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1-4)
약속이라는 것을 구태여 언급을 해야 되는 이유가 뭔가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비 약속, 약속 아닌 비 약속 요소를 노출시키기 위해서 언급하신 겁니다. 약속 아닌 것은 하나님 것 아닌 줄 알아라, 그런 뜻이에요.
1.기독교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지 천국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여호와를 믿고 구원되겠다는 그런 약속은 없다는 거예요. 율법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그 내용도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고 오해한 것이에요.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2절에 나온 것처럼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할 때 우리 구원하려고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직접 관여해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과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했다는 것이 차이점이 뭐냐?
모든 천지창조, 그 안에 포함된 우리자신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예수님이 그냥 우리 구원하라는 수단으로서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내가 당신 믿어줄 테니 당신이 나한테 뭐해 줄 거요, 이렇게 통박 굴리고 거래하고 흥정하라고 예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 행복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아주 냉혹하게 이야기해서 ‘우리행복이라는 것은 성경에 약속된 바가 없습니다.’ 성령 받으면 이렇게 돼요. ‘천국은 저한테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죄인인데 무슨 천국을 갑니까? 넘볼 것을 넘봐야지. 넘볼 무엇도 없는데 왜 그걸 넘봐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오셨다는 그 말은 이 세상에 비 약속이 흐르고 넘치는 거예요. 비약속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2.예수님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을 배치를 해놓았는데 약속을 배치하니 그 배치된 약속 안에 뭐가 있느냐하면, 인간과 신 사이에 거부와 거절의 장치가 장만되는 거예요. 오지 말라는 것, 너 같은 인간은 오지 말라는 그 장치가 배치되어 있는데 그것이 모세를 통해서 준 율법의 정신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음을, ‘나는 천국가고 싶어요.’라는 말을 내 뱉으면서 그것이 바로 저주로 갈 수밖에 없는 근거로서 완전히 깔려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아무도 자신이 비약속적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이 없는 거예요. 아주 집요한 종교적인 집념, 집착, 그런 것은 발휘될지 모르지만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이야기는 꿈에서도 생각 못한 이야기입니다. 꿈에서조차. 목사가 희생으로 거룩한 목회를 하면서 설마 이것마저 죄가 될 줄이야 나는 생각 안 해, 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십자가 지고 희생의 길을 가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에요.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거예요. 그 예수그리스도가 있기 위해서 먼저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 중에 한 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레위기 10장 8절에서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어떤 특정 장소가 있다는 거예요. 그 장소는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구멍을 판 거예요. 블랙홀이에요.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 계시를 받고……, 약속을 받은 거지요, 그 장소에 성전이라는 혹은 성소라는 혹은 성막이라는 특정 공간(회막)을 확보한 순간 그 때부터는 ‘들어오지 말라.’가 성립돼요. 이러한 조건이 안 되면 들어오지 말라, 가 돼버려요.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형성된 그 시내 산꼭대기와 지면 사이가 이게 엎어져버리면 수평적으로 특수한 공간과 그 외의 다른 공간과의 차별화가 성립됩니다. 제사장만 들어가고 우리는 못 들어가, 라는 수평적인 인식은 그것을 곧추세워버리면 뭐냐, 수직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는 마음대로 살 수 있지만 진짜 계시는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못 들어가, 라는 것을 그대로 모형으로 보여준 거예요. 이 레위기 10장에서 특정한 장소인 성소를 만들어놓고 못 들어간다고 하는 이야기는 로마서 1장 2절에 의하면 그것마저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도달시키고 연결시키는 약속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눈치 못 채고 오직 자기 자신의 잘난 맛에 인생 승부 거는 비 약속으로 넘쳐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그냥 넘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수많은 수천 성경구절을 여기에 집어넣어요. 큐티를 해왔으니 성경구절 오죽 많이 알겠습니까? 거기에 제자훈련까지 해 놓으니 머릿속에 가득 들어있는 것이 성경구절이에요.
3.‘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지요. 이제야 밝힙니다. 이제 밝힐게요. 이 사람들은 남들을 괴롭게 한 사람들이에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람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용을 설교에 담아버리면 그것은 자진해서 ‘나는 그리스도 종이 아닙니다.’라고 강대상에서 외치는 것이 돼요. 60평생 70평생 살면서 내가 누군지를 몰랐는데 이제 보니 내가 천하에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라 태생이 죄인역할 하라고 모태로부터 죄인으로 그냥 출산된 거군요, 라는 것을 알 때 그동안 죄인에게 퍼부었던 투자, 죄인의 명예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서 쏟아 부었던 모든 조바심과 행동의 윤리와 도덕 같은 것이 얼마나 허접스러운 것이었는지, 자기를 가리는 하나의 가식적인 가면에 불과한 거예요, 그게!
