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주님의 자기입증

아빠와 함께 2022. 8. 18. 09:48

주님의 자기 입증 

2022년 8월 17일                 본문 말씀: 나훔 1: 9-13

(1: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이스라엘이 여호와에 대해서 묻지를 않는다는 말은 자기 식대로 나라를 이끌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평소에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할 그런 신으로 대했음이 들통난 겁니다.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만들어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삽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생이 하나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자화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한 관계를 두셨습니다. 신명기 32:10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눈동자’라는 것은 신체에서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는 곳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본질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민족을 세상에 펼쳤다는 것은 세상 민족을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유인책입니다. 이스라엘을 미끼로 사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내부로 깊숙하게 들어오게 하시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원리는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원리와 다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에 곁에 같이 십자가 달린 자는 살인 강도입니다. 이들 강도는 사람을 헤쳐서 그를 체포하여 사형시키는 것에 대해서 본인부터 시작해서 그 어느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강도 입에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의 천국에 이를 때에 저도 거기에 넣어 달라”는 겁니다. 문제는 이 강도의 요구에 주님께서 들어주신 겁니다. 이로서 강도와 더불어 예수님도 왜 인간들의 공분을 샀는지 이해될 수 있습니다. 터무니 없는 원칙을 적용시키기 때문입니다. 천하무도한 악인을 천국에 넣어주신다면 도대체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에 대해서 그 어떤 사람의 동의도 받아낼 수 없을 겁니다.

이 원리가 그대로 구약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 하나님께서 지켜주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상실일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상식을 외면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일체 구원을 허락하거나 허용하지 않고 도리어 반대로 몰아 세우십니다.

이 작용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앗수르라는 나라가 쓰여지는 겁니다. 이 앗수르라는 나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잔혹한 전쟁을 벌리는 제국입니다. 적들에 대해서 학살로 대우해서 점령한 자들이 다시는 독립을 꿈꾸지 못하고 사전을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이 이 제국의 전쟁방식입니다.

이 제국은 스스로 자신의 힘을 키워왔다고 자부하는 나라의 정형입니다. 타인의 도움으로 큰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폭력적인 과감함으로 인하여 다른 나라보다 우위에 서 있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힘을 키워온 이 나라는 일찍이 선진 문화는 철기를 받아들이고 무역을 해서 남들보다 더 발달된 무기체제를 갖춘 겁니다.

최상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여기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민족입니다. 외부의 그 어떤 도움을 받지 않았기에 잔인하게 타민족을 압제하는 것이 힘 가진 자의 당연한 권리행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 앗수르라는 나라의 번성에 대해 달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키우셨다는 겁니다.

그 키워진 힘으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치도록 유도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마땅히 구원되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즉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일말은 구원 희망조차도 생겨나지 못하는 그 위치까지 철저하게 데려가게 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 내심 생각해놓은 인간의 자화상이 하나님의 구원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이 묻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그 다음 절차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절차는 이러합니다. 철저하게 ‘내 인생을 내가 만든다’에 철두철미한 민족을 크게 만들어서는 똑같은 생각을 가진 이스라엘을 궁지로 몰아세우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의지 자체를 접을 수가 있습니다.

즉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내가 원하는 인생이 되어보겠다’는 것조차 ‘내가 만드는 인생살이’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것을 제거코자 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결국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는데 무슨 ‘내 인생’이라는 게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이사야 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나라 아하수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지만 아하스왕은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계획대로 징조들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 상태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정이 아들이 태어나게 했는데 그 이름이 ‘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 뜻은 ‘노략과 약탈이 속히 이루어진다’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약탈당하게끔 되는 시기가 오는데 그 일이 하나님의 구원의 절차에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앗수르가 이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 제국이 쳐들어와면 이스라엘에서 아무 것도 앗수르의 포악한 통치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악의 임마누엘’입니다. 곧 ‘악의 편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앗수르 중의 한 악한 자가 이 일을 꾸미고 들고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11절) 그리고 난 뒤에 앗수르가 덮친 그 위에 그 앗수르 위를 예수님께서 덮치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어느 누구도 마땅히 구원될 자가 없음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처럼 인간의 모든 논리를 능가합니다. 유월절날 밤, 애굽 사람들의 장자가 죽는 이유는, 그들이 ‘흠없는 어린 양의 가치를 모른다’데 있습니다. ‘흠없는 어린 양의 가치를 아는’ 히브리인들이 집집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는 것도 대비가 된다는 겁니다.

