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과 옛것
새것과 옛것
2021년 12월 1일 본문 말씀: 요엘 2: 24-27
(2: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2: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이 예언의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곧 전에 혹독하게 메뚜기가 들어닥치는 재난과 북쪽 군대가 나라의 모든 것을 앗아간 그런 경우를 당했던 그 이스라엘입니다. 이런 지경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수치를 잊을 정도로 혜택을 내려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조건입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이 되려면 먼저 ‘나’라고 하신 분에게 철저하게 예속되는 자들이 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고 하신 분이 이 땅에서 오셔서 하는 그 모든 일에만 근거해서, 그 토대 위에 성립된 운명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자들이 발생해야 합니다.
이는 곧 독자적으로 자기만의 인생 설계를 철폐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각자 자신이 기대하는 인생사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자가 아니라 아예 자기 인생 자체가 허락될 수없음을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흔쾌히 수용하는 자들입니다. 백성들 운명의 모티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진행시키신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스케줄입니다.
이 예수님의 여정이 그대로 확장되면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여정은 어떤 여정이었습니까? 빌립보서 2:6-8에 나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즉 예수님의 여정은, 왜 인간은 창조주되시는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아 마땅한가를 보여주시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나는 구원받은 자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달라진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수치스러운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수치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안 사람이라면 지나가는 타인이 자신을 욕한다 할지라도 화를 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을 욕해도 무방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존재임을 이미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비천함으로 이 세상을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치스러움과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도 훼손하시지 않고 도리어 제대로 독생자로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요 1:14 “독생자의 영광이요”) 이런 취지에 따라서 애굽에서 막 나왔던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시내산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취해서 말입니다.
그 장면이 히브리서 12:18-21에 나옵니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즉 감히 통째로 흔들리는 거대한 산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사적인 가치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이 그저 하나님의 엄숙한 영광스러운 정경에 압도 당했습니다. 이럴 때,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적(私的)인 관심사를 아예 내려 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나는 독자적으로, 사적으로 나는 가치있다”고 주장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시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주님 중심의 공적 상태만 인정하십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개인적 사정은 하나님 보시기에 추잡고 더럽고 수치스럽기 때문입니다.
수치를 영원히 덮어주시는 방안은 오직 예수님이 오셔서 마련되는 겁니다. 인간이 개인적으로 스스로의 죄와 수치를 덮을 수가 없습니다. 사적인 인식을 가지고 계속 살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곧 전혀 하나님의 현존을 고려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적인 영역의 참여상태를 안다면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영광에 매료되어서 삽니다.
세상 사람들이 와서 각가지 세상일을 가지고 성도의 관심사를 세상쪽으로 돌려보려고 심각한 일들을 집어넣어도 “그려든 말든”하고 사소한 일로 처리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나만을 위한 사적 영역은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망가져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수치스러운 존재가 수치스럽지 않은 척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적인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사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되기 보다는 자기만의 인생을 달성하기 위해 복음을 피해 자꾸만 밀폐된 공간으로 숨어들어가게 됩니다. 망하여 가면서 안 망해야 하는 비겁한 변명들을 쏟아놓으면서 말입니다. 성도란, 곧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미 최종 판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대기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후딱 이 세상에서 망해도 하등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세상 불신자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여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 미안해서 어쩌나?”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미리 이런 인사를 할 수 있는 겁니까? 누가복음 17:34-35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래서 성도는,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를 말하는 자가 아니라 ‘나’라는 수치스러운 옛것과 주님의 행하신 ‘새것’을 모두 전시하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 성도 안에 영광스러운 주님의 것이 들어있기에 비록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의 것은 우리 안에서 버리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9:3에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세상에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에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팔자라고 지적받은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같은 신세의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신원, 즉 원수를 갚아주시는 겁니다. 다시는 수치가 없게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이라는 구원의 능력을 전시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요엘 2장 24-27절(옛것과 새것)2112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2장 24-27절입니다.
