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파수꾼

아빠와 함께 2022. 6. 16. 12:12

파수꾼  

2022년 6월 15일                       본문 말씀: 미가 7: 1-4

(7: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7:2)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7:3)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7:4)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이스라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단일체로 봅니다. 인간 대 인간들의 공통점을 찾아서 단결의지로 뭉쳐진 단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준해서 단일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에 집어넣으신 것은 인간들이 기대하거나 예상하거나 가능한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바가 이런 겁니다. 사람들의 능력으로 행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민족과는 차별화가 갖추어집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원칙’이 이스라엘에게 있기에 이스라엘은 전부 ‘하나됨’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애굽에 나왔을 때에, 그들이 마주했던 홍해가 갈라지는 일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개성이나 가치를 내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시내산 밑에 왔을 때, 모세만이 홀로 하나님 뵙고 와서 하늘로부터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로 묶는 원리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피’입니다. 언약의 피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5-8) 여기서 말씀하는 이 ‘피’는 사람들의 피가 아니라 언약된 피요 나중에는 곧 하나님 자신의 피입니다.

신약의 교회가 하나된다는 것은 모두들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피’ 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이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파수꾼을 세웁니다.

파수꾼은 하나의 집단에서 차출된 자입니다. 결코 자기 고유의 가치를 따로 갖고 있으면 아니됩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되게 하는 그 원리만 고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방민족과의 차별됨이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원리가 아닌 겁니다. 이스라엘 내부에는 율법이 그물망처럼 퍼져 있습니다.

그 율법이 이스라엘을 하나됨으로 유지시켜 줍니다. 늘 하나님의 요소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해당되는 할례가 이스라엘에서는 과목에게서 행해집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23-25)

이처럼 이스라엘은 개인적 가치를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시작해서는 아니되는 나라입니다. 즉 ‘나’ 하나를 ‘단독적인 하나’로 여기서 살아가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율법이 없는 이방나라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체적으로 폐쇄공간으로 작용해서 율법의 하나됨을 외치는 자를 왕따시키고 모욕주고 비난하게 됩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400명의 거짓 선지자와 싸워야 했고(왕상 22:6) 엘리야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대결해야 했습니다.(왕상 18:19) 거짓 선지자들은 인간의 해낼 수 있는 능력으로 나라를 하나로 단결시키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권력입니다. 하나의 권력이 되기 위해 숱하게 인간들은 쉬지 않고 투쟁하기 마련입니다. 권력은 ‘나 중심으로 하나됨’을 목표로 합니다. 이런 모습은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부여하고 하나님께서 지키고자 하신 ‘차별화’가 아닙니다. 어느새 이스라엘은 내부적으로 각자 자기 중심주의 정신으로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미가 선지자가 제시하는 이스라엘 차별화는 재앙입니다. 당연히 망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야 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을 이스라엘이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할례 받은 과일, 이후의 먹어야 될 그런 율법을 통과한 과일을 선지자가 먹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미가 7:1)

이제부터 이스라엘이 보여줄 율법적 특이성은 그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찌그려져 붕괴하는 특이성입니다. 공동체 자체가 동그란 구(球)처럼 자체적으로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그 와중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걱정이 되어 종교생활을 겸해서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종교생활은 세상에서 주는 심적인 죄책감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시도되는 선행입니다.

결코 자신의 인생을 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 앞에서 인간은 자기 인생을 본인이 쥐고 있으면 뭘 해도 추잡고 더럽게 됩니다. 세상은 서로 노리고 탈취하게 되는 관계이기에 사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도 쉬지 않고 거짓과 속임수와 사기를 개발해내어야 겨울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는 심적인 중량감을 완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섬겨보고자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어디까지나 나의 것을 그대로 내가 쥐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겁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적으로 간주해서 공격하는 파수꾼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시대에 아무리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해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에 와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막 4:9,23/눅 8:8/눅 14:35) 즉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될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그대로 간직하고자 합니다. 

그 역할이 신약에 들어와서 그대로 이어졌는데 그 최초의 인물이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이 말씀은 곧, “이미 세상은 망했다. 더는 이 세상에 미련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망한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망했다’입니다.

더는 희망 둘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성도는 하나님을 자신의 운명과 모든 것을 건네주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성도는 이 제물성으로 인해 이 시대의 파수꾼입니다. 이를 위해 피의 능력으로 늘 새롭게 하루 생활에 나서는 사람입니다. 늘 공백에서 새로 시작하는 자들입니다. “이상하다? 왜  아직 나는 안 죽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목숨을 주님께 늘 건네주는 식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3강-미가 7장 1-4절(파수꾼)2206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7장 1-4절까지입니다.

