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한 분과 다수

아빠와 함께 2022. 1. 27. 16:24

한 분과 다수

2022년 1월 26일               본문 말씀: 미가 1:8-12

(1: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1:9)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1:10)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지어다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지어다

(1:11)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1:12)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난데없이 선지자의 모양새가 달라졌습니다. 비통한 모습을 하게 됩니다. 벌거벗은 몸이며 애곡하는 것을 봐서 이는 노예의 모습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이런 옷차림을 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비참한 운명과 자신의 처참한 몰골을 합치시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운명’이란 곧 예루살렘의 인격화와 관련있습니다.

즉 세상 나라가 망하면 하나의 국가가 망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곧 나중에 어떤 분이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인격화되셔서 죽으심을 일찍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분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흘만에 그 죽음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영원한 나라가 됩니다.

앗수르 제국이 북쪽 이스라엘이 무참하게 멸망시키고 이제는 남쪽 유다나라를 부수려 내려옵니다. 그 길목에 있는 도시들이 하나 둘씩 무너집니다. 이를 때, 이들 도시들의 파괴는 곧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이렇게 되니 예루살렘을 건드리도록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을 일으키신 겁니다.

즉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추진하신 계획의 일환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하므로서 진정한 예루살렘이 피어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 땅은 이미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즉 모든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어버렸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계신다고 여겨졌던 그 성전 자체도 이미 예수님으로 오심으로서 거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성전이 건물이나 공간적 규정에서 예수님이라는 인물로 바꿨음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 계심’이 장소가 아니라 인물로 전환되었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라는 인물은 딱 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딱 한 분에게 일어난 현상에 모든 이스라엘 전체가 종속되었습니다. 다수가 1인에게 종속된 겁니다. 이는 곧 이 1인이 나중에 다수가 되면 이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한 분의 죽음이 정답이 되면 다른 분들은 이 정답을 위해 존재해야만 합니다.

마치 병을 들고 난 뒤에 약을 먹는 것이 아니라 약이 먼저 제조되고 난 뒤, 이 약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맞추기 위해 사람들인 병이 들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투명한 셀로판지에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규격에 맞는 그림을 찾아나서는 식입니다. 메시야께서 죽으셨다는 말은 일종의 블랙홀로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어둠 속으로 삼켜져야 합니다.

즉 모든 세상 사람들이나 피조물들을 다 집어넣어서 모두 죽은 것으로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남으로서 죽음으로 들어왔다가 생명으로 생산되는 바가 됩니다. 이 메시야의 죽음 안에서는 죽음마저 복이요 은혜입니다. 이렇게 되면 생명과 통하는 죽음과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는 죽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출생에서 파멸로 이어지는 인생이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파멸로 막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4-25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희생을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창세기 2장의 상태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너와 나가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이후에는 너와 나가 등장하게 됩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5:12)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는 아담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3-24) 즉 비록 두 사람이지만 결코 나와 너가 아닙니다.

도리어 한 몸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로서 한 몸입니다. 즉 생명이란 나와 너의 세계에서 한 몸인 뿐인 세계로의 이동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따라서 미가 선지자에게는 이처럼 죽음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가 겹쳐져 있습니다. 아래층으로 죽음이 들어오지만 2층으로 생명으로 나옵니다.

이 와중에서 예수님은 다수를 낳게 되는 단독 1인으로 나타나신 겁니다. 이는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핍박 받기 전의 요셉의 위상과 같습니다. 창세기 50:24-25에 보면,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요셉은 죽어서도 마치 네이게이션처럼 이스라엘의 미래를 추진하게 됩니다. 즉 과거에서 미래로 진격합니다. 그 결과가 여호수아 24:32에 나와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한 분의 운명에 다수의 운명이 실려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마치 밤 들판에 꼬마 전구들이 각처에 연결되어 퍼져서 깜빡이는 것처럼 한 분의 전력공급처에서 제공된 의미가 동일하게 종속됩니다. 성도나 세상 사람이 출생할부터 모두 죽은 귀신들입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1- 22)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으로 통하는 유일한 죽음입니다. 즉 성도의 죽는 것 자체가 복이요 그저 주시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개인의 경험이 나중에 공동의 경험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미가 선지자의 경험은 오늘날 중첩된 두 세계를 지니고 있는 성도 자체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미가 1장 8-12절(한 분과 다수)2201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1장 8-12절까지입니다.