요엘 2:24-27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요엘의 예언에 의하면, 요엘 1장과 2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있는 것은 메뚜기의 침략에 의해서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도무지 자력으로는 살길이 전무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다는 이것은 불가능하다, 라는 것을 혹독하게 체험하고 난 뒤에 같은 선지자 요엘이 오늘 본문 23절부터 보게 되면, 너희는 기뻐하라, 너희에게 전에 준 것 이른 비 그리고 늦은 비……,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답게 다루시기 위해서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게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너희는 이제 영영히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전의 그 혹독하고 비참한 것은 이제는 너희에게는 끝났다. 없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26절 끝에 보면 “내 백성”이라고 되어 있어요.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백성이라는 것은 예속된 겁니다. 본인이 스스로 살겠다든지 설계를 한다든지 그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되어 있는데, ‘내 백성’ 할 때의 그 ‘나’ 있잖아요. 나. 나의 백성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인간들이 독자적으로 자기 나라를 건설한다는 이것은 이 예언의 혜택에서는 배제됩니다. 없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일 경우에만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백성들은 나의 백성이니까 ‘나’라는 그분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백성의 운명이고 백성의 팔자에 그대로 계승됩니다. ‘나’라는 분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그게 백성에게 확장이 되면서 ‘내 백성’이 발생해 버려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은 따로 내 인생 설계라든지 계산된 자기의 장래계획, 이것은 접어야 됩니다. “본인이 계산한 대로 본인 인생 살래요,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 될래요?” 그걸 묻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 같으면,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는 겁니다. “그렇게 살래요,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해서 자기의 고집을 부릴 겁니까?” 이걸 묻는 거예요. 요엘 선지자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볼까요? “예수님한테 종속된 팔자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따로 네 팔자 네가 만들겠습니까?” 그 이야기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신자가 아니거든요.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왜 신자가 아니냐 하면, 자기 인생 설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 도움 좀 받으려고 온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 백성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그것은 관심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 것이냐, 거기에 완전히 빠져서 교회 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 그게 무슨 내 백성이에요? 자기 인생 자기가 꾸려 나겠다는 계획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사적 설계입니다. 사적인 것, 개인적인 거예요. 개인적인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영원히 수치를 당치 아니한다, 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무슨 요소를 갖고 있어야 되느냐 하면, 영원히 수치 당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나였다, 라는 것을 수납해야 돼요. 인정을 해야 돼요.
좀 더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혹시 불신자들, 예수 안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 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한번 해보세요. 당신이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을 한번 해보라고 해보세요. 불신자에게요.
지난 수요일에, 신자에게 내가 불신자인 것을 증명해 보라고 했지요. 이번에는 반대로 나갑니다. 불신자에게, 절에 나가는 사람 또는 중한테 하나님이 있음을 증명해 보라, 하면 그들이 “나 하나님을 안 믿기 때문에 증명 안 한다.” 그렇게 할 거지요.
그러면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당신이 신이 되기를 원합니까, 피조물 되기를 원합니까?” 한번 물어보세요. 그러면 그들이 틀니 빠진 것처럼 입 오므리고 말을 못 하지요. 제가 왜 그 질문을 하라고 하느냐 하면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들은 본인이 신이라고 인정하거든요. 신이라고 인정하는데 그 신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뭐냐? 신은 뭐든지 증명하는 그런 우쭐댐으로 살아가요. 신은 뭐든지 증명해요.
과학의 힘으로 뭐든지 증명이 가능하다고 희망을 갖고 사는 것이 신입니다. 왜? 그러니까 신은 자립적이잖아요. 지금 내 백성은 자립적이 아니고 예속된 겁니다. 일종의 노예예요. 그러나 인간은 노예 되기를 싫어해요. 이미 선악과 따먹고 우리 조상이 마귀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신이고 싶어요.
그러나 진짜 신이라면 뭐든지 증명해야 됩니다. 그게 신이 신다운 거거든요. 그런데 제가 뭐라고 질문하라 했습니까? 당신이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 질문하게 되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 못 하겠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자기가 신인데 신의 요소 가운데 어떤 요소가 발생 되었느냐 하면, 증명 못 할게 남아 있는 요소가 생겼기 때문에 그 사람은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무슨 말인지 지금 잘 모르겠지요. 불신자는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요. 신의 자존심이에요. 뭐든지 증명하고, 뭐든지 납득하고 설명할 그런 자신감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증명 못 하는 게 있잖아요. 신이 존재하는 것을 증명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쪽의 세계는 한곳이 구부러진 거지요. 남겨둔 게 있다고요. 미진한 것이 있다고요. 미진한 것이 있으면 어떤 논리에 빠지느냐 하면, 본인이 덜 신인 거에요. 신이 아니라 신인데 덜 신이에요.