미가 7:1-4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숫군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이스라엘 상태를 평할 때는 원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원칙이 뭐냐? 이스라엘 처음 구성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에다 심어준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단일인간, 단일인간으로 본다는 거예요. 한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남자 60만이 오든, 70만이 오든, 80만이 오든, 이스라엘의 숫자가 그 뒤에 아무리 늘어나도 다 하나같이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이스라엘이다.’라는 그 대전제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개성 다르고, 사람마다 살아온 과거가 다른데 어떻게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심으로서 율법의 그물망 속에서 그들은 한 코, 한 고리를 형성케 하는 겁니다. ‘우리 둘이 만나서 또는 세 명 네 명이 만나서 율법이 현실화되도록 하자. 율법이, 말씀이 살아나도록 하자.’라는 이러한 의도 아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움직였던 겁니다.

그들은 이 율법, 이스라엘이 율법대로 사는 방식이 그들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고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하나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건, 그 사건이 바로 유월절 사건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모든 공통적인 가정들만 홍해를 건널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할례를 행하고, 같은 할례를 행하고 그들이 똑같은 공통된 그 바닷속을, 그냥 바다가 아닙니다, 바닷속을, 바다 그 내부를 그들은 건너왔습니다.

이들이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홍해가 갈라지는 일, 죽음의 사자에서 구사일생 빠져나오는 그 일, 아니 그보다도 밤중에 천사가 와서 집집마다 방문해서 맏이를 죽인다는 그 사건 자체가 결코 인간의 머리에서, 인간의 예상에서 나올 수 없는 사건에 그들은 맞닥뜨렸고 부딪혔던 겁니다.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너희들이 예상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예상 못 한 것을 이미 내가 너희 속에 집어넣어 줬잖아.”라는 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리고 홍해를 건너오고 난 뒤에 그들은 1년 동안 시내 산 밑에서 있었는데 그 시내 산 밑에서 그들은 뭔가 대기 상태에 있었어요.

이스라엘 전체 뭐 몇백만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 묶는 끈 같은 것, 그것이 모세를 불러서 시내 산 꼭대기로 오라 해서 다시 시내 산에서 내려갔을 때 그 이스라엘을 묶을 수 있는 것은 뭐냐? 바로 피였습니다. ‘희생 피’였습니다. 피를 양푼으로 담아서 양쪽에 뿌리는 데 한쪽은 율법에다 피를 뿌리고, 또 다른 한쪽, 나머지 피는 이스라엘 백성 쪽을 향하여 피를 뿌렸습니다.

그러면 율법과 백성 사이에 공통된 것, 똑같은 것들로 덮였습니다. 그게 바로 흠 없는 희생제물의 피였습니다. 율법을 제시한 하나님 쪽에서도 “내가 율법 짜면, 율법을 완성하면 거기서 피 나온다. 따라서 너희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그 율법의 피에 흠뻑 젖을 때 너희들이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하나라고 해 줄게. 하나로 쳐 줄게.” 단일체라고 해주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피를 내신다는 것, 어린양의 피의 모습으로 하나님 자신을 내놓았다는 것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고유의 개성이라든지 성질, 또는 부산 강의에서 했습니다만 스타일, 그런 스타일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만약에 개성을 받아버리면 전체가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교회를 정의할 때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하나님이 피로 사신 단체가 교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피가 관여되게 되면 ‘하나님께서 피를 흘렸다. 하나님께서 자기 죽음으로 천국 백성을 만든다.’는 이 아이디어, 이 생각은 어느 인간에서도 나올 수 없는, 인간이 예상 못한, 달리 말해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 쪽에서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하지 못하는 불가능함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는 거예요. 그럴 때 그들은 제대로 된 공동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미가 선지자가 스스로 자기를 일컬어서 “나는 지금 재앙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에서 뭔가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빠져 있기때문에 공동체에 남아 있는, 축구공 안에 있는 것처럼 구 안에, 동그란 구(球) 안에 들어 있는 자기들 내부적으로 서로 속이고 서로 공격하고 물어뜯고 탈취하는 그런 일이 공동체라는 이름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2-4절에 나오거든요. “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쾌락)을 취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이게 폐쇄된 공간이기 때문에 그 안에 가시 같은 게 있으면 가시가 더욱더 상대방을 아프게 찌르게 되어 있어요.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서로가 속이고 싸우고 하는 그러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 됨은 날아 가 버리지요. 하나 됨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각자 하나에요, 각자.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되는데 “교인 몇 명인고?” 벌써 몇 명이냐 물으면 이것은 하나 됨이 끝났어요. 교회는 몇 명입니까, 묻지 말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하나입니다.” 열 명이 와도 하나고, 한 명이 와도 하나고, 두 명이 와도 하나고, 그럴 리 없겠지만 2백 명이 와도 하나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 됨을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에서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용어가 나옵니다. 그게 4절에 나오는데요 “그들의 파숫군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여기 파수꾼이라는 게 나옵니다. 파숫군은 공동체가 하나 됨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걸 기정사실화해서 거기서 차출해서 보초서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도 한국의 철책선에 보초서는 군인들 있거든요. 그 군인들, 그 사람 군에 갔으면 더이상 자기 집안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회사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차출해준 온 국민을 위해서 그들은 보초를 서고 군 복무를 합니다. 가끔 여군 희롱하는 군인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국민을 위해서 번갈아 가면서 보초를 서는 거예요.

