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세계
내면의 세계
2021년 11월 7일 본문 말씀: 욥기 32:6-10
(32: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32:7)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32:8)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32:9)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32:1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엘리후는 다른 친국들 사이에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듯이 끼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논쟁 자체를 엎어버립니다. 그들은 인간 외부에서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질서를 찾으려고 합니다. 자신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하자가 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들 친구들이나 욥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일관성에 장애물이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런고하니 그들은 역사적으로나 체험적으로 옳고 바른 것들을 수집하면서 진리체계를 다듬어 왔기 때문입니다. 항상 바른 생각만을 얻고자 하는 본인의 노력이 점점 본인 자체게 잘못이다는 생각을 못 갖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즉 선을 향한 집념으로 인해 점점 악의 나락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찾고자하는 의미와 진리는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억지가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주셨습니다. 이 고난과 고통은 욥만 느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인간들, 즉 친구들의 한계를 아울러 들추어내는 고통입니다. 그들이 여태껏 긴긴 인생을 살면서 구축한 그 진리체제가 자신들의 망할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된 겁니다.
그것은 진리는 진리를 찾는 본인까지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욥을 통해서 알려진 바와 같이 인간은 반(反)-작용을 내뿜고 반항의 기질을 드러내면서 반대쪽에 자아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즉 어떤 경우든 자아가 파괴되는 경우는 자아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식입니다. 욥과 욥의 친구가 다 그러합니다.
이런 와중에 엘리후라는 네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외부에서, 하나님의 뜻과 질서의 출발점을 찾지 말자고 나옵니다. 세월 따라 차곡차곡 지혜가 쌓였다고 해서 그것이 내면의 세계까지 파괴시킬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굳은살이 그동안 누적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말합니다. 나이 먹었다는 사실이 진리답게 하는데 요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업 처소는 인간의 내면, 즉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는 인간의 내면이 결코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작업은 외부에서 찾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욥기에서는 인간의 한계성까지만 말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이 인간들의 한계가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다 전달됩니다. 그 예가 시편 136:10에 보면,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죽음의 현장‘이 만들어집니다.
인간의 내면과 마음을 감화, 감동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인간을 죽여버리는 조치를 내리시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등장하십니다. 인간의 내부를 하나님깨서 이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 세계를 파괴하십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들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하기에 그 내부 아지트에 대한 단호한 파괴를 실시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냥 인간을 만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를 거쳐서 하나님에게 다가오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내면을 하나님 자신의 활동 영역으로 변조시키시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의 의로움이나 훌륭함도 완벽하게 남지기 않는 식으로 하나님 홀로 말씀 성취를 해나가십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에 오해할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는, 자신의 내부 마음이 늘 옳은 구석이 있음을 기정 사실화하면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만은 제대로 붙잡아둘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17-19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7-19)
이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당분간 심판하지 않고 대신 그 시간에 구원에 나서시겠다는 의견을 표하셨습니다. 하지만 곧 뒤에 나오는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벌써‘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심판은 나중에 온다‘는 선입견이든지, 아니면 구원이 있고 난 뒤에 심판이 주어진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엎어버리는 말씀이 됩니다. 구원작업 이전에 벌써 전면적인 심판이 발생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들은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심판대상이 됨을 못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시므로서 인간의 내면과 예수님의 내면에 극단적 차이가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우리가 뭘하면 구원받겠습니까” 묻게 되면 주님은 “너희들은 벌써 심판받았다”가 됩니다. 그럴 때, 인간들이 또 주님께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인간 세계에 오셨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나에게는 벌써 심판받은 자가 필요한 이유는 그 안에 예수님의 자신의 구원을 펼치기 위해서이다”라고 답변하십니다. 즉 독생자가 찾아온 사람은 그 독생자로 인하여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겁니다. 중립지역에서 구원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 말씀은 다음과 같이 대 활약을 펼쳐 인간의 내면을 유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즉 나 내면에 나의 것이 일체 남겨지지 않기 위해 심판작업을 벌리시는 그 일이 곧 구원작업이 되는 겁니다. 