미가 1:8-12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찌어다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찌어다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찌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미가 1장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둘로,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원래 하나이어야 되는데 나누어졌다는 것은 차차 위쪽부터 망할 징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북쪽부터 먼저 망하는데 그 북쪽 나라가 사마리아라고 했습니다. 1장 5절에 사마리아라는 이 북쪽 나라가 누구한테 망하느냐? 앗수르라는 대제국에게 망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부러워하고 우리도 그 큰 나라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선망의 제국한테 도로 그들은 먹히고 만 겁니다.

그다음 차례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나라, 이 유다나라가 이제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망하게 되어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북쪽 나라 망하고 남쪽 나라 망한다, 세상적인 역사에서 볼 때는 그냥 나라 하나가 망한 걸로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그게 아닙니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여기 ‘내가’가 나옵니다. 여기 ‘내가’라는 것은 바로 미가 선지자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미가 선지자가 그냥 말만 하면 되지, 왜 자기가 애통하느냐? 여기 미가 선지자가 북쪽도 망하고 남쪽도 망하는 그 모양새를 나타내는데 여기 세 가지로 되어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벌거벗었다고 되어있고 두 번째는 들개같이 애곡한다, 타조같이 애통한다, 같은 말이죠. 세 번째가 뭐냐 하면 9절에, 상처는 고칠 수 없다.

이 세 가지를 결합해보면 바로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이 노예로 살았던 모습을 지금 미가 선지자가 자기 몸에다가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얼른 보면 나라가 망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 나라가 망하는 모습이 ‘미가라는 어떤 인물이 옛날 애굽 시대 때 서글프게 노예 생활했던 그때 모습으로 나라가 망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나라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라가 없어지면서 미가라는 선지자에게 그 애통과 고통이 다 흡수되고 거기에 다 응집이 된다는 그 말은 세상 나라는 그냥 나라만 망하면 되지만 이 이스라엘 나라는 망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인격체로 인물로 바뀌게 되어있어요. 나라가 망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 망하느냐. 어느 것이 더 근원적이고 더 원형이냐를 보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것은 굉장히 어렵지 않아요. ‘당신이 세운 교회 망하는 것이 애통스럽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십자가 죽은 것이 가슴 아픕니까?’ 이 질문하고 똑같은 거예요. ‘조직체가 함몰하는 것이 가슴 아픕니까?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이 가슴 아픕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십자가 돌아가신 것이 가슴 아픕니까?’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광주의 아파트 39층 외벽 무너진 것이 애통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죄 없이 죽으신 것이 더 가슴 아픕니까?’ 그걸 묻는 거예요.

왜 그렇게 물을 수 있느냐 하면 그 뒤에 9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유다나라가 뭉개지면서 그 뭉개진 것이 어디로 흘러들어오느냐 하면 예루살렘, 하나님이 계신다는 예루살렘으로 모든 파괴성이 무너짐이 그 속에 같이 흘러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이 여기서 일종의 블랙홀 같은 역할을 해요.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집어넣어서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는 그러한 물리적 개념이 블랙홀이에요. 모든 걸 삼켜서 마치 밑바닥 없는 우물처럼 삼켰는데 보니까 시커멓게 아무것도 없는 것. 그 안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다 와해되어버리는 것. 블랙홀 근처에서는 뭔가 잠깐이나마 있음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블랙홀에 삼킴을 당함과 동시에 블랙홀 안에서는 있음이란 흔적도 없이 전부다 ‘어디 있지? 없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있음은 그 있음의 진짜 뿌리를 보게 되면 우리가 몰랐던 어떤 인물이 있었고 인격이 있었고 그 인격 된 분이 세상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다 있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분을 위해서 만들어졌어요. 요한복음 1장 3절에 나오죠. 그분 없이는 이 세상에 만들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분 없었으면 이 세상에 생명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진짜 있다는 것, 있음의 뿌리가 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고통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이 땅에 있다는 것, 인간이 있고 닭이 있고 토끼가 있고 뭐 세상에 별이 있고 땅이 있고 하늘이 있고 모든 있음은 무엇의 표현이냐.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을 표현하는 거예요. 그 아픔을 선지자 미가가 대신해서 미리 아파하고 울부짖고 있는 겁니다.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그 앗수르라는 이방 민족이 북쪽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남쪽 유다로 올 때에 앗수르 제국이 보기에는 그냥 한 나라에 불과해요. 유다라는 한 나라인데 거기에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겁니다. 바로 예루살렘을 건드린 거예요.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하나님이 거기에 거주하십니다. 하나님의 거주지를 그들은 공격해버린 거예요. 누가? 앗수르 제국이.