군대가 있다는 것은, ‘그 나라는 누가 뭐래도 하나의 군대 아래서 보호받고 있다. 하나의 파숫군 아래서 보호받고 있다.’ 이 파수꾼이 차출되어서 국가의 하나 됨을 대표로 내세워서 그 공동체 하나 됨을 깨는 적들로부터 미리 방어해서 보호받도록, 대비하도록 그렇게 번갈아 가면서 외부를 향하여 사태를 주시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 파수꾼의 원리원칙은, 이스라엘의 특수성, 이스라엘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은 나라거든요. 그 하나님의 집어 넣어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원리원칙을 가지고, 그다음에 중요합니다, 그 원칙을 가지고 이스라엘과 적들 사이에, 다른 나라 사이에 차별하는 게 다른 점이 뭔가, 그 다른 점, 차이점, 그걸 지키는 것이 이 파수꾼입니다.

이 파수꾼이 나중에 뭐로 바뀌는가 하면, 선지자로 바뀌어요. 선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 요소만 외칩니다. 하나님 요소만 증거해요. 초창기 파수꾼은 이방 나라하고 이스라엘하고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이방 나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지만, 율법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 그 율법 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 경계선상,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 사이의 그 경계선상에 서서 저쪽 이방 민족을 향하여 그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이스라엘에게 통보하는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데 나중에 이 선지자가 파수꾼 역할을 한다는 말은, 적이 이제는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파수꾼은 이스라엘의 파수꾼이 아니고 뭐냐 하면,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공동체의 태동을 알리는 그 역할을 미가 또는 에스겔 예레미야 선지자들이 그 일을 하는 겁니다.

에스겔 3장 17절에 보면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파수꾼의 역할,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이스라엘은 왜 이 파숫군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느냐? 이게 중요하겠지요.

전쟁할 때 처음 이스라엘이 되고 난 뒤에 전쟁을 하는데 미디안이라는 이방 민족이 있었어요. 사사기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사기 7장의 미디안하고 전쟁할 때에 기드온이 자기 3백 명 군사 가운데 1백 명을 따로 뽑아서 미디안 군대를 언제 쳤느냐 하면, 그들의 파수꾼이 교체할 그 때에 틈을 노려서 차고 들어가서 나팔 불고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쉈다고 되어 있어요.

사사기 7장 19절에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명이 이경 초에 진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그러니까 이 파수꾼만 함몰되면 그냥 그대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파괴되는 겁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적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그 파수꾼이 제 역할을 못 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1절에 보면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라고 미가 선지자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갑자기 미가 선지자가 과일이 먹고 싶어서? 철도 지났는데, 철 지났는데 과일을 찾고 있어요. 마치 예수님께서 목말라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 보니까 아직 철이 안 되어서 못 먹었거든요. 대번에 저주해버렸습니다.

이 말은, 무화과나무든 이스라엘이든 결코 이스라엘 편에 서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 있으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편이 되면 안 되고 누구 편이 되어야 되는가? 철저하게 하나님 편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편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 율법입니다, 율법의 원리가 이스라엘 속에 계속 유지되어야 돼요.

