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의식
주체 의식
2021년 10월 10일 본문 말씀: 욥기 31:16-23
(31: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31:17)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31: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31:19)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31:20)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31:21)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31:22)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31:23)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욥은 계속 상대방에게 반문하듯이 이야기합니다. 이는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즉 “나는 잘하고 있다”는 말은 “내가 잘못된 것을 너희들이 찾아보라. 찾아볼 수 있는가”라는 식입니다. 내가 내 것을 지키고 싶은 바에 대해서 너희들도 내 시도에 동조해 달라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욥의 이러한 태도는 바로 오늘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인류는, 민주주의가 노골화되기 전에 자신들의 말을 자신의 말로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국가나 권력자나 지도층이나 지도 계급층에서 그들의 말을 대신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권한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의 본심을 그 사회를 향하여 말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기존의 권력이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백성들의 말하는 바를 일방적으로 정해서 되돌려 지시하는 식으로 개인을 통제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은 시대를 앞서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유감없이 다 털어내어 놓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욥에게는 모든 인간이라는 누구가 덧쒸어진 그 한계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욥이 기대하는 자신의 장래 모습은 기존의 것을 고쳐 쓰는 식으로 자아상입니다. 즉 신약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의식은 없습니다.
기존의 삶의 원리를 철저하게 사수하고 완전하게 만드는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통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욥은 자신의 선함을 타인의 선함을 견주면서 자기 위치를 정합니다. “나처럼 착하게 산 사람 나와보라고 그래!”입니다. 이러한 비교방식이 사람에게도 군말없이 통하듯이 하나님에게도 그대로 통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신약의 입장에서 볼 때, 욥이 근원적으로 잘못 생각하는 바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만을 행하고 그 가치를 자신의 위치에 되가져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여지없이 ‘주체 의식’입니다. 주체의식이란 곧 ‘주인의식’을 말합니다. 인간은 그냥 몸 그 자체만으로 자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몸에 영혼을 불어넣듯이, ‘저 몸이 바로 나의 몸’이라는 의식으로 자기 신체를 이해합니다. 즉 ‘몸’과 ‘나’를 구분하면서 자기를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몸이라는 신체를 보지만 각자 중요시 여기는 ‘자아’에 대해서 서로가 아는 바 없습니다. 심지어 같은 가족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체의식’이란 세상을 보는 모든 관찰의 중심에 자신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의식입니다. 나를 위해서 세상을 보고, 나를 위하여 세상을 탐구하고 관찰하게끔 되어 있다는 겁니다.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매사가 이런 식이나 아무리 상대방을 높이고 상대방을 인정해주어도, 결국 상대를 인정한 자는 바로 나다는 의식은 지울 길이 없게 됩니다.
과학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어놓습니다. “사과는 왜 둥글까?” 그것은 과육을 품은 수분을 안 빼앗기기 위해 최적의 형태가 둥근 모양이라다는 겁니다. 즉 과육의 부피는 최대, 겉넓이는 최소가 되는 모형이 바로 둥근 구모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호기심은 곧 인간들의 주체의식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은 이런 취지를 따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17:9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주체의식을 가지고 타인을 대하게 되면, 그 사람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사물’ 혹은 ‘물건’처럼 다루어지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기에 어떤 사람을 사랑했는데 사랑하고 난 뒤, 그 사람은 그냥 사물, 혹은 물체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에게 고작 이것을 내가 그토록 죽고 못사는 지경으로 사랑했었어?” 라고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은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인간이 주변을 살피고 관찰하면서 벌써 주체의식이 작동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에게는 내가 궁극적 의미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을 본인이 나서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사과가 둥근 것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인간들이 아무리 사과를 들여다보와도 사과 안에서 이런 결과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미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되고 썩어버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관찰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다라서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의미 있다’하는 그 모든 것을 ‘의미 없음’으로 돌려놓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3장까지 보면, 사도 요한에게는 아예 교회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모조리 다 촛대를 옮길 대상자들입니다. 촛대는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신 경로를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생각하는 것은 교회의 주체의식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주체의식으로 스스로 힘으로 지워버릴 수가 없듯이 교회가 스스로 자신을 부정할 수가 없어 하나님께서 악마의 활동을 통해 지상에서 교회를 없어버리시는 겁니다. 교회가 없어지기 위해서 교회가 필히 있어야 하듯이 인간들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주체의식을 평생이 다가도록 여전해야 합니다.
