으려고 인간은 만인을 상대해서, 모든 사람을 상대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하지요. 내가 이정도라는 것, 심지어 사촌끼리도 땅 싸움합니다. 땅 저 혼자 차지하려고. 그 땅을 차지한 내가 든든한 자리를 확보했다는 그런 목적으로 인간은 쉬지 않고 전쟁을 해 왔습니다.
이방 나라들만 전쟁하는 게 아니고 그 당시 이스라엘도 그 이방 나라하고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세상 전쟁에 그들이 편승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게 되면 선지자들한테 꼭 책망받는 대목이 어느 대목이냐 하면, 가만있으면 되는데 ‘저 아람 나라가 날 도와주겠지.’ 혹은 ‘저 앗수르가 나를 도와주겠지, 바벨론 나라가 날 도와주겠지.’
특히 이스라엘 왕들이 도움을 받은 나라는 애굽이었습니다. ‘애굽나라의 그 병거와 말들이 나를 도와주겠지.’ 그런 식으로 자기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세상 나라들이 전쟁하는 똑같은 의식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자기들도 전쟁을 해온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그 땅은요, 본인들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싶어서 계시는 땅이에요. 하나님의 땅이에요. 하나님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내가 거주하는 내 식구, 내 가족, 우리나라, 내가 건사할 수 있는 땅 확보에 나서다 보니까 ‘나는 이런 땅을 가졌으니 나는 이정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고, 확정 짓고 싶고, 계속해서 후손들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물려주고 싶은 그러한 본심, 그 본심이나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나 다른 점이 뭐가 있어요? 똑같습니다. 전혀 다른 점이 없어요.
모든 인간이 똑같거든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러니하나님의 전쟁은 “가만있어. 내가 해줄 게. 너는 구경이나 해라.” 여기에 구경이나 할 위인이 없어요. 아무도 없는 겁니다. 결국 뭐 구원이 없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것은 “너희가 세상 나라처럼 내가 자리 확보하고, 내가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전쟁에 나서고 끼어들고, 다른 나라와 조약 맺고 하는 그런 방식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할 도리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하나님과 같이 살게 되었는가? 그 원리와 원칙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놓쳐버리면 이스라엘도 같이 망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선지자가 “구경이나 해.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영화롭게 해. 땅 주고 다 할 거야.”라고 나훔 선지자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과 더불어서 전쟁할 때 어떻게 전쟁했는가를 그들은 잊어버렸습니다. 세월이 지나니까 잊어버린 거예요.
이스라엘은 땅을 거저 얻은 거예요.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대충 아시는 분은 어떤 것이 딱 한눈에 이미지로 떠오르면 되느냐 하면, 광야라는 게 있잖아요. 광야를 통과할 때 그 사막길에 통과하는 민족이 딱 이스라엘 한민족밖에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돼요.
그 사막 황량한 땅을 뭐라고 거기를 통과해요? 왜 통과하는데요? 좋은 길 놔두고, 지중해 쪽으로 좋은 길 있는데 그 길 놔두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막길을 가도록 밀어붙였어요. 물론 가면서 도중에 시내산 거쳐서 그냥 가지 않고 율법을 장착하고 자기들끼리만, 이스라엘끼리만 가게 한 거지요.
가게 하는데 이 율법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가면서 어떤 효과가 보이느냐 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황량한 사막길을 이스라엘 민족이 가니까 주위에서 마적 떼, 도적 떼 같은 주변 나라들이 얕잡아 보고 우습게 보고 시비를 걸어 오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해서 그런 날파리들을 다 훌쳐보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방 민족은 그냥 날파리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속도를 빨리하면 날파리들은 다 떨어져 나가요. 결국은 이방 민족은 다 떨어져 나가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을 대적할 나라는 애초부터 이 땅에는 없다는 겁니다.