한가지 예를 들면 여러분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레위기 19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약속의 땅에서 과수원 경영하는데 3년간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거예요. 맺히더라도 먹지 말라. 왜? 그것은 하나님 거니까.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할례 언약, 율법 중심의 단일공동체가 되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비록 이스라엘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로 묶었다는, 하나로 묶은 그 하나님이 함께 기거하는 나라이어야 해요. 그 ‘함께 기거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의 자기의 욕구보다도 하나님이 원하는 법이 살아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 있어야 돼요. 그 율법이 뭐냐? 율법의 취지는 “너희들 속에 너희들만 있는 게 아니다.” 이게 율법의 취지입니다.

식구가 지금 네 명이라면, 여기는 식구가 두 명인데, 두 명이라도 거기에 그 둘, 혹은 넷이라는 숫자 카운트의 의미는 주님의 가족이라는 의미로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각자가 행해야 돼요. 무슨 할례냐 하면, 요즘으로 하면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데 그 마음의 할례가 뭐냐 하면, 성도는 날마다 공백으로부터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에요. 매일같이.

그러니까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내가 왜 아직도 살아 있지? 참 신기하네.’ 요 질문을 네 식구면 네 식구 다 하게 되면 그 네 식구는 누가 네 명이라 해도 그것은 단 하나로 쳐줍니다. ‘이상하다. 왜 내가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지? 아이고, 이렇게 신기한 일이!’

할례 언약이란, 심지어 그것이 인간에게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과수 농업에까지 할례가 적용된다는 말은 그 과수원의 사과나 귤이나 딸기나 ‘내가 그 과일 먹고 내가 살아야지.’라는 원칙은, 그런 것은 할례 없는 이방 민족에서나 찾으라는 말이지요.

뭔가 차이성이 있어야 돼요. 율법이, 말씀이 우리를 살리지 그 바나나, 사과, 포도, 무화과나무, 이것 먹는다고 이게 삶이 아니고, 이게 생존이 아니고, 이게 목숨 부지책이 못 된다는 것, 이게 바로 차이성이거든요.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떡보다 말씀이 우선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돈보다 말씀이 우선된다는 거예요.

그 말씀이 뭐냐?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그러한 불가능한 요소가 인간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처음에 이스라엘은 기드온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이방 나라와 전쟁할 때 그 원칙을 그대로 적용시켰습니다. 2만 2천 명 왔는데 다 보내버리고 달랑 3백 명만 남겼지요. 달랑 3백 명.

이것도 인간의 숫자의 증가가 힘의 증가라는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부수는 겁니다.그런데 그렇게 파수꾼이 있어야 될 이스라엘이 이게 짜부라지고 함몰되기 시작한 겁니다. 이방 민족에 의해서 율법이 시시하게, 하나님의 요소가 시시하게 여겨지면서 불가능함을 믿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자기 능력과 애씀과 그러한 자기 수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체를 하나 되게 하는 거예요.

좀 어렵지요. 각자 개성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서 그 할 수 있는 것들의 하나 됨, 그걸 추구한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의 하나 됨이 아니고, 그게 진짜 이스라엘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재주껏의 하나 됨, 그러면 자연적으로 권력 위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요. 이방 나라를 닮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가 처음에 출애굽할 때 그냥 아무것도 없이 출애굽 했거든요. 하나님이 함께 해서, 주셔서 되었다 그 말이지요. 그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내 것을 안 받는다는 뜻입니다. 내 능력과 지혜를 받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것을 요구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다들 불가능한 것 있지요? 그 불가능함을 제시하면 되잖아요. 그 불가능함은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이여, 제가 왜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이게 바로 불가능한 인간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고백입니다, 불가능한 고백.

인간의 고백은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남아야지. 코로나 걸려서 다 죽어라. 나만 살겠다.’ 이게 인간의 타고난 자기 위주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나가는 거예요. ‘왜 아직 내가 살아 있지?’ 실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거 뭐 이런 기적에 내가 계속 휩싸여서 살아도 돼? 내가 그럴 만한 위인이 되는 거야? 그럴만한 가치가 되는 거야?’ 참 헛웃음이 나오지요.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살 가치 있는 인간으로는 전혀 모르겠는데 주께서는 계속 살려 주시잖아요. 나는 가치 없다고 외치고 싶은데 주께서는 더 살라, 더 살라, 더 살아야 돼, 이렇게 나오니까 이게 진짜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기이한 현상이 되는 겁니다.

