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고백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3:9-12)
고린도교회 같은 경우에는 교인들끼리 송사하고, 우상 제물 먹고, 사창가 들락거리고, 간음하고, 이런 일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사도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복음의 내용에 더 깊숙이 들어가는 하나의 계기로 삼았던 겁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 보여지게 되어 있는데 ‘그 현실은 누가 만든 것인가, 왜 교회에 그런 일이 생겼는가?’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지만 사도는 단연코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 복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체험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 데살로니가 교회같은 경우에는 그냥 놀고먹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사도가 ‘손 좀 봐야 되겠다. 가만있으면 안 되겠다. 놀고먹으면서 재림하실 거니까 그냥 하늘로 휴거 되면 되잖아, 이런 생각, 이런 사람들이 나타난 것을 계기로 해서 복음을 확실하게 더 설명할 수 있겠구나.’ 해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아는 복음은 나처럼 이렇게 일을 하는 것이다. 내 양식은, 내 밥벌이는 내가 챙기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짜 교회는 말썽꾼들이 자주자주, 이것 터지면 저것 또 터지고, 이렇게 자주자주 나타나야 돼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담의 속성, 아담의 DNA를 너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갖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왜 저 사람에게는 그게 양생이 되고, 드러나고 나는 아직까지 왜 안 드러났는가? 그런 찬스가 아직 안 와서 그래요. 그런 상황이 안되어서 그랬을 뿐이지 남들에게 욕하는 그런 기회가, 그런 상황과 똑같은 상황이 되면 남들에게 비난받는 일들이 터지는 겁니다. 그럴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이런 일을 통해서 ‘그동안 내 구원을 내가 관리하려 했던가?’ 아니면 ‘이 구원문제가 내 손을 떠나서 일방적으로 주님에게 이미 넘겨진 상태인가?’를 돌아보는 그러한 계기로 삼아야 됩니다.
내 구원을 내가 챙겨버리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기독교 문화에요. 문화라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들의 노동의 산물이 문화라는 겁니다. 자연과 더불어 있으면서 인간의 자기 정신을 구체화시킨 게 문화에요. 그 문화가 좀 더 체계가 되면 이것은 문화가 아니고 문명이 되는데요, 그 문명의 특징은 폭력적입니다. 여기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 중에서 노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이 세상이 주는 그 폭력이 무서워서 도피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돈을 번다는 것은 그 폭력 세계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야 이 돈을 벌 수가 있는 겁니다. 세상은 조직적으로 악하거든요. 조직적으로 악에 가담해야 되고 더욱더 기발하고 정교한, 그래서 남의 것을 빼먹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개발하지 아니하면 자리를 버틸 수가 없어요. 회사가 그렇고 기업을 해도 그렇고, 계속해서 이 세상이 부추기는 것은 더 기발한 악한 것 없냐, 계속해서 그걸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성이 그대로 문화입니다. 자연에 대해서 인간의 노동력과 지혜가 들어가서 자연을변형시키는 것을 문화 또는 문명이라 하는데 인간이 갖고 있던 그 정신이 그대로 바깥으로 다 구체화 된 것이 바벨탑이에요. 모든 인간은 등질화 되어 있다. 회사가 바벨탑이고 교회가 바벨탑이거든요.
성경의 원리는 이렇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은 네가 못한다. 너 천당 가는 것, 너 구원받는 것,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네 솜씨로 가능하지 않고 불가능하다는 것.’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행함은 선악 체계가 있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이 행해놓고는 반드시 뭘 따지는가 하면, ‘내가 잘했는가, 내가 이번 일을 못 했는가?’ 그걸로 따져요. 자기 일로 시작해서 자기 일로 계속 되돌아오는 겁니다. 절대로 주의 일로 넘어가지 않아요. 주의 일이 뭔가 다시 말씀드리겠어요. 주의 일이라는 것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이게 인간으로는 가능치 않은 일입니다. 인간의 교회가 해내지를 못해요. 선교단체가 해내지를 못합니다. 목사가 해내지를 못해요. 사도바울이 해내지를 못합니다. 주의 일이 되기 위해서는 ‘이 나는 잘했어, 못했어?’가 아예 싸그리 제거 되어야 돼요. 이 말은, 인간이 하는 일은 나의 일이에요. 그런데 나의 일인데, 사도가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일이 되면 안 되고,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이 일을 주의 일,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신령한 일이라 하는 겁니다.