신이고자 하지만 신이 될 수 없는 그런 약점이 그 질문 하나에 노출되어버리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냐 하면, 지금 불신자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냐, 하는 문제를 따져봅시다. 하나님의 백성 같으면 오늘 요엘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이 되어야 돼요.
적용이 된다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존재에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찾아와야 이 수치가 수치 아닌 것으로 전환되기에 그렇습니다. 그것도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거든요. 영영히.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않는 조건이 뭐냐?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돼요.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돼요.
그러면 주님의 백성 된다는 말은 뭐냐? 내가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그것 그 나가 주님 앞에 완전히 포기된 입장입니다. 나는 스스로 내 힘으로 살겠다는 것을 완전히 포기해버렸어요. 그 포기했다는 말은 하나님께 철저히 예속됐다는 말이고 예속됐다는 말은 곧 뭐냐?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더럽고 수치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내가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왕 자주 묻는 것 한번 더 물어볼게요. 나는 신자가 되었다 할 때, 나는 이제 성도가 되었습니다, 할 때 제가 후딱 묻고 싶은 게 뭐냐? 당신은 어떤 점에서 변했습니까, 를 묻고 싶어요. “신자가 아니었는데, 불신자였는데 신자가 되었다. 성도가 아니었는데 성도가 되었다고 그렇게 이야기들 하시는데 그러면 어떤 점에서 당신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제가 묻고 싶어요.
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답을 요구하면 제가 실례가 되기에 답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내가, 살아가는 모든 내 모습이 더럽고 수치스럽다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달라진 것, 그게 바로 신자 된 것이고 성도 된 겁니다. 내가 내 보기에도 수치스럽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당신은 신자 되어서 어떤 점이 달라졌습니까?” “나는 죄인이고, 나는 더럽고 부끄러운 사람입니다”라고 한다면 그다음에 준비된 질문이 있어요. “그러면 남이 당신을 욕할 때 당신은 분노합니까, 분노 안 합니까?”
수치스럽다는데, 수치스러운 게 왜 분노를 해요? 무엇을 챙기고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분노합니까? 지금 앞뒤가 안 맞잖아요. 처음부터 다시 할까요? 지금 내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나는 지저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다는 겁니다. 이걸 내가 흔쾌히 받아들인 거예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받아들인 거예요.
그러면 남들이 나를 이 더러운 놈이라고 할 때, 욕을 할 때 화를 내야 되느냐, 안 내야 되느냐 그 말입니다. 화를 내버리면 자기 것이, 지킬 것이 생긴 거예요. 뭐냐 하면, 나는 내가 수치스럽지만 내가 수치스럽다는 것을 아는 이상은 나는 고귀하고 가치 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덜 수치스러운 거예요. 온전하게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고 덜 수치스러운 거예요.
주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희를 영원히 수치스럽지 않도록 내가 갚아줄게, 너희를 덮어줄게, 라는 이 말씀은요, 내 백성 하나님의 백성 된다는 조건이고요. 그 내 백성 된다는 조건은 어떤 조건이 붙느냐 하면,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일정, 그 스케줄 있잖아요, 이 땅에 온 그 스케줄, 그 스케줄이 그대로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일 경우에만 이 수치가 덮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땅에 온 그 일정이 나한테 도달되지 아니하면 나는 영영히 수치스러운 사람이에요. 영영히 수치스러운 사람.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스케줄대로 움직였을 때 어떤 움직임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그 수치스러운 더러움, 비천함, 그걸 예수님이 몸소 다 보여줬어요. 그게 비천함인데요.
빌립보서 2장에 보면 하나님과 영광을 같이 해야 될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진해서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 뭐냐 하면……, 남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죄인이거든요. 그것도 어느 죄냐? 사형당할 죄다 그 말이지요. 빌립보서 2장에 그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복종’하신 거예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한 겁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지금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두 분이 구성해 낸 것이 뭐냐? 어떤 인간도 수치의 극한을 몰라요. 비천함의 극한을 몰라요. 인간은 도대체 아는 것이 없어요. 자기에 대해서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는 것을 “너는 현재 이정도야” 하고 알려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어떤 경위를 보여줘요. 경위, 어떤 절차를 보여줘야 돼요.
