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와 성공
401강-YouTube강의(승리와 성공 요한일서 5:4)20220719-이 근호 목사
제401강, ‘승리와 성공’. 승리의 반대말이 성공입니다. 성공의 반대말이 실패가 아니고 승리가 돼요. 성공과 승리는 대척관계에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치고 승리한 사람 한 사람도 없고요. 승리한 사람치고 실패/ 성공에 대해서 신경 쓸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성공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성공이나 실패를 논할 때 나오는 개념이고 승리라 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승리해서 확보된 새로운 영토가 있어요. 그 영토 차원에서 골고루 승리가 적용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비 올 때 우리가 개인적으로 빗방울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다 튕기면서 비를 안 맞는 것, 그 방법도 되기는 돼요. 그렇지만 좀 바빠요. 빗방울 탁 튕기고, 빗방울 막 때려가지고 떨어지기 전에 밀어내고, 또 쏟아지면 빗방울 밀어내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보다 약간 더 간단한 방법이 있어요. 우산 쓰면 돼요.
우산 쓰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빗방울은 내 몸에 닿기 전에 어느 표면에 다 닿아버리죠? 위에 있는 우산 표면에 다 닿아버리죠. 그러면 우산 안은 새로운 영토가 됩니다, 새로운 영토. 승리가 집단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성공을 주님께서는 승리에 넣어주질 않습니다. 사적인 것, 사적인 출세라든지 성공을 승리에 넣질 않아요.
승리는 집단적이라 너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아이 성을 공격할 때, 하나님께서 아이 성이 이기게 해줬거든요. 여리고성 점령 다음에 아이 성 칠 때 (이스라엘이) 패배했어요. 집단적 패배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단적 패배 속에서 개인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아간이라는 사람이에요. 챙길 건 챙겼어요. 금 챙기고 외투 챙기고 챙겼습니다.
승리는 집단적인데 집단적인 것에 흠이 되는 요소인 사적인 성공을 탐하는 자가 거기에 발생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게 하셨는가? 여호수아 7장 마지막에 보면,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아골 골짜기, 괴로움의 골짜기라는 뜻인데요. 이 돌무더기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승리를 훼방했던 자가 하나님의 분노를 받아서 저주를 받아서 그 돌 안에 묻혀있게 된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승리를 사적이 아닌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이 받을 필요가 있어요. 만약에 주님의 승리를 또 사적으로 나의 승리로 간주한다면 이 아이 성 승리에 돌무더기 있었다는 그 요소를 빼먹고 하나님의 승리를 이해하는 것밖에 안돼요.
흔히 말하는,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이건 집단적이에요. 십자가로 승리한다 할 때에 툭 물어보세요. 네가 어떻게 해서 승리했냐고. 뭘 해서 승리했냐고 물어보게 되면 아무리 봐도 우리가 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적으로서의 성공/ 실패는 내가 뭔가 한 게 있었고 그 업적과 성과와 실적이 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에 난 그걸 성공이라 부르고 싶다, 이럴 때 성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실패가 뭐냐? 실패는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갖은 노력과 열정을 다 투자했는데 예상한 것보다 성과가 좋지 않을 때 우리는 거침없이 그걸, 이번 일은 실패다, 실패했다고 간주하는 거예요.
그러니 성공과 실패를 논할 때는 반드시 사적인 자기의 애씀과 수고와 기대성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승리의 반대말은 성공이나 실패를 말하고, 성공/ 실패의 반대말은 그냥 승리에요.
이렇게 해놓고 요한일서 5장 4절을 보겠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여기 이겼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겼다는 말은 내 라이벌인 저 사람보다 내가 이겼다는, 그런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집단이 발생되었고 그 집단의 맞은편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세상 그 전부가 그 맞은편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마치 골리앗과 다윗이 싸울 때...... 사울은 이 전쟁을 자기의 성공으로 보고 싶었어요. 사울왕은 사적인 성공으로 보고 싶었어요. 이걸 이김으로써 자기 백성들로부터 더욱더 칭송받고 이스라엘을 자기 권한 속으로 두고 장악하고 싶었죠. 골리앗은 역시 싸움에서 자기가 성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골리앗이나 사울은 그 성공이란 말을 승리하고 싶다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공하고 싶은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실패하기 싫은 겁니다.
그런데 승리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고 성공/ 실패 다 반대말이에요. 승리는 실패라는 게 없습니다. ‘승리가 생겼다/ 승리가 아예 없다’ 이렇게 되어야지, ‘승리가 생겼다/ 승리한테 실패했다’ 이런 말은 성립되지 않아요. 제가 말을 더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 말고는 다른 표현이 안 돼요.
승리는 승리할 때 새로 생기는 것이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나 구원받는 데 성공이에요. 그런데 내 구원 성공이란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구원은 승리에 속하지, 내 성공에 속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승리의 맞은편에 있는, 이스라엘 맞은편에 있는 골리앗이 있는 블레셋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서는 승리는 없습니다. 오직 성공뿐이에요.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데에 성공한 것처럼 계속 살기를 바라는 성공뿐입니다. 비실비실하게 살면 이건 인생 실패한 것으로 간주해서 곧 자살모드로 들어갈 수가 있어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누가 나더러 인생 실패했다고 하면, 할 수 없지 뭐. 내가 봐도 나 인생 실패한 거야. 거기서 내 인생 성공할 거냐/ 실패할 거냐,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딱 두 가지 밖에.
엉뚱한 곳에 승리 있다는 것은 전혀 감을 못 잡고 사적인 것밖에 생각 못 하니까 ‘내 인생 어느 정도 선방했지.’ 아니면 ‘내 인생 아직 멀었어 멀었어. 이래가지고는 낯 들고 못 살아. 너무 실패했어. 난 누구 만나기도 겁나. 차라리 자연인 될까?’ 하여튼 자연인 되서 산속에서 혼자 사는 사람치고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전부다 도피성이에요, 도피성. 남 눈에 안 띄는 거요. 전부다 개인적이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 어느 구석에도 승리는 없었다. 승리는 이 세상 말고 따로 승리가 주어지는 겁니다, 따로이. 이 세상 전체가 죽음인데 승리는 부활의 세계가 승리죠. 이 세상 전체는 죄밖에 없는데 의의 세계가 승리가 되는 겁니다. 승리는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집단 안에 들어온 사람은 공유해서 다 누리는 거예요.
그래서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면 쉽게 말해서 우리 앞에 커다란 명패 같은 걸 붙이라는 거예요, 덜렁덜렁하게. 이 명패에다가 뭘 써붙이느냐 하면 ‘나는 세상을 이기었다. 세상을 승리했다. 승리자’ 이거 하나 붙이고 세상 돌아다니라 이 말입니다.
성도는 사적인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만든 나라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 실패에 대해서 그렇게 미련 갖고 있는 이 세상 자체에서 이미 뚝 떨어져 승리한 세계를 따로 만들었다는 그 표시로서 증거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께로 난 자입니다.
뭐 성령 받고 십자가 믿고 온갖 거 다 치장해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증명할 게 아니고,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건 너무 복잡하고, 간단히 해서 가슴팍에 하나 마음속으로 써붙이는 거예요.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뒤에서 안 보이면 똑같은 거 하나 더 해서 뒤에도 하나 붙여가지고 덜렁덜렁 돌아다녀라.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어서 오세요, 손님. 속으로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항상 승리입니다. 그러니까 사적인 성공과 실패는 승리 앞에 아예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