이처럼 심판하시려는 쪽에서 먼저 죄를 입증하시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작업이 바로 이스라엘을 미끼로 사용하려 세상을 향해 벌리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내 힘으로 세상에서 성공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나훔 1장 9-13절(주님의 자기입증)2208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1장 9-13절까지입니다.

나훔 1:9-13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이 마른 지푸라기 같이 다 탈 것이어늘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특한 것을 권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할찌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게 하였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너의 결박을 끊으리라.”

지금 하나님께서 나훔선지자를 보내는 것은 나훔 선지자가 이스라엘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훔 선지자 내용은 두 패라 나눠서 생각하면 쉽습니다. 한쪽은 이스라엘, 한쪽은 앗수르, 니느베(Nineveh)라는 곳을 수도로 갖고 있는 앗수르, 그 두 패로 나뉘었는데 이렇게 하나님 쪽에 속한 이스라엘과 나머지 이방 민족 앗수르와 대결구조로 가져가시는 이유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의 대리전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쪽에 속한 이스라엘 그리고 그 외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원수 마귀에게 속한 민족, 나라, 그 두 패로 나눠서 전쟁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성경 자체가. 사도바울도 영적 전쟁이라 하지 않습니까? 전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전쟁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그 적 마귀, 두 진영의 전쟁, 그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러면 우리의 위치는 어디냐? 우리의 위치는 빠지면 되지요.

이게 굉장히 쉬운데요. 이론상 굉장히 쉬운데 참 이게 안돼요. 하나님 덕 보려고 하기에 우리 자신을 빼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자꾸 나의 전쟁을 하려고 해요. 그러니 이 성경이 복잡한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기도하면 응답받습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자꾸 치근덕대면서 자꾸 집어넣는 거예요. 복음 이야기가 하나님과 마귀싸움 이야기입니다. 복음 이야기가.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복음 알면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자꾸 치근대면 사람이 짜증이 확 올라오지요. “우리 인간 이야기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가, 복음 아는 사람은 당부해야 되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우리 자신도 ‘아,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구나.’ 낄끼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되는데 낄 때 조차도 우리에게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끼는 것조차.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끼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이런 것이 마귀로부터 세뇌를 받아서 ‘내 인생 내가 책임 안 지면 누가 책임지느냐?’ 그런 식으로 가니까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요청한다고 이스라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아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눈동자라고 여깁니다. 의도적으로 미끼로, 전쟁의 미끼로, 낚시 미끼로 탁 던져놓은 거예요.

신명기 32장 10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이스라엘을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본질 중에서도 본질에 속하는 그 지점에 이스라엘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그냥 보통 나라인 줄 알고 약소국가니까, 인구도 별고 없고 면적도 얼마 안 되니까 삼키고 싶어서 달려드는 거예요. 달려들면 이것은 함정에 빠진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손대면 하나님께서 찬스다, 기회다, 해서 그 민족을 “왜 내 나라 내 백성 건드리냐?”는 것을 빌미로 멸망시켜 버립니다.

그럴 때 가슴 철렁 내려앉는 쪽은 누구 쪽이냐? 이스라엘 쪽이지요. 좀 인생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그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사람 만들어서 위태위태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위태위태하게 사용해버리지요.