이러니 욥이나 욥의 세 친구들이 주장하는 ’나의 의로움‘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내부에서 복음이 나와야지, 내부에서 나의 의가 나오면 아니 됩니다. 이처럼 나의 내부는 내가 내뱉은 말로서 그 정체가 나타납니다.(약 3: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주님만 사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8강-욥기 32장 6~10절(내면의 세계)21110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2장 6~10절입니다. 구약성경 790페이지입니다.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년소하고 당신들은 년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그동안 욥과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대한 해석에서 대자연의 운행, 대자연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뜻, 이런 것을 가지고 설명을 하려고 했습니다. 자연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만든 것처럼 욥 너도 하나님의 자연에 일부니까 자연의 이치대로 하나님께서 너를 다루신다. 그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너에게 힘든 일을 시키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일관성에 네가 위배 되기 때문에 너는 벌 받아 마땅하다는 이것이 욥의 세 친구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 중립을 지키고 침묵을 하세요. 말씀을 안 하십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말이 많았습니다. 친구보다 더 말이 많았던 자가 바로 욥입니다. 욥에 의하면 ‘너희들 이론대로라면 내가 고난받을 이유가 없는데 왜 나에게 고난이 오는 줄을 나는 모르겠다’라고 그렇게 모르겠다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나중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잘못 구분해서 고난을 주실 사람에게 주지 않고 엉뚱한 나에게 고난이 떨어졌고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내가 납득이 안 간다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일에 욥이 납득이 안 간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살펴볼 때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잘못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잘못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잘못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처벌이 과연 하나님의 일관성에 부합되느냐,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부합되느냐는 그 문제에 대해서 욥의 세친구와 논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2장에 들어가면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라는 사람이 등장하죠. 엘리후는 하나의 의견을 제시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너희들 욥과 합쳐서 네 명인데 나도 하나 껴달라는 이런 것이 아니에요. 그 논쟁을 즐긴다든지 그 논쟁을 이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 엘리후가 이야기하는 바를 아주 어렵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물질로 되어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미는 새로운 영역, 새로운 영토를 만든다. 새로운 영토. 어떤 영토냐 하면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것이 엘리후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발생시키느냐. 하나님의 의미라는 것은 외부에서 인간이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고 아무 의미가 없는 인간 속에 하나님께서 그 안에 새로운 의미의 장, 의미의 영역을 따로 계시한다, 또는 시작한다는 겁니다.
말이 너무 어렵죠.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안 다녔어요. 절에도 안 가고 평소 세상 사람, 현대인들처럼 그냥 돈 벌고 일하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갑작스럽게 성령이 임한다고 합시다.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구원받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역시 나는 죽으면 천국 간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상 못 한 새로운 의미, 나와 관계 끊어진 상태에서 나오는 새로운 의미를 주님께서 내 안에 새로운 주님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살아온 인생은 뭐냐 하면 하나의 보자기 역할밖에 안 돼요. 알맹이는 주님이 알맹이고 나는 그것을 둘러싼 보자기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보물 있다는 겁니다. 내 안에 보물단지 있다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에게 이야기할 때 ‘너 잘났나? 나도 잘났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문제 없다. 나는 하자 없다. 나는 내가 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 인생 꼬이는지 모르겠다. 나는..나는...나는...’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 새로운 사람은 주님이 나에게 새롭게 마련한 의미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엘리후입니다.
그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 이야기할 때는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논리는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만큼 정보의 양, 지혜의 양이 누적되어서 젊은 사람보다 더 많아진다는 것이 상식이에요. 배운 만큼, 이 세상에 체험한 만큼, 그렇게 되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명한 말에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가는 것이라고 했지요. 노사연이나 임영웅이 노래한 것을 들어보면 나와요.
사람은 익어가는 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세월이 필요하다는 거죠. 세월이 필요한 거고, 노련함이 그 값을 한다는 겁니다. 노련함이 너무 값을 해서 나중에 노망들죠. 노련함 백날 하면 뭐합니까. 단단한 이기주의 되고 완전히 변비 되어있는데. 정말 답답해요. ‘우리 아버지가 저렇게 고집이 셌나?’라고 하는데 원래부터 고집이 셌는데 아닌 척하고 있었지요.
나중에 나이 드니까 이제 우사스러울 것도 없고 가식적인 것 다 비듬 떨어지듯이 툭툭 떨어지니까 나중에 남는 것이 고집! 그 유명한 고집이 나중에 성이 붙어요. 최 고집, 김 고집, 정 고집, 박 고집, 이 고집, 오롯이 고집만 남고 나머지는 다 사라져버리죠. 오직 나는 나를 위해서 내 방어 외에는 마지막에 남는 기억이 뭐냐. 나 방어하기, 내 의로움 지키기, 이런 거죠.
