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미리 연락

아빠와 함께 2022. 1. 20. 09:56

미리 연락 

2022년 1월 19일               본문 말씀: 미가 1:6-7

(1:6)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지대를 드러내며

(1:7) 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그 음행의 값을 다 불사르며 그 목상을 다 훼파하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선지자는 지적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이런 선지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비록 가혹한 지적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미리 찾아온다는 점에 감격하게 됩니다. 즉 늘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 뿌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형성된 성도입니다.

반면에 선지자가 말씀을 가지고 어떤 지적을 하면, 그 말씀이 듣기 싫어서 얼굴을 피하는 사람은 관심사가 엉뚱한 곳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계속 보내시는 취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적을 받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있는 자를 찾습니다. 선지자의 책망을 감사하는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연락을 하시는 이유는, 결국에는 모든 인간이 이 선지자의 말씀에 의해서 심판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중심을 보십니다. 바탕과 뿌리와 근본을 후벼내십니다. 이 상황이 오늘 본문에서는 ‘지대가 드러난 사마리아의 형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방민족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제국들은 대단한 소유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많은 가지고 있고 넉넉하게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의 뿌리를 주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크게 번성한 외형 규모에 감탄할 것이 아니라 그 큰 번영의 뿌리를 봐야 했습니다. 오늘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이방민족과 그 이방민족을 부러워하는 이스라엘의 뿌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십니다. ‘기생의 값’이라고 말입니다. ‘값’이란 가치입니다. 노동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기생이란 직업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23:18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즉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과 무관한 재물은 하나님의 전 앞에 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언약과 무관함’이란 곧 이방민족이 살아가는 방식을 뜻합니다. 그들은 언약이 존재 바탕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면 안될 성질을 토대로 하여 살아갈까요? 신약에 와서 밝혀집니다. 골로셔서 3:5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곧 우상이란 인간의 탐욕이 바탕이 되어서 등장해서 섬기는 되는 신(神)이라는 겁니다.

이방민족의 삶의 바탕에는 욕망이 깔려 있어 매사가 그 욕망의 기초에서 발현되고 구현된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값’이란 자신의 소유성으로 자신의 바탕으로 깔아놓았다는 말입니다. 기생이란 창기와 같이 이방민족들의 생활상에 간음하듯이 일치된 감정으로 동화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우상을 도입한다는 것은 이방민족과 간음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잠언 2:16-
19에 보면,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호린다’는 말이 나옵니다. 즉 아무리 기초가 하나님의 언약에 두고 나타난 이스라엘이라도 외형적으로 이방민족은 얼마든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미리 연락을 주어서 이스라엘의 뿌리와 근본을 주목하도록 하십니다.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들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세상을 살아갈까요?

그들에게는 일단 궁극적인 죄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총괄해서 죄와 의를 규정한 자격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인간이 근원적으로 죄인이요 어두움임을 지적하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여버렸습니다. 심판주를 없애버린 겁니다.

이로서 궁극적인 죄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간들의 생각이 노출되어버렸습니다. 이 세상은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수없는 자, 불운한 자들만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죄를 의식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발전하고 진화하는 것이 선이요 의로운 일이라고 믿고들 있습니다. 소유가 줄어드는 것은 악이요 죄라고 여깁니다. 

발전한다는 것은 바로 소유된 것이 풍부하고 늘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것이 죄요 부한 것이 선이 되고 약한 것이 죄요 강한 것이 의가 된 세상입니다. 선과 악을 최종 판단자는 본인 스스로 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뿌리에 언약이고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3-5에 보면, 가룟 유다가 취한 태도가 나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것은, “내가 지은 죄는 내가 책임지고 떠안고 떠나게 해달라”는 겁니다. 즉 끝까지 가룟 유다는 자신의 소유성을 포기 못합니다. 바탕 자체가 우상숭배라고 간주되는 탐심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탕에 언약이 없는 자는 아무리 겸손하게 살아도 그것 조차 시건방진 태도입니다.