오늘날 성도의 처지가 바로 그런 처지입니다. 우리 쪽에서 우리가 하나님한테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일속에 자기 백성을 거기다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어 놓고 아슬아슬하게 다루고 있지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바로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강도 같은 경우입니다. 자, 그 강도 입장에서 그 사람이 사형당해야 되는 확실한 이유는 살인강도를 했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야 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강도를 사형시키는 것은 신의 뜻이라든지 양심의 뜻에 비추어서 이것은 정당하게 옳은 일을 했다고 자부할 겁니다.

강도가 죽는 것은 마땅하지요. 왜? 남을 죽였으니까, 살인강도니까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런데 그 강도를 누가 천국에 보내는가 예수님이 천국에 보냅니다. 그 강도를, 남의 가정 파탄 낸 강도를, 어떤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그 강도를 누가 데려가느냐 하면, 누가 스카웃 해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스카웃 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 입장에서는 강도와 예수님을 하나로 묶어서 공분을 살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지요. 모든 사람이 처형하는 것이 마땅한 그 강도의 편을 예수님 당신이 왜 편을 들어서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렇게 강도를 천국에 보내버리면 그동안 우리가 천국 가는 원칙, 천국 가는 이유, 천국 가는 정당성, 이 가장 기본적이고 이것은 마땅하고 당연하다는, 가장 기본적이고 납득이 되는 그 원리원칙이 예수님 한분으로 완전히 다 파탄 나버리는 거예요.

‘뭐야 이게? 강도가 천국 간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강도질 해야 된다는 말이냐?’ 그런 생각 들겠지요. 바로 그런 것을 제자들도 이해 못 했고 그 당시 사람들도 이해 못 했다는 이유는, 지금 이 강도가 예수님의 나라를 가지고 전쟁하는 전쟁의 미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너희가 세상을 보는 안목과 주님이 세상을 보는 안목과 이게 틀린 정도가 아니고 서로 상치되고 있고 대결상태에 있는 거예요. 우리 평소의 삶과 우리의 상식이 예수님과 대결구조, 대립구조로 짜여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구원받는 가능성은 영 퍼센트에요. 구원받을 확률 제로에요. 그러면 예수님 생각은 그렇다 치고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하나님의 적, 이스라엘을 미끼인 줄 모르고 덥석 물었던 그 적, 나훔이니까 그 적이 니느웨 앗수르입니다, 이 앗수르라는 이 제국이, 뭐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뭐 그리 잘못했기에 망해야 되는가, 앗수르 나라가 왜 망해야 되는가?

망하는 이유는 설교 시작할 때 언급했습니다.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들었기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본질을 건드린 거예요. 인간이 알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만 아는, 예수님과 아버지 성령만이 아는 그것을 인간 쪽에서 개코도 모르면서 안다고 치고 넙죽 이스라엘을 건드린 겁니다.

건드릴 때 건드리는 이방 나라 민족, 보통 그냥 인간들이지요, 인간들이 이스라엘을 건드릴 때 이유가 있어요. 그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는 겁니다. 그걸 자화상이라 하는데 늘 인간은 매일같이 자화상을 그립니다. 집에 초상화는 없지만 증명사진은 다 있지요. 내 사진입니다. 여권 사진.

니느웨의 문제점, 앗수르 제국의 문제점은 내 나라 내 민족을 강건하고 든든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앗수르 민족 국민들, 백성들 우리 몫이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런 생각은 전 세계 2백여 국가가 넘는 모든 인간들이 동일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 안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에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앗수르 이 나라 역사를 보게 되면 현재 이라크거든요, 니느베, 성경대로 하면 니느웨, 니느웨가 20세기에 들어와서 발굴이 되었어요.

프랑스에서 발굴해서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앗수르 유물이 많이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안 가보셨지요? 날개 달린 사자 등 거기 가면 유물이 한두 점이 아닙니다. 발굴을 했는데 발굴하면서 드러난 사실은, 그들이 처음에는 현재 이라크의 조그만 시골 동네에 있으면서 별볼일 없었어요.