그러니까 욥과 세친구에 대해서 네 번째 엘리후는 그걸 본 겁니다. 여기를 보면 8절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신약 성경에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큰 기적이 있기를 원합니다. 태풍이 와도 태풍에 아무 피해가 없는 기적, 가뭄이 오게 되면 속히 비가 내리는 기적, 어떤 전염병이 오면 바람 불어서 전염병이 다 사라지는 기적, 이런 기적들이 뭐냐 하면 나를 멀쩡하게 도움 줄 수 있는 것을 기적이라고 해요.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거, 나에게 이익이 되는 거, 그때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의미 있다고 해요.
사람이 자기와 관련 없으면 의미가 없어요. 그러나 자기에게 관련 없으면 의미 있는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용하고 예수님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하나님께서 좀 도와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 예도 어려운데요.
예를 들어서 ‘나 기차 탔다. 참 잘했지?’라고 서울로 학교 보낸 딸이 금요일에 와서 주말 보내고 기차를 타서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해서 ‘엄마, 나 기차 탔어. 다음 주에 봐’라고 하고 갔을 때 딸이 기차 타는 것을 ‘그래 잘했어. 잘 탔어’라는 이것은 그 집안에만 의미가 있어요. 옆에 사람은 전화 건다고 시끄러워요. 그 집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의미는 항상 나를 품어야 의미가 있는 겁니다. 얼마나 이기주의예요.
욥이 그 한계를 못 벗어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신다. 예수님도 마치 그런 것 같아요. 물이 포도주 되고, 물 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 주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고 사랑의 역사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잘못된 거예요. 그게 나에게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야, 기적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언약적 완성은 나에게 유리하다는 그 의미 자체가, 그 내부를 찢어버립니다. 쪼개버려요.
말씀이 들어와서 그동안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칼로 북을 찢듯이 찢어버려요. 아예 우리 의미는 주님 하시는 일에 근처도 안 가게 그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은 자연을 총동원해서 움직이는 기적이지만 진짜 하나님의 기적은 십자가 지셨다가 아니라, 십자가 지신 그것이 우리 마음속까지 쑥 집어넣으실 때 우리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확 달라집니다.
‘그동안 평생 내가 말한 것이 나 잘났다는 티를 내기 위해서 말해 왔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욥의 세친구 그런 것을 계속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후는 하나님이 투입한, 하나님 입장에서 유일하게 평할 수 있는 엘리후는 그게 답답한 거예요.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 것이 아니다. 주님이 네 안에서 너의 이야기만 하는 너를 어떻게 찢어버렸는가 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이 주인공 되어야지 언제까지 내가 주인공 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욥의 이 이야기를 여기 9절에 보면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라고 완전 노인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죠. 그러니까 노인들에게 지하철 공짜 표를 주면 안 된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월남전부터 해서 지금까지 한국이 이렇게 잘 살기까지 지금의 노인들이 젊었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멀리 사우디까지 가서 고생 고생했거든요. 실은 돈 벌기 위해 간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돈 벌기 위해 갔지만 국가적으로는 외화벌이가 된 거예요. 독일로 간 간호사나 광부들. 한국에 있는 어지간한 직장보다 서너 배 더 주니까, 월남전 가면 카메라 새롭게 살 수 있으니까 갔지만 국가적으로 봐서는 공로가 많기에, 지금의 경제 성장을 위한 토대가 되었기에, 예우상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하철 실버카드 해서 국가 예산 가운데 복지 예산 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도시철도 적자가 2천억인데요.
노인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그들이 노인이기 때문에 준 것이 아니고 그들이 사회에 기여한 것을 우리가 잊지는 말자고 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 후손들이 나라가 될 때 외롭고 쓸쓸하고 돈 없는 우리를 대우할 거니까요. 그런데 엘리후는 바로 그런 것들이 인간적인 의미라는 거예요. 나에게 뭔가 콩고물 떨어지고 이익이 되니까 ‘하나님 참 좋으신 분이고’라고 그런 식으로 운을 떼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이방인들인 욥과 친구들 말고 진짜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전달 되는가.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편 136편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기 죽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 구슬리고 잘 달래고 잘한다고 긍정적 사고방식을 주입 시켜서 일하게 하는 것이 주의 일이 아니에요.
‘젊은 아이가 일도 잘하네. 잘한다. 잘해. 승진시켜줄게’라고 힘 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너 실수 했구나. 죽여버린다’라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 일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죽음을 동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살아있는 한 내 의미 위주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내가 살아있는 한. 무슨 일을 만나도 어떤 뉴스를 듣더라도 ‘저게 나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코로나 백신을 맞았는데 돌파 감염이 될 때, 저 돌파 감염이 나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나도 두 번 맞았는데 두 번 맞은 것이 실패로 끝나면 세 번째 부스터샷까지 하나 더 맞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부 다 사람들이 떠오른 게 딱딱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게 나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되면 의미 있고 손해가 되면 나는 무의미하고. 전부 다 그 생각밖에 없는 거예요.