탐심으로 시작된 삶은 그 공허함은 메우기 위해 날마다 새로운 소유를 구걸하고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저주받은 돌무더기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는 이점을 지적하는 겁니다. 뿌리에 관심을 두고 지적하는 선지자는 미가 말고 에스겔 선지자도 있습니다.

에스겔 16:22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네 어렸을 때에 벌거벗어 적신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이렇듯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지적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역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람들만의 영역과 확연히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관심사입니다. 아무리 선지자들로부터 지적을 받고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말씀으로부터 책망을 받더라도 여전히 그 복음적 말씀에 반응을 나타나고 그쪽으로 관심이 쏠려 산다면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성도입니다. 성도의 믿음은 마치 이런 겁니다. 어떤 서툰 택배직원이 아침 11시에 이미 물건을 배달해놓고서는 오후 세 시에 문자로 “곧 물건 배달될 겁니다”라고 통보하는 점을 둘 다 같이 연관시켜 보고 있는 마음입니다.

즉 이미 예수님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피’로 용서를 받아놓고서, 그후 계속해서 밀려오는 말씀을 지적을 기꺼이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바로 이 마음 자세가 신앙입니다. “주님, 계속해서 우리의 뿌리부분을 책망해 주옵소서”고 고대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미리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소유에 있지 않고 책망하시는 말씀를 통해 전달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강-미가 1장 6-7절(미리연락)2201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1장 6-7절까지입니다.

미가 1:6-7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지대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그 음행의 값을 다 불사르며 그 목상을 다 훼파하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사마리아 지대를 드러내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 관심사가 그 인간의 겉으로 드러난 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탕에 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뿌리 되는 그 바탕과 그 위에 올려져 있는 것과 동질의 것이 되어야 되는데 인간은 그럴싸하게 남들에게 내세우는 그것을 거창하게 해놓고 그 바탕 뿌리는 은근히 강력하게 숨기는 그런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는 안 통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그 지대를 드러내는데, 그 바탕을 드러내는데 그러면 그 바탕을 감추기 위해서 쌓아놓은 그것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여기 7절에 보면 ‘기생의 값’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럽게 네가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기생의 값에 대해서 7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그 새긴 우상을 다 파쇄하고 그 음행의 값을 다 불사르며 그 목상을 다 훼파하리니” 기생의 값으로 수립한 너희들의 그 내세울 것은, 그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너희에게 우상이 되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탕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뿌리를 주목하는데 인간들은 그럴싸한 겉멋만 드러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너희에게 우상으로 간주 되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너희들의 신처럼 간주되어서 거기에 인생을 매진했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지적, 다른 민족한테는 이런 지적을 하지 않고, 바로 미가가 이스라엘의 선지자에요, 선지자로 하여금 이런 지적을 받게 한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미리 연락받은 일이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선지자가 와 가지고 ‘너 이렇게이렇게 문제 있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한테 지적받은 것을 미리 연락받은 거예요. 지적받은 것에 대해서 섭섭해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았다는 이 사실이 놀라운 복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선지자의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에요. 어떻게 뭐 잔소리를 듣던, 비난을 듣던 간에 그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진다는 것은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리 연락을 줬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그 이방 민족과 다른 특징들을 보게 되면 어디서 감사해야 되는가가 드러나지요. 지적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껏 하나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일단 감사하고 지적은, 그다음에 지적을 받으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때려주세요.’ 이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듣게 되면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내용이 ‘우상, 기생의 값’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우상이라 하는 것은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신을 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말씀드리는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렇게 묻는 거예요. ‘너희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적을 하든 때리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그 자체가 아무리 하나님한테 얻어맞아도 이미 그것은 구원받은 상태에서 얻어맞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미가, 오늘 읽었던 본문을 누구한테 이야기를 해보세요. 그 사람은 이렇게 하면 “나와 상관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바로가 하는 유명한 말이 있어요. 세상의 정체를 단순하게 단출하게 줄여서 하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 바로가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호와가 뉘고~? 여호와가 누구지?”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면 바로 당신의 관심사가 어디~? 당신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관심이,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얻어맞고 지적을 받고 잔소리를 듣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관심이 주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복음에 관심이 없으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리고 그걸 오늘 본문대로 하면 그게 바로 창기 기생이에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보고 너 창기야, 너 기생이야, 우상을 섬기는 인간들과 똑같아, 라는 지적을 받더라도 바로 그 지적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구약성경 자체가 율법적이니까요. 율법을 주시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한테 지적을 받더라도 나의 관심사는 우리 주님밖에 없어요, 라는 그런 연락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연락 관계가. 그러니 이 미가에서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욕설을 해도 미가를 선지자로 인정한다는 그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의 바탕과 나의 뿌리는 아무리 내가 이 땅에서 주의 말씀대로 살지 않더라도 이 뿌리와 바탕 자체는 하나님의 연락체제가 원활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에요. 궁극적으로 관심사가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이고 말씀에 가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관심이 가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은 성도입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미가 선지자가 이러한 아주 차가운, 아주 세차게 몰아붙이는, 욕설에 가까운 이러한 지적을 하더라도 이걸 흔쾌히 고맙고 감사하게 받을 수가 있습니다. 자, 일단은 우리가 이런 지적을 고맙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고 치고 ‘고맙습니다. 오늘 지적해주셔서’ 하는 마음이 있다 치고 그렇다면 오늘 이 미가가 지적한 내용에 들어가봐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그것이 어떻게 기생의 값이 되고 창기의 값이 되고, 7절에 보면 ‘음행의 값’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음행의 값이 되고 우상 섬기는 것이 되느냐? 이 문제부터 설명을 해 봐야 됩니다. 이걸 우리가 알아봐야 됩니다.