없는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믿음이 없어 가지고 ‘대적할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없어. 너를 대적하는 자가 없어.” 이스라엘은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덩치도 크고 잘살고 막강한 무기를 갖고 있는 것, 우리 정탐꾼 보내서 살펴보니까 권력과 군사력이 국가의 힘이 대단하던데요. 우리는 못 들어갑니다.”라고 이스라엘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래 봤자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대적할 가치조차 없어.”라는 그 의견충돌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홍해 건너온 사람 두 사람 빼놓고는 다 죽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구경만 하라.”가 안 된다니까요. “구경만 하면 구원시켜 줄게.”가 안 돼요. 조바심이 나서 안 돼요. 염려가 되어서 안 되고 걱정이 되어서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어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나는 나를 의지하는 것이 태생이기 때문에, 내가 나 의지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서 전쟁할 때 방법이 뭐냐? 떨어내는 방법, 떨궈내는 방법을 사용하신 거예요. 이스라엘이 벌벌 떨고 있으니까 주께서 다 떨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 방법이 신약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하나가 바리새인들에게 질질 끌려오다시피 옵니다. 끌려오는데 누구 앞에 끌려오느냐? 예수님 앞까지 그 여인은 분노하는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율법사들에 의해서 끌려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가지고 분노하는 이유는 있어요. 그 이유가 그들 나름대로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간음한 죄가 있어버리면 그 죄가 하늘에 상달 되어서 이 유대 나라가 해방되는 시기가 늦춰지고 하나님의 혹독한 징벌이 계속 된다는 그 이유때문에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 하는 것처럼 ‘이 여인을 돌로 쳐죽임으로써 살아남은 자들이나 살자.’ 이런 취지, 이런 신앙으로 그들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 같은 여자 때문에 우리나라가 통일이 안 되잖아. 망했잖아. 로마한테, (일제한테 압제당하듯이) 로마한테 압제당했으니까 이런 여자는 본때를 보여서 죽여 버려야 돼.’ 죽이기는 죽이는데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이런 죄인을 두둔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참에 같이 보내버리려고 예수님에게 율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찾아내기 위해서 예수님과 여인을 대면시켰지요.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기세등등해서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주장을 듣고 거기다 글을 쓰고 난 뒤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러니까 기세등등해서 자기는 이 여자보다 훌륭하고 의롭고 율법대로 지킨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예수님이 글을 쓰니까 ‘무슨 글을 쓴 거야?’ 하고 보니까 자신의 과거사가 거기 다 나와 있더라는 거예요.
이것은 짱돌, 여인 때려죽이려고 들고 있던 그 짱돌, 이제는 여자 죽이고 난 뒤에 그 짱돌이 자기한테 날아올 판이에요.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이 먼저 떠났는데 그만큼 많은 세월을 살면서 지은 죄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슬슬 여인에게 떨어져 나가요.
주님의 방법은 그 여인 앞에서 떨궈내는 거예요. 여인을 정죄하는 자를 떨궈내는 겁니다. 여인주위에서 사람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의 전쟁의 끝이 하나님의 안식인데 하나님의 안식, 창세기 1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안식의 그 취지가 뭐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님만 있고 아무도 없는 것.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최종적인.
하나님 외에는 존재라는 말을 붙이면 안 돼요. 하나님 외에 ‘있다’ 하면 안 돼요. 인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있음의 장소제공용으로 있는 거예요. “주님이 여기 계시다.”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있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다”가 아니라, “천국이 있다”가 아니라 “주님이 여기 있다.” 하는 장소제공용으로 우리가 백성이 된 겁니다. 여인은 벌벌 떨었지요. 주위에 자기 고소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글 좀 끄적끄적 쓰니까 다 떨어져 나갔어요. “다 떨어져 나가” 날파리들 다 떨어져 나갔어요.
그다음에 그 여인은 비로소 누굴 만났느냐? 비로소 예수님하고 정면으로 독대했어요. 예수님이 보이는 기회를 얻게 된 거예요. 그러면 전쟁은 누가 하느냐? 전쟁은 주님이 하지요. 여인이 알게 된 것은 그거예요. 내가 있어 버리면, 내가 존재해버리면 내가 구원 되고 안 되고는 이 존재한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돼요. 내 눈에는 나만 보이니까.