그런데 앗수르 제국이 남쪽 유다를 쳐들어오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는 그 노정, 여정에 10절에 보면 가드라는 지역이 나오고요. 그다음에 베들레아브라라는 지역이 나오고 사빌이라는 지역이 나오고 그다음 11절에 사아난 지역이 나오고 벧에셀이라는 지역이 나오고 12절에 마롯이라는 지역이 나오고요. 13절에 보면 라기스 지역 나오고 가드모레셋이 나오고 여러 가지 지명들이 나와요.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이 지명들은 유다나라에서 기능을 하는데 어떤 기능을 하느냐 하면 예루살렘의 의미, 예루살렘이 갖고 있던 하나님 보시기에 역할, 그 취지에 도달하기 전에 그 경로에서 예루살렘의 취지를 가지고 미리 마중을 나오는 남쪽 유다나라의 지명들이에요.

가드 따로 있고 예루살렘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가드라는 지역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과 관련성이 있어요. 이게 연관이 있어요. 가드라는 게 옛날에 사울과 아들들이 죽었던 곳이거든요. 늘 승리해서 땅을 차지했던 이스라엘이 블레셋이라는 나라에 그 낭패를 당하고 패배를 당했을 때 이스라엘 왕이 전사한 곳이 가드에요.

그래서 가드가 무너졌다는 것은 유다 나라 이스라엘에 불길한 징조가 제일 생생하게 예루살렘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그 생생한 징후를 유다나라 최전방에서 먼저 감지하는 감지장치가 가드에요. 이 가드 무너지면 예루살렘은 곧 무너진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가드에다가 “도무지 호곡하지 말찌어다” 이 말은 가드를 지금 블레셋이 접수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앗수르가 지금 가드를 치면서 예루살렘 친다는 이야기를 가드나 그쪽 근처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이 알았으면 얼마나 그들은 신이 났겠느냐 말이죠. ‘역시 뭐 이스라엘도 유다나라도 여호와가 지켜준다면서 아무것도 아니네.’ 하고 신나한단 말이죠.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이 함께하는 백성이 망하는 꼴을 보고 이방민족이 좋아하는 그 자체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으로서 가슴 아픈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호곡하지 말라는 말은 그 지역도 결국은 접수 당한다,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차례차례로 멸망하면서 마지막에 예루살렘까지 곧 도달하게 되어있어요. 물론 예루살렘은 앗수르한테는 멸망하지 않고 그다음에 나오는 제국인 바벨론한테 망합니다만 그 당시 미가 예언에 의하면 이건 뭐 풍전등화죠. 예루살렘이 곧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다음 나오는 베들레아브라는 이 지역의 이름은 ‘먼지의 집’이라는 뜻인데 이 먼지의 집이 티끌에 굴렀다는 것은, 망했어. 망했어. 우리는 건질 것 없어. 티끌이 뭐 건질 게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살 이유도 없고 희망도 하나도 없어.’ 그것을 예루살렘 정복되기 전에 먼저 앞당겨서 앗수르 침략 경로에서 그걸 미리 보여주라 이 말이죠. 온 나라가 지금 슬픔입니다.

그리고 여기 11절에 나오는 사빌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잘 살았어요. 번화가에요. 서울의 강남 정도. 화려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곳, 모자람이 없던 그들이 어떻게 되느냐? 그렇게 자랑질하던 그들이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찌어다” 전부다 도망치고 피난하기 바쁘다. 그 잘났던 것, 한꺼번에 전부다 놔두고 불쌍한 모습으로 뛰쳐나가는 거죠.

