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
379강-YouTube강의(본향 히브리서 11:16)20220208-이 근호 목사
제379강, ‘본향’. 보통 인간들 입장에서는 ‘사람에게는 집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람이 안 필요해요. 사람이 안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집이 필요하다는 그 말 자체도 주님한테는 먹히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업무, 일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시편 127편에 이런 말씀이 있죠.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는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집이 필요하지, 너희들 사는 집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 집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기 생존이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생존이 우선되니까 자기 집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결국 무슨 집에 대한 생각을 나중으로 돌리냐 하면 주님의 집에 대해서는 그냥 시답지 않은 거예요.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일단 나 살고보자가 우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 내 살 도리 한다고 거기엔 뒷전이 되는 거예요.
가끔가다 성경도 보지만 내 집, 내 아파트 장만하는 데에 어떻게 복 받는 방법 없습니까? 이렇게 성경을 보는 식이 되니까요. 그러니까 일단은 인간에게는 집이 필요하다는 것은 성경하고 하나님 뜻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말은 인간들끼리 사는 집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한 집이죠.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하나님께서 집 짓는 순서가 그냥 따로 집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뭉개버리느냐 하면 우리의 장막 집을 무너뜨리고 거기에다가 집을 짓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우리 인간들이 집을 지을 때는 자재로 집을 지어놓고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집은 그 집의 주인 자체가 집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나는 기도하는 집이다’ 할 때, ‘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이 성전을 지으리라’ 요한복음 2장에서 이야기하실 때 예수님의 확장이 집이 되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집 지어놓고 예수님 들어가고 우리 들어가고, 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영향력 또는 자신이 한 업적, 성과, 이 땅에 하신 모든 것이 고스란히 평수가 넓어지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하늘의 나라가 돼요. 골로새서 1장에서는 그것이 ‘아들의 나라’에요. 예수님의 통치성이 확장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통치성이 지배하는.
왜냐하면 예수님이 왕이시기 때문에 왕의 자기 능력을 확장시켜 나가면 그것이 하늘나라가 돼요. 그럼 하늘나라 평수가 만평 있다면 만평 구석구석에 무엇의 지배력이 거기에 다 미치겠습니까? 예수님이 친히 손댄 흔적과 열매들로 그 하늘나라 집이 꽉 채워지겠죠. 어느 한 구석에 빈 공터가 없겠죠. 어느 한 구석이라도.
그래서 예수님 몸의 통치가 지배하는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나라가 된다면, 하늘나라 들어가는 사람은 그냥 넣어줄게, 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예수님 자기 몸에 일어났던 동일한 현상을 우리 몸에 그대로 적용시켜버려요.
적용시켜버리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죽으셨잖아요.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죠. 이게 예수님의 몸에서 일어난 겁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장막 집은 날아가버리고 부활의 영광된 몸으로 달라져요, 부활되고 나면.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된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손대지 마라’고 해요. 너희 그런 육신에 있는 몸으로 손댈 몸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도 마찬가지에요. Don't touch me. 나를 터치하지 마라. 네 육과 현재 내 육이 같아 보이지만 이게 같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전혀 다른 몸이에요. 예수님의 몸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몸이고 예수님의 달라진 몸이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말은 달라지지 않은 우리의 몸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그러한 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알려준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몸을 어떻게 해야 돼요? 빨리 폐기처분해야 되죠. 그게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더러운 몸에서 후딱 떠나서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으려고 한다. 이 갈아입는다는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5장입니다. 이 몸이 무너지게 되면 다른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거예요, 다른 옷으로. 영원한 집.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2절에 보면 우리가 벌거벗은 채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몸으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사도 바울이 뭔가 요구하는 게 아니고요. 사도 바울은 뭔가 하나님께 이거 해주세요, 요구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언약의 원칙에 의하면 그대로 성도한테 이전되어 있고 확장되어 있는 그 조치를 시행해달라는 겁니다.