인간은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육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몸을 갖고 태어난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네가 살아 있어도 그것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고 이미 죽었기에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 말입니다. 십자가에 비로소 그 해답이, 정답이 나온 거예요. 그러면 종교란 무엇인가, 오락이죠. 취미의 일종이죠. 교회가 뭐냐, 친목단체고 계모임이에요. 돈 내서 놀러가기 바쁘고, 노인들 밥해주는 이런 것. 친목단체를 버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오락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타고난,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던 타고난 층층의 죄의 일부라 그 말입니다. 그 내 모습은 모습대로 교회에서 발휘하되 그것이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것을 알아채면 되는 겁니다. 구원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율법이 오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법을 지키냐 안 지키냐에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차후에 법이 주어진 것은 이래서 네가 죄인 맞잖아, 라고 고발하기 위해서 법이 주어진 겁니다. 율법이 주어지면 우리는 내가 몰랐던 죄는 증식이 되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이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겁니다.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죄가 넘치지 않으면, 죄가 증식되지 않으면 은혜를 모르는 거예요.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숨어 있던 죄가 발각되어야 되는 겁니다.
4.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죄인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약속에 포함이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아담 때문에 죄인된 거예요. 우리가 아담에 속했기에 죄인된 것처럼 우리가 마지막 아담에 속해버리면 이유를 막론하고 이 땅에서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관계없이 의인되어버립니다. 주님이 나를 약속의 일부로 봐 준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잘난 사람으로 그 약속의 일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날 때부터 죄인이었고 날 때부터 잘난 체 하고 날 때부터 자기의만 챙기는 죄인의 역할로서 약속과 엮여져 버려요. 엮여진 약속의 끝을 살살 쫓아가 ‘누구십니까? 나를 죄인 되게 하는 이 약속을 보여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게 되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루신 약속의 그물망 속에 나는 나름대로의 죄인의 모습으로 한 가닥 같이 얽혀 있는 겁니다. 이 관계망을 하나님의 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의를 내가 가위로 잘라서 꼭 챙겨 넣어야 그것이 의라고 여겼습니다. 내가 있다, 없다, 내가 있는 것이 바로 나의 정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실 있다, 없다, 이것은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냥 나타나는 거예요. 복음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죄가 나타나고 그 가운데 우리는 약속에 포함될 경우에 진짜 내 모습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하고 ‘하나님, 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잖아요. 책임지세요.’
간단한 논리지요. ‘하나님이여, 신이 있다면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힘든 인생 살게 하십니까?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괴로움을 주십니까?’ 그 말은 ‘내 인생 따로 챙겼는데 왜 자꾸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다치게 하십니까?’ 라는 말과 똑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나는 약속된 나가 아닌데 비 약속, 약속이 안 된 비약속이거든요.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인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나밖에 모르는 비약속입니다. 이 비 약속은 약속을 핍박하게 되어 있고 약속에 저항하게 되어 있고 반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점을 고치지 말고 다 까발려 내라 그 말이지요. 레위기에 나오는 거부와 거절의 장치, 어떤 인간도, 어떤 자도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거절과 거부의 장치, 이게 오늘날 십자가입니다.
4절의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게 만든①그 성령께서 부활하셨다는 그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시게 되면 오지 못할 자이지만 내가 불쌍히 여겨서, 자비를 베푸셔서, 사랑을 해줘서 그냥 네 자격으로는 못 오고 ②네가 나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서 더 이상 너 자신의 것이라는 것은 없어진 상황 이후에 ③내가 네 안에 들어가서너를 나의 지체로서 영원한 천국백성 만들겠다는 것,이것이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왜 이렇게 힘들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자기 근원부터 살펴서 ‘내가 아담의 죄 가운데 태어난 것도 그리스도의 약속 안에서는 당연히 죄인 역할을 하라고 죄 가운데 태어났구나. 그냥 있는 그대로 염치없지만 ‘주여, 오늘밤에 제가 어디 갑니까?’라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의 약속만 외친다면 이미 그 사람 속에 주의 약속이 내장되어 있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순교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우리는 순교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가 많고 큽니다. 엉뚱한데 정신 팔려 있습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 축복받은 자랑, 은혜 받은 자랑하고 있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다시 한 번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죄로서 약속에 편입되어서 구원받은 사실을 남한테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