그런데 간음한 여인은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바리새인이 강제로 끌고 그 여인과 예수님과 딱 만나게 해주니까 비로소 여인은 자기 존재의 뒤쪽세계를 여행하게 된 겁니다. 존재의 뒤편이에요. 이게 인간으로 가능합니까? 자기 존재를 지워버리고 뒤쪽으로 갈 수 있습니까? 서울 강남에 비 많이 왔을 때, 몇백 밀리 왔을 때 두 사람이, 남매간 그 두 사람이 맨홀 뚜껑이 열렸는데 거기에 맨홀이 있는 것도 모르고 빠져버려서 강남의 지면에서 뒤쪽으로 사라져버렸어요. 물론 두 사람 다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말은 이 존재의 세계에서 자기 자리를 확보하고 ‘나는 이정도야. 나는 이정도 대단해. 이 정도 같으면 내 인생 잘 살았잖아.’ 그거 자랑질하려고 투쟁하고 싸우고 경쟁하는, ‘이 땅 1200평은 내 땅이야.’ 그런 것, 그 경쟁하는 표면에서 소리소문없이, 그 존재의 표면에서 사라져서 뒤쪽세계에 가버리는 거예요. 뒤쪽세계에서 주님과 함께 거기 있는 거예요.
그게 무슨 세계냐? 말씀의 세계입니다. 그게 말씀 완성의 세계고 주님의 세계에요. 이스라엘은 그런 의미에서 구경만 해야 돼요. 자기가 나서서 자기 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서로 인간들끼리 쥐어뜯고 내가 살았니 네가 살았니, 하는 거기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려야 돼요.
물론 뒤에서 주님께서 멱살 잡고 “너는 뒤쪽으로 와. 거기 끼지 말고 뒤로 빠져버려.” 뒤로 빠지는데 이 빠지는 게 인간의 힘으로 왜 안 되느냐 하면, 빠질 때는 내 인생, 내 가치, 내 자존심, 내 학력, 내 재산, 하여튼 나를 괜찮게 봤던 모든 조건들을 주께서 다 떨어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게 아파요. 그게 너무 아파요. 부서지고, 망하고, 무너지고, 찢어지고, 삶아 먹고, 지져 먹고, 튀겨먹고, 볶아먹고, 하듯이 주님께서는 나를 망하도록 하지 않고 구원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안 망하면 자꾸 내 존재가 보이니까, 내 존재를 건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은 기존의 세상 사람과 투쟁하고 경쟁하는 것과 똑같이 되어버려요.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신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 백성으로 내가 가는 길을 따라오라는 겁니다. 그게 죽음인데 그 죽음 뒤에는 부활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따라오라는 거예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 26)
이게 그냥 존재,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 표면에 있으면요, 이걸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는 시늉은 하지만 믿어지지는 않아요. 그런데 주께서 뒷목 잡고 “너 거기서 놀지 말고 이 뒤로 빠져나와.” 확 이렇게 뒤로 빼버리면 이것은 믿을 필요도 없어요. 왜? 그 세계가 그 세계기 때문에, 죽어도 사는 세계에 이미 도달해 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것은 너 나랑 같이 죽자, 그 말입니다. 이게 굉장히 고맙고 감사하고, 가볍고 즐거워야 돼요. 너 나랑 같이 죽음의 길로 가버리면 내 존재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구와 시합하거나, 누구와 견주거나 비교하거나, 기죽거나 우월하거나 할 대상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랑 비교할 사람이 아예 없어져요.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1장 5, 6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그리고 8-10절에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요한복음 1장에서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서 남들로부터 출세했네, 아파트 굉장히 넓더라, 네 차 외제 타 더라, 그런 이 세상에서의 승리감, 내가 이 땅에서 살면서 대단하고 부러울 것 없이 당당하게 승자가 되었다는, 전쟁에서 이긴 자가 되었다는 그 존재, 그 존재 자체를 요한복음 1장에서는 뭘로 보느냐 하면, 그걸 ‘어두움’이라고 보는 거예요. 어두움, 어두움이고 그 어두움의 특징이 뭐냐? 빛을 빛으로 못 알아봐요. 알아보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존재가 출세와 성공욕에 빠져있는 인간들은 빛을 영접할 수가 없어요. 그 이야기에요.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할 수가 없어요. 그럴 능력이 없어요. 자기 존재가 찬란하게 빛나는데 매일 아침 여섯 시부터 일어나서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면서 자기 자리, 내 자리 확보에 미친 듯이 거기에 열심히 매진하고 있는데 뭘 영접해요? 이미 내가 있는데, 내가 여기 한평생 열심히 잘 살았는데 거기에 무슨 또 영접할 자가 있어요? 필요 없지요. “물건 안 삽니다. 저리 가세요.” 배척해 버리지요.
