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375강-YouTube강의(시간 베드로후서 3:8)20211207-이 근호 목사
제375강, 제목은 거창합니다, ‘시간’. ‘시간은 길다’ 상식이죠. 이걸 한번 축약해봅시다. 긴 시간을 꼬깃꼬깃 조그마한 상자라든지 또는 컵 같은 데다가 구겨서 한번 넣어봅시다. 그러면 천 년이 하루 같이 되겠죠. 그걸 펴보면 천 년이 되고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마술이 아니죠? 천 년을 집어넣자 이 말이죠.
그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자, 시간을 딱 구겨서 함축시켜서 있는 그 시간의 자리. 그것은 주님입니다. 주님 계신 공간에서 시간이 펼쳐지기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주님은 시간을 창조하거든요.
구겨진, 오므려진, 이렇게 함축된 데서 펼쳐버리면 폭발하듯이 시간이 천 년, 이천 년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의 날은 뭐냐 하면 다시 모아. 다시 모아. 빅뱅에서 빅크런치로 폭발한 걸 다시 뭉쳐서 하나로 끌어당기는 거예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
시간은 잊어라. 네가 몇 월 몇 일에 뭐 했느냐를 잊어라. 지금 누구 안에 있는가, 그것이 네 시간을 대변할 것이다. 이게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입니다. 그게 주의 날이에요. 주의 날을 시간과 대비해서 ‘아, 난 시간 잊어버리겠어. 난 주의 날이 더 좋아.’ 할 때 주님이 갖고 있는 시간관을 그 사람도 동일하게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그걸 세 자로 하면 ‘현장성’이에요.
주일 날 설교에서 그랬죠. 인간에게는 내일이 있은 적이 없다고, 주일 오후에. 인간에게 내일이 있은 적이 없어요. 내일은 현재가 조작하는 것이지, 조작한 내일은 내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관리하시는 분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그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주께서 무슨 내일을 펼칠지 몰라요. 아무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결론은 나와 있어요. 펼치신 내일도 다시 그 다음날이 되면 이것이 다시 주님이 계신 컵 안으로 전부다 소실, 소멸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과거는 없습니다. 과거는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한다면 나는 매일 죽는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했듯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죽은 자는 과거가 없죠. 과거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죠. ‘왕년에’라 하는데 그 왕년은 현재가 조작해 낸 과거이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거예요.
하루가 천 년이고 천 년이 하루 같다 할 때 이 시간이 주 안에서 현장성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현장성을 생각 못하는 이유가 자꾸 ‘내일은 잘 할 거야.’ 하고 내일로 도피하려는 생각이 있어요. 지금은 내가 힘든 거지만 내일되면 편할 거야. 지금 주와 함께 있는데 따로 도망을 치는 거예요.
현대인의 속성은 자꾸 빠르게 내일로 미래로 도망치는 버릇이 있어요. 옛날 조선시대나 중세 때는 어떠냐. 중세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가기 때문에 도망을 안 쳤습니다. 산업 구조가 느리기 때문에 시간도 느리게 갔어요.
그래서 머슴 되면 네 팔자라 합니다. 머슴, 너 5년 뒤에 과거에 합격해서 나중에 뭐 해라. 그런 거 없었습니다. 너는 네 팔자다. 너는 죽을 때까지 머슴 해. 끝났어. 그러니까 “예. 돌쇠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는 순간 마당만 쓸고 있지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을 따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시간을 따져봐야. 아니, 경쟁이 없는데 무슨 시간을 따집니까? 경쟁이 없는데. 학교에서 중간고사, 학기말 시험 수시로 시험 치는 이유가 뭡니까? 계속해서 내일은 잘 될 거야, 계속해서 ‘잘 될 거야’를 경쟁을 붙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공부하는 학생에게 “집어 치워. 너는 신분상 결정됐어. 너는 시험 칠 자격도 없어.” 그러면 에이, 치워버리죠. 뭐한다고 합니까? 안 하죠.
일본 기업이 그래요. 한번 들어가면 늙어서 퇴직할 때까지 보장해줄게. 경쟁도 없고 일할 맛도 안 나고 그냥 월급 타는 맛만 있지, 일할 맛은 안 나요. 그러나 호주나 미국 같은 데 보세요. 못 하면 십 년 일해 놓은 거, “You're fired!” 하고 그냥 잘라버리죠. 뭐 하루 아침에 잘라버려요. 호주에 광부 되었는데 나중에 힘 없다하면, 유 파이어! 나가!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다니면서 한 달 뒤에 퇴직하면 뭐할지를 생각해야 돼요. 이게 뭐냐. 현대인은 끊임없이 도피를 해야 됩니다. 지금 뭐 설치해놓고도 전혀 본인이 안심이 안 돼요. 본인이 불안해요. 현재에서 늘 도망칠 생각만 해요. 현재에서 미래로. 그러면 현장성에서 안정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3장의 현장성은 어떠냐 하면...... 미리 말씀드리면 기록된 말씀이니까 제 말로 듣지 마세요. 저는 빠지겠습니다. 기록된 말씀이니까요. 저보고 욕하지 마세요, 또 그거 골랐다고.
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그 현장성은 시간이 사라진 현장성이에요. 시간이 사라지니까 미래가 더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미래는 뭐냐. 그냥 이 세상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땅과 하늘은 어쩌면 우리가 최후의 목격자가 될 수가 있어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매일 같이 마지막 목격자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날에 주와 함께 있는 자의 현장성이에요. 예수님의 안목으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럼 미래로 도피할 이유가 없어요. 미래로 가봤자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해서 시간을 응축하고 잡아 당긴다니까요. 빅크런치, 완전 부숴버리죠. 컵 속에 모든 시간을 꼬깃꼬깃 집어넣고 그게 폭발해버리면 세상에 모든 것은 다 없어지니까요. 주님이 마련한 현장성입니다.
인간 세계에는 시간이 있다,가 돼요. 그러나 주님 세계에서는 시간 그딴 거 없다. 마지막 불 심판 돼도 시간이 없지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도 나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죽는 순간에 무슨 시간이 있습니까? 순간인데요. 사건인데 사건에 무슨 시간이 있어요? 납작한데. 폭이 습자지처럼 납작한데 무슨 여기에 시간의 폭이 있습니까?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죽는 순간 살아온 모든 시간은 습자지처럼 없어져요.
그러니까 여기서 경건이란 언제든 없어질 수밖에 없는 이 땅에 살면서 순간순간 고맙고 감사한 거죠. 감사합니다. 이렇게 없어질 시간이지만 없어질 공간이지만 여기서 생존해서 이 기록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증거할 수 있는 이런 안목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경건함이라 하고 그걸 가지고 오직 하늘 나라만, 주께서 오실 날만 고대하는 성도라는 것이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13절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