신명기 7장 2절과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 2절에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했어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 빼놓고 나머지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마음의 태도입니다. 이걸 이스라엘한테 이야기를 했거든요.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자 그 말이지요. 같은 인간끼리 친하게 지내자, 이런 것 말고 우리 인간의 안목 말고 하나님의 안목, 하나님의 시선이 바탕이 될 때, 그것이 이스라엘의 뿌리가 될 때 3절에 보면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아예 상종도 하지 말고 진멸해 버리라는 겁니다.

방금 2, 3절을 봤는데요. 신명기 7장 16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왜 이방 민족의 신을 섬기지 말고,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아주 없애 버리라, 하는 이유가 뭐냐? ‘네게 올무가 된다’는 바로 이점에 있습니다. 올무가 된다는 것.

올무가 된다는 말은, 이스라엘 빼놓고 다른 민족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방식이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는 불쌍히 여김 받을 대상도 안 되는 진멸의 이유가 되는 겁니다. 이방 민족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는가? 거기서 기생이라는 말, 기생의 값, 같은 뜻으로 우상 섬김, 이렇게 보는데 이미 신명기 23장 18절에도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창녀가 번 돈은 하나님 앞에 헌금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창녀가 번 돈도 그렇고, 그다음에 무슨 돈이냐, 개 같은 자의 소득, 개 같은 자의 소득은 하나님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왜? 하나님의 전은 이스라엘의 바탕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 이것은 이방 민족, 이스라엘이 상종하지도 말아야 될 이방 민족이 평소에 그들이 이 세상 살아가는 방식과 일치되는 식으로 돈을 벌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는 것으로 파악이 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도대체 이방 민족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 그것은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을 옆에 둬서 나란히 비교하고 대조해 보면 확 드러납니다. 잠언서 2장 16-19절에서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이방입니다, 이방 민족,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 민족의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는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자, 생명 길은 이스라엘에게 있고요,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이방 민족은 생명 길로 들어설 수도 없는 사람이 나름대로 이 땅에서 밥 먹고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 그게 바로 창녀의 짓이고 기생의 짓이고 그게 음녀의 짓이고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거지요. 하나님의 언약과 아무 상관 없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거기에 유혹을 당한다, 호림을 당한다, 유혹당하는 요소가 이스라엘에게 계속 있어 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이스라엘과 이방을 비교해볼 때 이스라엘은 그 바탕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말씀이라 했습니다. 뿌리가 바탕이. 그것부터 시작해요.