나의 일에서, 나의 하는 그 일에서 속히 어디로 넘겨져야 되는가? 주의 일로 넘어와야 돼요, 주의 일로. 주의 일로 넘어올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되느냐 하면, 본인에게 난처한 일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본인에게 난처한 일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감당 못할 일이 터져 버려야돼요, 내가 감당 못할 일.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난처한 일 빼놓고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다 그동안 그때그때 해소 시키고 다 제거했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어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기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해소가 되어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자기가 괜찮은 존재로 자부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서 자기를 지키려고 하지요. 이게 인간에게 습관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벌어지게 되면 지금껏 내가 쌓아놓은 괜찮은 나라는 존재가 그 일을 해결을 못 해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고장 난 줄 아는데 자기가 고장난 게 아니고 원천적으로 내 일은 주님이 안 받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유명한 탕자 비유 나오지요. 아시지요, 탕자비유. 탕자비유에서 탕자가 집 나가서 일했고 그다음에 집에 돌아와서도 일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놀려고 온 게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서도 일했어요. 그런데 나갈 때는 자기 일 했고 돌아올 때는 자기 일이 아닌 일을 한 겁니다. 아버지 일을 한 거예요. 더 이상 내 가 잘했다, 못 했다가 싸그리 아주 뿌리 채 뽑힌 그런 행위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누가복음 15장에서, 이걸 아버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얻었다’고 이야기해요, 얻었다. 이 말은, 아버지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고 아들 입장에서는 빼앗긴 거예요. 주의 일이란 뭔가 자아를 빼앗기는 일이 주의 일이에요. 내가 그동안 야무지게 일을 처리해서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는 괜찮은 삶으로 남에게 평가받으려 하는 이 나를 홀라당 주님한테 빼앗겨 버려야 됩니다.
그 쓸데없는 쓰레기 지고 뭐할건데요? 사람이 자기 지키는 게 습관화되고 안 빼앗기려고 할 때 그때 자꾸 많아지는 것이 말이 많아져요. 사람이 말이 많은 이유가, 내가 항상……, 인간의 자아 주체는요, 남하고 싸우는 데서 그게 확인이 되고 증명이 됩니다. 남하고 싸우는 데서 나를 발견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인간이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싸워야 되는데 말이 많다는 것은 누구하고 싸우려 나갈 때 싸우는 내가 아직 정비가 안 되었다고 여기고 자기가 실력이 안 되니까 자꾸 그걸 감추기 위해서 말을 자꾸 해 가지고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모순이 벌어지는데 어떤 모순이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나 자신이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 진실을, 어느 정도로 내가 아무것도 아닌가를, 그 진실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데서 모순이 발생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정확히 알게 되면 나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모자라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자기 내부정리가 제대로 인간은 안 된다는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도행전 20장 24절, 사도바울이 자기가 하는 일을 일관성 있게 요약을 하는데 이렇게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내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는 요소가 복음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는 놀았습니까? 내가 주의 복음과 말씀을 위해서 내 목숨을, 남은 목숨을 내가 양식으로 여겨서 그걸 갈아먹고 있다는 거예요. 날마다 일을 함으로써 날마다 내 목숨을, 내 수명을 내가 스스로 알아서 단축시키는 일을 하는 이 일이 주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주의 일이 안 되면요,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해놓고 이걸 잘했는가 못했는가를 어떻게 판정하느냐 하면, 내가 오래 사는데 기여했는가, 기여했으면 잘했고 내가 오래 못 살고 조기에 죽으면 이것은 나쁜 일 한 것으로 본인이 선악 체계에서 그런 잘못된 결론에 도달된다 그 말이지요. 이 악한 세대, 복음을 모르는 악한 세대, 그 세계가 어떤 세계냐 하면, 그 세계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무대에요. 연극 무대라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그 세계를 피해간 게 아닙니다. 그 세계 속에 뛰어든 거예요. 날 잡아먹으라고. 그래서 내 수명을 단축시키라고. 그래서 내 욕망은 뭐냐? 빨리 죽어서 주님을 만나는 게 내 욕망이다.