본인의 소원이라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일어난 일은 중단되지 않잖아요. 지속되잖아요. 그 지속된 일의 절차가 뭐냐.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누구 차례입니까? 바로 백성들이 부활될 차례이잖아요. 그 순서대로 그냥 진행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지금. 뭘 해주세요, 해주세요,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우리는 그냥... 컨베이어 시스템이라 하죠, 수서역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만 가만히 서 있으면 도로 자체가 움직이잖아요. 도로 자체가 움직여서 여기 있는 우리가 저쪽으로 이동되잖아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여기 있다가 저쪽으로 이동해요. 그 밑에 판이 이동하고 있는 거예요. 그 판이 예수님의 후속조치이고 그것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발바닥을 봐야 돼요. 발밑을 봐야 되고. 자꾸 하늘보고 도와달라, 천국 보내달라고 기도할 게 아니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이동 중이에요. 이동 중이라는 것에 감사해야 되지, 뭐 새삼스럽게 구원받았으니까 그다음 뭘 기도해야 되지? 아차, 재림할 때 구원해달라고 기도해야지. 빠뜨렸다. 이래가지고 또 자기 쪽에서 일을 추가시켜, 또. 숙제하듯이요. 그런 게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15절에 보게 되면 컨베이어 시스템, 가만있어도 움직이는 그 경로가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히브리서 11장 15절-16절 보실 때 여러분들이 방금 들었던 그 원칙을 적용시켜 보세요. 가만 있는데 도로가 움직인다. 그게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 본인이 하시는 일인 것을,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관점에서 보세요. 확 와 닿아요. 쉽게 이해돼요.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히11;15) 15. If they had been thinking of the country they had left, they would have had opportunity to return.(NIV) 15. And truly, if they had been mindful of that country from whence they came out, they might have had opportunity to have returned.(KJV) 이15. And indeed if they had been thinking of that [country] from which they went out, they would have had opportunity to return.(NASB) 제는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내 발걸음보다 밑에 있는 발판이 방향을 이미 정해버렸어요. 더 세요. 아무리 가고자 해도 발판 자체가 나를 아예 끌고 가버려요. 성령은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와 협의하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납치해가듯이 우리를 끌고 갑니다, 하늘나라로.
16절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는데... 오늘 379강 제목을 ‘본향’이라 해도 되고 다른 말로 ‘그냥 가만히 있는데’ 주께서 알아서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어? 뭐 이것뿐이죠. 그냥 가만히 있는데 점점 더 본향이 어떻게 돼요? 가까워요. 멀리 보이는 본향이 점점 더 가까운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아브라함 이야기거든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때 이야기란 말이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야말로 주님에 의해서 온 가나안 땅을 다 돌아다녔잖아요. 다 돌아다녔는데 다 돌아다닌 그 기간은 내 힘으로 내가 천국 가는 모든 힘을 빼내고 그것을 제거하는 기간이었어요. 이것은 내 힘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거에요. 하늘과 땅은 완전히 단절되었기 때문에 폴짝 뛰어도 올라갈 수가 없어요. 그냥 주님이 와서 받쳐줘야 돼요.
그게 언약이거든요.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삭 언약이, 야곱 언약이. 그들이 하나의 발판이 되어서 언약이 움직이니까 언약이 움직이니까 그들은 그냥 가만히 서있어도 움직여나갔던 겁니다. 물론 고생을 안 할 수가 없죠. 언약 주체자가 예수님인데 예수님도 고생했는데 예수님 위에 살면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고생을 안 할리 있습니까? 그건 욕심이죠. 어째든 고생을 하든 말든 갈수록 세상은 작아지는 거예요. 그러나 본향은 크게 되는 거예요.
중국이 아무리 반대하고 숏트랙 금메달 3개, 4개 다 날라가도 우리가 젊을 때는 중국 이거 죽여버리자 하지만 나중에 본향 보이면 놔둬라. 메달 다 가져가든 말든. 우리는 그냥 안 보면 되고 본향이 더 좋으니까. 그런 식으로 가볍게 이 세상 모든 것을 시답지 않은 시시한 일로 여기면서 가볍게 벨트를 타면서 본향만 크게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