그러면 이방 민족은 하나님의 요소가 자기에게 뿌리로, 바탕으로 이게 안 들어가 있어요. 빠져 있어요. 빠져 있으면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욕구, 욕망이 내 뿌리와 내 바탕을 장식하고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바로 그걸 우상숭배라 해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되어 있어요.

신약에 오면 우상숭배가 부처 섬기고 돌부처나 갓바위에 빌고, 이게 우상숭배가 아니고 탐심이 너의 뿌리고 근본이 되어 있다면 너는 이미 시작부터가 우상 숭배자로 시작을 한다는 겁니다. 그 사실을 이스라엘이 없다고 치고요, 이 땅에 이스라엘이 없다고 치고 이방 민족들만 이 있다면 인간이 자기가 되고 싶은 욕심과 탐심 욕망으로 살아가는 이것이 아무런 허물이 되지 않아요. 상당히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사람 사는 모습이 이게 정상적인 모습이거든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 빼놓고 나머지 모든 민족에 이게 오염되었고 전염되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내 욕심대로, 내 욕망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이게 뭐가 나쁘냐,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오기 전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오게 되면 이스라엘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된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요, 그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 그분을 죽여서 없애버렸어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왔습니다만, 예수님이 와야 그들이 우상으로 드러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거짓된 신을 섬긴다, 내가 욕구에 맞는 신을 내가 선택한다, 이게 왜 잘못이냐, 이게 뭐가 잘못됐느냐, 내가 섬기고 싶은 신을 내가 맘대로 선택하는데, 이게 내 맘이고 내 욕망인데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 라고 따지는 이것이 죄 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죄냐 의냐’를 판정하실 분인 심판주를 인간이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은 죄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죄라는 게 없어요. 다만 불행한 사람이 있고 재수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죄는 없고 진화만 있어요. 진보만 있고 발전만 있어요. 이 세상에, 초등학교에도 죄는 없고요, 중학교에도 없고, 고등학교에도 없어요. 대학교 가도 없고, 사회에 나가도, 직장에 가도 죄는 없어요.

발전 못 하고 퇴보하는 자가 죄인이에요. 그 집단과 가정과 그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왜? ‘죄냐 뭐냐’를 따지는 분을 죽여버렸으니까요. 없애버렸으니까요. 온 천지가 우상 천지로 본격적으로 제대로 잘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이런 사고방식으로 했던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이 사단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이 가룟유다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5절에 보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 가룟유다가 굉장히 양심적이에요. ‘내가 스승을 팔아먹다니 이것은 정말 내가 잘못한 것이다.’ 깨달아 가지고. ‘가룟유다는 비록 자살하지만 죽고 난 뒤에 아마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이런 기대나 희망을 가질 수 있는데 인간들이 심판주를 없애버렸으니까 심판주 없는 세상에서는 결국 누가 심판주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심판해버려요. 선악 지식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룟유다는 선악 지식에 준해서 내가 지은 죄는 내가 떠안고 떠나게 해달라는 겁니다. 이게 사탄인데요. 가룟유다, 사탄의 생각인데 내가 지은 죄는 내가 책임지고 떠안고 자살해서 장렬한 죽음으로 하든지 해서 내가 떠안고 죽도록 그렇게 용납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상성, 기생의 값, 그리고 이 세상 민족들, 사람들이 살아가는 원칙, 법칙 다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끝까지 자기의 소유성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자기의 소유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소유성을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 직업을 가져요. I have a job. 하나의 직업을 가져버려요. 직업이 있어야 자기의 소유가 계속 유지가 되고 늘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재의 바탕에 뭐냐? 뿌리는 뭐냐? 소유성이에요.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미가가 지적하기를 ‘너희 이스라엘은 기생의 값으로 모았다’는 거예요. 기생 자체가 직업이 된 거예요. 기생이라는 이름의, 창녀라는 이름의 직업이었다는 겁니다. 직업을 갖는 이유는 그 소유성 때문에 자기가 직업을 갖는다, have, 갖는다, 뭔가 내가 갖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가진 그것이 나의 나다움의 출발점이고 시작점이지요. 집에서 빈들빈들 놀면 식구들이 대번 뭐라고 합니까? “나이 서른이나 처먹고 이게 뭐고! 너 오늘부로 집 나가라. 네가 굶어 죽든 나는 모른다. 얼어 죽든 말든 나는 모르겠다. 공부시킬 만큼 공부시켜 줬고 먹여줬는데 아빠 엄마 다 늙었다. 더이상 너 뒷바라지 못 해준다. 이번 설 쇠고 나가라.” 설쇠고 나가라 해놓고는 계속 기어 붙어 있으면 추석 쇠고 나가라, 하고 그다음에는 또 그 다음 해 설 쇠고 나가라, 하고 이렇게 하다가 한 15년 지나버려요.

