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요
내려요
2021년 11월 21일 본문 말씀: 욥기 33:26-28
(33:22)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
(33:23)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
(3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33:25) 그런즉 그 살이 어린 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33:2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33:27)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
(33:28)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욥이 지난날 동안 보여주었던 모습은 자신이 자기를 어떻게든 올바르게 살리겠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나는 내 것이다’는 정신이 옹골차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돌멩이처럼 박혀 있는 이 ‘자아’라는 돌멩이는 자력으로 빼낼 수가 없습니다. 기껏 죽으면 빠질 수 있을까 정도로 기대를 가질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자아성이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 때까지 자아성을 유지되고 지옥가서도 영원히 자아성을 이어집니다. 따라서 자아성이 인간 내부에 박혀 있는 이상, 기껏 욥의 딜레마에 공통적으로 처하게 될 뿐입니다. 대책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 엘리후는 천사를 거론합니다.
타락하지 않는 천사는 마치 기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그대로 전달합니다. 악마가 아닌 이상 자아성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성이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시킨대로 하십니다. 본인이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냥 주님의 계획에 따를 뿐입니다. 따라서 천사는 본인이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 22:7-9)
반면에 인간에게는 자아성이 있어 자기 운명을 본인이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에 짓눌려 삽니다. 엘리후의 제안이 이것입니다. “천사가 네에게 투입이 된다면 너는 네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냥 ‘나 자신’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하신 ‘대속물’로서의 전환되는 겁니다.
이는 곧 성도의 자율성은 주님의 자율성으로 대체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아성에 놀아나던 나는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더 이상 ‘나’가 아니라 ‘주님의 대속물’, 즉 구원된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 삶의 목적도 더 이상 ‘나’가 ‘구원자이신 주님’이십니다. 이런 변화를 유발하는데는 인간의 외부 환경이 작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버스가 탔다가 자기 집 근처에 와서 그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 것처럼, 성도는 그동안 ‘자기 인생사’에서 도중 하차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필히 강제적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욥처럼 맨날 “나는 정당하다”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죄가 있는 반면에 자신이 알 수 없는 중에 지은 죄가 있습니다.
본인이 의도한 자는 선한 일을 차후에 하게 되므로서 심리적으로 균형을 맞추었다는 안도감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럽게 하는 매사의 일이 꼭 범죄자에게 신이 저주를 내리는 듯한 환경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음에도 결과가 본인의 가치가 망가져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성도는 ‘환경’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전에는 주변 환경이 내가 선하게 살면 마련되는 복된 환경이라고 자부했는데 이제보니 자신의 행위에 상관없이 일어나는 환경이요 변수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환경은 성도에게 불안감을 줍니다. 이럴 경우가 바로 더 이상 성도가 자신의 자아성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사라지는 때입니다.
욥과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욥은 온갖 것 다 해봤습니다. 하지만 전혀 사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엘리후는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께서 조성한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다”. 즉 욥은 자신을 죽을까 봐 불안에 떨었지만 실은 죽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의 연장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죽는 당사자가 관여할 게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특징은 기쁨과 감사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성도를 둘러싼 환경 자체가 주님의 조성한 주님이 계시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미 고인이 된 자에게도 계속 그 주소로 편지가 오는 것처럼, 환경이란 내가 바꿔치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주어집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환경은 하나님께서 의도해서 조성한 환경입니다. 주님은 어떤 식으로 환경을 조성할까요? 마태복음 15:17-20에 보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율법적으로 압박감을 높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자아상 어떻게든 자신의 의로운 존재로 인식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괜찮은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건전한 것들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 시도 자체가 이미 “너는 죽은 시체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도저히 타 넘을 수 없도록 윤리, 도덕적 바bar를 높여버립니다. 마치 높이뛰기 선수가 더 이상 뛰어넘을 수 없도록 바를 계속 높이듯이 말입니다.