생각하는 것은 전부 다 자기 생각뿐인데 거기에 덤으로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니 이게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서로 맞지 아니하다) 하나님의 의미와 내 의미가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존재는 반작용적입니다. 인간이 반항하니까 주의 의미를 나에게 집어넣기 위해서는 반항하는 존재인 나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것을 파괴시키죠. 죽어라. 인간아. 죽어라, 이 존재야.
죽지 않으면 자꾸 내 의미를 곁다리로 주님의 하는 일에 끼워 넣어요. 그러면 온전히 주님만의 공로가 아니고 얼추 나도 좀 보탰다는 나의 구원에 좀 도움이 되었다는 이런 식으로 같이 붙어서 가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안 받아주죠. 받아주질 않습니다. 오스카상을 받은 미나리라는 영화에 보면 눈물 날 장면이 있습니다. 미국 아칸소주로 이민 간 가족 중에 할머니가 TV를 트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 나오는 유명한 노래가 TV에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라라 에로스퍼’가 부른 ‘사랑해 당신을(사랑해)’이라는 노래입니다.
‘라라 에로스퍼’의 뜻은 ‘개구리와 두꺼비’예요. 얼굴도 조금 닮았어요. 남녀가 함께 부른 노래인데 ‘사랑해~당신을~정말로 사랑해~’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나중에 ‘라라 에로스퍼’ 밴드에서 나와서 은희라는 가수가 단독으로 할 때 가사 끝부분이 바뀌어요.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예예예예~~~’ 이렇게 노래를 부르다가 ‘미워해 당신을 정말로 미워해~, 예예예~’라고 하면서 끝나요.
은희씨가 뭘 느꼈느냐 하면 미움은 사랑했기에 생겨나는 것이 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사랑했기에 사랑은 미움이 들이닥치는 예비단계가 사랑입니다. 사랑 안 했으면 미워하지도 않았어요. 사랑에 몰빵해서 자기 의미를 다 준 거예요. 내 의미 다 가져가라. 당신이 다 가져가고 나는 의미 없이 당신만 쳐다볼게. 이렇게 그 말을 함축시켜서 ‘사랑해 당신을’이라고 했는데 그 사기꾼이 내 의미 몽땅 가져가서 사기 치고 달아나니까 그다음부터는 미움으로 그 대상을 향해 화살을 쏘는 거예요. ‘미워해 당신을’이라고 그 사람을 미워해야 속이 약간이라도 위로가 될 정도로 미워하는 거예요.
‘요소수’라는 일반인들은 듣기 힘든 이 요소수가 품귀현상이 일어나서 화물차가 못 움직인다고 하잖아요. 요소수가 품귀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이 요소수 만드는 공장들이 우리나라에 있는데 그 공장에 전화해서 자기가 KT(한국통신) 회사에서 전화하는 것처럼 사기 쳐서 “요새 전화 많이 와서 받기 귀찮죠? 일단 제가 드리는 번호로 다 돌려놓으시면 우리가 받아서 일에 편리가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리고 이 사기꾼이 회사전화번호를 자기에게 돌려놓고 요소수 찾는 사람들에게 먼저 선불로 천만 원, 백만 원 받아내서 도망갔어요. 사기 쳤습니다. 공장에는 전화 안 왔는데 그쪽에서 다 가져갔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의미가 있고 욕망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사기가 출현하기 마련이에요. 이건 전화 건 사람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기꾼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세상은 이런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고 봅니다. 이게 욥의 한계이고 욥 친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약간 신약적인 사람이에요. 십자가 이후 사람같은. 왜냐 하면 말씀은 우리를 후빈다는 겁니다. 여기 히브리서 4장 12~13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여기에 나이 많은 것이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은혜를 받아도 이 정도는 받아야 해요. 내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나의 모든 고민과 걱정과 평소 모든 염려가 일거에 ‘어디 갔지?’라는 식으로 사라져버리려면 내 내면이 북 찢듯이 찢어져 버려야 해요. 말씀에 의해서. ‘너의 속 자리는 네 자리 아니고 내 자리야’라고 말씀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속이 시원한 말씀은 내용이 어떤 것이며 어디서 오는 건지 여러분이 묻고 싶죠.