물론 이스라엘 내부에서 믿음으로 산 사람이 있었지요. 하지만 이미 공동체 자체가요, 다수가 의인 하나를 아주 압살시키는 그런 생리가 있어요. 그런 생리, 그런 속성이 작동하고 있어요. 인간은 자기의 가능성을 어쨌든 간에 자랑질하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들이에요.

부모들 모이면 자식들 자랑, 자식 다 크면 손자 손녀 자랑. “이렇게 예쁜 자식 못 봤지? 이런 손녀 못 봤지?”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나도 씨, 우리 딸 결혼하면 예쁜 것 낳는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화를 돋우지요.

그러니까 교인들끼리 편하게 이야기해도 은연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우에 기도를 많이 했으면 복을 이리 많이 받고 돈을 잘 벌고 사십니까?’ 뭐 말은 차마 안 하지만. 왜 말은 안 하느냐? 복음 있는 척하거든요. 속은 그게 궁금한데, 뭐 얼마나 복음을 잘 알아서 아프지도 않습니까, 막 이런 이야기가 막 나올 것 같아요. 굴뚝같아요.

그런데 복음은 이상하게, 복음은, 논리는 잘 모르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하는 느낌이 들지요. 이스라엘이 세월이 가면서 하나님의 특수성을, 이방 나라와의 차이성을 다 까먹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인들이 있지만 외로워요. 외로우니까 흔히 하는 이 말 있잖아요, 우~우~우~우~우~, 워~워~워~워~워~, 한 사람 바보 만드는 것 워워~ 우우~ 해가지고.

그게 바로 선지자입니다. 850대 1, 미가야는 400대 1(왕상 22:6), 워워워워~! 선지자 하나 바보 등신 만들어 버려요. 엘리야도 850대 1이었습니다.(왕상 18:19) 단지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850명 한번 모아 보세요. 거의 천명 가까이 되는데 천명이 우우우우우~, 하고 있는데 혼자 해봐야 모깃소리도 안 나요.

인간은 주님이 주신 요소, 할례의 요소, 하나님의 요소가 담기지 않으면, 신약에서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그것을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서 외쳤지요. 외쳤는데 선지자들이 외칠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로 단정 지으시고 이런 문구를 남깁니다. 그들은 들을 귀가 없나니.

선지자가 바르게 외쳐도 그들에게 뭐가 없느냐? 그 말을 들을 귀가 없다는 거예요. 이사야 6장 9, 10절에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말은 선지자가 파수꾼 역할을 할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되는가? 이유는 뭐냐? 들을 귀가 없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들을 귀가 없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을 귀를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예? 하나님께 자기 이스라엘에게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들을 귀를 주시면서 듣게 하면 되지 왜 선지자를 통해서 계시를 전하게 하고 들을 귀는 왜 안 주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할례 언약의 특징이요, 할례를 형식적으로 한다고 해서 할례 언약의 바닥에 있는 본질을 다 받는 게 아니고 일단 육은 망해야 돼요. 할례받은 육이 망해야 마음의 할례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망하도록 유도하신 겁니다. 망하게 하는 방법이 뭐냐? 선지자를 통해서 계시를 전하되 들을 귀가 없는 거예요. 귀가 있어도 이것은 폼으로 있는 거예요. 들을 귀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방 나라를 위한 파수꾼인데 이제는 내부를 향하여 파수꾼을 세우고 그 파수꾼 역할 하는 자들이 선지자고요.

에스겔 3장 17절에 봐도,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파수꾼으로 세우고 그 마지막 파수꾼이 누구냐? 마지막 파수꾼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신약에 오면, 마가복음 4장 9절에 보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렇게 들을 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막 4:9,23/눅 8:8/눅 14:35)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 말은,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은 필히, 개성이고 스타일이고 간에 그 사람의 성격 인품 상관없이 똑같이 모조리 다 망해야 됩니다. 망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기를 ‘우리는 안 망하고 싶습니다.’ 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함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할례 자체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할례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불가능한 것이었어요.

율법 자체가 그래요. 불가능해서 피에요. 오늘도 주의 말씀은 우리가 지킬 수 없어요. 불가능합니다. 뭐 들을 귀가 없는데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들을 귀가 없는데. 왜 들을 귀가 없게 하는가? 왜 들을 귀가 없느냐 하면 이 공동체가, 인간들 이 세상 하나하나가 내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몽땅 다 하나로, 하나의 이름으로 망한다는 생각을 못 하고 나만 살겠다는 이름으로 나만 살면 되지,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된다는, 개인 전체가 하나의 본질 속에 속했다는 것을 믿지를 못하고 나는 다르겠지, 하는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인 것이 신약에 와서 더욱더, 구약 이스라엘 후반부로 해서 신약에 넘어오면 그게 더욱더 확대되게 되어 있습니다.

