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다른 존재

아빠와 함께 2022. 3. 23. 08:47

385강-YouTube강의(다른 존재 이사야 1:18)20220322-이 근호 목사


제385강, ‘다른 존재’. 인간보고 존재라는 말을 쓸 때는 ‘너 다르고 나 다르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통합적으로 ‘아이고, 존재야 이 인간아’ 할 때 통합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존재라는 말을 쓰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인간이죠. 그러니까 존재로 말을 바꾸면, 인간은 인간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두 똑같은 존재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전부다 이의가 없고 동의를 해요. 그럼 인간 사는 것은 고만고만하죠. 별다른 인간 없다 이 말이죠.

다만 별다른 인간은 없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생각에 남들을 서열화 시키고 측정해요. 저 사람은 성공한 사람, 저 사람은 실패한 사람. 그러한 서열, 계층, 계급은 누가 내리느냐 하면 본인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내립니다.

그런데 그 서열화, 계층화할 때 저 사람은 나보다 잘 살고 나는 못 산다 할 때 어떤 마음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비록 나는 너보다 못 살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내가 노력하게 되면 네 수준만큼 따라 붙일 수 있어. 나도 너처럼 잘 살 수 있어.’ 라는 희망을 인간은 늦추지 않습니다. 희망마저 인간은 버리지 않아요.

‘그래 아이고, 잘 사는구나.’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도 너처럼 되면 참 좋겠다.’하는 희망을 피력하는 겁니다. 나타내는 거거든요. 인간 존재는 그 인간 존재 안에서 다 같은 인간이니까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 나도 운 좋으면 너처럼 될 수 있어. 나도 좋은 집안에 좋은 부모 만나면 너처럼 이렇게 으스대며 살 수 있어.’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아, 나는 참새가 되고 싶어.’ 이건 뭐 정신 이상자도 아니고 희한하죠. ‘나는 참새가 되고 싶어. 나는 옥수수가 되고 싶어.’ 그건 뭐 미친 사람이죠. ‘나는 나중에 대통령이 될 거야.’ 이걸 미쳤다고 하지 않죠. 왜냐하면 대통령이나 나나 같은 존재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데 ‘옥수수가 되고 싶어. 나는 참새가 되고 싶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네가 될 수 있는 걸 이야기하라.’ 대번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할 수 있는 걸 하라, 이렇게 나오죠.

그러니까 제 말은 어떤 존재로 구역을 치면 절대로 인간은 다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고만고만하죠. 뒤떨어진 존재, 앞서간 존재. 성공한 존재, 인생 낙오된 존재. 같은 존재이지만 그 안에서 서열화 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네 인간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과연 그럴까요? 성경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상상도 못한 거죠. 같은 인간 존재 안에서는 노력하면 따라 붙일 수가 있어요. 연속적일 수 있단 말이죠. 물론 힘든 건 맞아요. 노력하다 나중에 늙어죽을 수도 있고 아파 죽을 수도 있고. 나중에 ‘분하다. 결국은 내 원대로 안 됐네.’ 하며 낙담할 수도 있지만 희망은 가져볼 수 있잖아요.

예레미야 13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피부가 까만 흑인이 백인이 될 수 있느냐. 와... 이것은 안 되죠. 나중에 백인이랑 결혼해서 애 낳는 그것 말고 피부 자체가 흑인으로 태어났으면 흑인이고 백인으로 태어났으면 백인입니다. 병 걸리면 백인이 될 수도 있죠, 마이클잭슨처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반점 없으면 그건 표범이 아니죠. 그냥 범이죠. 호랑이죠. 표범이 반점을 변할 수 있느냐? 인간 세계에는 없어요. 표범 고유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 속성은 반점이 없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없어요. 흑인이 백인이라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은 해줄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사야 1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현재 우리 상태를 색깔로 말했다는 것은 이 색깔은 변할 수 없다는 뜻을 의미하는 거예요.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마치 흑인의 피부색같이. 표범의 반점 있는 피부처럼. 우리 죄는 속에서 꾸역꾸역 계속 올라오기 때문에 그래요.

원래 죄가 없는데 죄 지으면 먼지 같은 거잖아요. 먼지는 물에 씻으면 되죠. 외부에서 묻은 죄는. 내가 본의 아니게 한 실수 같은 것은 그 다음에 실수 안하면 되죠. 그러나 죄라는 것은 본의 아니게가 아니라 태생이 그래요, 우리는.

죄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자기의 죄가 자기의 속성이 투명하게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평소에 말씀을 안 보니까 자기가 건전하고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하죠. 말씀을 보게 되면 말씀에 위배 안 되는 게 없어요. 말씀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 되는 겁니다.

눈 감고 어느 말씀이라도 딱 들추면 다 그래요. 내가 아무데나 들췄는데 빌립보서 3장 20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 이걸 하루 종일 중에 우리가 얼마나 생각합니까? 어느 성경구절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굳이 들 필요도 없어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러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사랑의 뜻에 위배되죠. 위배되어놓고 자기가 그래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옵니까? 나올 수가 없죠.

그래서 성경 이사야 1장 같은 경우에 네 죄가 주홍 같다는 말은 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네 죄에 대해서는 더는 손댈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노아 때 홍수 왔잖아요. 죄가 어느 정도냐, 죄와 죄의 심판이 어느 정도냐 하면 노아 때 물이 오는 것을 노아가 그때그때 바케스로 퍼낸다고 비가 내린 그 물을 다 없앨 수 있어요? 못 없애죠.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소낙비를 인간이 무슨 수로 다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처럼 이미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계속 꾸역꾸역 죄가 나오기 때문에, 하루 살면 계속 죄가 더 나오기 때문에 그냥 죄 지었다 하지 마시고 내 피부 자체가 죄 덩어리이다. 그 색깔이 붉은 색깔이다. 얼마나 올라왔으면 붉은 색이겠어요. 어느 하나 얼룩덜룩하지도 않아요. 벌게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된다 했습니까? 붉은 색깔이 양털같이 희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에서 올라온 색깔 자체가 어디 갔지? 이게 왜 없어졌지? 어? 왜 죄가 없어졌지? 하얗게 되어버린 겁니다. 너무나 하얘서 뭐 죄 하나라도 새로 생기면 금방 눈에 확 들어오게. 죄 거기 있잖아, 딱 지적이 될 정도로 그 배경이 하얘요. 이 말은 어디를 봐도 죄가 있다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순백의 피부로 바뀌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어디서? 이사야 1장에서.

그것이 이사야 53장에 보면 주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서 그분이 오셨다는 것으로 주님이 지적하시고 주님이 해결책을 제시한 책, 이게 바로 이사야입니다.

이게 이사야만 그럴까요?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바로 인간이 못했지만 내가 해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너희들은 나는 못했습니다. 나는 해내지 못했습니다, 를 계속해서 유지하시면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