인간들은 궁극적으로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 일이라는 느낌을 동반하면서 모든 경우를 받아들이고 있게 됩니다. 욥이나 유대인들이 모두 이 지상에서 주체의식에 준해서 살아온 모든 기준들이 그대로 하나님에게도 통하리라고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연구하기 위해 6세 아동 때부터 학교를 다녔던 신약 시대 이후의 유대인들은 결국 어릴 때부터 알았던 문자 기능으로 인하여 나중에 도시에서 상인과 장인으로 취업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위주입니다. 평생을 가도 안 바뀝니다. 따라서 신약 성도에게 참으로 신기한 일은, 본인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언급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 자기 말고 사물처럼 대할 수밖에 없는 그 예수님을 진정한 자신의 주체자로서 이해하는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현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주체의식을 끝까지 이끄시는 방식으로 우리 마음이 얼마나 더럽게 부패한지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4강-욥기 31장 16~23절(주체 의식)21101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1장 16~23절입니다. 구약성경 790페이지입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나를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욥이 친구들에게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자기를 변호하는데 자기의 죄를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얼마나 의롭게 살았는지를 변호하는 겁니다. 왜 그런 식으로 변호했는가 하면 ‘나뿐만 아니고 너희도 마찬가지잖아. 너희도 잘난 맛에 살잖아. 잘난 맛으로 산 것도 한번 배틀 해볼까? 누가 잘났는지를, 누가 바르게 살았는지를, 누가 선행을 많이 했는지를 한번 시합해봐?’라는 식으로 나갑니다.
욥이 사람과 사람끼리 대결해서 그들을 입 다물게 만들고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그 기준과 방식이 욥은 그대로 하나님에게도 통할 줄 알았던 겁니다. 내가 사람에게 선행 가지고 견주어서 내가 이기게 되면 그것은 아마 하나님도 이 땅에 오시면 누가 선행을 많이 했는가를 시합 붙여서 최고 승리자에게 456억이라는 상금을 주는 그런 오징어게임이나 하시는 분으로 욥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욥의 이런 선행자랑은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우리의 내심, 우리의 본심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뭐 기도라고 정하지 않아도 무심코 평소에 갖는 마음가짐은 ‘하나님, 그래도 나쁜 짓은 안 했잖아요. 이런 어려움은 웬 말입니까? 내가 아무리 봐도 그렇게 독한 짓은, 나쁜 짓은 안 했잖아요’라는 것을 입버릇처럼 하나님 앞에 내뱉게 됩니다.
그걸 노골적으로는 말 안 하죠. 또 건방지다고 잔소리 들을까 싶어서 입을 꾹 닫고 참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도 남이 보기에도 그다지 악하게 일부러 악하게 산 적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라는 마음 자세가 되어있어요. 그래서 19절에 보면 욥이 말하는 투가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라고 나오는데 부정어가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부정어가 계속 들어간다는 말은 이런 식입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착하게 했다’라고 간단하게 하면 되는데 내가 그들에게 나쁘게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한번 찾아보라고 말하는 버릇이 계속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자기가 지킬 것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내 것을 지켜야 한다는 이것만큼은 내가 너희들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나의 잘남을 지키고 싶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남에게 욕 얻어먹을 짓은 안 했잖아?’라고 타인에게 묻는 식으로, ‘나는 착해’라고 하면 되는데 ‘나는 나쁜 짓 안 했지? 그지?’라고 묻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대화를 위한 대화가 아니고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너희도 좀 인정해줘. 내가 지키는 것에 대해서 정당하게 지킨다고 좀 이야기해줘’라는 것에서 나오는 말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며 욥을 욕하지 마세요. 우리도 평소에 무의식중에 이것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 좋게 해보자는 식이 아니고 일단 나는 좋고 그 좋다는 것을 네가 나에게 인정해 주면 우리는 좋은 사이라고 하고 싶은 겁니다. 그것을 현대 용어로 ‘주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주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너의 몸과 나의 몸이 동일하면 주체라는 말을 못 해요. 너의 몸도 인간의 몸이고 나의 몸도 인간의 몸이니까 여기에는 주체라는 것이 없습니다. 주인 의식이 성립되지 않아요.
