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수련회 소감-얼굴이 명승지

아빠와 함께 2022. 8. 14. 10:48

한 재단사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주겠다며 그 나라의 왕을 찾아왔다. 이 옷이 독특한 이유는 옷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선하고 진실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기에 너무 특별해서 왕의 기품 정도는 되어야 입을 수 있기에 찾아왔다는 것이다. 임금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알았기에 재단사의 말을 믿은 것이 아니라 누구나 흔하게 가질 수 없는 특수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내부에서 왕을 충동질하며 ‘나는 그런 사람이 맞다’라고 믿게 했다. 그리고 왕의 측근에서 보좌하며 왕의 권세를 부러워하고 탐하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 안에서도 동일한 욕망이 작동했다.

분명히 왕의 치수를 재어갔는데 그 치수를 따라 만들어지고 있는 옷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치수는 있는데 옷은 없다. 몰래몰래 재단사의 작업을 훔쳐보던 모든 사람은 안 보이는데 보이는 것처럼 가장하느라 사투를 벌인다. 재단사를 관찰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총동원하여 더 구체적이고 그럴듯하게 옷의 모양을 설명해 줘야 상대에게 믿음직스러워 보일 수 있다. 듣는 자도 말하는 자와 어느 정도의 일치점을 찾으며 자신만의 의견을 덧붙여서 서로 속이고 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서로 속였다.

차라리 보이는 척하는 것이 연기가 아니고 현실 그 자체이고 자신의 진심이라고 믿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다면 굳이 남을 속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서로 믿을 수 있다. 모두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도록 눈이 가려져 있다는 것은 오히려 서로를 가장 완벽하게 속일 수 있고 또 속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욕망의 실체가 있는 거짓의 원천에 미리 도착하지 못한다면 죽고 나서야 진리의 외침을 듣게 된다. ‘너는 속았다. 너는 옷이 없기에 벌거벗었다’

하늘나라가 어디 있는지를 묻는 사람에게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답이 아닌 것처럼 내가 믿는 하나님과 다른 네가 아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이라고 할 때 보여줄 것이나 말할 것이 완벽히 준비되어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말할 때 인간의 시공간에 속하지 않은 외부에서 원형 형상을 담고 오신 예수님 자신이 답인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그 자체가 이스라엘이 예수님 안에 박아넣은 아픔이었고, 이제 택하신 주의 백성 안에 동일하게 자리 잡은 주의 아픔이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자기 말로 변명하지 않고 차라리 벙어리처럼 입을 닫을 뿐이다. 인간의 말은 없어지고 주의 말씀만 나타나도록.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주의 아픔을 부르는 것과 같고 나의 자존감 박살 내고 온전한 패배감을 안겨주시는 주님만이 내가 기다리던 진정한 군주라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택함을 받은 백성임을 의심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성전을 파괴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성전이 없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고 자신들이 살아갈 소망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렇게 하나님께 버려진다는 것은 상상으로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에스겔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자신의 몸에 담아 인자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내린 평가를 전달해야 했다.

에스겔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온몸으로 전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빌립과 다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 너는 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느냐. 답답해 죽겠으니 차라리 나도 하나님을 좀 만나게 해줘라. 내가 직접 들어 보겠다’ 선지자가 전하는 말을 믿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이 직접 오셔도 결코 믿지 못할 정도로 인간의 상태가 심히 부패 되어있음을 스스로 알 길이 없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나의 선하고 진실한 선택으로 불가능한 건 잉태된 자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합당한 것으로 받아낼 빈 마음이 없어서이다. 잉태치 못한 노선으로 오셔서 이미 시체에 불과한 백성의 죄를 모두 끌어안으시고 하나님 진노의 형벌을 대신 받아내신 인자의 마음에 접속되어야만 비로소 세상과 하나였던 나의 내부성이 죽고 텅 빈 그릇으로 준비될 수 있다.

그릇은 담기는 대로 그 지시에 따르게 되지 ‘믿고 싶다, 감사하고 싶다, 구원받고 싶다’라는 자기 지시에서 단절되고 나의 자존감에서 완전히 끊어진 채 오직 말씀의 지시만 머무는 처소가 된다. 주님에게 패배했기에 그분 앞에서 철저히 죄인이 될 수 있고,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을 따질 자격자가 아님이 확실해지기에,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원래부터 마땅한 일인데 그것이 주의 복음을 위해서 그리되어야 한다면 그것이 도리어 영광스러운 일이다.

북쪽에서 몰려오는 말씀의 폭풍에 휘말리며 일어나는 사건의 반복 속에서 나의 동질성에 금이 가고 다시 복구될 수 없는 채로 불안정과 무질서로 던져지면서 인간 개개의 모래알같은 생각이 언어를 통한 사유와 타협의 과정으로 잠시 뭉쳐지고 하나 되었던 질서와 안정감을 끊임없이 공격받는다. 인간들이 만든 일자가 어떤 모습으로든 우상이 되는 이유는 인간의 모든 움직임의 동기에 하나님의 자기소개와 그분의 지시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나에게 나를 소개하고 내가 나에게 지시하는 것만 있기에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게으르지 않고 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할지언정 태어나고 숨 쉬고 살도록 하신 에너지가 누구에게서 공급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살려놓으셨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한 번도 산 적이 없다.

다수의 인간이 동의하는 언어로 정의된 죽음 말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는 죽음을 만나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다시 사신 부활의 생명력과 활동력에 무지하니 평생을 허깨비같은 나의 존재 증명에 열심을 낼뿐, 진짜 존재하시는 분을 증거 하지 못하는 죽은 삶을 드리우다 사라진다.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자기 안일에 빠진 죄와 아무 상관이 없을 일이지만, 세상에 머무는 동안 살아있도록 공급받은 햇빛, 공기, 그 외에 모든 것의 주인을 고백하지 못한 채 죽어서 심판대에 설 때,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되었던 빚을 갚아야만 빠져나올 지옥이 있었음을 실감하고 그곳에 영원히 갇히게 된다. 세상에서 누린 어느 것도 공짜는 없었다.