청년이 되고 나중에 취직을 하게 되면 그냥 돈 번다, 나에게 돈이 생긴다, 이것만 생각해서 ‘그 돈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쓰고, 내가 즐기고 싶은 대로 즐기고, 또 돈 모아놓았다가 나중에 가고 싶은 여행가겠다.’라는 아주 순진한 생각으로 청년들이 사회에 나갑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라는 게 사회에 나가서 직장생활 해보게 되면 예상 못할 더러운 꼴이 나는데 그 더러운 꼴을 오늘 미가 7장 2절에서 4절에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숫군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또 뭔가 정보를 미리 아는 사람은 그걸 이용해서 남의 것을 빼먹으려고 설치는 그것을 그냥 드라마나 영화에서 저 사람 나쁜 사람이다,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회사 직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회사 돌아가는 거 가만 지켜보니, 가만히 지켜봐요, 그냥 보면 잘 몰라요, 가만히 지켜보면 이게 전부 다 사기라는 사실, 이게 전부 다 도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직원이니까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회사가 내거냐? 나는 월급만 받아 챙기면 되지.’ 해놓고는 막상 그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럴 때는 마음속으로는 자기 정당화를 하지만 ‘뭐 내 잘못인가? 나는 그냥 말단 직원인데 다 윗사람이 잘못해서 그렇지. 그러니 나는 관계없다. 나쁜 일 시키는데 할 수 없지. 에이, 잘 먹고 잘살아라.’ 하고 윗사람 욕하고 공격하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회사 직원으로 혹은 사원으로, 어떤 조직의 일원으로 있을 때는 윗사람 욕하면서 자기 정당화가 되는데 막상 개인이 나서서 개인적으로 사업을 한다고 해봅시다.

사업을 해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업을 할 때는 이 세상 자체가 하우스에요. 하우스 아십니까? 도박판. 이 세상 자체가 도박판이에요. 도박판에서 이겨 나가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악함을 개발해야 돼요. 직원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월급이나 타 먹고 윗사람 욕이나 하면 되지만 사업하는 사람은, 파리바케트 회장님이라든지 비비큐 회장님, 이 사람들은 악한 것을 날마다 개발하지 않으면 사업이 몽땅 망합니다.

더욱더 악랄하면서도 속아 넘어가게 할 수 있는, 타인을 현혹할 수 있는 나쁜 짓이라는 나쁜 짓은 다 해야 돼요. 왜냐하면 자기 목숨이 걸렸거든요. 그래서 그게 뭐냐? 목숨 걸고 하는 도박판, 그게 바로 공동체, 이 세상이라는 공동체입니다. 그 사업하는 사람은 어떻게 위로를 받느냐 하면요, ‘나만 쓰레기인가?’ 그게 위로가 돼요. 나만 쓰레기가 아니에요.

누가 사기를 개발하느냐에 따라서 성공이냐 실패하느냐가 따라옵니다. 내가 개발하는 사기보다 더 멋진 사기가 오게 되면 나는 쫄딱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업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종교 생활에 열중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개발한 악이 자기에게 너무 중량감을 주니까, 무게를 주니까 그 무게 경중에 맞춰서……, 너무나 진짜 세상 자체가 도박판이니까 거기서 목숨을 판 돈으로 안 걸 수가 없어요.

콜, 콜, 목숨 걸고 해요. 사원은 월급 받으면 그만이지만, 퇴근하면 그만이지만 사업하는 사람은 자기 가족과 자기의 목숨줄이 달린 거예요. 자존심이 달린 겁니다. 그냥 돈 5만 원이 아니고 자기 목숨을 건 거예요. 청춘을 다 건 거예요. 이거 아니면 자살이에요. 이거 안되면 자살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개발한 악이 한두 번 개발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더 성장하려면 더 교묘하고 얍삽한, 찌질하고 치졸한 악, 악을 계속해서 개발하지 않으면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생리가 이 도박판의 생리입니다. 판돈 계속 들어가요. 앞집 인테리어 새로 했는데 같이 안 하면 이쪽이 망하잖아요. 돈 대출 내서 인테리어 또 해야됩니다. 경쟁 사회에요.