그런데 주체가 뭐냐 하면 너는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좀 도와주면 안 되겠어? 이때는 중심축이 너보다 나에게 이미 쏠리게 되는 거예요. 욥이 이런 식으로 자기 잘남을 지키겠다는 것은 이 모든 인간의 태생을 욥이 고스란히 다 보여주는 거예요. 사람은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주체를 가지고 태어나는구나. 사람이 목욕탕 전신거울 속에 있는 그 몸, 그게 내가 아니고 진짜는 내 몸, 육신이 있다고 내가 아니라 육신이라는 것을 형태로 하되 진짜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주체의식이에요. 북한의 주체의식 아닙니다. 내가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을 좀 용납해줘.
주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나만이 진짜 인간처럼 산다는 겁니다. 나한테는 내가 정말 사람 사는 것처럼 산다. 이걸 주체의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주체의식이 되면 다른 것들, 다른 사람들은, 고양이, 강아지, 다른 사물들, 앰프, 마이크, 이런 모든 것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물이라고 합니다. 사물. 나는 주체가 되고 주체는 주체와 만나는 것이 아니에요.
주체는 나로 끝났어요. 나로. ‘당신도 주인공입니다’라고 백날 해봐야 그게 둘러둘러서 당신을 주인공이라고 인정해 주는 내가 당신을 그렇게 좋게 봐주는 나를 당신도 인정해달라는 주체로 결국은 되돌아오게 되어있어요. 모든 이야기가. 그러니 주체의식이 있는 한, 인간의 순수란 없어요. 국경 없는 의사회, 맨날 방송 보면 돈 보내라고 온갖 선전을 하거든요.
유니세프(UNICEF), 전 세계 빈민 아이들을 돌보자고 하고 온갖 것들이 있는데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국경 없는 의사회든지 유니세프든지 그 단체에 대해서 ‘이거 참 좋은 일 한다. 내가 사는 보람을 이렇게 헛되게 취미생활로 보낼 수 없다. 나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신이 주신 나의 사명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한 번 뛰어 들어가 보세요. 그 단체가 주체예요.
인간은 태어날 때 자동으로 내가 주체인데 내가 국경 없는 의사회 들어가서 아프리카 봉사하니까 그 조직 자체가 주체가 되는 거예요. 나라는 가치, 내가 보람있게 산다는 그 가치를 챙기려고 갔는데 조직이 원하는 것은 조직의 가치를 위해서 너의 가치를 포기하라고 그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현재 20대나 30대 아가씨들이 늘 하는 이야기가 ‘엄마, 꼭 시집가야 해? 시집을 꼭 가야 해?’라고 하죠. 요새 남자들도 마찬가지지만.
그 질문이 뭐냐 하면 나는 내 주체를 키우는데 모든 것을 몰입하고 평생을 나의 나 됨에 열중하면 되지 꼭 시집에 가서 그동안 키워놓은 주체를 시집에 다 쏟아붓고 다 허비하고 죽도록 일하고 영광은 시집이 받고 하는 그런 바보같은 짓을 굳이 해야 하느냐고 엄마에게 묻는 거죠. 그러면 엄마가 하는 말이 “유난 좀 떨지 마라. 다들 그렇게 살아. 다들 너만큼 똑똑해도 시집가서 그렇게 살았어. 쫌 가줘. 제발 가줘. 나도 너 키운다고 힘들었는데 이제 숨 좀 쉬자. 나이 서른 다 돼서 시집도 안 가고 이게 무슨 짓이고. 숨 좀 쉬자”
시집가서 아이를 낳아봐야 인간이 되지. 이래서는 이거 인간 안 된다. 이 남자 소개하면 뭐가 이래서 싫다. 저 남자 소개하면 주체가 강해서 싫다. 자기 주체는 뭐 괜찮은 주체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주체가 강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것을 국력으로 국가 권력으로 눌러버렸죠. 신분제도로. 그러나 지금은 민주주의제도라서 그걸 못 누르니까 주체가 활성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주체가 강한 상태에서 처음 사랑을 할 때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죠. 사랑하고 난 뒤에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사물을 사랑한 것이 되어서 사랑을 얻은 순간에 사랑을 잃어버려요. ‘에게게, 이거야? 이거 얻으려고 내가 그렇게 아양을 떨었던 거야’라고 확 올라오죠. 그러다가 “너 왜 약속시간에 30분이나 늦게 와? 이러려면 헤어져. 네가 뭔데 나를 30분 기다리게 해? 헤어져” 하면 날아오는 것이 데이트폭력 터지죠. 가방 내놓으라고 하면서.