우상숭배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았던 에덴동산에서 우상숭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야 할 사건이 터졌다. 아담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으나 찾지 않았다. 늘 하나님의 눈동자 안에, 목소리 안에, 그분의 지시 안에, 이렇게 하나님 안에 있음이 애써 느낀 것이 아니고 항상 함께 계시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 그는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주의 목소리를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있음으로부터 애써 피하고 숨으려는 독자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다. 선악 체계는 하나님의 지시를 단절시키고 마귀의 지시만을 받게 하니 결국 하나님과 단절된 사망과 음부의 세계로 강제추방되어야 했고 이렇게 지시의 루트가 바뀐 채로 아담의 몸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의 세계가 확장되고 구체화 되었다.

세상에서 잉태된 모든 자식은 모형의 아들이기에 참 아버지가 없는 고아이고 사생아다. 육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믿기에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육의 동질성을 유지한 채 인생의 끝에 죽게 되는 죽음이 선악과의 결과로 이미 죽었던 정녕 죽는 죽음이다.

세상이 이미 우상성으로 가득함을 확증하시고 하나님 되심의 거룩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의 몸속에서 갈비뼈를 취하시듯 애굽 속에서 언약으로 심어놓으신 히브리민족을 뽑아내시어 이스라엘 국가를 만드셨다. 이스라엘을 샘플로 채취해 율법의 시약을 첨가하시어 부글대는 욕망의 에너지가 애굽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광야에서도,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육체의 연장이기에 우상숭배만 이루어짐을 분명히 보이게 하셨다.

아담의 요소로 여자를 만드시어 여자 안에 여자의 후손의 비밀을 감춰서 보호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귀히 보시고 지키신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담긴 어린양의 희생이 만든 생명의 피였다. 하나님은 끝까지 아들만 아끼시고 사랑하신다.

광야에서 이미 시체나 마찬가지인 이스라엘을 어린양의 피에 담아 여호와의 이름이 진두지휘하며 세상의 우상성을 속속들이 폭로하시고 패배시켜 주님 홀로 이스라엘의 이김이 되게 했건만, 홍해를 건너면서 이미 죽음으로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음을 깨닫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승리의 결과를 인간의 형상에 돌리며 우상의 세계로 신속히 환원되면서 보이지 않는 주의 형상에 공로를 돌리지 못했다.

이것까지도 육에서 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세력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음을 발각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이방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조차도 우상을 섬기는 선악적 욕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드러내며 모두가 죄 아래 있고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음을 확실히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되시는 유일한 한 분의 선택만이 빛나게 해주셨다.

첫째 사람 아담으로 시작해 두 번째 아담이자 진짜 사람이신 인자로 나타나시기까지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그리고 수많은 성경에 언급되었던 언약에 붙어있는 이름들이 주의 이름의 의미를 담은 알갱이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온전히 언약의 의미가 수거되는 분리과정이고 그들의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통합되어 왕의 승리 안에 담기는 것이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언약의 주인공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하나님만 계셨음이 최종 증거되는 작업인 것이다.

불신자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그들과 한배를 탄 동지인 것처럼 먹고살아야 하고 안정감을 유지하려고 가짜 신자인 척하는 가짜로 계속 발견되다가, 말씀으로 하나 되는 임시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기쁜 소식에 속히 그곳에 합류되어 진짜 신자인 척하는 가짜로 발견되면서 어디에 있든지 하늘나라가 아니라 심판의 제단 위에 있음을 고백하게 하신다. 말씀은 듣는 것이 아니라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목격하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이해하고 습득할 어떤 것도 수련회 현장에는 없었다.

지금은 텅 비어있을 수련회 강의실의 황량함이 전해지며 하나님께서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을 끌어당겨 강제로 앉혀 놓으시고 인간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지는 우상의 증거들이 드러나게 하고, 더 높은 차원에서 천사의 수많은 눈에 그것들이 낱낱이 포착되어 응축된 인간의 형상을 되비쳐 주시며 말씀을 사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관찰하기에 이루어지는 모든 말과 행동이 우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규정하시고 다시 강제로 해산당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은 없었고 우리 아닌 다른 분의 전쟁에 가담되어 오직 십자가를 거부하고 등을 돌리고자 하는 우상성만 풀풀 풍기면서 한도 끝도 없이 느껴지는 이 참담함이 누구의 작품인지를 바라보게 하신다. 유일하게 하나님에게 잃어버림을 당한 적이 있는 독생자 예수님에게만 모든 복이 돌아가게 하시고 내가 나의 의를 주장할 복이 하나도 남겨지지 않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어중이떠중이처럼 남기신 자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긍휼이었다.

없음을 그렇게 원래 없음의 상태로 돌아가게 해주시는 배제됨에서 오는 가벼움을 성급하게 소유해서는 안 되고 먼저 자신이 당한 소외감에 분노하면서 모든 아픔을 나의 고통으로 해석하는 오류에 던져져서 진짜 아픔의 출처에서 나오는 피를 경유 한 우상 숭배자로 주님 앞에 서야 한다. 이미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승리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파생된 심판사건의 한 가닥이 꽂힐 때마다 흘러나오는 피가 나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경로가 열려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합당함으로 받을 수 있는 예수님의 내부성이 담긴 새 영을 공급받고 머리 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새 성전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