그다음에 사아난 거민은 너무 겁이 나서 나오지도 못하고요. 모두 그 근처인데 벧에셀이라는 곳은 일종의 비상 도피할 수 있는 곳인데 그곳마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다.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보통 난(亂)이 일어나면 거기로 피해야지, 그런 데가 있거든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비슷한 곳. 그것조차 소용없어요. 앗수르는 그냥 인정사정없이 밀고 들어오는 거예요. 다 망해버렸어요.

그다음 12절에 마롯도 예루살렘 근처인데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그들은 걱정 가운데서 그냥 복만 바랄 뿐인데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재앙이 드디어 앗수르라는 것을 앞장세워서 예루살렘까지 이제는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는 미가가 우리는 이미 끝났다는 모습으로 옛날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면서 결국 우리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자기의 인격적인 모션으로서 평소의 생활방식으로서 자기가 그것을 애곡하면서 울부짖으면서 우우우~ 이렇게 울부짖으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옷도 제대로 못 갖추고.

자, 이러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거주하는 예루살렘까지 이렇게 망하게 하시는가?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끝까지 예루살렘이 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기능은 바로 이런 식으로 완료시키는 방법을 쓰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이 블랙홀이에요. 블랙홀이라는 말은 모든 고물들을 다 끌어 모아요. 고물들을 끌어 모아가지고 ‘옛집 다오. 새집 줄게.’ 하는 교체기능이 일어나는 하늘나라의 행정실? 물론 행정실장도 있긴 있다마는, 하늘나라의 행정실 또는 하늘나라의 사무처, 그 역할을 예루살렘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음에 처한 그것. 죽음에 처한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결집시켜요. 예루살렘은 블랙홀이니까. 기존에 살고자하는 것들은 거기다 다 집어넣어서 거기서 없애버립니다. 없애버리고 그 예루살렘이 망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예루살렘, 진짜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흐르는 천국의 나라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그 과정에 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앗수르 제국이 인정사정없이 막 칼날로 모든 일가친척들부터 가진 재산들 전부다 몰살하니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망했다고 하는데 원래 이스라엘은 망해야 돼요. 그 이유를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약이라는 것은 세상에서는 병이 들고 그다음에 약을 먹잖아요. 하늘나라의 약이라는 것은 약의 효능이 뭔지 보여주기 위해서 병이 나중에 나야 돼요. 감기약이 하나 만들어졌으면 감기약의 효과, 그 감기약 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감기 들어야 돼요.

셀로판지에다가 그냥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려놓고 이 셀로판지에 그린 선으로 된 그림, 셀로판지는 투명하잖아요, 이 선에 맞는 사람을 일부러 골라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는 곳이 예루살렘이에요, 거기에 하나님의 성전이 계시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스스로 죽고 죽은 데서 사흘 만에 살아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연속적인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 일에 지금 이스라엘이 말려든 거예요.

아래층에서는 죽음이 들어가고 위층에서는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input 죽음, output 생명 되는 거예요. 밑으로 들어가서 생명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밑으로 들어갈 때 그냥 죽으면 안돼요. 그들은 예루살렘의 취지와 의미를 살리는 쪽으로, 망함으로써 새롭게 아는 방식으로 자기 죽음을 맞이해야 돼요.

이걸 더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잖아요. 미가 선지자는 하나란 말이죠. 그럼 다수는 뭐냐. 이스라엘에는 미가 선지자가 있어요. 남쪽 북쪽 다 예언합니다. 그러면 전체 이스라엘 인구가 많더라도 그 개개인은 하나님께서 쳐다볼 의미가 없고요. 지금 하나님의 신이 임한 미가 선지자에게 어떠한 모션, 어떤 모습이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미가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미가 선지자에게 일어났던 그 표현이에요. 하나님 일의 표현.

그럼 다수는 어디에 모여 집결되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에 집결되어야 돼요. 파괴되고 멸망하는 이스라엘 역사 자체는 미가라는 한 인격의 아픔으로 집결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다수는 1인이 되고 그 1인이 완성이 되면 완성된 1인, 예수님이죠, 그 완성된 1인에서 새로운 다수가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확대되는 거예요.