아주 이름도 별로 없는 한 마을 촌구석에 있던 그들이었는데 히타이트라는 세계최초의 철기문화를 가졌던 그들의 문화를 받아서 그때부터 청동기문화, 무른 도구에서 가장 단단한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을 연마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가야, 신라에는 철기문화가 있지요.

그 철기문화를 통해서 그때부터는 이 니느웨가 무역을 하는 중심부에 있어서 장사도 잘 하면서 그다음부터는 부를 축적해서 무기를 만드는데 최초의 4인승 전차를 만들게 됩니다. 3인승 전차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4인승 전차는 앗수르가 최초에요. 그 4인승 전차에 막강한 공성퇴(공성망치)라 해서 성문을 부수면서 성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공격하는 그런 무기도 발달했어요.

그래서 역시 촌 동네였는데 바다에서 지금의 아프리카 북쪽이지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바다의 민족한테 히타이트라는 민족이 침공을 당해서 망해버렸어요. 앗수르의 이웃 나라가 망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숨통이 트인 거지요.

히타이트라는 것은 지금의 레바논지역을 말합니다. 그 히타이트하고 저 이집트하고 전쟁을 하는 가운데서 바다의 민족에게 망해버리니까 자기는 거기서 숨통을 터서 그 철기문화 가지고 강력한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국가로서 확산되었던 겁니다. 큰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된 겁니다.

그때부터 완전히 그 나라 정책자체가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 나라 주변 현재 이라크, 이스라엘, 이란,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터키, 지금 지명으로는 그런데 이 동네들을 완전히 전부 다 접수하고 말았어요. 역사는 그렇게 말해요. “철기문화로 힘 키워서 그들이 강대국이 되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세상에서는.

그런데 성경은 달리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살인강도를 보고 예수님께서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눅 23:43) 하는 그러한 단언이, 예수님의 그 초청이 이 세상 인간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강도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간단한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수 없고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나니, 그러니까 “예수님 맘대로 어떤 죄인을, 어떤 특정 죄인을 천국에 넣어주는데 네가 왜 말이 많아?” 이거거든요. 그거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원리원칙은 이 세상에서는 터무니없고 낯설기 짝이 없는 거예요. ‘뭐 저런 논리가 다 있어?’ 황당한 겁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앗수르 생각이에요. ‘힘이 있어야 나라가 강대하고 강대해야 남의 나라까지 점령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앗수르의 번창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모든 중심이 눈동자 이스라엘 중심이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주변에 힘을 모으고 키우도록 주께서 부추겨 줬다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그들이 앗수르라는 나라가 제국이 되기까지는 그들이 노력했다.” 이게 인간 역사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역사학에서 이야기하는 거고요. 그걸 당연한 걸로 여기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앗수르 나라를 키워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걸 오늘날 신약 입장에서 말을 바꾸어서 이야기하게 되면 “강도가 강도질해서 사형당하는 것은 자기가 나쁜 짓 해서 그렇다.” 세상에서는, 세상 역사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죄지었으니까 체포되어야 되고 체포되어서 사형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이 세상을 빠져나오는 방법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와~, 완전히 완전히 달라요. “너는 강도질 해서 사람 죽이고 빠져나오너라.” 지금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충격이지요. 세상에서는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 세상이 너무 범죄가 많고 사기꾼도 많고, 그리고 자연재해도 많고 전쟁도 있어서 정말 살기 힘듭니다. 도와주세요.” 이것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 종교나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네가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뻐개지는 맛을 덜 봐서 그렇다. 이 세상에는 살인이 있어야 되고, 폭력이 있어야 되고, 사기꾼이 있어야 되고, 탐욕이 있어야 되고, 전쟁이 있어야 되고, 그래야 네가 이 세상에 대해서 손을 놓고 미련을 거둘 것이다. 그래야 그 나라 그 의만 바라볼 것이다. 이걸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조성했다.” 이게 성경 이야기에요.