주께서 영광스러움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버림을 받을 때 그것은 죄 때문에 수치스럽게 버림받은 거거든요. 죽기까지 복종하신 거예요. 왜? 그럴만하기 때문에, 그게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게 율법의 완성이고요.
따라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주께서 이 땅에서 했던 그 결과물, 그 성과, 그 성과가 그대로 확장되어서 그게 입혀질 때 이 땅에 없던 내 백성이 여기서 발생하는 거예요. 어떤 백성,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는 백성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이런 인간 되고 싶습니까?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수치스러운데 주님의 행하심이 덮여서 주님의 백성, 주님께 예속된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결과만 보고 ‘역시 하늘나라 백성, 천국 백성이 낫지’라고 이야기하고 싶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 땅에서 자신의 모습이 수치스럽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걸 받아들여야 돼요.
쉽게 말해서 칭얼대지 마세요. 자기 인생사에 대해서. 그리고 인생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엄살 부리지 마세요. 수치스러운 것이 수치스러워야 마땅하지 왜 저는 남들처럼 못삽니까, 우리 가정은 왜 그래요, 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좀 좋은 자리 있어서 투자했는데 사기당했습니다.” 그렇게 징징대지 마세요. 그보다 더한 수치 당해도 그것은 합당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 자체가 수치스러운 거예요.
그러면 아까 우리 집사님이 이야기하는데 저한테도 들렸어요. “남들이 수치스러운 나 보고 욕을 할 때 같이 대들어서 욕을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할 때 집사님은 “욕을 해야 됩니다”라고 했거든요. 아마 깊은 뜻, 두 번 세 번 깊이 새겨서 깊은 뜻을 가지고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게 놀랍게도 정답이에요.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 저는 수치스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저를 버리지 마세요.’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저에게 찾아온 복음을 버리지 마세요’라고 기도해야 돼요. 저를 버리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저에게 입혀진 하나님의 복음, 율법의 완성이 버려지지 말게 하옵소서.’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할 때 나를 욕하는 것은 화 내면 안 돼요. 왜? 나는 본래 수치스럽기 때문에.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복음을 욕한다? 그것은 마땅히 분노해야 되지요. 그래서 정답이십니다. 거기에 약간의 억지가 좀 섞인 것 같기는 한데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놀랍게도 마태복음 13장 52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천국의 제자입니다. 지금은 없지만 주께서 생산해 내실 거예요.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여기서 새것과 옛것, 새것은 주님의 스케줄이 들어온 이것이 새것이에요. 성령이지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니까요. 주께서 했던 성과 있잖아요, 성과. 그 성과가 있으면 새것이에요. 그러면 옛것은? 옛것에 새것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나라는 더러운 옛것과 내 안에 들어온 주님의 성과, 다 이루심을 같이 나열하고 전시할 수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새사람 성도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너는 수치를 당치 않는다니까 헤헤거리면서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이게 천국의 백성이 아니라, 네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랑질하는 것이 천국의 백성이 아니고, 나는 어떠한 자였는데 주님께서 이런 일을 했다, ‘나는 어떠한 자- 1’, ‘주께서 이렇게 했다-2’ 1과 2를 다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개인 구원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 한마디에 개인 구원은 전부 다 이단인 것이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수완을 부려서 예수님을 내 것 만들어서 천당 가려고 시도하는 모든 인간들의 시도 자체가 이단적이에요.
로마서 9장 3절에 의해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런 고백을 할 때 새것과 옛것, 두 개 있는 사람은 이 발언을 하면서 얼굴이 환~해요. 햇빛처럼. 아주 신이 나요. 이제 내 할 일은 이 땅에서 망하는 일만 하면 되니까, 내가 이 땅에서 망하는 일만 남아 있으니까.
망하는 일만 남아 있다는데 이게 활짝 피었어요. 입꼬리가 올라가고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그 망하는 일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수요일에 피아노 반주하는 거예요. 햅쌀로 밥해 먹는 것. 나한테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주님께서 ‘너 내 백성 맞지? 망해! 망해! 이제 즐겁게 망해! 칭얼대지 말고, 징징대지 말고, 엄살 부리지 말고 그냥 망해버려!’ 이 망하는 즐거움, 속 시원함, 이런 데가 바로 속 시원한 냇가에요.