여기에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 이게 성립이 안 돼요. 그런데 세상의 일은요, 모든 일의 목적이 있습니다. 내가 참하게 남에게 좋은 평가 받으면서 오래 버티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 세상인가는 계산안 하고, 좋은 세상인지 아닌지 그냥 그런 것은 나는 모르겠고 나는 그냥 오래 살면 그게 남는 장사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대해서 디모데 후서 3장 13절에 이렇게 잘 나와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이 세상 자체가, 문명은 폭력적이에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할 때 여러분 뭘 느꼈습니까? 폭력을 느끼는 거예요. 그게 이 세상 활동의 모양새고 그게 이 세상 내부 구조입니다. 힘 있는 게 정의기 때문에. “우리 러시아는 힘이 있다. 좀 당해봐라. 이게 이 세상의 질서요 정의야.”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럴 때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보느냐? 러시아는 가해자고 우크라이나는 피해자로 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피해자나 가해자가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구분되고 정해지는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에요. 사기 치는 사람의 99퍼센트가 자기가 사기를 당해봤으니까 사기를 치는 겁니다. ‘나만 당할 수 없잖아.’ 이런 오기가 발동해서 사기 치는 거예요. ‘내가 쪼다고 바보야? 나는 사기 칠 줄 몰라서 안쳐?’ 이 세상의 특징은 나를 위해서 싸움을 벌이는 전쟁터에요. 나를 위해서만. 주님을 위해서도 아니고, 교회를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교회 나와도 나의 천당 가는 것, 나의 구원받는 것, 나를 위해서 싸우는 전쟁이에요. 이 세상 자체가!
그것은 내가 있음이잖아요. 내가 있음이 되어버리면 이미 있음에서 출발하는 그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고 지저분은 더러운 짓이에요, 그게.
이 세상에 주의 일의 진짜 원형은 예수님이 보여줬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되어 있어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일을 사람들은 그것을 아버지의 일로 못 보는 이유가, 나를 위해서 일하는 것만 일로 여기는 이 악한 세계의 동질성 때문에 도무지 예수님의 일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쫓아왔어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열심히 쫓아왔다고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보셨지요. 그냥 돌아보신 것이 아니고 휙 돌아보셨어요. 눈 딱 보면서 “네가 나를 찾는 까닭이 무엇이뇨? 네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잖아.” ‘일단 배가 불러야, 배고프지 않아야, 일단 생존을 해야 그다음에 내가 천국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그것이 되니까 일단 나부터 살리자.’ 그러한 육의 일을 했다는 거요. 너희들이 모든 생각하는 떡과 양식은 우선 나부터 배불리는 조건 하에 일을 했다는 겁니다. 그 일을 해봐야 그게 주의 일이 아니고 자기 일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까 했잖아요. 자기 일에서 주의 일로 넘어와야 된다고요. 주님께서 그걸 육의 일로 이야기 했는데 사람들은 그 육의 일이 왜 나쁜지, 내가 나를 위해서 복음 듣고 내가 나를 위해서 일하는 게 그게 왜 그렇게 주님한테, 하나님 앞에 욕 얻어먹을 악한 짓이 되는지가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그게 납득이 안되는 이유가 그들이 유월절을 몰라서 그래요.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첫 번째 유월절 일은, 유월절 경험을 겪지 아니한 사람은 이스라엘에 포함될 수가 없습니다. 유월절이 뭐냐? “모든 인간은 죽었다.” 그게 유월절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일하고 부자가 된다 할지라도 죽은 존재다.” 그 말이에요. 심지어 왕이 된다 할지라도 죽은 존재고, 옥에 갇혀서 죄수가 된다 할지라도 죽은 존재고, 심지어 유월절에서 살아남아도 그 이스라엘은 죽은 존재다, 하는 그 요소가 포함될 경우에만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자기 일밖에 모르는 그들 위에 주의 일을 하시는 주의 이름이 그들을 통제하는 국가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고 기존의 모든 이방 나라와 싸움에 나서게 됩니다. 싸움에 나서는 그 명분은 뭐냐? 