직업이 없다는 것은 사람 구실을 못한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왜? 소유성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인간을, 상대방을 분석하고분석하고, 제일 마지막에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은 뭐냐 하면, ‘당신 하는 일이 뭡니까?’ 이거예요. “당신 하는 말이 뭡니까?” “노는데요.” 이러면 끝, 가위표, 끝났어.

오늘 본문에 ‘기생의 값’이라 해요. 값, 가치, 기생의 직업의 가치는 그 월급과 수입으로 결정되는 거예요. 그것을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 밑둥치를 후벼 파는 거예요. 왜? 바탕을 주목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바탕을 주목해서 보니까. 거기서 뭐가 나왔느냐? 기생의 값이 나온 거예요.

기생이라는 직업에서 얻었던 그 소유가 이스라엘의 뿌리가 되었고, 근본이 되었고, 기초가 된 겁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고마운 줄 알아야 이런 지적을 받더라도 결국은 마지막에 주님으로부터 이런 미가 이야기를 또 듣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미리 연락받아서 듣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요?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요!

이스라엘 뿌리가 다른 이방 민족과 동일하게 자기 직업에서 얻는 자기의 소유로 자꾸자꾸 쌓아나가니까 그들의 입에서, 행동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그저 자기 소유 자랑질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복음이 안 나오는 거예요. 말씀이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 자기 자랑거리만 나오다 보니까.

결국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살 것 같으면 이 하나님 계시는 약속의 땅에서 나가라, 이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기생은 얼쩡거리지 말아라. 이 창녀야! 이 기생아! 어딜 하나님 거룩한 곳에 얼쩡거리고 있어. 나가! 여기서 너하고 못 살아. 나가!” 이런 뜻이에요.

인간이 자기 어떤 인식의 범위, 지식의 범위, 사고방식체계의 범위를 넓히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자기 소유성이 발목을 잡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고의 폭을 넓힐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7장 13절에 사람들은 어떤 행렬, 퍼레이드, 행렬을 이룬다는 거예요.

행렬을 이루는데 두 종류의 행렬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가는 행렬이 있고, 어떤 행렬은 사람들이 거의 없는 행렬이 있어요. 바로 없는 쪽이 뭐냐?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그게 바로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

그런데 거기 비해서 대다수가 아무런 어떤 장애물 없이, 의견의 충돌 없이 그저 서로 동의하면서 ‘우리끼리 아무 문제 없지?’ 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단결 지으면서, 합을 이루면서 가는 그 길, 가봤자 뭐 절벽에 차례차례 떨어지는 거지요. 퐁당퐁당, 그냥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그냥 지옥으로!

그게 바로 이방 민족들이 살아가는 그 사고방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생각한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끝까지 지켜야 된다는 책임감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은 지키는 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한테 빼앗기는 자가 필요해요. 그 형식을 다 날마다 빼앗겨 가지고 뭐만 달랑 나타나느냐 하면, 그 바탕과 뿌리가 날마다 확인되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선지자들의 역할이 그 역할이에요.