도대체 어떤 말을 들으면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걱정근심도 앞으로의 모든 걱정근심도 일거에 사라지는 그런 말씀이 있는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은 우리 이익과 나의 의미와 전혀 동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한번 듣기는 들어보세요. 요한복음 3장 17~18절에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직은 심판 때가 아니라는 거죠.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분명히 3장 17절에는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되어있는데 3장 18절에는 벌~써, 이미 너희는 심판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듣게 되면 우리가 할 몫이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는데 내가 할 게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근심 걱정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려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관련 없는 것 가지고 고민 걱정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 일은 내 속에 주께서 친히 일하는데 우리가 거들 것이 없습니다. ‘다음 대통령은 제발 간첩이 안 나타났으면 좋겠다’라고 경사도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하고 전라도 쪽은 ‘제발 다음 대통령은 돈 가진 거 다 뺏어서 노동자에게 다 나눠주면 좋겠다’라고 고민하죠. 제가 지금 정치적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욕하지 마세요.
이게 전부 다 의미 있는 거예요. 누구에게? 나에게 이익이 있기 때문에 대통령 잘 뽑아야 하는 것이 걱정근심이 되어서 내년 3월 29일까지 가는 거예요. 내년 3월 되면 점점 더 초조해 지지요. 벌써 심판받은 겁니다. 아직도 본인이 살아있어요. 주의 말씀이, 주의 완성이 살아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미완성이 살아있어요. 내 안에. 나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이렇게 잘되어야 한다는 미완성.
그게 욥과 욥의 세친구라는 겁니다. 당신의 내면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전에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나레이터 모델이 신장개업하는 곳 앞에서 춤추면서 “제 다리만 보지 마~시구요~~”라고 하면서 춤추잖아요. 엘리후가 그러는 거예요. 남의 다리 보지 말고 네 다리부터 먼저 좀 봐라. 너를. 도대체 하나님이 너에게 뭐냐는 겁니다.
네 의미만 만족시켜 주고 네 문제나 해결해 주고 너의 고통 없애주는 그런 시다바리 하나님이냐는 거죠. 엘리후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너는 작고 그분은 큰 분인데 왜 작은 나에게 큰 분을 억지로 잡아당기냐는 겁니다. 그것이 너에게 무리수였다는 겁니다. 다시 시편 136편에 와서 하나님의 일은 애굽의 장자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시편 136편 15절에 보면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애굽 군대를 죽이고 바로의 장자를 죽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우리는 진정 그 ‘인자하심’이라는 새로운 의미에 우리는 푹 젖게 되는 겁니다. 내 욕망과 욕심을 채워주는 것이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고 쓸데없이 염려 걱정하는 원인 제공 요소인 나의 탐욕을 찢어버리시는 것이 주의 인자하심이고 우리는 영원히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끝으로 야고보서 3장 6절을 보겠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그러니까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갈 이야기만 나오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 이야기가 자기 입을 통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입은 마이크 같아서 아무 의미 없어요.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에 무슨 의미로써 뭉쳐있고 다져져 있느냐는 겁니다. 뱀이 똬리 틀고 있느냐, 악마가 내 안에 똬리 틀고 있느냐, 아니면 천사가 주님의 다 이루심을 왕왕 공명 나게 나를 울려주면서 “걱정하지 마라.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서 날마다 천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느냐. 자기가 아는 이야기가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겁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짜증 나는데 짜증 날 수밖에 없죠. 불평 나면 불평 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좋아하다가 서로 싸울 때는 막 욕하고 싸우죠. 그 마지막 끝에서는 웃으면서 끝나야 해요. 쭉 인상 쓰고 죽인다 살린다 해놓고 “이게 바로 더러운 내 모습이었어. 미안해요”라고 웃으면 얼마나 좋아요. 네가 감히 나에게 주먹질해서 코피 나게 하고 입원 3주 하게 해놓고 “이게 바로 나의 더러운 속성이었습니다. 미안하오. 패버려서”라고 하면 상대방도 “나도 미안합니다. 당신 두 번 때릴 때 나는 세 번 때려서 미안합니다”라고 둘 다 얼굴에 붕대 감고 벌게져서 둘이 병원에서 만나서 서로 “미안하오”라고 하는 것처럼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본인의 의미를 전시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런 의미였었는데 주님께서 나를 개 패듯이 팼다’라는 이야기가 바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부싸움을 하든 누구와 시비 걸 든 마지막은 그것이 바로 숨겨진 나의 본성이고 죄였음을 십자가 앞에서 웃으면서 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말을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