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2021. 11. 17. 08:52

372강-YouTube강의(권세 마태복음 21:32)20211116-이 근호 목사


제372강, 제목은 ‘권세’. 권세라 하는 것은 그 당시 자기 유대나라를 다스릴 때는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할 때 권세를 말합니다. 자기들은 부족하지만 아주 센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지켜준다, 그게 권세인데 그 권세를 기다린다는 것은 바로 선지자를 기다린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선지자가 오게 되면 구약 때 약속했던 일관성이 이 시대에 자기에게 완성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선지자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 가운데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살리기 위해 선지자를 우리 시대에 나타나게 하셨다’, 이것을 그들은 신앙이라 본 거예요. ‘너 말고 너 말고 너 말고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 찾기 또는 그걸 찾아서 우리는 그 사람이 하는 것을 믿으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말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보통 인간들의 말하고는 차이가 있으니까 권세 있는 선지자의 말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그렇게 믿은 겁니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참 순결한 믿음처럼 들리죠. 일반 사람을 안 믿고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을 믿으니까. ‘그 사람은 하늘의 권세를 지니고 왔기 때문에 하늘의 권세 있는 사람을 찾아보자’ 라고 찾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들이 찾은 권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5절에 보면 이미 그 당시의 대중들이 나름대로의 신앙체계가 갖추어져 있고 거기에 합당한 선지자가 왔다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 사람이 세례 요한인데 25절에 보면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렇게 물었어요. 이것은 물음 자체가...... 이건 뭐 답은 딱 나와 있어요.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건 하늘로서다. 그러니까 요한이 세례준 것은 드디어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 비췄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만약에 어느 교회에 목사님을 새로 옹립했는데 옹립할 때 그 교인들의 희망사항이 우리 새로 옹립된 그 목사님은 사람에게서 나온 그런 권세 말고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사랑해서 주신 권세를 덧입은 그런 사람이기를 간절히 생각하면서 그 사람의 설교라든지 그 분의 목회에 대해서 전적으로 따르고 순종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자세에 대해서 교인들은 순수한 믿음이 있다고 그렇게 자부하는 거예요. 땅의 것이 아니고 하늘의 것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기에도 ‘세상에, 아이고 나도 참 믿음 대단하다. 하늘의 권세를 이렇게 생각하니까.’ 교인들 본인 스스로가 얼마나 의젓했겠습니까. 우리가 저 목사님의 하늘에서 온 권세를 믿기만 한다면 우리 교회에 등록된 사람은 내일 죽어도 천국 간다는 보험 같은 것, 편안한 마음을 그들이 보장받을 거겠죠.
그런데 마태복음 21장 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이게 이제 하늘의 권세가 어떤 모양새로 오느냐에 대해서 너희들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늘에서 주신 것은 무조건 옳은 것이고 무조건 바른 것이다. 나는 이 세상 세속적인 사람같이 이 세상을 찾지 않고 하늘의 것만 추구하니까 정말 나는 믿음 있다고 장담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오신 경우를 들어서 이걸 구분합니다. 세리와 창기는 세례 요한을 믿었다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는. 그런데 세리와 창기는 믿었는데 너희는 세례 요한의 의의 도를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세리와 창기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어떤 요소를 보태었느냐 하면 뉘우친 거예요. 뉘우쳤다는 거예요. 그냥 받기만 한 것이 아니고 뉘우친 거예요. 뉘우쳤다는 말은 ‘하늘에서 어떤 권세가 오게 되면 내가 한 것은 일체 죄이고 더럽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일에 성실히 임했건 어떻게 열심히 했건 하나님께서는 그걸 죄로 규정해서 안 받는다’ 라는 뜻이고 바로 세리와 창녀가 그걸 인정하고 그런 마음을 가졌어요.

그러면 세례 요한이 가진 권세는 뉘우침이 함유된 믿음만 믿음이라고 간주한 권세이고 그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 이 말이죠, 세례 요한. 그럼 다른 사람은 뭡니까? 제가 아까 예를 들었던 다른 사람은 뭡니까? 뉘우칠 생각 없어요. 그냥 하늘의 권세를 내가 살아가는데 추가해서 추가적으로 내가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는 받기만 하는 게 아니고 뭘 경유했어요? 내가 이 땅에서 하는 어떤 것도 이것은 정말 추하고 더럽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사람들은 그 당시에 나쁜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겠죠. 세리와 창기는 나쁜 일을 한 게 아니고 돈 버는 일을 했어요.

돈 버는 일이 뉘우치는 일이 돼요. 이 땅에서 돈 버는 일이 뉘우치는 일이 돼요. 이게 일반인들에게 수긍됩니까? 수긍될 리가 없죠. 수긍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서 돈 버는 일을 하게 되면 필히 누구도 세리와 창기 수준이 될 수밖에 없음을 세리와 창기는 그걸 온 몸으로 노골적으로 보여준 거예요, 노골적으로.

그들은 노골적으로 보여줬고 다른 사람들은 음흉하게 그걸 감추면서 그걸 정당화한 겁니다. ‘아니 일 열심히 해서 노동해서 돈 버는 게 뭐가 나쁜데? 아니 뭐 문제 있을 수 있지. 하지만 돈 벌어야죠.’ 이게 뉘우침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이 땅에서 돈 번다는 자체가 필히 나의 허접함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그러한 계기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리와 창기는 그대로 인정한 겁니다. 누구 앞에서? 하늘의 권세 앞에서.

사람들은 하늘의 권세를 그렇게 보지 않고 나름대로 착실하게 사는데 조금 문제 있고 모자람이 있겠죠. 그때 하나님의 권세까지 보태버리면 나는 죽어도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목사 하는 일이 창기 일하고 equal(동일)이 된다는 생각을 어느 목사가 하겠습니까?

‘아, 추잡하고 더러워라, 이 목사일.’ 목사 중 누가 그런 고백을 하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평생 주의 목자였습니다. 이 더러운 창기 짓을 했습니다.’ 목사 일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 신학교 가자. 창녀짓 하러 가자.’ 이런 식으로. ‘신학교 왜 왔습니까?’ ‘창녀짓 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서약하고 신학교 간 사람 봤어요? 못 봤죠. 이게 문제에요. 이게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아주 우습게 본 거예요.

그 당시에 또 어떤 파가 있느냐 하면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겨우 밥 먹는 일만 하고 최소한의 노동만 하고 나머지는 기도와 성경 읽기에 몰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은 일체 더럽다고 해가지고 일체 세상의 어떤 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기도 안 잡고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세상은 더러우니까 우리는 의로우니까 의로운 사람답게 말씀에 전념하자.

그 사람은 직장에 안 다녔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 되는 기회를 놓친 거예요. 돈 버는 일을 안 했잖아요. 그냥 텃밭 가꾸고 최소한의 죄로 줄이기 위해서 직장을 안 다니다 보니까 지가 얼마나 돈 밝히는지 지가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다 박탈당했습니다. 갑자기 기쁘지 않습니까? 돈 버는 일이 기쁘죠?

돈 벌게 해서 창녀 되게 해가지고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왔을 때에 ‘저요!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하고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지금 여러분한테 줬습니다. 평생 직장 안 다니고 가정주부해도 마찬가지에요. 줬어요.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야기 더 하다가는 욕 얻어먹겠다. 이 기회가 바로 창녀하고 우리하고 다를 바 없다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28절-30절에 나옵니다. 두 아들 비유할 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 하겠다 하다가 안 갔고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 했다가 뉘우치고 갔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권세를 그냥 받지만 그렇지 않고 뒤집어서 받을 수 있는 안목. 그게 바로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제대로 알아보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