미가에서는 “너희들이 기생의 값으로 살았기 때문에 나중에 그걸 빼앗아버릴 테야. 그러면 네 뿌리가 드러날 거야. 네 뿌리가 뭐냐? 돌무더기야. 아무것도 없어. 왜? 뿌리부터 기생의 값으로 이방 사람들이 살아가는 행세와 똑같은 행세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 뿌리 채 뽑아버리면 너는 남는 게 없잖아.”

그걸 미가 선지지가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했다면 에스겔 선지자도 못지않습니다. 완전 하나님은 우리가 감추고 있는 우리의 뿌리, 우리의 핵심, 근본, 여기에 대해서 계속해서 그걸 지목하고 쑤시고 들어오는 거예요. 자꾸 하나님 변호하려고 하지 마세요. 자꾸 하나님 변호한다고 하나님이 거기에 맞장구쳐주지를 않습니다.

주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주님께서 어떻게 오시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가 하나의 코일처럼, 구리선처럼, 케이블처럼 있고 그 위에 절연체로 피막, 죄인의 육신으로서 피막한 모습, 그런 구조로 이 땅에 오셨거든요. 안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의 기능이 흐르고 있고, 바깥에는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감아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안에는 피가 있다고요.

왜 그렇게 오시느냐 하면, 인간의 내부에는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어요. 인간이 나중에 죽어버리면 이게 무기물이 돼요. 지난 오후 예배 끝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무기물, 흙이에요. 그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목숨이라는, 생명이라는 피가 인간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썩은 피, 더러운 피죠, 더러운 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피는 먹지 말라, 한 거예요. 왜? 피는 하나님이 손댈 문제에요. 어떻게 손대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 피를 흘림으로써 이 피가 너의 바깥 말고, 네 외형 말고 네 내부를 겨냥해서 일으킨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 그 취지가 다 이룬 것이 십자가, 그 십자가에 흘리신 피는 우리의 중심과 우리의 뿌리와 우리의 바탕을 주목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 끝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홍수가 남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고 돌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면 홍수가 왜 일어나야 됩니까? 집이 얼마나 그럴싸하냐를 보는 게 아니에요. 뿌리가 모래인지 아니면 영원히 망하지 않는 그런 반석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필히 하나님께서 무너뜨리는 일을 아니할 수가 없어요. 결국은 건성으로 지어진 모든 것, 외형적인 것은 다 무너뜨립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을 위해서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는 미가 이야기를 했고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에스겔 선지자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다. 에스겔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나 이스라엘한테 그 핵심, 뿌리, 근본, 시초, 처음, 근본, 바탕, 그것에 주목해서 에스겔 16장 22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 어렸을 때에 벌거벗어 적신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너는 왜 네 주제 파악을 못하느냐, 너는 벌거 벗었다, 그런데 그 벌거벗은 것을 누가 챙겨줬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챙겨준 거예요. 그것도 아름답게 하나님 보시기에 예쁘게 챙겨준 거예요.

그게 에스겔 16장 9절부터 죽 나옵니다.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수 놓은 옷을 입히고……” 친히 하나님께서 갓난아이를 얼추 성장할 때까지 계속 아름다운 소녀로, 예쁜 딸로 키웠다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시온의 딸로 보기 때문에, 예쁜 신부로 보기 때문에 장차 나중에 하나님의 신부감이 되도록 잘 키웠다 그 말입니다.

키웠는데 이 이스라엘이, 이 유다 나라가 옆 나라한테 그만 휘둘리고 말았어요. 옆 나라하고 그만 간음을 해버린 겁니다. 이것은 옆의 나라가, 그 뿌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유다나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뿌리를 주시고 거기서 자라나게 했다는 생각을 못 하고 건성으로 나타난, 그냥 외형으로 나타난 그 강대한 소유성이요……, 이방 나라의 특징이 굉장히 잘 살았거든요. 부자였어요.

그래서 거기에 그 앗수르, 갈대아라고 나오는데 바벨론, 에스겔 16장 27절, 29절, 이렇게 계속 나와요. 앗수르는 대 제국입니다. 바벨론도 대제국이에요. 소유가 많고, 소유가 많으면 권세가, 권력이 센 거예요. 여기에 그만 현혹된 겁니다.

