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가련한 양

아빠와 함께 2022. 5. 12. 15:24

다리 통증으로 정형외과, 신경외과를 전전하다가 침을 잘 놓는다는 한의원을 소개받고 치료를 하러 갔다. 간호사가 진료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주고 나가자 옆쪽에서 문이 열리며 원장이 들어오는데 다리를 쓰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입장했다.

상황 스캔과 동시에 먹구름처럼 생각들이 몰려오고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갈등이 유발된다. ‘그냥 집에 갈 것인가 아니면 치료를 받을 것인가. 무엇이 내게 유리한가 다리가 정상이 아닌 사람에게 아픈 다리를 맡기는 것이 맞는 것인지 오히려 드라마처럼 숨은 고수는 이런 반전을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여러 가지 판단들이 일어났지만 감사하게도 이런 생각들이 아무런 쓸모 없었고, 이미 몸은 침대라는 도마 위에 놓여서 작업은 벌써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고, 소통도 없고, 상호작용도 없는 일방적인 조치를 당하며 밀려오는 공포감과 내 머리는 액세서리인가라는 기분 상함은 잠시였고 어느새 통증만 감지하는 고깃덩이가 되어있었다. ‘오랫동안 혈루병을 앓은 여인은 의사를 몇 명이나 만나봤을까라는 개그같은 감정이입이 일어난다. 여인의 아픔을 이용해 돈을 뜯어 간 의사만 나쁜 것이 아니었다.

 

살고자 하는, 그것도 어떻게든 덜 아프면서 살고자 하는 이 본능을 버릴 수 없는 내가 나쁘다. 그래서 이런 명언이 나온 것인가. ‘나만 쓰레기인가?’ 내 몸이 아니니 병원에 다니든 가만히 있든 주님 것을 주께서 관리하고 기르신다고 감사하며 은근슬쩍 넘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왜 너를 위해 살고자 하느냐라는 책망을 앞세워 철저히 나만 믿는 나를 위한 행위를 긁어 부스럼 만드시면서 병에 걸려있거나 완치되었거나 속한 세상이 정상이 아닌 것은 변함없다는 것을 보이시는 주의 작업이 선행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도축장 고기처럼 축 늘어져 물과 피를 모두 흘려내고 있을 때 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예수님 옆에 강도가 메시아를 알아본 말씀이나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말씀을 믿기보다는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먼저 구원해 봐라라는 말이 믿음직스럽다. 죄를 배제해버리면 구원자는 적어도 자신을 먼저 구원할 힘이 있어야 한다는 세상의 상식을 따르게 되는 나의 믿음에서 구원받을 길이 없기에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말씀을 말장난이라고 믿을 수는 있어도 참으로 지당하신 예수님의 일방적 선포라고 믿을 수 없다.

 

주님에게 병 고침을 받고 귀신이 나가서 깨끗하게 소제 된 몸이라 할지라도 죄사함의 증거가 되는 죽어 마땅함의 확실성이 터 잡지 않으시면 나간 귀신이 더 센 귀신들과 함께 다시 들어와 이전보다 더 심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수상한 세상의 실체를 드러내시려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 내가 나았고 건강한 몸으로 더 나은 미래를 계획하게 된다면 그것이 십자가와 복음을 위해서일지라도 결국 나만을 의식하는 심한 상태이다.

 

아무리 청함을 받았을지언정 불러주신 분이 나의 죽어 마땅함을, 구원이 불가한 근거를 내부에 심어주신 증거가 없어서 신랑의 긍휼하심을 입지 못한다면 지옥에서 이를 가는 고통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생길 수 없는 삶을 살기에 주님이 청하셨을 때 얼른 혼인 잔치에 응하면서 자칫 복 받은 자라고 구원받은 자라고 잠시 착각할 수는 있어도, 불러주신 그분이 내가 죽인, 그것도 수천수만 번을 찌르고 죽인 피해자였음을 알고만 있었던 인식세계를 벗어나 눈으로 확인할 때 구원되었다는 오해는커녕 바깥 어두움에 던지라는 주의 지시가 합당함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에게 예외가 없다. 신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되기 전부터 어린양의 피의 근거가 입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죄인의 몫이 아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그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었다. 아담 안에 갈빗대로 만들어졌던 최초의 여자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데도 아무 결핍 없는 완전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뼈중에 뼈이고 살 중에 살같은 안에 거하는 여자가 되기 위해 남편이 있음을 계속 확인해야 했고 남편이 내 것임을 확실히 할 수 있는 잉태를 간절히 원했다.

 

눈에 보이고 소유해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육의 기질이 소유 당하는 사랑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남편에게 아내가 둘이나 되니 온전히 라헬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불안 속에서, 먼저 임신하고 여자다움의 면모를 보이는 언니를 질투하며 치열한 경쟁모드를 유지했다. 막상 라헬이 자신의 몸에서 난 아들을 품에 안았을 때 그 아들을 통해 평안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있는지도 몰랐던 허전하고 허무한 공백을 느끼며 다시 아들을 주시기를 원하는 존재 확인의 죄악이 폭로되었다. 남편 있음을 통해 여자로서 자신이 있음을 확인하려는 집착의 쳇바퀴에서 하염없이 구르면서, 자신이 만든 업적이 주는 가짜 평안으로 잠시 위로도 좀 받고 그렇게 도상 위에 존재로 갈 데까지 가야 했다.