그래서 기도하면서 불평불만하고 짜증 내는 것은 아직 죽을 맛을 덜 봐서 그래요. 배불러서 그렇다는 거예요. 진짜 큰 고통 속에 있다면 어지간한 것 가지고 불평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이걸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엄마가 되는 조건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필요조건이 있고, 둘째는 충분조건이 있어요.

엄마가 되는 필요조건은 여자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필요조건입니다. 그런데 여자라고 다 엄마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전제는 뭐냐? 재료는 여자, 필요조건은 여자, 충분조건은 아이 낳는 것. 이 두 가지가 될 때 엄마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에 있어서 필요조건은 뭐냐? 이것은 죄인입니다, 죄인. 그런데 죄인 된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 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에요. “저 죄인입니다.” “죄인이야? 잘됐다. 지옥이나 가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죄인 되었다고 해서 그거 구원되는 것 아니에요.

충분조건은 뭐냐 하면, 그 당사자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희생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때 그때 그 사람 속에 구원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음, 하나님의 죽음에 동참시켜야 이게 이스라엘이 구원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앗수르나 바벨론 이런 제국에 의해서 멸망 당하고 파괴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유는 이게 충분조건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받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죽음에 동참하고 참여시키는 방법이 그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은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쉽게 하면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덮치게 해요.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덮치게 하고, 큰 힘을 키워서 덮치게 하고 그다음에 그 덮친 앗수르를 예수님이 덮쳐버리면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구원되는 겁니다. 앗수르한테 덮치게 해줘야 이스라엘이, “내가 구원받아야 됩니다.”라는 말을 더는 못 하거든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대단히 좋아했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나라한테 당한 거예요. 성도가, 교인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 세상한테 사기도 당하고 당하는 겁니다. 세상이 너무 좋았어요. 너무 좋아서 세상과 함께 망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상 좋아하라고 부추긴 겁니다. “네가 그리 좋아하는 세상한테 배신 한번 당해봐라.” 이런 거지요.

참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데 이런 것이 어려워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7장에 이 어려운 이야기가 죽 나와요. 하나님께서 남쪽 유다왕 아하스한테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네가 나를 믿나?” “믿습니다.” “믿으면 나에게 징조를 구해라.” 그렇게 하니까 아하스왕이 “제가 뭐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11, 12절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게 오늘 나훔 1장 9절에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왜 나한테 이런 사태에 대해서 묻지를 않느냐?” 그런 뜻입니다. “주님이여, 그다음 조치가 뭡니까? 그 다음 순서가 뭡니까, 왜 묻지를 않느냐?” 그 말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묻지를 않았습니까? 삐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삐졌어요. 하나님 열심히 믿고 교회 다녔는데 되는 일이 없어요. 아주 심하게 삐져버린 겁니다. 그런데 원래 삐져야 돼요. 이게 삐져야 내가 구원받을 권리가 있어서 구원 받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 극단적인 최종지점까지 몰아세워서 그 지점까지 가야 돼요. 내가 구원받을만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그 지점까지 가야 돼요.

내가 구원받을만해서 구원받지 않는다는 그 지점은 뭐냐? ‘나 이제 하나님하고 안 놀아.’ 하는 그걸 솔직하게 자인하는 그 순간, 다시 말해서 내가 그동안 믿은 것은 ‘뭔가 믿게 되면 얼추 뭔가 생기지 않을까? 요행이라도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다리면서 믿었는데 ‘미쳤지. 내가 미쳤지. 믿을 것을 믿어야지. 믿은 내가 바보지.’라는 그 지점까지 주께서 데려가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하고 사기 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아 나한테 징조를 원해라.” 아하스왕이 “나는 징조 구하지 않습니다.” 뭔 뜻이냐 하면, “내 인생 내가 꾸려나가고 내 인생 내 소박하나마 내 힘으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내 힘으로 가난하지만 이대로 저는 사는 게 제 성격에 맞습니다.” 징조를 구하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인생을 만드는 당사자는 나기 때문에, 나는 내 자아상을 내가 귀하게 보기 때문에, 내가 만든 인생을 내가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뭐냐? 나라는 것을 없애려고 합니다. 나라는 것이 없어지는 그 판에 인생은 무슨, 인생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요. 누가 그런 노래 불렀지요. 인생은 나그네 길? 최 희준씨가 불렀잖아요. <하숙생> 인생은 나그네 길…….