그런데 이방 나라의 특징은 뭐냐 하면, 시건방지다는 거예요. 사람이 소유가 많아지게 되면 시건방져요. 그리고 이것이 또 오염되고 온 세상에 전염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나아가서 그걸 유일한 현실로 봅니다. 자, 현실은 뭐냐? 현실은 소유성, 또는 소유, 이거에 이의 거는 사람은 없어요. 현실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자기 가진 재산으로 살아간다. 여기에 대해서 아니오, 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런 말을 끄집어내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모든 사람이 여기에 동의하는 입장에 있어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죽으신 이유가 뭐냐 하면, 그들의 뿌리와 근본을 지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미가선지자와 에스겔 선지자와 똑같아요. “너는 지금, 너 유대나라 너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의 언약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세상의 이방 라와 다를 바 없는 그 소유성, 재산과 권세와 권력에 합세 되어 가지고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복 줬다고 하는 그것, 바로 너희들이 죄인이다.” 이거 지적했다고 그냥 죽여버린 거예요.

그래서 이 선지자들은 인간들에게 있는 그 피막을 벗겨버려요. 그 안에 있는 케이블 나오지요, 하수구 나오지요, 거기 가스관 나오지요. 그 안을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보니까 오늘 미가의 본질이 뭐냐? 너희들은 기생으로 살아왔다. 다시 말해서 이방 나라하고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런 의식으로 살아왔다. 소유가 있어야 사람답게 산다는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너희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까도 말씀 했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죄라는 것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고 못사는 것이 죄고, 없는 것이 바로 벌이고, 그 바탕 상 본능 상 그래요. 그래서 복음을 운운하면서 ‘나 십자가만 자랑하고 나는 복음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여러분에게 누가 하거든요, ‘어지간히 못사는 모양이다’ 그렇게 일단 그렇게 의심하고 들어가세요. 거의 맞아요. 거의 맞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잘살게 되면 “뭐 내가 무슨 자랑할 게 있어? 집 네 채 있는 것 빼고는 뭐 자랑할 것도 없고, 요새 뭐 애가 차 하나 사줘서 타고 나니는 거고, ‘엄마 나이도 많은데, 몸 힘든데 차는 이거라도 타야 되지 않습니까’ 해서 사준 게 벤츠고. 나 안 받으려 했는데……”

그러니 이야깃거리 있잖아요. 화젯거리가, 그들과 대화가 통하려면 네 소유 끄집어내면 나도 소유 끄집어내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다니까요. 이게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요새 교회 뭐 부흥 안 하려고 하는데 부흥이 되어 가지고 예배당이 비좁아서. 몇 명 오지는 않았어. 지난주에 우리 전도사가 세어보니까 1250명이 왔다던가? 뭐 1년 헌금은 한 150억 돼. 조계종 전체 예산하고 맞먹어. 그런데 부흥은 해야지. 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되니까.” 뭐 이런 이야기.

목사들 만나면 그 이야기한다고요. 그래서 뭐 한 달 월급 2천만 원이라는 등 그런 이야기 한다고요. 세상에 어느 가정주부가요, 서로 만나 가지고 “요새 자식이 참 고마워요. 왜? 이번에 또 떨어졌어. 취직 또 안 됐어. 공무원 시험 7번째인데 또 떨어졌어. 백수야. 기분 너무 좋아. 백수라서. 그 애는 오직 복음만 사랑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봤습니까? 제 말 끝까지 들어야 돼요. 없습니다.