너희들의 나라가 아무리 튼튼하고 강건하고 견고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은 나라 가 이방 나라에요. 아무리 이스라엘이 보잘것없고 숫자가 적어도 거기에 하나님의 희생이 들어 있으면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 거룩한 택한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 원리에요. 그 원리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하나님은 알고 이스라엘은 몰랐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 몰아붙입니다. 광야에 몰아붙이니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은 그들과 함께 다닐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서히 알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이런 대담한 이야기를 합니다. 8절부터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그리고 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여기 ‘교제’라는 말이 나와요. 예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성도라 불러줬다는 겁니다. 성도가 뭐냐? 홀로 사는 것을 성도라 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교제가 되는 사람을 성도라 하는 겁니다. 이거 대담한 발언이에요. 아, 이것은 정말 우리나라 헌법에도 안 나옵니다. 맞아 죽어야 돼요. 이거 교과서에도 안 나와요.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 이게 주님과 인간이 동거가 됩니까? 인간은 할 수 있는 일만 해요. 그런데 인간의 주님과의 동거는, 인간의 의도와 노력과 자기 욕구로 동거가 안 돼요. 인간은 동거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변명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이 많아요. 성경 구절 외우고, 선교 이야기하고, 기도 많이 한 것 이야기해봐도 이게 동거인지 아니면 내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자기 아는 지식을 남발하는 것인지 동거하고 있는 사람은 다 알아요. 교제하고 있는 사람은 다 압니다. 당신이 그렇게 성경 구절 이야기하고 자기 신앙 좋은 것 이야기하는데 결국 그렇게 해놓고 돌아서면 뭐냐? ‘역시 나는 잘했어. 결국 나는 이거 잘했어. 못한 게 아니야.’ 자기 행동을 자기가 평가하는 그걸로 돌아가 버리면 그것은 자기 일이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자기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광야 때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경험을 하는 거예요. 광야 때 그들의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동거 자체가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고 옛날 애굽에서 내가 먹고 마시던 것처럼 기본 애굽 정도라도, 기본 식수는, 양식과 먹을 것은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대들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너희들이 나를 원망한다’고 그렇게 규정을 해버렸어요. “너희는 이제야 너희들이 하나님과 동거가 안 되고 교제가 안 되는 존재인 것을 이제야 알았느냐?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건너와도 결국 너희는 네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지? 그렇지? 네 편한 것만 생각하지 주의일 없지? 나의 일 뿐이지? 그런데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특혜로 너에게 너희들이 생각도 못 하고 맛도 본 적도 없는 만나를 너에게 주마.” 그 만나는 말씀입니다. 영의 양식입니다. 이게 신자라고 우기면서 들어와서 빈들빈들 놀면서 남들에게 가난한 척하면서 동정만 받고 구제만 받는 이 인간들로 하여금 사도가 역정을 내면서, 화를 내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이, 이 세상, 악한 세상에 들어가서 그 악한 세상이라는 그들의 모습과 현재 네 모습이 얼마나 등질화, 동질화되어 있는가를 직접체험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그래야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용서하심으로 산다는 것, 주님 자체가 양식이라는 사실을 네가 알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 양식이라는 것, 광야에서 양식, 주님을 양식으로 하시는 것은 이미 일방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주는 거예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이 말은 “너희들은 이미 죽었어, 이 인간들아! 