주님은 결국 다음과 같이 발언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즉 마음 내부가 썩어있기에 외부를 거짓으로 위장하려는 시도를 멈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아예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 새로운 환경이란 반복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작업이 작동되는 곳입니다. 이는 감사가 반복해서 나오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에 대해서 성도는 미리 예견할 수가 없습니다.
본의하기에 난처한 상황에 휘말리더라도 성도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조차 주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련된 환경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자신의 것을 독립적으로 지키려고 하지 않기에 복수심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두고 보자”는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켜 낼 자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우리 자신이 책임질 인생을 고려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0강-욥기 33장 23~28절(내려요)21112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3장 23~28절입니다. 구약성경 790페이지입니다.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찐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엘리후가 욥에게 계속 지적을 합니다. 욥은 한마디도 답변을 못 하고 있어요. 그 이유가 있어요. 욥은 자기가 죽는 것이 사적인 자기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자기 죽음마저 주께서 벌이신 일에 일부라는 것을 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자기 안에 돌멩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라는 돌멩이.
이 ‘나’라는 돌멩이를 본인이 끄집어낼 수가 없어요. ‘세상은 망해도 나는 안 망해야 합니다. 하나님’ 결국은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지만 자기 안에는 ‘나’라는 이름의 자기 돌멩이를 자기가 신봉하면서 그것을 지키는 것에 평생을 다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자기 주변 모든 사람이 자기와 똑같아요. 다를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라고 여기에 갑자기 개입합니다. 사람을 그냥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천사를 엘리후가 개입시킬 때, ‘사람의 일은 자기 돌멩이를 자기가 뺄 수 없다. 오케이. 그건 맞아’ 하지만 천사가 왔다고 했을 때 그건 사태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천사의 특징은 자기 배알도 없고 자기 것도 없어요.
천사가 만약에 선악에 대해서 알고 그 선악의 지식을 자기가 가지고자 한다면 그때부터는 천사라도 자아가 생겨서 그게 마귀가 되고 악마가 되는 겁니다. 악마의 특징은 이사야에도 나오고 여러 가지로 성경에 나오는데 악마가 뭐냐 하면 딱 하나예요. ‘나보다 더 높은 것은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 이게 악마의 마음입니다. 내가 신보다 더 높아지겠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이 되어서 왔을 때 누가 알아보았느냐. 악마가 그걸 알아본 거예요. 그래서 같이 협력하자고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수작을 걸었습니다. 욥은 악마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자기 눈앞에, 코앞에 있는 것만 보는 거예요. 그런데 결국 그렇게 보면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했는데 끄집어낼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게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바르게 옳게 살았다고 하지만, 나 자신을 나에게서 분리하는 작업이 욥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면 엘리후가 말하는 대책은 뭐냐. 천사가 와서 하는 대책은 본문 24절에 보면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라는 대속물, 내가 대신 건질 자를 건졌다는 그것을 하나 얻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아직까지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신약에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것이 없지만 희미하나마 하나님이 개입되었을 때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결코 끄집어내지 못하는 자아를 끄집어내는 대신에 아예 바꿔치기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엘리후가 알아요.
여러분이 서커스를 볼 때 서커스 단원들이 공중에서 그네를 탈 때 무슨 재주를 피우느냐 하면 공중에서 그네 바꿔 타기를 합니다. 이쪽에서 타던 그네를 저쪽 그네로 바꿔 타죠. 그러면 사람들이 ‘와~~~’하며 환호성을 보냅니다. 그네 바꿔 타기에 환호성을 지를 줄 알면서 자기 인생 바꿔치기는 왜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오래전에 유명한 배우 중에서 명세빈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나오는 어떤 장면이 이런 대사가 있어요. ‘나 여기서 내려요’
내리면 내리지 어쩌라고. 그게 같이 좀 버스에서 내려서 사귀자는 이야기겠지요. 우리 인생에서 내가 좀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에서. 물론 어떤 남편이 자기 부인과 자식들을 모아놓고 ‘얘들아, 여보, 나는 내 인생에서 내려요’라고 하면 부인과 자식은 미쳤다고 난리일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쩌고 당신만 내리면 다인가’라고 하겠죠.