망해도 되는 즐거움. 검사받고 암 걸렸으면 암으로 망하면 되고, 안 그러면 또 오래 살다 망하면 되고요. 어쨌든 간에 수치스러운 옛것이 제거되어야 된다는 것을 이제는 일상을 통해서 그걸 느껴보는 거예요. ‘아, 나 때문에 이런 고초를 당했구나’ 그걸 느껴보는 거예요.
아주 쉽게 말해서 이겁니다. 최종 판결, 판정을 이미 받고 대기 상태에 있는 겁니다. 이 느긋함, 이 느긋함! 최종 판결 받고 느긋하게 대기 상태에 있으면 돼요. 집사님은 7십이 넘었으니 앞으로 살날이 한 32년 정도 남았네요. 너무 고생시키나 싶은데 그 남은 30년 동안 느긋하게 사시다가 나중에 9십 넘어 운전도 못 하는데 운전하다 남의 차 박고, 그런 온갖 것 다 겪으면서 느긋하게 ‘욕해라. 나로 인해서는 욕 안 할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수치스럽게 보신 거예요. 언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 그들은 뭐 괜찮아서 나온 줄 알았어요. 신명기 9장에 나오지요. 내가 너희를 건진 것은 너희들 자체가 악함이고 너희들이 들어갈 그 땅에 있는 민족도 악함인데, 악한 너희들 끄집어내서 저 악한 것 추방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너희를 덮어줘서 악한 것 쫓아내고 악한 너희들 거기에 심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신명기 9장에서.
이것은 뭐 너무 많이 해서 다시 읽어드리려니 식상할까 싶은데 그래도 읽어드려야지요. 신명기 9장 4, 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나를 분노케한, 광야에서 격노케 한 백성인데 그 백성이 뭐냐? 내가 보기에는 수치스럽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내 백성이라는 겁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뭐냐? 이른 비, 늦은 비처럼 남아 있는 것은 그들에게 주님이 하신 성과를 덮어줌으로써 분명히 이들은 천국 올 수 없는 더러운 인간들인데 어 천국에 오게 만드는 거예요. 따라서 이러한 은혜를 그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어느 산으로 인도했느냐 하면, 바로 시내산으로 인도했어요.
시내산의 그 분위기 한번 보세요. 얼마나 무서운지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히브리서 12장 20, 21절에 보면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했어요. 그 산 전체가 떨린 거예요.
여러분, 어쩌다 지진 같은 것 경험하잖아요. 지진 일어났을 때 어느 용기 있는 사람도 순간적으로 예측 못 했다는 이유 때문에 무서워요. 땅이 흔들릴 때 무섭다고요.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미리 예측을 못 하니까 무섭기 마련이에요.
그리고 히브리서 12장 26절에 보면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이제는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때가 놀랍게도 가장 이스라엘이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어요.
주님의 영광 속에 있다는 말은, 내가 영광스럽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만 영광스러운 앞에서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주님에 예속되어서 그 영광에 모든 혼이 정신과 마음과 혼이 거기에 쏙 빼앗길 때 그 공간, 상황이 영광스러운 상황이에요.
그러면 백성들은 뭐냐? 심히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거지요. 성도의 하루하루의 삶, 생활이, 매일이 나의 최후가 되는 겁니다. 하루하루가 최후에요. 마지막이에요. 무섭고 무서운 주님의 면전에 있는 그 공간을 생각해 볼 때 이 무서운 주님의 현존, 지금의 신약에는 그 시내산 그 자리에 뭐가 있느냐? 십자가가 거기 있어요.
십자가 볼 때마다 두렵고 떨리고 무섭지요. 이 말은요 우리가 성도, 주의 백성이 되어서 주님의 십자가의 행하심을 보고 무섭고 떨린다, 할 때는 내가 이 땅에서 한 일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나가면서 나를 욕해도 그것은 아무 신경도 쓰이지도 않아요. 지금 자기는 십자가 앞에, 곧 하나님의 현존이 십자가로 나타나거든요. 십자가로 나타난 주님 앞에 무섭고 떨리고 그래서 발발 떨고 있는데 남편이 있다가 “여보, 당신 오늘부터 나하고 갈라서.” 이렇게 하면 “갈라서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나는 지금 그런 시시한 일에 신경 못써.”