확대되게 되면 어떤 형상일지 제가 상상해봤어요. 깜깜한 밤, 푸른 잔디밭에다 깜빡이는 전구를 쫙 깔아놔요. 전선으로 연결해서 쫙 깔아놓고 위에서 스위치를 올려버리면 그 깜깜한 잔디밭에 반짝반짝반짝 반짝이는 전구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있는 거예요, 하나의 점으로서. 그것은 밤에만 보여요, 밤에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을 밤으로 만듭니다, 밤. 깜깜한 밤으로 만들어요. 밤으로 만들어놓고 예루살렘과 연계된 사람, 예루살렘과 의미 있게 연결된 사람은 그들이 하나하나 망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망하더라도 그 망함의 연결망을 한번 추적해보자. 그러면 단 한분의 망함과 한분의 죽으심과 한분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생명, 그 생명을 깜빡이는 형식으로 흩어져있는 전구를 통해서 표현해주는 것, 이게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모양새입니다.

그렇다면 아래층에서 죽음이 들어가고 이것이 생명으로 바뀌려면 여기에 어떤 특수한 장치가 있어야 돼요. 그 장치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의 원리를 그대로 사용하십니다. 창세기 2장의 특징은 나와 너가 없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나와 너가 없어요. 거기 두 사람 있잖아요? 그거 두 사람 아니에요. 네가 나고 내가 나다.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 두 육체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너, 나가 성립 안 되어있습니다. 거기에 너, 나는 없어요.

너, 나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넘어가게 되면 “저 여자가 먼저 따먹었습니다.” 하고 아담의 자아에서 타자가 발생돼요. ‘남’이라는 것이 발생돼요. 남이 발생된다고요. “수요일에 같이 오셨습니까?” “아니요, 혼자 왔어요.” ‘같이 왔습니까, 혼자 왔습니다’ 이 말이 이미 그것은 하나가 아니에요. “나 오면 같이 온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게 창세기 2장이에요. “나는 왔는데 집사람은 안 왔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입장에서는 창세기 2장 이게 말이 안 되죠. 너는 너고 나는 나거든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는 방식과 같으면 너도 살아있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다수를 죽이기 위해서 모두 다 죽은 자로 만들어버려요. ‘나는 나고 너는 너다’에 뭘 보태느냐 하면 ‘나도 죽었고 너도 죽었다’. 죽음을 뒤에다 집어넣는다고요.

너도 이 땅에서 울 수밖에 없고 나도 울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미가에게 있었던 애통함을 확대시켜버리면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이 어둠 속에서 전부다 똑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망한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없어요.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 비교 경쟁하는 것은 나는 나고 너는 너라고 따로 구분 짓기 때문에 서로 경쟁과 비교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전구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전구 하나하나의 불빛이 원초적인 한분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이고 구약에서는 그게 예루살렘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이 파괴되잖아요. 멸망하잖아요. 예루살렘의 전구 전선이 끊어지면 모든 것도 마땅히 다 끊어지는 거예요. 그럼 예루살렘, 이스라엘을 치는 앗수르도 죽은 자이고 침을 받고 멸망당하는 이스라엘도 죽은 자이고. 그게 예루살렘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금 하시려고 하는 일입니다.

그럼 나는 없고 너도 없다면 무엇이 있느냐. 신랑이 있고 신부가 있을 뿐이죠, 그때는. 창세기 2장 보세요. 아담 있고 하와가 있지만 남자 있고 여자 있지만 그 남자, 여자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남자 더하기 여자가 있어야 이게 한 몸이 된다고요. 예수님은 신랑이고 성도는 신부. 그걸 목표로 하는 거예요, 지금 새로운 예루살렘은.

너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따로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전부다 예수님이라는 한 인물 속에 지체로서 한 인물 속에 신부로서 다 포함이 되는 그런 상황으로 되어야 이것이 생명의 output이 되는 겁니다. 생명 자체가 생산돼요. 왜? 창세기 2장이니까요. 창세기 2장에서는 선악과도 살아있고 생명나무도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하고 생명나무가 분리돼서 선악과는 이미 따먹어서 인간 속에 있고 나머지 생명나무는 따로 근처도 못 오도록 만들어버렸죠.