성경에서는 인생 자체가 없어요. 프랭크 시내트라는 <마이 웨이> 마이웨이 자체가 없어요. 인생 자체는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 끝 모습, 마지막 사라지는 순간을 죽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인생 자체가 없어요. 지금 있는 듯 보이지요. 그건 덜 사라져서 그래요, 덜 사라져서.

연극 할 때는 무대에서 연극배우가 침 튀겨 가면서 대사하고 성의껏 연기하지요. 연극이 끝난 후에 연극의 막이 내려면 거기에는 텅 빈 무대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얼마 안 남았어요. 한 30년 남았습니까? 너무 심하게 많이 남겼나요? 사라져 없어요.

인생 자체가 없는데요. 왜 우리는 고집을 부리는지 몰라요. 사라지는데 안 사라지려고 붙잡고 있다는 게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마치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어떤 남작이었어요. 어떤 귀족이 물에 빠졌는데 기껏 한다는 게 자기가 자기 머리끄덩이를 잡고 물에서 건져 올리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보 같은 짓 아니에요? 빠져들어가고 있는 자기 손을 가지고 자기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면 머리카락만 빠질 뿐이지 자기 몸 전체가 들려 나오겠어요? 구출되겠습니까? 교회가 하는 구원이 바로 그런 구원이잖아요. 안되는 거예요. 악마는 인간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되지도 않는 구원을 구원시켜 준다고 교회 만들어놓은 거예요. 어떻게 이게 돼요, 안 되는데!

주께서는 그냥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고 물속에 집어넣어 버려요. 물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구원, 꿈도 꾸지 말라고. 네 주제 파악도 못한 채 무슨 구원이 되느냐는 말이지요. 징조를 구하라는 말이지요. 네 구원 생각하지 말고 징조를 구하라.

그 징조가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아하스는 징조를 안 구한다 했어요. “저까지 귀찮게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래가지고 안 구한 거예요. ‘뭐 하나님이 주시면 주시는 대로 받지 뭐.’ 굉장히 겸손한 척, 믿음이 있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게 아니고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 임마누엘이 뭐냐 하면 이사야 8장 8절에 나옵니다.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게 좀 어렵지만 참고 들어주세요. 하나님이 징조를 주는데 그 징조가 처녀가 아들을 낳아요. 처녀가! 인간의 육의 혈통은 끝났습니다. 인간의 육의 혈통으로 태어난 것은 안 받습니다. 처녀로 태어나야 돼요. 처녀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안 받습니다.

그런데 그 징조를 징조답게 하기 위해서 여기에 누가 들어가느냐? 7장 18절에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그러니까 이집트 이걸 날파리, 앗수르를 땡벌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 역사에 관여해서 그들로 힘을 비축케 하는데 그 힘을 비축한 힘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비축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들을 더욱더, 물속에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집어넣는데 앗수르 이집트 이런 나라들을 활용하시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앗수르는 천하에 자기가 최고의 제국이라고 으스대고 뻐기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인류의 역사관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칩니다. 이사야 7장 20절에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주님께서는 앗수르를 이발소에 가면 날카로운 칼 있잖아요, 삭도, 칼, 그 칼로 사용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야말로 구원에 대해서 아예 거의 절망적인 곳으로 밀어넣어 버립니다. “구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인간에게 구원은 없어.” 그쪽으로 밀어 넣는 일에 앗수르를 동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앗수르가 온다는 것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주님께서 처녀로 아기를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로 하라는 그 징후의 절차, 과정 속에 앗수르, 바벨론, 이집트, 이런 나라를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그 집어넣는 과정 속에 이사야의 자식까지 있습니다.