 

라헬이 더 이상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자신이 망상의 세계에 있었음을 직시한 것은 예상치 않은 임산이 몰고 온 죽음 앞에서였다. 그녀의 평생이 주의 분노하심 안에서 쏜살같이 지나가 점이 되는 한순간일 뿐이고 수고와 고통이 마땅한 인생이고 결코 누군가의 참된 여인이 될 수 없는 슬픔의 열매일 뿐임을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살아온 모든 시간이 죽음의 흔적임을 고백하는 라헬을 찢고 나온 생명이 라헬을 신부로 그리고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참된 여자로 만들어낸다. 라헬은 생명을 고대하며 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헛된 인생일 뿐임을 알고 죽는 그것뿐이고 생명의 노선은 라헬의 죽음에서 나온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주의 이름이 만드시는 업무였다.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그다음 남자가 먹었다. 여자가 벗으면 그제야 가상의 남자가 작렬하는 죄를 발산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치심을 자꾸만 가리려는 인간 욕망의 치마가 여자를 통해 벗겨지면서 그 뒤에 숨어있는 짐승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미 구약부터 예수님의 증상을 임신한 선지자들이 출현하고 이 세상이 슬픔과 저주가 마땅한 증거를 출산하면서 만든 여자의 노선으로 유일한 진짜 남자이신 예수님이 죄의 실체를 밝히시고 심판하실 메시아로 오셨고 신부를 품어 하나 되실 거처인 예수 안을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이루셨다. 혼인 잔치의 피날레가 이미 개시되어 신랑 품이냐 바깥 어둠이냐를 가르신다.

 

하나님이 참된 남자로, 목자로 이 세상에 오셨던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몸을 찢어 계약을 파기하시면서 이곳에는 자신의 여인이 한 명도 없었음을, 참된 양이 단 한 마리도 없었음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이렇게 신랑을 잃은 경로를 따라 이 세상에 참된 목자가 없기에 자신이 참된 양이 아님을 알게 되는 잃어버린 양이 등장하고, 자신에게 기름이 없음을 알게 되는 처녀가 등장하며,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없음을 알게 되는 잃어버린 아들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고 그분의 뜻대로 된 것임을 알게 되는 가련한 양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만드신 길에서 등장한다. 깨진 언약 안에서 언약의 영원성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 잉태한 생명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목자를 알게 되고 그 목자의 음성을 청종하며 무엇을 해도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 없는 일을 지시하심을 감사하게 된다.

 

신부 없이 홀로 신랑이라는 말이 성립 안 되고, 남편이 없는 아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있음을 위해 끝까지 고수하고자 했던 여자의 자리가 이 세상의 남편을 상실하며 함께 철거된다. 철거된 자리에는 죽음같은 황량함만 있다. 없음이 마련되어야 진짜 있음의 작업이 비칠 수 있고 썩은 냄새 풀풀 풍길 정도로 확실히 죽어야 예수님의 부르심과 그 말씀이 생명으로 살아 움직임을 증거 할 수 있다.

 

주님의 손길에 놀아나며 예수님과 내가 우리인 적이 없음을, 너와 내가 우리인 적이 없었음을 들통 내는 환란을 주시는 주님의 공로를 마음껏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부부가 서로를 믿지 않는 모습을 발각당한 것이 감사하고, 남편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복음을 믿는 척하지 않도록 조치하심도 고맙다. 하나도 소통되지 않는데도 한집에서 끝까지 의로운 남자로 내 옆에서 거울처럼 머물러 나의 불신의 모습이 복음을 믿는 척하는 바로 너의 모습이다라고 깔아뭉개는 흑암의 권세의 위력을 깨우쳐주는 것이 고맙다.

 

하마터면 내가 믿음 있는 자인 줄 착각에 빠질 뻔했는데 주님이 허락하신 구조 안에서 사이에 낀 존재로 의심을 멈추지 않게 보존하시며 결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스스로 믿었음을 주장하지 못하는 자로 지켜주신다. 모든 족속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각 사람의 눈으로 주를 보게 될 그 날에 기이해 하고 놀라며 애곡할 수밖에 없도록, 말씀이 말씀 되도록 끝까지 이끄시는 증거들이 감사하다.

 

바람에 날아가는 먼지같은 존재들이 주님의 자아가 밀어붙이시기에 불법의 자아를 토해내고 우리의 저주와 멸망이 하나님의 뜻임을 외치며 날마다 죽을 수 있는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의심을 멈추지 못하기에 바람에 밀려 요동치는 바닷물결이 이고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기에 아무것도 구할 자격이 없는 자로 날마다 죽으면서 믿음은 오직 주의 것이었음을 증거 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피로 단장된 신부들이 자신을 잃어버리고 상실해가는 모습으로 신랑이 계신 곳까지 휩쓸려가는 찬미의 높은 노래가 울리고 있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이미 시작된 예배가 신랑의 혼인 잔치가 있는 곳까지 충만하다.

이근호목사

“ 주의 지시가 합당함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사람이 죽는 것은 늙어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죽는다. 태어난 것도 주님의 지시였다. 악마는 ‘주님의 지시’를 빼고 ‘자신을 믿는 믿음’을 그 자리에 집어넣도록 했고 이게 자연스러움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간에게 있어 ‘주님의 지시’는 생소하고 가상처럼 느껴진다.

결국 나의 세계로 도로 환원되느냐 마느냐하는 것은 주님의 지시가 합당하게 여겨지는가 여부에 있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