또 “조직검사 했는데 내가 암 말기라 몸 전체에 퍼졌단다.” “암세포가 다 퍼지든 밥이 퍼지든 식든 나는 몰라. 지금 나 그럴 정신이 없어. 암 말기 그런 시시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시비 걸지 마. 맘대로 해. 잘 가. 가버려.” 지금 중요한 것은 무섭고 떨리는 어떤 분 앞에 서 있는데, 그것도 백성의 자격으로 있는데. “그냥 지나가세요. 그냥 지나가.” 가든지 말든지 그것은 문제 될 것이 아니라고요, 문제 될 게.
왜 그러냐?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치스러운 이유가 사적 공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사적 공간을 공적 공간으로 바꾼 겁니다. 사적 공간은 지금 시내산처럼 무섭고 두렵고 떨리고 그런 것이 없어요. 내가 신이에요. 신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 때문에 벌벌 떨어요. 이것 때문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인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가 그런 것을 몰라요. 왜?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메뚜기한테 안 당해 봐서 그렇습니다. 앗수르 군대한테 싸그리 다 멸망 안 당해 봐서 나는 한평생 지금 내 노력대로, 이만한 성과로 스스로 자기 보기에 장한 거예요. 사적 영역을 그냥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복음으로 찾아가면 자꾸 주춤주춤 물러나요. 내 이 귀한 공간, 사적 공간 건드리지 말라고. 사적인, 개인적인 이러한 공간은요, 결국 이것은 객기인데요. 이 객기는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의해서 전부 다 마감이 됩니다. 10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심판대 앞에.
사적 공간을 주님께서 인정해 준 적이 없습니다. 추잡하고 더러운 건데요. 혼자서 “바르고 착하게 살았습니다” 말하지 마세요. 뭐 달라이라마가 어떻고, 혼자서 도를 닦고, 돈도 초월하고, 오직 정신세계와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봉사 백날 해도 사적 공간이잖아요.
사적 공간은 뭐냐 하면, 내가 하는 행동에 타인의 운명을 결정지을 요소가 그 안에 없어요. 똑같이 뭐 아담의 망할 죄인인데 누가 누굴 도와줍니까? 설교 다시 할게요. 옛것과 새것이 둘 다 있어야 돼요. 그런데 내 것만 있어 버리면 이것은 사적 공간으로 취급되어서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새것이 없기에 더럽고 더러운 거예요. 인간은 계약상대자가 아니니까요.
옛것과 새것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스케줄 따라 정한 거예요. 하나님이시지만 비참하게 사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 그것은 옛것, 그런데 영광스럽게 주가 되신 그것은 새것. 백성은 뭐냐? 그 영광스러운 주님의 권력 안에, 영역권 안에 놓여있을 때, 주님만 쳐다볼 때 덩달아 백성이라는 이름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보장받는 겁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두렵고 떨린다는 말은 쉽게 이야기해서 이렇게 하면 돼요. 남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쳐다보면서 또는 식구들이 뭐라고 하든 그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게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왜? 그들에게는 새것이 없기 때문에.
새것도 없는 주제에 뭘 남한테 간섭질해요? 새것이 없는데, 십자가가 없는데요. 두렵고 떨리는 게 없는데요. 지금 그들은 각자가 자기가 신이라고 여겨요. 그러면 성도로서 이 세상에 나와서 사적 영역만 고집하면서 너 나처럼 되어야 된다, 그래야 남이 너보고 욕 안 한다, 너도 인정받으면서 살아야지,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 할 때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그들에게 대꾸하면 되느냐?
그 대꾸 문장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돼요. “아이고, 미안해서 어쩌나!” 이러면 돼요. 왜 그들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느냐 하면, 바로 누가복음 17장 34절과 35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보고 “아이고 미안해서 어쩌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잡초를 뽑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때 이미 최종 판정을 받은 사람은 대기 상태에 있다가 주님께서 솎아냈으니 우리를 뽑아서 데려가잖아요.
데려갈 때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할 말은 뭡니까? “지옥에나 가라” 그것도 되겠지만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요. “미안해서 어쩝니까!” 그렇게 미안해 하면 되는 거예요. ‘나는 망해야 된다, 는 사실을 나는 알았는데 내가 당신한테 전에 이야기했잖아. 당신 망한다고. 그런데 당신은 밀폐된 공간으로 피신했잖아. 밀폐된 공간으로. 숨어 들어갔잖아. 내가 전에 십자가 복음 전할 때.’