영접할 수가 없어요. 영접할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12절에“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니까 인간들이 아무리 교회 나와서 예수 믿는 시늉을 낸다 할지라도 교회 나가서 예수 믿는 것조차도 내 존재를 구원하고자 한다든지, 빛내고자 한다든지 이 땅에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자 할 경우에는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아까 그 간음한 여인 보세요. 자기 능력 아닙니다. 질질 끌려왔어요. 예수님 만나고 싶고 보고 싶어서 환장한 것 아닙니다. 그것은 뭐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강제로 주님과 딱 만났어요. 강제로 만났어요. 강제로 만나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이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 말고 전혀 예상 못 한 이야기를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됩니다.
“나도 너의 죄를 정죄하지 않노라.” 그런 이야기, 네 죄를 사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돼요. 누구한테요? 예수님한테요. 누가요? 간음하다 잡힌 그 여인이 일방적으로 그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구원받는데 그 여인은 구경만 했어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러면 전쟁은 누가 하느냐? 전쟁은 주님이 홀로 하시지요. 인간들의 전쟁, 그것은 저희끼리 붙어서 피 터지게 싸우다가 저희끼리 전부 다 망해 버리는, 주께서 그렇게 박치기시켜서 부숴버리고, 박치기시켜서 부숴버리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내 백성 이스라엘 빼놓고 전부 다, 나머지기 모든 민족들을 다 발라내기 때문에 그래요.
신약에 오면 성도 빼놓고, 성도 빼놓고 다 발라내요. 다 제쳐요. 붙어 있는 것들, 세상 것들 다 없애버려요. 제거하는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전쟁 와중에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두고 내가 가는 길로 가라, 그 말이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즉 “내가 알아서 너한테 붙어 있는, 네 존재가 잘되고 내가 실패하면 안 된다는 걱정근심 내가 다 떨어내 줄게. 내가 가는 그쪽으로 오라.” 그 말이지요. 그쪽 가는 길이 뭐냐? 어두움을 관통하는 길이에요. 어두움을 관통하는 길.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울주군, 그냥 울산이라 합시다. 울산의 온산에서 밀양까지 가는 고속도로가 있어요. 경부고속도로 말고요, 그냥 똑바로 가는 게 있어요. 그 고속도로가 한 20킬로미터쯤이라면 터널이 한 16킬로미터 정도 돼요. 터널이 얼마나 많은지 터널 끝나니까 부산서 동대구 가는 그 고속도로 민자고속도로 나와요.
밀양에서 만나요. 터널 끝나면 또 터널, 그거 끝나면 또 터널, 그거 끝나니까 바로 밀양입니다. 벌써 언양 훨씬 지났어요. 가지산 밑으로 지나가요. 가지산, 영남 알프스 그 밑 터널로 십몇 킬로를 지나가는 거예요. 터널로요. 성도가 가는 길은 그 터널에 세상적인 벽화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벽화.
그 벽화에 MBC, KBS, SBS, 이준석이 어떻고, 국민의 힘이 어떻고, 북한이며 우크라이나, 전부 다 벽화에요, 벽화.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저런 일들도 있었구나.’ 계속 벽화, 세상적으로 분주하고, ‘삼성 또 졌어, 또 졌어. 이래서는 삼성 또 가을야구 못해.’ 이런 것 있잖아요. ‘손흥민 요새 뭐하나? 조용하네.’ 이런 것, 세상 모든 것들이 지옥체험을 하게 만들어요. 주님 가신 길이 지옥체험을 하는 거예요.
그 지옥체험의 끝은 천국체험입니다. 그런데 천국체험은 지옥체험, 그 가지산 밑 터널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천국 안 나옵니다. 터널 속으로. 깜깜한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 어두움이라 했어요. 어두움을 실컷 맛보게 하는 거예요. 거기서 성공했다, 돈 벌었다, 뭐 주식해서 대박났다…….
그런데 성도는 부서지고, 무너지고, 찢어지고, 그렇지요. 예를 들면요 터널이라 할 때 이런 것이 유혹이에요. 예를 들어서 몸이 아프다, 몸이 아플 때 “하나님, 몸 건강하게 해주세요.” 이게 바로 유혹입니다. ‘왜 저 사람은 나보다 신앙도 없고 교회도 안 다니는데도 멀쩡한데 나는 수요일 예배까지도 나왔는데 몸이 왜 아프냐?’