죽었으니까 제발 죽은 티를 좀 내라.”는 거예요. 어디서? 이 세상에서 돈 벌면서. 사람이 돈 버는 이유가 살기 위해서 돈 벌잖아요. 악착같이 살기 위해서 돈 벌잖아요. 주님은, 그렇게 하지 말고 악착같이 일해서 죽으라는 겁니다. “일해야 죽지.” 일해야 의미 있는 죽음이 된다는 거예요. 왜? 사도는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죽음이 곧 주의 일이다.” 이게 유월절을 이스라엘이 경험해야 될 이유입니다. 나의 죽음이. 나는 죽으면 안 돼, 가 아니라 꼭 죽어야 돼요. 왜 그게 주의 요구고 주의 일이기 때문이에요. 주의 일은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겁니다. 그래야 이 죽음이 백합이 되지요. 생명이 되는 겁니다. 유월절에 와서 주님께서 인간 자체를 갈아치우기 하는 이유가요, 어린양을 장자로 맞이해야 되고 기존의 장자는 이미 장자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회수해 간 겁니다. 두꺼비 집이에요. “옛집 다오 새집 줄게.” 이건 거예요. 육이라는 나의 옛것을 빼앗아가고 새것을 주시는 그 작업을 하시는 이유가,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악마의 감시적인 칩을 우리 손으로 뽑아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두렵다는 것은 날마다 나에 대해서 평가를 내가 내리고 있다는 겁니다. 주의 일인데 계속 주님께 넘기지 않고 내일로 여기고 넘기는 거예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거 주의 문제에요. 내 문제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 왜냐? 이미 우리는 더러운 양식으로 살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죽은 자에요.
더러운 것으로 살면 죽지 뭐 그 외에 뭐가 있겠어요? 주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 나름대로 이 세상을 향하여 전쟁을 벌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문화라는 것, 문명이라는 것을 상대로 전쟁하는 겁니다.
기능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양식, 네가 일해야 돈을 번다는 이 양식을 성도에게는 이미 양식으로 성사된 것을 드러내는 기능성 존재로 우리를 바꾸는 거예요. 거리의 댄서처럼.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 자신이 영의 양식이 되었다는 것을 마음껏 펼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한시도 주의 일이 아닌 게 없어요. 네가 이거 해서 밥 먹고 살려고, 그게 아니고 이미 영생을 받았기 때문에, 주와 함께 교제하고 주와 함께 동거하기 때문에 일 안 하고 멈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주의 일이라는 것은 더이상 나를 위한 일이 안 될 때 그걸 주의 일이라고 합니다. 쉽지요. 더이상 나를 생각하고, 나를 좋게 하고, 나를 좋은 인간으로 만드는 일이 안 되는 일을 할 때 그 사람은 지금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지금 춤추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영생입니다. 우리의 사는 것은 가짜입니다. 우리의 이 목숨은 가짜입니다. 이것은 갉아 먹어야 됩니다.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은, 이것은 인간 일이지, 악마가 시키는 일이지 주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잘못된 길로, 지옥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주의 일을, 오늘 본문대로 하면 “네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하는 이것이 일종의 율법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하라, 가 아니라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않아야 되는구나, 라는 것을 흔쾌히, 그것도 하나의 영생의 양식이 율법화 된 기능 중 하나라고 그걸 받아들이면서 사도가 전하는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지금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일을 하게 되면 세상에는 어떤 일이 기다리는가?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 거기에 나오는 말씀이 길지만 간추려 드리겠습니다. 