이사야가 결혼을 했는데요, 아내하고 동침을 해서 자식까지 낳았습니다. 그 자식 이름이 8장 1절에 보면, 자식 이름이 좀 어려워요, ‘마헬살랄하스바스’ 이름을 왜 이렇게 짓는지 동방삭으로 짓든지 오래 살라는 그런 식으로 안 짓고 ‘하나님의 노략. 이방인들의 강탈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이름의 자식을 낳아요.

이사야의 자식은 개인적인 자기의 정체성이라든지 개별성은 일체 용납이 안 됩니다. 아버지 직업에 기여하라고 자식 낳은 겁니다. 아버지 직업에. 아버지 직업이 뭐냐? 주님의 계시 받은 거잖아요. 자식도 본의 아니게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아버지 계시를 뒷받침해주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노략을 하는 거예요. 강탈, 약탈을 하는 거예요.

뭔가 가지게 되면 아직 숨통을 트고 있는 거예요. 뭔가 가진 마지막 숨통을 완전히 질식시켜 버리는 겁니다. 일체 가진 것이 없도록 강대국 앗수르를 키워서 노략질하게 만들 때 그 앗수르가 어떻게 하느냐? 이사야 8장 7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유다에 들어와서 유다의 모든 것을 덮어버려요. 덮일 때에 그게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편만하다. 어떤 것 하나 앗수르의 그 잔인하고……, 앗수르가 제국 가운데 가장 잔인한 제국이에요. 포로 잡혀갈 때 애들이 힘이 없으니까 걸음이 좀 느리잖아요. 느리게 간다고 애를 바위에 집어던져서 죽여버리는 게 앗수르군대에요.

그리고 앗수르가 어느 나라를 침공하면 귀족들의 코와 코를 꿰어서 꼼짝 못 하게 자기 나라로 끌고 가서 다 죽여버립니다. 말살해버려요. 도살하는 거지요. 인간의 잔혹함과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 앗수르 제국입니다. 한번 점령했다 하면 그 지역의 주민들 다 싹쓸이 했어요. 몽골의 징키스칸 비슷하게 다 죽여버렸어요.

그것을 이사야 8장에서는 편만(遍滿)이라 해요. 8절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으로 인해서 생긴 그 잔인함 학정 폭력 횡포를 두고 편만, 어느 빈틈도 없이 좍 깔아놓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임마누엘로 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앗수르 중의 한 악한 자가 이 일을 꾸미고 들고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11절) 놀라운 사실이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앗수르로 하여금 덮치게 만드는 거예요. 빈틈없도록. 이스라엘 유다 할 것이 없이 빈틈없이 다 덮치게 해놓고, 그렇게 덮쳐서 어느 하나 숨통 없도록 만들어 놓고 그 덮친 것 위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 덮친 위에 덮쳐버립니다. 완전히 말타기 게임이지요. 가위바위보! 하고 있는데 뒤통수 쳐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오셨다는 그 말은 예수님 이전에 이미 임마누엘이 있었어요. 잔인함의 임마누엘, 지옥 형벌의 임마누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죄인만 있는 임마누엘, 모든 것이 편재되어 있고 편만한 임마누엘이 절차상 먼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징조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엘로 오시기를 바라느냐 하면, 세상에 대해서 일체 당해내지 못하는 것을 소원으로 삼는 사람, 세상한테 이길 생각은커녕 세상한테 된통 당하고 질 생각만 하면, 세상에 사기당하고 질 것만 생각하면 너무 기뻐서 환장하는 사람, 도대체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임마누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 이런 사람, 그걸 아주 쉽게 잘 아는 문자로 이야기하면, 요새 문자로 많이 이야기하는데, 문자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어차피 못 먹을거 찔러나 보자. “주여, 이 세상 어차피 내 것 아닌 거 주께서 확 찔러버리세요.” 일체 세상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안 갖는 그 즐거움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집의 아내가 코로나 걸렸다. 성경에 보면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라 했잖아요. 나도 어서 걸리기를 소원하는 사람. 일부러 마스크 안 쓰고요. 이게 우리 남편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함께 당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 바로 강도 아닙니까?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그 강도.