그러면 몸이 아픈 것 낫게 되면 이것은 뭐냐 하면, 내 위주의 현실이 또 안 없어지고 그대로 있는 거예요. 아팠는데 지금 멀쩡한 나만의 현실막(幕)이 안 없어지고 그대로 있는 거예요. ‘다음에 안 아프도록 주의해야지.’ 그러면 그 현실막은 뭐냐? 기존의 생존투쟁의 현실막이 그대로 이게 표면에 있는 거예요.
그 현실막 뒤쪽으로 빠져나가야 되는데 그 현실 뒤쪽으로 못 빠져 나가고 나 하나 건사하고 나 하나 지탱하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쓰고 노력하는 그 삶을 또 아팠다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또 시작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쥐고 있는 현실은 주께서 없애버렸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현실, 내가 중심이 되고 나 위주로 생각되는 그 현실막, 그 현실막은 그것은 세상적인 현실막이에요.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정말 인간존재가 없는 뒤쪽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왜 그리 많이 나오는지, 아주 많이 나오니까 찾지 마시고 그냥 듣기만 해도 아시는 겁니다.
열왕기하 2장 11, 12절에 보니까 엘리야 엘리사가 나란히 나오지요. 그런데 엘리야가 죽을 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따로 있고 저쪽에는 누가 있느냐? 선지생도들, 신학생들이 엘리야가 죽게 되었다는 소문 듣고 시체 찾기 위해서 준비되어 있어요. 그래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엘리사는 선생님 따라서 끝까지 붙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엘리사야, 나는 이제 곧 늙어 죽는다. 바통을 너에게 넘길게. 꼴까닥!” 그렇게 죽는 게 아니고 엘리야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인간들이 죽어서 무덤이 있는 이 현실막,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끝을 확인할 수 있는 그 현실의 지평선에서 없어져 버렸어요.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하늘로 올라갈 때 엘리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여기 11, 12절에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엘리야 보고 하는 소리에요. 그다음에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이스라엘의 무기라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의 전차라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이 하는 전쟁은 인간이 하는 전쟁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하는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벌이는, 이스라엘 자체는 무기고 그 용사는, 그 장군은 바로 하나님 자체, 자신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하나님만, 예수님만 남기고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 없어져요. 몇십 년 가면 다 없어져요. 없어져도 예수님의 존재의 그릇으로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고 지옥에서 마귀의 그릇으로 갈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지옥 가든 천국 가든 독자적으로 나라고 규정할 존재는 없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나라는 것을, 딱 악마가 그렇게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해가지고 나 자신만 자아를 위해서 나 중심으로 사는 현실로 하게 한 것은, 악마가 그렇게 한 것은 나의 전쟁을 하게 만들었어요, 나의 전쟁을. 사느냐 죽느냐, 이 문제 놓고 내가 평생토록 염려하고 두려워 떨며 공포에 휩쓸리고 한시도 잠 푹 자지 못하고 깜짝깜짝 경기(驚氣) 나고 놀랄 수밖에 없게.
왜 그런 짓 하느냐? 지킬 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지킬 리가 없다는 겁니다. 있지도 않는 너를 지킨다고 그렇게 아등바등 평생동안 걱정근심 공포에 휩싸여서 지금껏 살아왔다는 겁니다. 지킬 것이 없는데! “지키려면 말씀이나 지켜라, 인간아! 너를 구원하는 예수님이나 지켜라!” 그 말이지요. “복음이나 지켜!”