천국은 어떤 것인가? “천국은 일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천국은 일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 나를 위한 나의 일을 하는 것은 천국은 아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의 특징은 말이 많다고.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 보면, 천국은 하늘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에 있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그 능력은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하늘나라는 오직 기뻐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평안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말이 아니고 기쁨이 되느냐? 마태복음 20장에 그 예가 나오는데 천국이라 하는 것은 어떤 포도원에 주인이 있는데 그 주인이 일군을 뽑는데 있어서 그 일꾼들이 일단 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점을 우리가 유념해야 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뭔가 일하고 있지요? 하지만 천국 입장에서 그것은 놀고 있는 사람이에요. 포도원밖에 포도원과 상관없는, 천국과 상관없는 자기 일을 하는데 열심히 하는 일들이에요. 그냥 놀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기준이 천국은 포도원이니까 포도원과 상관없는 일에 열심 내 봐야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니지요. 자기 일이지요. 그래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아침 10시에 한 사람 뽑고, 12시에 한 사람 뽑고, 오후 3시에 한사람 뽑았고 퇴근 시간이 6시인데요, 오후 5시에 또 한 사람을 뽑았어요. 그렇게 일을 시켰습니다. 자, 이들 일꾼들이 자기가 천국의 일을 하는지 자기 일을 하는지 아직까지 자기 자신들은 그걸 모르는 상태에요. 언제 드러나는가? 일이 끝나고 난 뒤에 그들에게 품삯을 주는데 이 품삯이 자연에 대해서 인간의 정신력을 투입해서 자연을 문화와 문명으로 바꾸는 이 세상의 원리와는 완전히 의도적으로 반대가 되는 식으로 품삯을 정해버립니다. 의도적으로 반대가 되는 식으로 품삯을 정해요. 이 세상이 하는 원리, 내가 사는 원리와 정반대되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못 들어가요. 사람들이 천국을 못가는 이유가 충분하게 내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에요. 배추 숨죽일 때 소금 뿌려 절이지요. 완전히 이 세상 원리로 축 절여져 있기때문에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관심사가 나한테 관심 있기때문에 천국과는 정반대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어느 인간도 관심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게 만들었어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내가 일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일이 아니고서는 천국은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전부 다 지어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믿을만한 것도 못 되고요, 괜히 교회에서 장사하려고 지어낸 천국은 그것은 생각하지 마세요. 철저하게 내가 천국 못 들어간다는 사실이 유지가 되어 줘야 돼요. 만약에 내가 천국 들어가는 사람 되어버리면요, 천국 일이 그때부터는 누구 일이 되느냐? 나의 일이 되어버려요. 나의 일이 되어버리면 실컷 천국 간다고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바르게 살겠습니다.’ 그게 나의 일이 돼요. 그게 나의 일이에요. 그게 지금 스스로 조작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주님은 안 속아 넘어가요. 같은 옆의 사람은 다 넘어가도. 나중에 주께서 품삯을 줍니다. 품삯을 주니 열심히 일할 때 돈을 보고 열심히 일했지요. 교회 식으로 하면 구원받기 위해서 봉사해야 구원받으니까 열심히 일했지요. 나중에 주님께서 품삯을 주는데 제일 농땡이한테, 아침에 온 사람부터가 아니라 제일 농땡이한테 하나님께서 약속한 품삯을 주니까 그 농땡이는 혼자 좋아하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그 포도원 주인에게 대들 때 이 전체 그 상황을 주님께서는 천국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땅의 천국은 주님의 희생 아니고서는 인간의 어떤 피땀 어린 노력으로도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 자, 이제 증명되었지?” 그걸 증명하는 거지요. 