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인생이란

아빠와 함께 2022. 4. 20. 08:26

389강-YouTube강의(인생이란 누가복음 21:26)20220419-이 근호 목사


제389강, ‘인생이란’. 참, 세상 사람들, 젊으나 나이 많으나 이런 철학적인 질문을 어느 날 하고 싶어 할 거예요. ‘형님, 인생이 뭡니까?’ 거기에 관한 책들도 나와 있고 의견도 많은데 제가 답변하고 싶은 것은 인생이란 오류다. 오류. 뭔가 잘못되어 있다.

그 증거로서 누가복음 21장 21-26절까지, 좀 깁니다. 긴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23절에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절,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25절,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절,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인간들을 그동안 포근히 감싸주고 인간들이 잘 살도록 온실처럼 꾸며져 있는 이 세상, 이 세상은 그런 식으로 영원토록 인간 세계를 보존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아늑한 분위기 안에서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인생의 해답은, 인생은 허무하다. 또는 인생은 뷰티플 라이프, 즐겁다. 아름답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뭐 온갖 각자 자기가 살아온 경험에 입각해서 나름대로 정리된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어떤 조건에서 그렇습니까? 이 자연세계가 아늑하다는 조건 하에 포근하게 안정적이라는 구조 안에서 우리는 내 인생만 그냥 열심히 부지런히 착실히 살면 거기에 대한 보상이 따라오는 아주 정직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정직한 인간으로 살면 그게 성공한 인생이라 그렇게 보통 생각하며 살잖아요.

그런데 누가복음 21장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기절할 정도에요. 자, 26절에 기절할 정도라면 뭔가 그동안 인생에 대해서 인생은 이렇다, 인생은 저렇다 하는 그 내용에 전혀 해당되지도 않는 예상 밖의 사태가 인간에게 들이닥쳐도 인간은 할 말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문제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오류, 잘못된 것을 계속 낳게 돼요. 기계가 오작동하고 오류 생기면 그 기계를 못 쓰잖아요. 인간은 처음부터 쓸 만한 게 하나도 없어요.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시편 51편의 말씀처럼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다윗이 고백하는 순간 다윗은 비로소 다윗 자기 자신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 오류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본인은 알게 된 겁니다. 다윗보고 그 순간에 인생이 뭐냐? 물으면 다윗은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나는 오류다. 나한테는 옳은 게 없다. 올바르다 하는 것이 나한테는 나올 리가 없다. 그걸 시편에서는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결국 내가 하는 모든 제사, 율법 지킴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사실, 그것을 본인은 알게 된 거죠. 주께서는 번제도 원치 아니하고 속전제도 원치 아니하고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가 오류 있다는 것, 그냥 심령이 아니고 상한 심령, 썩은 심령인 것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놓는 거예요. 이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대자연이 온화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있으니까 자기 자신에게 뭔가 건전한 의미가 뭐 귀중한 의미가 있어서 대자연도 나를 지켜주고 마땅히 보호해주는 것처럼 그렇게 오산을 한 거예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가게 신장개업해서 안에 내부 청소하고 나니까 신장개업하는 날 지붕 자체가 무너져버리면 청소한 게 무슨 소용 있어요? 이 우주, 우리 인간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는 하늘의 권능들이 그냥 내려앉아버리면 26절에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기절할 지경이래요.

도대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조차도 본인은 알 길이 없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많은 질문을 던지고 많은 답변을 얻어내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질문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질문을 빠뜨렸어요. ‘하나님이여, 저는 왜 잘못되었습니까?’ 그 질문을 인간은 못해요. 자기가 잘못된 것을 모르는 그 자체가 인간으로서는 근원적으로 오류의 인생입니다.

교회 성경공부하고 교회에 출석하면서 사람들은 지금껏 자신이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은 오류만 제공했지, 거기서는 진실이라는 것은 없었다고 인정하면서 교회 나옵니까? 그래서 내가 오류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태양이 빛을 잃어버리고 별들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진다 한들 ‘하나님이여, 왜 이러십니까?’ 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고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옴팍 그걸 다 받아들여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 나오고 있어요? 그래가지고 인생을 삽니까?

오늘 읽었던 본문 22절 봅시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그 날에 형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날에 형벌이 주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형벌은 최종적인 결과물인 거거든요. 줄곧 살아왔던 것에 대한 대가다 이 말이죠.

23절에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아이 밴 자, 얼마나 순결합니까? 젖먹이는 자, 그 아이를 안고 젖먹이는 그 엄마의 모성애, 이것은 천사처럼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은 모습이죠. 순결한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순수하고 순결한 갓난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요? 아이에게 젖먹인다는 엄마의 사랑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게 잘못된 겁니까? 하지만 이 세상에 환란과 하나님의 진노는 그 사람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그대로 동일하게 닥쳐옵니다.

러시아의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의 갓난아이를 피하지 못하듯이... 미사일이 날아오다가, 어? 아이고 이 애 예쁘네, 하고 미사일이 알아서 공중에서 아이 눈을 보고 엉뚱한 데로 떨어지고 그런 일은 없죠. 사정없이 그냥 떨어져버리죠. 그럴 때 아이고, 순수한 애가 안됐다. 안되기는 뭐가 안됐어요? 인간 자체가 오류인데요. 오류의 부모에서 오류의 자식이 태어났는데 죽는 것이 마땅하죠.

24절에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 게 인생이에요. 칼날에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 제대로 조치하셨습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될 그러한 모습이 제대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거예요.

칼날을 치든지 하늘이 떨어져서 망하든지 빌어먹든지 암에 걸리든지 어떤 하나님의 조치도 우리의 오류에 딱 합당한 제대로 된 정확한 조치를 취해주심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여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