그래서 종교 생활합니다. 어떤 종교 생활을 하느냐? 자기 악이 너무 무거워서 이걸 균형을 맞추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교회 출석하고, 봉사하고, 성경 공부하고, 기도하고, 헌금 십일조하고 해서, 비록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악이란 악은 개발하고 그것도 외국의 악까지 참고로 해서 다 동원하고, 일본에서는 어떤 사기를 치는가를 미리 도입해서, 그것도 미리 도입해야 통하지 늦게 도입하면 또 먼저 선방 날린 사기에다 말려들거든요, 그런 게 너무 심해서 ‘이러다가 내가 진짜 죽어서 지옥 가겠다.’ 싶어서 교회, 종교 생활해서 균형을 맞추는 거예요.

선과 악과의 균형 맞추기 돌입에 들어갑니다. 이걸 누가 하느냐?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해왔던 거예요.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왔던 겁니다.

 

그러면 신약에 들어와서 파수꾼은 어떻게 하느냐?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 아주 간단합니다. 내 목숨을 내가 관리하면 더러워요. 내가 지키려 하면 더럽습니다. 그런데 이걸 내가 관리하는 게 아니고 내 것을 누구한테 이양해 버려요. 인수인계 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에요. 창세기 22장 16, 17절에 보면,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사건에다가 아버지로서 그 아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인수인계해버려요. 그 이삭 역할이 로마서 4장에 보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내가 받을 수 없다는, 아까 처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요소로서 이스라엘 되었다는 그 원칙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그냥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한다.’ 자기 것을 자기가 간직하는 게 아니고 그냥 주님 앞에 던지는 거예요. 줘버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제물입니다, 제물. 내가 주님의 제물로 바쳐 지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참 쉽지요. 안 쉬워요?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오는 것은, 내가 너희를 하나님의 산 제물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5장 16절에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을 예수님께 바치게 만드는 일을 사도바울이 성령 안에서 해낸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제가 사도바울이라면 여러분한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 운명과 팔자와 운명과 인생을 그냥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께 그냥 드리세요. 본인이 간직하지 마시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드리시고, 주님이 살려주면, 그리고 주께서 하게 하시면 시키는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이걸 가지고 파수꾼이라고 하는 거예요, 파수꾼. 파수꾼의 특징은 자기 안에 내 것이 없는 거예요. 선과 악, 종교 행위를 해서 선과 악을 균형 맞출 이유가 없지요. 내게 아예 없으니까. 파수꾼의 특징은 뭐냐? 자기 것이 없으니까 자기의 몸체가 바짝 야윈 습자지 같아요. 내 것이 없으니까. 그리고 외칩니다. 마태복음 3장 2절,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세례요한이 외쳤던 그 말씀 제가 한번 외쳐볼까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세상 이미 망했습니다.” 망할 겁니다, 가 아닙니다. “이미 망했습니다. 이미 망했는데 무슨 도박을 하고, 무슨 희망을 갖고, 무슨 목표를 가지고, 무슨 계획을 가집니까? 망해버렸는데! 너도 망하고 나도 망했어요. 다 망했어요. 망한 나에게 미련 두지 맙시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에게 미련 두지 맙시다.” 이게 회개에요. “오실 분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러니까 내 말 듣고 물에 풍덩 빠집시다. 빠져 죽읍시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모세가, 다 같이 신령한 음료를, 다 같이 신령한 물을 마셨다고 해요. 하나의 음식을 먹고 하나의 물을 마신 것처럼 그 하나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지요. 1-4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어떻습니까? 인생 사는 것 참 쉽지요? 파수꾼은 하나를 지키는 사람이에요, 하나,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생명이라는 그 하나,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 세상은 하나 이미, 앞으로 망할 것이다, 가 아니라 이미 그들은 망해버렸다, 일체, 그들에게는 희망은 일체 없다, 알아서 주께 미리 우리의 갖고 있는 이 목숨도 주의 것이니까 미리 드려서 이 땅에 외칠 것을 외치는 파수꾼으로 삽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들을 귀 없어야 되는 우리에게 주께서 성령을 주셔서 주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이 뭔지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초부터 나의 것이 없었음을 기뻐하게 해주시고 이제는 주의 말씀만 가벼운 마음으로,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마음껏 외칠 수 있는 파수꾼 역할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