그런데 부모입장에서 ‘그렇게들 다 살아’라는 말은 젊은 사람 듣기에는 엄마가 행복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주체를 없애는 것도 아니고 주체를 억누르면서 억지로 억지로 살면서 심지어 딸과 아들인 자식에게 엄마 주체와 아빠 주체를 위해서 나를 이용한다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확 올라오죠. 그래서 시집이 아니고 아예 독립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욥을 통해 문제점이 아울러 올라와야 해요.
성경은 구약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도 있으니까 아울러 올라와야 해요. 여기서 욥의 잘못이 뭐냐 하면 바로 옛것을 고쳐서 새것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게 잘못이에요. 옛것을 고쳐서 새것으로 만들겠다. 더 결론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욥은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나열한 겁니다. 신약에서의 성도인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만 내놓게 되어있어요. 그런 존재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은 거기에 주체의식과 연관되어 있어서 뭘 해도, 헌금하고 기도하고 뭘 해도 그게 자기 자랑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또 자랑으로 나오는 것도 자기가 미리 짐작해서 ‘낮춰야 해. 내가 버려야 해. 나를 버리고 또 버리고 낮추고 또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해서 낮춰야지. 낮춰야지’라고 하는데 그 낮추는 짓거리가 주체 짓거리인데요. 그 짓이 백날 한다고 낮아집니까?
어디까지 낮아졌나를 보는 거예요. 바보도 아니고 이건 뭐 도 닦는 겁니까? 신약의 성도는 본인의 행동에 본인이 놀라야 해요. 아침에 주일학교 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복음을 아니까 논다가 아니고 주님께서는 복음 아는 자를 철공소로 보내서 철공소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베고 일하는 이게 내가 복음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현장에서 깨닫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 이 자체가 주께서 일체를 받지 않을 정도로 주님은 주님의 일만 받는다는 것을 현장에서 죽도록 고생을 해봐야 하는 거예요. 사람 대우도 못 받고요.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과학문제를 하나 낼 테니 이 주체의식과 얼마나 결부되어 있는지 여러분들이 한번 정리해보세요. ‘사과는 왜 둥글게 생겼을까?’라고 과학자는 호기심을 가지고 문제에 들어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유가 호기심 때문에 그래요. 저거 따먹지 말라고 하는데 따먹었을 경우에 어떻게 되지? 욕망이라는 것은 금지함으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욕망이에요. 금지하지 않으면 욕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욕망이 생기라고 주님께서 금지를 시킨 거예요. 인간의 흙의 한계를 알게하기 위해서. 흙으로 만든 존재의 한계를 알아야 장차 천국에서 흙으로 만들지 않고 주님 부활의 영광으로 만든 새로운 피조물들의 집단이 등장하거든요.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을 이렇게 1장, 2장, 3장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어떤 것을 찾아보셔야 하냐면 요한계시록에 사도 요한에게는 교회가 없어요. 교회라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가 없다는 것은 애초부터 없다고 하지 않고 있는 일곱교회 없애는 식으로 교회는 없는 거예요. 지상의 교회는 없어지라고 있는 겁니다. 촛대를 다 옮겨버려요. 주목해야 할 것은 촛대가 어디서 어디로 옮겨지는지를 봐야 해요.
촛대 옮겨지는 경로가 예수님 이 땅에 오셨다가 부활하는 경로를 말합니다. 초라한 예수님이 어떻게 영광스러운 주님이 되었는가. 마찬가지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진짜 성도가 어떻게 하늘나라의 교회가 되었는가. 그건 지상의 교회는 악마의 힘에 의해서 부서지는 것이 옳습니다. 현재는 코로나로 뒤에서 지시하고 그냥 가버리지만 일제 시대에는 아예 순사가 앞에 앉아 있어요. 일제 시대에 예배 때는.
제가 직접 현장을 가봤습니다. 영천에 있는 교회. 일제 시대 때에 그 모습이 그대로 있어요. 일본 순사들이 어떻게 했는지. 예수님 찬양하기 전에 먼저 ‘덴노 헤이카 반자이’라고 일본 천왕에게 만세 부르지 않으면 예배 자체가 성립이 안 됐어요. 그런 시대에 여러분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예배드렸겠습니까. ‘덴노 헤이카 반자이’라고 만세 부르고 예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예배예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악마의 활동을 허락한 이유를 알아야 해요. 왜냐 하면 악마와 주체의식을 가진 인간하고 똑같아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그래서 비빔밥이 잘 되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 주님 부르지만 악마가 보면 피식 웃습니다. ‘너는 내 쪽이야. 내 스타일이야. 왜 그래? 종교만 가졌다뿐이지 스타일이 내 스타일이라니까’ 자기 주체의식을 가졌잖아요. 하나님이든 예수든 삼위일체든 다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니까 딱 그게 바로 마귀 마음이에요.