우리는 내 인생이라는 것에서 결별할 수 있는 타이밍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 박혀있는 단단한 돌멩이를 이건 너무 단단해서 씨도 안 먹히는 돌멩이를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이걸 암세포처럼 담석처럼 지니고 가야 해요. 그렇다고 내 손으로 끄집어낼 수 없어요. 그저 내 인생에서, 나 위주로 갔던 인생에서 ‘나 여기서 내려요’라고 하면서 그냥 내리면 되는 겁니다.
그냥 맨땅에 내리면 큰일 나죠. 주님의 대속물에 내리는 거예요. 그러면 노선이 바뀌는 겁니다. 서커스 단원들이 공중에서 그네 바꿔 타는 것처럼 전에는 내가 주인공이었는데 이 주인공이 대신 어떤 분이 주인공이 되고 나는 그저 그분의 시다바리가 되는 거죠. 종이라도 어떻습니까. 내 자아를 안 끄집어내도 되니까요. 내 자아는 그분이 알아서 활용하실 거예요.
안에 돌멩이도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분의 준비된 인생, 딱 내려보니까 그분의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몽땅 벌써 다 해놨어요. 이미 다 채비가 되어있어요. 내가 더 손쓸 것이 없습니다. 참, ‘여기서 내려요’라는 말은 쉬운데요, 내리려면 환경에서 압박이 가해져야 합니다. 이게 욥기예요. 욥기에서 욥을 바꿔 치기 하는 거예요. 욥기 내용은 이겁니다.
욥을 공중그네 태워서 이쪽 그네에서 다른 그네로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욥은 자기중심으로 살다가 이제는 장차 오실 예수님 중심으로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욥기도 주님의 영으로 쓰신 책이 되는 겁니다. 욥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예요. 무슨 이야기? 바꿔치기 이야기. 내 백성은 욥처럼 바꿔치기 안 하면 절대로 내 백성이 될 수 없다. 나는 대속물로 제공될 뿐이다. 바꿔치기하라고.
맨땅에 헤딩할 수는 없으니 밑에 미리 마련해 놓은 거예요. 여기 위로, 대속물 위로 내리라고. 여기 위에 내릴 때 조건이 뭐냐 하면 너는 더이상 없다는 거예요. 너라는 자체는 이미 죽은 자로서 여기 내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 죽은 자가 여기서 내린다고 할 수는 없고 어떻게 되느냐. 환경이 압박을 가합니다. 저희 사는 집 앞 동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거기 사셨는데 아직도 편지가 와요. 우편함에.
그게 뭐냐 하면 고인은 돌아가셔도 환경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 주소로 계속 편지가 오는 겁니다. 환경이, 그러니까 엘리후가 하는 것은 욥은 그전까지는 내가 내 환경을 억지로 끌고 가는 이 무거운 인생을 가야 하는 겁니다. 남과 경쟁하면서 안 지기 위해서. ‘너는 얼마만큼 모았어? 나는 이만큼 모았어’라는 이 자체가 굉장히 피곤한 거예요. 그러면 내 환경 말고 다른 환경으로 바꿔야 할 때 기존 환경이 나를 토해버려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지요. 기존의 환경을 감당 못 하게 만드시고 환경이 나를 토하게 하시는 거죠. 기존에 있던 곳에서 토하게 만드실 때 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욥에게 불안감이 생깁니다.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이에요. 성경적 말고 인간적 입장에서는 죄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의도해서 나온 죄입니다. 이건 본인이 나중에 착한 일 하면 만회가 될 수 있습니다.