“그 애가 노력하더니만 내가 알아봤어 .딱 두 번 떨어지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 했어.” 이런 거요. “내가 그 애 뒷받침 얼마 하지도 않았어. 1억밖에 안 줬어. 그런데 공무원 시험에 됐어.” 이런 거요. “공무원시험, 애드윌인가 그걸로 해서 됐어” 이런 거요. “내가 이제 한시름 놨다”

주고받는 정겨운 이야기가 전부 다 소유에 관한 이야기만 주고받아요. 안 그러면 대화가 안 되니까요. 그게 바로 기생들이라는 거예요. 미가에 의하면 기생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미가 보고 뭐라 합니까? “너는 어떻게 사는가?” 나는 빼앗겼다는 거예요. “나는 주님한테 다 빼앗겼어.” 내놓을 내 것, 내 소유성을 내놓을 것이 없어요.

그게 선지자고 그 선지자의 완성이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들은 바로 오늘날 완성된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그 기초가 성령이고 십자가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영역 말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영역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나님이 사는 영역과, 그렇고 그런 인간들이 사는 영역이 완전히 달라져야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고집을 합니다. 그 차이점이 있어야 된다고. 여러분이 성도라면 주변 사람들 한번 둘러보세요.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모습과 여러분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점에서 질적으로 차이납니까? 뭐가 차이납니까?

물었으니 답변을 제가 해드려야지요. “나는 남 앞에 이야기할 때 내 자식 자랑, 돈 자랑, 직장자랑, 여러 가지 특히 돈 자랑 하는데 이게 바로 내가 몰랐던, 이게 바로 창기의 값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가 왜 그런 소리를 해?” “이게 바로 미가 1장 6절-7절에 나옵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가 1장 6-7절에서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 가 아니라 그렇게 지적을 받는데 거기에 나는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그런 영역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살아간다는게 아니고요. 늘 지적받으면서 늘 하나님 앞에 다 빼앗기는 거예요. 왜? 그런 식으로 미리 하나님께서 연락을 줬으니까요. 이 말씀을, 결국 이 마지막 들을 말씀을 우리에게 미리 줬다는 것, 미리 도달했다는 게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사람이 소유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공허하기 때문에 그래요. 뿌리는 없지요. 그러니까 소유로 살아가는데 남 따라가려는데 힘들고 공허하니까 계속해서 소유를 추구해서 공허함을 또 다른 소유로 채우는 식으로 인생을 그냥 허비하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이런 가운데 그렇다면 성령 받은 이 말씀으로 지적받는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가? 참 쉬워요. 얼마나 쉬운가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CJ택배에서 물건을 하나 보냈는데 물건이 아침 11시에 왔었어요. 그런데 신참 택배 직원이라서 서투르고 어설퍼서 잘 못 해요.

11시에 이미 물건은 받았는데, 오후 3시 되어서 “곧 물건 갑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낸 거예요. 이게 얼마나 받는 사람에게는 좋은 믿음인지요. 왜 좋은 믿음이냐? 일단 구원은 챙기고 난 뒤에…… 우리는 구약을 보고 있잖아요. 뭔 뜻인지 지금 알아채야 됩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이미 십자가로 구원받고 난 뒤에 너 맞는다, 당한다, 너 기생이야, 라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있으니까요, 그걸 십자가의 뿌리와 연관을 시킬 수 있는 재료가 살아가면서 계속 우리에게 연락이 오는 거예요. 날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왜 쉬우냐 하면, 이미 받고, 이미 구원받았음을 확인하는 이 신앙이 정말 참 쉽죠, 잉! 얼마나 쉬운 거예요? 구원을 안 받았으면 따내려고 노력을 할 텐데 일단 물건은 받고요, 물건은 접수하고 난 뒤에 이런이런 사람이 지옥 갔다, 이런 사람이 망했다, 이래서 책망을 들었다, 듣게 되면 그것과 연관 시켜 버리면 아, 이렇게 될 수 없는, 천국 갈 수 없는 저를, 그 조건에 의하면 천국 갈 수 없는 저를 십자가로써, 십자가 피를 우리 안에 집어넣어서 가게 하셨으니까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만 더욱더 감사할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이고 그 이야기하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미가가 지적한대로 창기처럼, 기생처럼 남하고 대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나 창기가 천국에 더 먼저 간다는 그 말씀을 새겨들으면서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왜 우리 힘으로 구원될 수 없는가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