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답변

어제의 구원 오늘은 소용없다

아빠와 함께 2022. 7. 2. 19:34

※어제의 구원 오늘은 아무 소용없다

 

질문 : 유월절의 은혜를 입고 홍해를 건넌 어린 양의 피 때문에, 그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제 가나안에 못 들어간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들은 구원이 된 겁니까? 아니면 그냥 탈락 된 겁니까?
답변 : 구원의 개념은 그 언약 틈 안에서의 구원의 개념이 그때만 적용되고 그다음 언약이 주어지려면 기존의 구원 개념은 폐기되고 새로운 구원 개념이 또 등장해요.
질문 :그게 구약이라 그런가요?
답변 : 신약도 마찬가지고요.
질문 : 그럼 신약도 그러면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가 그 성령이 또 떠나가시기도 하고 그러십니까?
답변 : 십자가로서 이미 모든 언약은 마감됐어요. 다 이루다 했으니까. 더 이상의 언약은 없습니다. 근데 성도 그 인간 성도는 육 자체가 이미 구약적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제 구원받은 것이 오늘의 아무 소용이 없어요. 어제 은혜 받은 게 오늘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질문 : 십자가 사건 전까지만?
답변 : 십자가 사건 전까지는 모형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특수한 이스라엘 집단을 위해서 모형적으로 한 것이고 오늘날 어제 은혜 받은 것이 오늘에 효용이 없다니까요. 오늘 오늘 치의 은혜를 또 주시는 거예요. 그래야 인간은 이미 얻은 구원을 내 소유화 못 시켜요.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소유가 된 거기 때문에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죠. 걱정한다고 하면 주신 것을 도로 뺏는 게 되니까.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 매일같이 먹든지 마시든 뭐와 같이? 자기 일을 못하고 주의 일을 할 뿐이에요. 주의 일을. 이걸 먹든지 컵을 마시든지 이게 다 주의 일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이 24시간 늘 아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육을 통해서 이거는 은혜를 받은 이거는 주의 일이라고 하는 내가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자기 생각을 또 집어넣거든요. 그런데 그걸 집어넣는 이유가 죄와 의라 하는 것은 반드시 죄가 발생될 현장에 동반해서 다시 의가 되기 때문에 어제 짓지 못한 죄를 오늘 지어줘야 오늘 치의 의가 또 새롭게 감사가 되는 겁니다. 어제까지는 커피를 내가 안 마셔가지고 커피나 마시면 토합니다. 못 마신다 했는데 그때까지는 커피 마시는 게 죄인 줄 몰랐는데 오늘 아침에 먹으니까 커피가 이거 당기네요. 이제 커피 먹어야지 하면서 커피 마실 때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 마시는 죄를 오늘에야 비로소 새롭게 짓게 만들어서 커피 마셔도 천당 가는 게 아님을 감사하는 거죠. 커피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그래요. 그래서 매일 일용할 양식을 매일같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이 내가 애써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결과물로 오늘 또 이렇게 살아서 이야기하고 숨 쉬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호흡을 취해버리면 호흡을 취해버리면 우리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왜냐? 이미 주님의 것이 된 상태에서 몇 년을 살아야 덜 아까운 거 이런 게 없거든요. 몇 년 살든지 그거는 주님이 자기의 권한의 문제지 더 살 건데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의 그 시한 의식이 갖고 있는 그 한계가 그런 게 문제가 되요. 미리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일 염려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내일 하라 이 말은 내일 살려주거든 그때 하라 이 말이죠. 니가 내일까지 산다는 보장은 없다 이거예요.

질문 : 목사님께서 그냥 사세요. 그냥 살다 보면 천국에 도착돼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그냥 산다는 게 사실은 성도가 느끼는 게 하루를 살면서도 순간순간 아니 계속은 못 느껴요. 순간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구나. 그 울림, 그게 그냥 그냥 사는 거예요?
답변 : 울림인데, 그게 감사하던가요 짜증 나던가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 감사한데 앞에서는 소급해서 전에 것도 감사해야지요. 어제 짜증 낸 것도 짜증내게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래 되어야지요. 감사하게 되면 질문도 끝나버렸죠. 감사, 고마운데 질문할 게, 뭔가 결핍이 있어야 질문이 되는데, 고맙습니다 하고 있는데 무슨 질문이 나오겠어요.
질문 :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재림을 하시고 재림을 하셔서 백성들을 데리고 다시 올라가세요. 주님 나라로. 거기서도 주님은 육을 입고 계세요?
답변 : 거기서요? 영광스럽게 오신다고 했으니까. 해와 같이.
질문 : 그러니까 재림은 구름 타시니까 육을 보여주실 거 아니에요? 시공간으로 들어오시니까.
답변 : 그게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1장에서 봤던, 분명히 어떤 실존적 인물은 계신데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영광스럽고 휘황찬란하고 감히 눈으로 볼 수 없어서 엎드릴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오시죠. 오시게 되면 우리가 지나온 나는 이렇게 살았고 어떻게 했고 교도소 일곱 번 왔다갔다 하고 사기 당하고 사기를 해 먹었다 하는 그게 그렇게 다 소소한 일이고 그거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고 괜히 고민했어. 아무 문젯거리도 아닌데 괜히 고민했어. 내가 애들 두 번 때리고. 세 번 때려도 괜찮아요. 그게 큰 문제가 아닌 거예요. 지갑 잃어버리고.
질문 : 영광체로만 느껴지는 거예요?
답변 : 돌아보면 지갑 잃어버린 것도 주께서 잃어버리게 하셨다는 것을 왜 그때서 이래 된 걸 왜 그때 쓸데없이 고민을 왜 했던가? 주께서 일부러 잃어버리게 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사건의 망은 주님이 쥐고 있지 우리 마음대로 안 돼요. 아내와 남편을 다른 남자 만나게 되면 하는데, 때 되면 또 그 남자 그 여자 만나게 돼 있고요. 서로 싸우게 돼 있어요. 그 싸우면서 감사하고 늘 고마워하시면 되는 겁니다. 상대방이 잘했다고 또 고마워한다고 오해시키지 말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질문 : 목사님. 인자를 표현할 적에요. 십자가 지기 전에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이 포함돼 있고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주가 되셨다는데 그런 건 그리스도와 주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변 : 문맥에 따라서 주님을 표현할 때는 주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싶으면 그리스도를 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 실체는 그리스가 주고 변함이 없고요. 문맥 따라서 그다음에 다른 걸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개념들을 조합하시는 거예요. 조합하게 하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