흔히 부흥사가 죄짓고 회개하라고 할 때 자기가 억지로 끄집어내는 죄 있잖아요. 그것도 재탕, 삼탕, 이미 작년 부흥회에서 다 써먹은 건데 이번엔 뭐 꺼리가 없으니까, 아무리 봐도 밥 먹고 산 거 외에는 죄가 없단 말이죠. 설마 밥 먹고 사는 것까지 죄라고 할 수는 없고요. 흔히 신문에 나올 법한 죄를 지으려면 죄지은 기억이 없는대요. 이때까지 파출소 한번 가본 적이 없어요. 파출소 면회도 안 갔어요. 친구 잘 만나서.
가족 잘 만나서 아이 때문에 파출소에 가본 적 없을 정도로 반듯한 모범생으로 살았다면 그 사람에게 죄를 고하라고 하면 너~~무 부담이 되는 거예요. 남들 주차위반 다 간섭하고 담배꽁초 줍고 아무리 생각해도 죄지은 것보다 오른손이 한 착한 일이 더 많이 생각나는데 도대체 무슨 죄로 회개를 합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환경이 그렇게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의도하지 않은 죄’입니다. 이 죄가 환경을 조성합니다. 우리에게 불안감을 조성해요. 불안감을 조성할 때 기여하고 활동하는 것은 악마지요. 악마는 항상 우리에게 흔들기를 하고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악령은 뭔가 불안이 조성되게 만들어요. 반면에 성령은 ‘나 여기서 내려요’라고 하면서 내렸기 때문에 성령은 네가 현재 기억 속에 없는 매일같이 새롭게 맞이한 환경이 주님이 조성한 환경이고 심지어 죽는 것도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죽는 것에 네가 신경 뚝! 신경쓰지마. 죽는 것도 나의 일이지 너의 일이 아니야”라고 하시면 성령이 하는 일은 뭐든지 감사가 됩니다. 모든 일이.
만약에 어떤 할머니가 있는데 그 할머니가 뭐하냐 하면 지하철 택배 하는 할머니예요. 그런데 갑자기 경찰서에서 참고인으로 좀 보자는 거예요. 왜냐 하면 지하철 택배 하는 사람에게 마약이나 이런 불법 취급 물을 본의 아니게 배달할 때 보관함 35번에서 가져오라고 할 때 자기는 회당 8천 원 받거든요. 그 돈 받고 그냥 배달하는데 이게 마약인지 뭔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냥 가져다준다는 말이죠. 그것도 태국이나 중국에서 걸리면 사형감이지만.
한국에서는 지금 65세 이상 노인들이 지하철 택배를 하는 이유가 차비를 안 낸다는 사실과 8천 원을 다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택배용역회사는 그게 유리하거든요. 차비 안 드니 헐값에 쓸 수 있지요. 그런데 마약같은 경우 본의 아니게 연루되어요. 그러니까 불안하죠. 이 의도하지 않는 죄로 인한 불안감. 만약 이 할머니가 진짜 마약 운반하고 경찰서에서 소환했다고 할 때 정말 그 할머니가 성령이 함께 있다면 불안감이 아니고 ‘마약을 운반하는 것도 내 일인가. 주의 일이지’라고 갑자기 감사게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 인생에서 내렸잖아요. 어느 것 하나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는 환경이 아닌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전에는 내가 착하게 만들면 그 환경은 복이 되고 내가 나쁜 짓 하면 비극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거기서, 그 버스에서 내렸어요. 내려보니 그 환경은 이미 주님이 짜신 환경입니다. 그 성령이 오기까지 먼저 누가 와야 하는가. 바로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 거죠. 그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5장 16~20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건 그 당시 유대 사회에 말씀하시는 거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주님께서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손 씻고 먹음으로써 자기가 깨끗하게 되었다 할 때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겁니다. 그게 율법적 기능이에요. 율법적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높이뛰기 선수에게 바(bar)를 올리는 거예요. 우리나라 높이뛰기 신기록이 잘은 모르지만 2미터 50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더 잘 뛰는 사람이 2미터 60이라서 챔피언이라고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2미터 70까지 바(bar)를 높이는 거예요. 그리고 2미터 70까지 또 뛰면 80까지 높이고.