그래서 매주 교회는 주님의 희생 말고, 교회 되려고 인간이 노력하는 그 모든 것들이 허사로 들통나는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4절에 보면,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한 시간 일해도 품삯을 준다는 게 아니고, 한 시간 일한 것이나 아침 아홉시부터 와서 일한 것이나 너는 그냥 가면 안 돼요. 내 뜻을 돈으로 환산해서 내 뜻이 너한테 칩으로 삽입되어서 갈 때 그 사람은 천국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평가를 받는 그 평가를 가지고 그 사람은 가야 됩니다. 그 평가를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내가 한일 잘했다, 못했다, 열심히 했다, 못했다, 그 나의 평가가 묵사발 나야 돼요. 그리고 반발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네가 왜 그걸 악하게 보느냐?” 이 말씀을 할 때 그냥 말로 하면 재미없고요. 손가락을 들어서 요 이마나 가슴팍을 콕 밀어야 돼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 것 가지고 내 사람 내가 일방적으로 주는데 쟤는 뭐 놀았다, 농땡이다, 나는 일 오래 했다, 네가 뭔데?” 멍들도록, 주님께서 우리 가슴팍이 멍들도록 매일같이 이걸 밀어주시는 것이 바로 교제고 동거입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너를 평가해? 내가 인생 잘살았느니 못살았느니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인생 잘살았느니 못살았느니 네가 왜 평가하는데? 네 몸이 네 거야? 네가 알아서 네 뜻대로 태어났어? 뭐 70년 동안 살았다고? 아이고, 네가 뭔데?” 70년 산 게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열심히 일해서 죽는 기쁨에 참여하라.” 이게 주의 뜻입니다. 이미 우리 속에, 이 육이, 평생 아무리 이야기 듣고 복음 들어도 죽을 때까지 이 육 속에는 악마가 뒤에서 배후 조종하는 전류가, 신호를 받는 신호장치가 있어요. 우리 속에. 그래서 이 몸이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발신 반응을 나타내요. 악마가 하는 이야기에. 주님 이야기 실컷 한 시간 듣고 23시간 악마 이야기 듣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돼. 실패하면 안 돼. 망하면 안 돼. 어쩌라고? 죽으면 안 돼. 우리 집안 우세 당하면 안 돼. 내 인생 이렇게 욕 얻어먹으면 안 돼.’ 이게 23시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게 23시간 55분이고, 나머지 5분 동안은 ‘내 몸이 아니잖아. 내가 망쳐도 그게 주의 일이잖아. 내가 왜 관여하지? 주의 일은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성령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이고 감사라 했는데 내가 또……, 정신 차려 이 인간아!’ 다시 그때 주께서 손가락으로 쑤셔서 멍들었던 것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세상은 폭력적입니다. 남들보고 폭력적이라 하지만 내가 남들 못지않아요. 나도 만만치 않아요. 폭력적이에요. 폭력이라 해서 주먹 쓰는 것만 폭력이 아닙니다. 남 저주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이것 전부 다 폭력적입니다. 다른 차 앞에 가면서 깜빡이도 안 넣고 가는 이런 게 다 폭력적입니다. 손가락질하는 것도 폭력적이고요. ‘에이 씨, 네가 뭔데 나보다 앞서가? 네가 뭔데 깜빡이 가지고 나한테 간섭질이야? 나는 나 대로 살았어.’ 우리는 이 몸이 있는 한 폭력이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 나를 우리가 믿어요? 참,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네 똥 싼 것 누가 치우느냐? 네가 죄지었어. 네가 치워라.” “주여, 제가 또 나를 사수하고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걸 억지로 찡그리면서 이야기하지 마시고요, 이젠 활짝, 백합처럼 활짝 피어서 “주여, 나는 나밖에 모릅니다.”를, 이제는 그 고백을 하면서 활짝 웃으시면서 이 남은 세월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가 일한 것이 자신의 주님의 사명이었던 것을 압니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라는말이 거저 나온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 세상 살아가면서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 그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내가 그 사람과 일치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주의 희생과 십자가를 감사하는 그것처럼 저희들도 사도의 감사에 동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