자기는 남의 가정 파탄 내놓고, 사람 죽여놓고 얼마나 낯짝 두껍게 ‘주님, 주님 나라 임하실 때, 천국 갈 때 저 생각해달라.’고 이런 발언을 하, 이런 발언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점핑하는 거예요. 그걸 뛰어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인간들, 철학박사, 신학박사, 과학박사, 그런 시시하고 무식한 이야기를 완전히 뛰어넘은 거예요. ‘너희 이런 것 몰랐지? 너희 백날 해야 이런 것 몰랐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한테요 구하는 것은 그거에요. 7절부터 13절까지 이야기는 덮친다는 이야기에요. 덮치는 이야기. 이 덮치는 이야기를 제가 쉽게 했는데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입증책임’이라는 게 법조계에 있어요. 입증책임이라는 게 뭐냐 하면, 형사사건에서는요, 피고보고 네 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라고 하지 않아요. 반드시 기소하는 검사가 입증책임이 있고 민사에서는 원고쪽이 입증책임이 있어요.

먼저 법정에 소를 제기하고 시비 거는 쪽이 증명을 해야 될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가 세상을 볼 때 뭘 보느냐 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내가 왜 이 세상을 심판해야 되는지 그 입증책임을 하기 위해서 벌인 일로 간주할 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왜 이 세상은 불로 심판받아야 되느냐, 라는 것을 예수님이 먼저 증명하는 식으로 세상 모든 일을 일으키고 있다는 그것을 같이 동감할 때 그게 성도입니다.

세상이 망해야 될 이유를, 주님 쪽이 검사니까, 심판주니까요, 그걸 입증해 나가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내 아들 죽였으니까 너 각오해라.” 이거 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게 얼마나 인간이 들으면 억지스러운지요?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출애굽할 때 애굽의 장자를 왜 죽이느냐 하면, 흠 없는 어린양을 죽였다고 애굽의 장자들 다 죽였어요.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흠 없는 어린양 중심으로 일하는 데, 장차 오실 예수님이지요, 흠 없는 어린양 중심으로 일하는데 애굽 너희들은 왜 모르느냐? 바로 그 의미를 모르는 애굽 너희 장자 내가 다 죽이고 그 의미를 아는 히브리인들은 제각각 문 앞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잖아요. “저 봐! 쟤들은 알잖아.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알잖아.”

그러니까 이것은 애굽나라에서는 얼토당토않은 덤터기를 씌움을 당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모르는 문제를 출제하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모르는 문제를! 그런데 그게 하나님 자기 입증이에요. 세상은 예수님 중심입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게 통일돼요.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서는 먹혀 들어가겠느냐? 터무니없는 이야기지요. 세상은 인간중심이지 예수님 중심이 아니거든요. 주님 뜻은 이거에요. “네가 만든 너라는 인간과 하나님이 만든 예수님과 누가 진실이고 누가 생명이고 누가 길이냐?” 하나님은 “내가 만든 예수님이 진짜 인간이고 나머지기는 가짜다.” 이걸 입증해 나가시는데 앗수르와 이스라엘을 동원시킨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모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하는 일이 너무나 터무니없이 들리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마귀한테 사로잡혀 살아간 그 이유 때문인줄 압니다. 우리에게 성령 주셨으면 이제 눈을 떠서 세상 편이 아니라 주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