이렇게 주님의 율법은 내 안에 있는 돌멩이를 인간으로는 결코 뺄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불안감을 조성하고 할 때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내가 착한 일 해서 그 지시와 명령을 준수함으로써 나는 선하다, 나는 의롭다는 그 바(bar)를 뛰어넘으려는 악마의 본성을 주께서는 불안감을 더욱더 조성하는 겁니다. 그걸 보면 기독교라 하는 것이 참 무시무시한 마귀종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계속해서 교인들에게 불안감을 계속 조성하는 겁니다. ‘십일조 했다고 여러분 헌금 다 한 줄 알아요? 십의 2조를 해야지’라고 하면서 그거 하면 목사 지는 맛있는 거 사 먹으려고 하나, 차 바꾸려고 하나. 십의 2조를 왜 합니까. 여러분 교회 잘 나온다고 만족하지 마시고 지금도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에 불쌍한 영혼들이 지금 여러분의 헌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선교사들이 그곳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선교사들이 사진 찍어서 막 보내고 하거든요.
아프카니스탄에서 사람 죽은 거 알죠? 선교사로 가서. 우리나라 돈 40만 불인가 물어주신 거 아시죠. 국민 세금으로. 제발 좀 그런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에 사람들 문제는 그 나라 백성들에게 맡기면 안 됩니까. 오지랖도 그런 오지랖이 어디 있어요. 그들이 왜 거기 가는 거예요. 가면 우리나라 국적을 아예 없애서 그 나라 국민 되든지. 이건 두 다리 걸쳐서 돈은 여기서 받고 일은 거기서 취직해서 살고요.
그래서 또 선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 또 뭐라고 하는데 전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어떤 일도, 심지어 마약을 운반하는 일도 선교가 되도록 주께서 하신다는 말입니다. 좀 심했습니까? 그 안에 뭐가 있는지를 알 수가 있어야지. 바구니인지 뭔지 아무것도 몰랐잖아요. 나의 일은 우리 인생에서 미리 예측을 하는데 내가 내린 상태에서 주의 일은 예측 자체를 하면 불안해요. 예측 자체를 하지 마세요.
하루 살면 그걸로 족한 겁니다. 내일 되면 내일 택배 물건 또 있겠지요. 아침에 눈 뜨면 뭐 또 이거 운반하라고 지시전달이 오겠죠. 어차피 나의 일이 아니니까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보장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여기 네 속이 더럽다는 것을 더 발전시킨 것이 마태복음 23장 27~28절까지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여기서 외식이라는 말은 바깥으로 거짓되게 조작한다는 거죠.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는 이 말씀을 더 깊이 있게 보면 안에 더럽고 죽은 것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바깥 페인트칠을 아름답게 하는 거예요. 안에 있는 그것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바깥을 자기 자신을 괜찮게 위장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꾸미는 거예요. 왜? 세상은 다 그렇게 사는 거니까.
행복한 사람을 찾으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행복한 사람은 없어요. 성도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프로이트라는 유명한 정신분석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자와 남자가 어떻게 차이 나느냐. 여자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반면에 남자는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여자는 자식이나 남편이나 어떤 사람 자체를 좋아하고 반면에 남자들은 차 바꾸고 취미생활 바꾸고 맨날 어떤 대상을 바꾸는 거예요. 사람을 좋아해도 금방 식어버리고 그런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근래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에 버팔로대학에서 프로이트의 말이 맞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인간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여자의 경우 사람을 좋아하는 경우가 나를 좀 좋아해 달라는 뜻에서 사람을 좋아한다고 프로이트가 이야기했거든요.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오직 자기에게만 반하고 자기에게 도취한 사람은 남자는 거의 없고 여자에게는 많다고 프로이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미국 버팔로대학에서 그것이 맞는지 알아보려고 실험을 했는데 몇 명을 실험했느냐 하면 475000명을 실험했어요. 넉넉하게 했어요. 시간은 31년 동안 했고. 조사해 보니 남자가 더 나빠요. 남자가 대상을 좋아하는 것은 그건 임시방편이고 자기 자신이 너무 좋아서 대상을 하나의 이상 체로 만든 것뿐이지 남자나 여자나 자기만 챙긴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이미 증명이 되었어요. 자기 안에 돌멩이를 스스로는 못 끄집어내는 거예요.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남자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죄인만 있어요. 남자라는 형태의 죄인 그리고 여자라는 형태의 죄인. 그래서 인간이 속한 이 환경은 마귀가 지배하기 때문에 이 죽음 환경에서 자꾸 진동을 보내요. 자꾸 약을 올리고 불안하게 만들고 공포심을 조장해서 흔들게 되면 그 파동이 계속 이어지거든요. 그러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도 ‘기뻐, 감사해’라고 해놓고 돌아서서는 또 뭔가가 불안한 거예요.