내가 십자가 전할 때 네가 숨어 들어간 이유는 지금 이대로 수치를 안 당하기 위해서, 감추기 위해서 들어간 거예요. 스스로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간 거예요. 제가 대전에서 그런 강의 한 것 같은데요. 기드온과 3백 명이 13만 5천 명의 미디안 군대와 싸웁니다. 제가 물었거든요. 그 13만 5천 명의 군대를 죽이려고 한다면 칼이 많이 필요할 건데 그 칼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시지요. 자기들 칼이 자기들을 찌른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의 사적 공간만 알고 그것만 기억하는 인간들에게 그들이 끌어모은 그 재산 화천인가 대천인가 해서 벌은 그 5십억, 세상에서 재벌 된 것, 그게 뭐냐 하면 자기를 멸망시키는, 자기를 공격하는 무기를 본인이 끌어모은 거예요, 그게!
아버지 빽 쓰고 퇴직금 5십억 받았는데 그 아들이 제일 먼저 한 게 뭐냐 하면, 페라리 차 샀어요. 7억 주고. 성공사례가 이게 지옥 사례에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아와 과부에 나그네들이 이 땅에서 쓸모없는 인간들이에요. 그들이 바라는 것은 신원하여 주는 거예요. 갚아주는 것, ‘주여, 제 팔자에 대해서 주께서 갚아줄 날을 기다립니다.’ 왜? 나는 누가 봐도 수치스럽기 때문에. 바로 그런 자에게 주께서, 여호와의 날이 찾아와서 주께서 갚아준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8장 20절에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신원이라는 것은 갚아주는 겁니다. 이사야 34장 8절에도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이렇게 되어 있고요. 이사야 1장 17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 땅에서 누가 봐도 수치스러운 것, 세리와 창기, 누가 봐도 더럽고 이것은 “아이고, 네 팔자 참 안됐다. 나 같으면 약 먹고 죽는다. 너 그래 가지고 계속 살려고 왜 하느냐?”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그 사람이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몰아넣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처지, 하나님이 그들의 처지로 왔을 때 얼마나 인간들이, 사적 공간만 추구하는 인간들이 자기들 지저분한 것은 모르고 오히려 예수님 보고 안됐다, 측은해하고 쯔쯔쯔, 하면서 자기들은 상대적으로 우쭐대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무지함,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오히려 그들이 수치스러운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수치스러운 것을 몰라요. 그래서 성공하려고, 성공하려는 일념으로 평생의 모든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자기 사적인, 개인적인 나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심지어 게다가 예수까지 믿어서 천당 가는 출세까지 하려고. 그것은 불신자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티를 내는 불신자예요.
이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신이 되고 싶습니까, 피조물이 되고 싶습니까? 성공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습니까?”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은, 영원히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이것은 나의 의가 아니에요. 그동안 비축해놓은 나의 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유명한 로마서 1장, 복음을 설명할 때 필히 이것이 들어가는 거예요. 1장 15절, 16절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새것이, 새것, 내가 가담한 적도 없는 백퍼센트 온전히 주님이 다 이루었던 그 복음이 우리의 수치를 갚아주고 영원히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겁니다. 로마서 1장 22-25절, 동일한 복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게 바로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몸소 보여준 스케줄입니다. 그 스케줄이, 그 일정이 오늘날 성도 안에 들어 있어요. 끝으로 시편 1편의 말씀이 어떻게 신약의 십자가에 완성이 되는지를 그걸 같이 결합 시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편 1편 1,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해놓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걸 신약적으로 바꾸면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십자가를 즐거워하며 그 십자가를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 십자가 앞에서, 주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인지를 너무나 알기 때문에 세상이 어떤 소리를 해도 세상에 대해서 전혀 무섭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고, 겁나지도 않은 거예요.
‘겁나 겁 안 무서워. 너무나도 겁 안 무서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왜? 망하는 것이 즐거우니까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어떤 계획을 갖지 말게 해주시고, 우리 자신이 어떤 예상을 하지 말게 하시고 우리는 그냥 대기 상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확정된 사실, 결정 난 사실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바라보며 살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