너는 자체가 없어요. 습자지 같아요. 빨아 먹으면 입가의 침에 다 녹아버리는 종이 과자 있잖아요. 투명한 것. 지킬 필요도 없고, 지키나 안 지키나 없어지고 녹아져 버리는, 침에도 녹아버리는 습자지 같은 얇은, 과자인데 종이 같은 과자 있잖아요, 침에다 녹아버리는 것, 그 녹아버리는 것을 왜 우리는 지키려고 했느냐는 말이지요. 이병철이 지키려다 날아갔잖아요. 그다음에 이병철 아들 이름 뭡니까, 이건희 녹았잖아요, 이건희 종이. 그 아들 삼성 부회장 좀 있으면 또 녹아들 거예요. 순서는 모르겠지만.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특징이 뭐냐 하면, 개죽음 하기 싫다는 거예요, 개죽음하기 싫다. “네 사람, 네 사람 여기 있잖아. 네 사람 좀 가져가. 얼쩡거리지 말고. 네 사람 빨리 데려가.” 마귀한테 데려가라고 보내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내가 지켜야지. 내 행복은 내가 지켜야지. 마이웨이, 내 인생은 내가 순전하게 해야지. 무쏘의 뿔로 나는 홀로 간다.’ 이것은 악마가 인간을 그렇게 속여온 거예요, 악마가. 남는 것은 너밖에 없다고 악마가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다니엘 10장에 보면 그 내용 전체가……,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받고 혼절이 나서 멍멍한 상태입니다. 그 전체 계시가 뭐냐 하면, 이 세상 나라가 강대국끼리 서로 피 터지게 싸우다 다 같이 망한다는 그 이야기 듣고 다니엘이 멍멍해서 ‘그러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는가?’ 걱정하고 있을 때에 그때 이 세상 나라를 이길 수 있는 그 장군이 있다는 거예요.
그 장군이 다니엘 10장 13절에 나옵니다. 바사, 페르사지요, 페르사 군대가 여기 나오는데 13절에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여기 나오는 미가엘, 천사입니다. 성도를 보호하는 일을 하는 천사가 미가엘 천사에요. 영어로 미카엘(Michael)이라 하지요.
미카엘, 갑자기 천사가 왜 끼냐 그 말이지요. 왜 천사가 거기서 나와? 아니 세상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이 하는 전쟁 아닙니까? 우리가 아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 우리가 평생 경험한 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사람하고만 상대해야 된다는 것이 우리가 습득한, 우리가 인생 살면서 습득한 진리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진리 같은 느낌같은 느낌. 사람하고 상대해서 남의 돈 빼먹고 손해 안 보는 것, 이게 이 세상 사는 요령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다니엘 10장에 보니까 거기에 미가엘 천사가 나와요. 21절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 뿐이니라.” 그리고 다니엘 12장 1절에도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하지만 미가엘이 일어나서 마지막 전쟁, 마지막 전쟁을 할 때에……, 아까 엘리사가 엘리야를 두고 하늘의 병거여, 하늘의 마병이여, 하는 그걸 염두에 두세요. 하늘에서 전쟁을 벌일 때에 땅의 티끌 가운데 있는 사람이 부활해서 영생을 얻을 자가 많이 나올 것이다. 다니엘 12장 1, 2절 계속 보면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이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되면요, 이 세상은 없어져요. 없어지고 그 전쟁은 우리가 하는 전쟁이 아니고 미가엘이 해요. 주님이 하셔요. 요한계시록 12장 7절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그 사자가, 악마가 이기지 못하고 이 땅에 내려왔다 그 이야기에요. 처음으로 하나님이 안식했던 그 시절에.
뭐가 믿음입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나를 믿지 않는 것. 나의 존재를 일체 인정하지 않고 나는 이 땅에서 이 터널 속 이 어두운 세상, 벽화로 있는 이 세상, 왕왕거리는 이 유혹들, 서로 꾀이려고 유혹하는 것, 주님 가신 길로 그냥 가면서, 십자가의 길로 가면서 이 어두움이 지나면 부활, 빛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냥 우리는 지옥체험 하면서 통과하는 중입니다.
통과할 때 부서지고, 무너지고, 찢어지고, 난리도 아니지요. 온갖 욕을 다 얻어먹더라도 주님 가신길이 그 길이었어요. 주님 가신 길, 너 나랑 죽자 했던 그 길, 주님은 하늘나라에 속하고 우리는 주님을 받쳐주는 하나의 그릇으로의 존재입니다. 주님에게 자리를 제공하는 거예요. 내 자리 있으면 안 돼요. 주님의 자리에요. 이 자리가 주님 여기 계시다, 를 보여주는 자리. 인간 세상은 떠들썩하고 우리는 그 뒤쪽으로 초대받은 주와 함께 여행하는 그런 성도의 삶을 살아갑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전쟁이 얼마나 헛것 가지고, 가질 수 없는 헛된 것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그게 내 자리인 양, 영원한 나의 출세인양 현혹되어있는 전쟁 속에 우리가 그동안 오랫동안 살아왔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눈을 떠서,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영원히 주와 함께 있는 이 주님의 전쟁을 우리는 구경할 수 있는 느긋한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