창세기 2장에서는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그 죄, 그 죄에 대한 책임도 충분하게 하나님께서는 얻어냈고. 왜?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니까, 창세기 2장에서. 창세기 2장에서 주님께서 신랑이 신부의 선악과 따먹은 죄를 충분히 담당했기 때문에 선악과의 취지도 “정녕 죽으리라”는 취지도 완료를 했고 그걸 마무리 지었고 그다음에 생명나무도 마무리 짓는 거예요. 생명나무를 따먹으라 했으니까요.

그래서 죽은 것이 들어오고 죽은 것이 생명으로 바뀌는 그 장치 안에서는 죽음조차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음조차도. 내가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준비한 예수님의 인격과 통하는 그 죽음에서는 죽음조차도 ‘복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 믿고 죽는 것이 복 있는 자에요. 복이라는 것은 거저 줬다 이 말이죠. 초대장 거저 받은 거예요, 초대장.

예수 믿었습니까? 그럼 이제는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왜? 죽음조차도 거저 주시는 은혜니까요. 뭐 그때까지는 고생을 좀 해야 되겠습니다만 그러나 때가 되면 주께서 또 부르실 거예요. 세상에 죽음조차도 은혜가 된다는 사실을 기존에 다수의 죽음 안에서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자기 것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8장 21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8장 21-22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여기에 두 가지 죽음이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죽음, 그 죽음은 예루살렘과 관계없는, 예루살렘과 통하지 않는 예루살렘의 블랙홀로 초청받지 않은 죽음이에요. 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어 있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채로 태어난 거예요. 살았다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귀신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십자가, 주님과 생명과 관계되어 있는 성도의 죽음은 뭐냐. 살아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귀신들을 구경하고 있는 귀신. 그러니 양쪽 다 귀신이에요. 양쪽 다 이미 죽은 거예요. 그래서 이미 죽은 거거든요. 죽었는데 예루살렘, 예수님의 인격, 십자가의 인격, 생명과 트랜스, 교체되는 행정실 안에 있을 때는 죽음과 삶이 겹쳐져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이런 내용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습니까. 너는 땅에서 죽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겹쳐져 있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게 죽었는데 이미 죽었지만 그 죽음 안에 생명이 같이 겹쳐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라 할 때는 어떤 관점인가? 너는 죽었다, 가 아니라 너는 겹쳐져 있는 생명의 관점으로 너 자신을 보라 이 말이죠. 저들이 죽은 것처럼 너도 죽는 게 맞지만 너에게 저들에게는 없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미 생명이 일찍 마중 나온 거예요.

미가 선지자하고 똑같은 거예요. 미가 선지자가 주님의 아픔을 같이 품었기 때문에 미가 선지자는 아파하지만 미가 선지자 속에는 예수님의 성령이 함께 있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11절 말씀처럼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의 성령이 함께 있는 거예요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게 오늘날 성도의 위상입니다. 겹쳐져 있는 거예요. 중첩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십자가 또는 예루살렘이라 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결국 이 세상의 죽음에 쫓겨서 진짜 백성들이 어디를 지켜봐야 되느냐 하면 ‘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 예루살렘을 하나님 스스로 자기 계시는 곳을 폭파시키는가, 그 폭파시키는 의미는 뭐냐’ 그 의미에 주목한다면, 다시 말해서 미가 선지자의 말에 대해서 관심이나 있고 신경이나 쓴다면 그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말씀을 통해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마중 나왔다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망하는 것이 제 코스를 가고 있는 거예요, 지금.

각자 나는 나밖에 없다 할 때는 개인적 죽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분, 미가의 고통스러운 아픔이 울부짖음이 있을 때...... 아, 이게 모든 인간이 너, 나, 너, 나 하는 구분 자체가 아무 의미 없구나. 동일하구나.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죽음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너, 나의 차이가 없는 거예요. 괜히 우리는 나 하나 지키려고 남하고 차별 나는 생활하려고 그 부질없는 애를 쓴 거예요. 인간이 죽는다는 점에서는 다 똑같은 겁니다.