이게 반복성입니다. 반복되는 이유가 ‘나는 구원 못 받았잖아요. 계속 감사하던데, 좀 전까지 감사했는데 지금 불안하면 구원 못 받은 거 맞죠?’라고 하는 데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사라는 것이 그냥 감사로 쭉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누가 환경에서 푹 절였다가 다시 나오게 함으로써 감사가 되풀이해서 나오게 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하냐면 인간이 그래야 자기 구원에 미치지 않아요. 인간이 자기 구원에 미치면 그것이 또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에요. 그게 자기 경배하는 거예요.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구원파 아닙니까. ‘언제 구원받았어요?’ 그걸 왜 묻느냐 거죠. ‘저는 구원받은 적 없습니다’ 도를 믿느냐고 묻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행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건 악마가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겁니다. 반복해서 감사가 나오게 하는 거예요. 감사가 나오면서 ‘참, 나는 버스에서 내렸잖아’라고 이미 내렸기 때문에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죽은 자가 머리 하나 안 하나 맨 그 머리가 그 머리지요. 이렇게 반복해서 감사가 되어버리면 내가 온 모든 과거나 이런 것은 새로 조립합니다. 그게 성경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저는 달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존경입니다. 존경하는 거. 남을 사랑한다고 할 때 사랑이 너무 흔하고 너무 값싸요. 사랑은 존경하게 되는 건데 존경하게 되면 상대에 대한 복수심이 사라져요.
그러면 누가 이익이냐. 내가 마음이 편해요. 복수한다는 것은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는 것이 이게 복수거든요. 그런데 나는 내 차에서 내렸거든요. 내리면 지금의 남편이고 아내고 자식이고 간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붙여준 주님의 일이 되어버린 겁니다. 주님의 일에서 나는 거기서 그냥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면 사랑은 존경심이라고 했죠.
존경심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독립심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따로 나의 독립심을 간직하거나 나의 자존심을 챙길 이유가 없다고요. 그게 사랑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바로 나를 조작하지 않죠. 오전에 제가 설교할 때 참 어려운 이야기를 한 가지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성도는 약점을 일부러 만들라고 했어요.
왜냐 하면 약점 만들면 그 약점은 제일 먼저 누가 아느냐 하면 내가 알아요. 내가 알기 때문에 남에게 내가 낫다는 소리를 못 해요. 왜냐 하면 내 안에 약점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만들어줘요.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줘요. 너는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서 ‘더 이상 내려가면 안 되는데’라는 버스에서 내려버려요. 그것도 주님의 대속물답게, 주님의 사랑의 대속물이 섞여 있는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려고 의도적으로 우리를 갖고 노시는 거예요. 그러면 갖고 노시도록 맡기면 되지 않습니까.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그동안 나를 갖고 놀았는데 이제는 피조물인 이상 창조주에게 맡기게 하옵소서. 내가 어떠하고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나는 무엇이고 하는 변명거리 늘어놓게 하지 마시고 모든 주어진 일에 존경심을 보내어서 독립심을 상실하고 복수심 없는 그런 기쁨이 계속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