나이 많은 분들이 젊은 사람보다 유리한 점이 뭐냐 하면 장점은 자아가 갈수록 부서진다는 거예요. 부서지고 구멍이 많아요. 그만큼 세상 일에 대해서 덜 충격적이고 덜 아파요. 젊은 사람은 조금만 자기 뜻대로 안되면 울부짖고 난리하고 막 울잖아요. 꼬마여자애가 백설공주 띠 안 사준다고 울고 뒹굴고 하잖아요. 그게 그렇게 아프지만 나이 팔십 넘은 할머니가 백설공주 띠 안 사준다고 구르면 백프로 치매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를 때는 자꾸 딱딱한 고체가 되어 있어요. 고체가 되어 있다가 나이 육십 넘으면 흐물흐물 액체가 되어 있다가 나중에 죽을 때쯤 되면 귀신처럼 기체가 되어가지고 빈 구멍들이 많아요, 빈 구멍들이.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님이 뭐 하자고 해도 하지도 않아. 너 해라. 난 연기 같은 존재다. 뭐 이래가지고.

옛날 2002년도에 <집으로>라는 영화가 있죠. 유승호 나오는 <집으로>라는 영화인데 그 영화에 보면 애가 장날에 갔다가 후라이드 치킨이 갑자기 눈에 띄었는 모양이라. 그런데 할머니가 말을 못하니까 할머니한테 후라이드 치킨 해달라는 표시하려고 날개하고 털 있고 이렇게 몸짓으로 하니까 할머니가, 오케이 오케이 접수했어. 그래서 할머니가 닭을 사와가지고, 자기는 후라이드 치킨을 바랬는데, 백숙을 해준 거예요. 애가 하는 말이 “누가 물에 빠뜨렸어?!” 왜 그걸 물에 빠뜨려가지고... 바삭바삭한 후라이드 치킨 해달라 했는데 백숙을 만들어놨단 말이죠. 할머니는 백숙했다고 뭐라 해도 그건 뭐 신경도 안 써요. 왜? 기체니까. 거의 귀신 됐으니까.

젊은 사람들은 오직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몰라요. 부모 보기에 아무렇지 않은데 자식들은 굉장히 심각한 거예요. 부모가 자식한테 뭐라고 하면 “그건 됐고요. 날 건드리지 마요.” 영어로 하면 “유 오케이. 벋 돈 터치 미.” No touch. 노터치. 누구한테 배운 영어에요. 날 건드리지 마라. 특히 중2 사춘기가 늘 그래요. 자기는 고체이기 때문에 자기밖에 몰라요. 자긴 앞으로 살날이 많다는 겁니다. 자기는 귀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귀신 새끼죠. 욕하는 거 아닙니다. 욕할라 하면 뱀 새끼 정도 되어야 되는데 다른 순한 말로 하면 귀신 새끼에요. 자기가 귀신이라는 걸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주께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하나의 개인으로서.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게 일방적인 하나님 일이에요. 우리보고 의논한 적 없어요. 창세기 3장에서 창세기 2장으로 돌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 작업이에요, 자기 작업. 죽은 것들을 블랙홀로 다 끌어 잡아당기고 그 아무것도 없는 블랙홀에서 생명이 나오는 이것은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순전히 주님 자신의 일이에요.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걸 한창 젊은 20대 자식한테 이야기하면 알아듣겠습니까? ‘유 오케이. 벝 노터치 미.’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영어 말이 안 되죠. 안되지만 알아서 새겨 들으세요.

젊은 사람들은요. 밥 먹고 잠자고 친구 만나는 이것이 당연한 줄 알아요. 절대로 이게 당연하지 않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군대 앞에서 밥 먹고 잠 잘 자고 친구 만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에요. 지금 벌거벗은 채 도망쳐야 돼요. 울어야 돼요, 죄 가운데. 아무것도 건질 것 없이 도망치기 바빠야 돼요. 그 모습이 오늘 미가 1장 8-12절에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평온하게 살았고 하나님이 지켜줬으니까 이렇게 행복해서... 하나님 고마워요, 하다가 왕창 쳐들어온 거예요, 인민군들이. 북한군들이. 북한군들이 쳐들어올 수도 없죠. 자기들 밥벌이도 바쁜데 뭘 쳐들어오겠어요.

파괴되는 지형과 그리고 그 파괴의 목적은 예루살렘. 지형을 통해서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의 개인으로 집어넣으면 출생에서 파멸로. 죽음이 아니에요. 파멸이에요. 죄 값이라니까요, 이게. 세상적인 죽음은 죄 값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죽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노예 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옛날 애굽에서 노예 되었다가 지금 이 미가가 이야기하는 약속의 땅까지 오게 되었잖아요. 이번 여호수아 할 때 우리가 봤겠지만 여호수아 32장 24절, 제일 마지막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개를 주고 산 땅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세겜에.

그런데 창세기 50장 25-26절에 보게 되면 요셉이 죽어가면서 하는 말이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창세기에서 요셉이라는 개인이 하나의 인물이에요. 다수가 아니고 하나의 인물이란 말이죠. 오늘 본문도 그래요. 지금 이스라엘이 망하고 있는데 미가라는 한 인물이에요. 다수의 이스라엘이 망하는 의미가 미가 선지자의 변신된 자기의 모습, 생활 모습, 갑자기 옷을 벗고 울부짖는 이상한 조짐, 그 하나의 인물에게 일어난 그 변화가 예루살렘의 지형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 미가의 모습은 마치 지금 노예생활하고 있는 그 노예로 다시 되돌아간 모습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이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요셉이 출애굽 이전이기 때문에 그냥 애굽에 살고 있어요. 애굽에 사는데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가지고 지금 우리가 비록 애굽이라는 남의 땅에 살고 있는 외인, 이방인이지만 내 뼈를 그냥 여기 두지 말고 데려가라. 그러면 우리 이스라엘의 운명은 내 뼈가 앞장서서 선도할 것이다. 뼈가 네비게이션이에요. 뼈가 이끄는 대로 그러니까 다수는 한 사람에게 이끌림을 당해서 드디어 여호수아에서 땅을 정복했을 때 여호수아 32장 24절에 아버지 야곱이 돈 주고 미리 사놓은 그 장지에 요셉의 뼈가 세겜에 묻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는 뭐냐.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이후에 다들 자기밖에 모르는 개인주의밖에 모르는 이 다수를 주님께서는 다시 창세기 2장에 오직 주님에게만 종속된 주님의 의와 거룩을 반짝거리는 그 조그만 전구, 꼬마전구의 불빛으로 관계망을 형성하는, 어두운 밤에 반짝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인공이 아닌 주님만 주인공이 되는 그 이스라엘로 주께서 하시는 일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망한다는 의미도 모르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나의 밀알이 되어서 죽고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한 명이 죽어서 다수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체가 열매에요. 본인이 사라진 열매에요. 본인은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인데 생명에 종속되는 생명의 열매로써 우리 성도는 이 땅에 중첩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육은 죽어야 되죠. 아니 죽어야 되는 게 아니고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벌써 죽은 귀신이에요. 빼꼼히 관 열고 너는 교사해라, 해가지고 심심하니 뭐 하노, 교사나 하다 가야지. 너는 애 셋이나 놓고 포기해라. 뭐 심심하니까. 관은 열었지, 잠시 크루즈 여행하는 거예요. 항구에 배는 세워놨지, 배 떠날 시간은 남아있거든요. 그럼 홍콩에 있으면 홍콩 구경 한 10시간 하고 다시 배에 귀가해서 붕~하고 떠나면 되는 겁니다. 떠날 때 뭐 우우우~하고 울부짖다 떠나든지 그건 관계없어요. 빼꼼히 관 열고 쭉 가면서 코로나 음성이지만 걸리고 오너라, 뭐 이런 식으로. 음성반응 검사 맡고 오너라.

이 땅은 그냥 귀신이지만 귀신이 아니고 결국 우리는 이미 생명책, 주님의 생명책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서 이 땅의 삶을 허락했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어느 위치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일 시키시는지를 발견하게 해주시고 이 세상 어두움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생명에만 구애받고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