그래서 기존 교회 가지고는 이게 해결이 안 납니다. 욥의 연장이에요. 욥이 자기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사례를 드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이거 해결책 안 납니다. 과학에서 사과는 왜 둥글까? 과육을 품은 수분을 안 빼앗기기 위해 과육의 부피는 최대로 하고 그 수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수분이 증발하는 겉넓이는 최소화하기 위해서 둥글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과육을 품은 수분을 빼앗기지 않으려며 어떤 모양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모양이 동그라미 모양이 될 때 가장 수분은 최대로 보장이 된다는 겁니다.
과수 농사하는 사람들은 이게 맞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과는 둥근데 왜 사과는 불 받아야 하는가. 불 받아야 하는 근거가 여기에 전혀 제시되지 않은 채 사과에 대해서 지금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사과를 이렇게 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이 지금 사과를 그런 식으로 관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관찰하는 관찰이 도리어 자기 본 모습을 가리게 되는 겁니다. 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사과가 왜 둥그냐 하면 둥글어야 주께 영광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창조과학에서는 이런 거 모릅니다.
인간들이 천주교에서 성자라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왜 성경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우기냐 하면 본인의 옛것, 선악 체계, 옛것을 잘 맞춰주게 되면 주체의식을 가진 내가 보기에도 진짜 내가 착한데 나처럼 주체의식을 가진 하나님이 나를 보기에 얼마나 이쁘고 착하다고 하겠느냐. 내가 나한테 봐도 대견스럽고 뻑이 갈 정도로 내가 이렇게 순수할 수 있느냐고 놀라죠. 이거 다 여러분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이렇게 순수할 수 있다니.
나처럼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는 식으로 욥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게 예레미야 17장 9절을 몰라서 그래요.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벌써 이스라엘 예언자가 딱 이야기하잖아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그렇다면 자기 마음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 주체의식인 마음, 이 주체의식이 왜 만물보다 썩었고 심히 거짓되었다는 것을 찾아내는 데 주력해야죠.
내 마음이 왜 이렇게 교만하고 자만하고 나는 나만 생각하느냐.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망가졌는가를 찾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준이 되려면 신약에 성령이 와야 나를 그렇게 봐요. 성령이 오지 않으면요, 자기변호 하는 데 급급하게 됩니다. 욥은 지금 과부를 도와주고 어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내가 남이 맞고 있을 때 안 도와주면 내 어깨죽지가 내려앉아도 나는 당연하다는 이 모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가 모든 것이 나에게 응축이 되고 나에게 집중이 되는 이야기예요. 더 이상 뭐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뭘 어떻게 더 착하게 살아.
이런 말을 우리가 욥처럼 해야 합니다. 나처럼 착한 사람이 뭘 더 어쩌라고. 그런데 신약의 성도가 성령 받으면 욥이 하는 말 그대로 하고 그 뒤에 뭘 붙이냐 하면 ‘이러니까 내 마음이 더럽지. 그러니까 내가 썪었지.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지’라고 정말 어깨죽지 나가도 ‘주여, 잘하셨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욥처럼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어요. 왜? 평소에 태어난 것이 주체의식이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 받은 신약의 성도는 ‘그러니까 내가 더러운 거야. 내 자랑하는 그게 더러운 거야. 평생 그 더러운 것을 내가 할 수밖에 없어. 내 마음이 그러니까’라고 하는 것은 사람인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게 성령의 일이에요. 어떻게 그 입술로 성령의 말이 나오는지 정말.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노래 부르면 장난삼아서 했던 노래가 있어요.
끼토산 야끼토 를디어 냐느가~
총깡총깡 서면뛰 를디어 냐느가~
이게 무슨 노래냐 하면 산토끼 노래를 거꾸로 부른 거예요. 아이들 장난처럼. 모든 것을 우리 주체의식으로 짓밟힌 분이 있잖아요. 그러면 방향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산토끼~’라는 ‘토’는 ‘끼토산’해도 맞아요. 중간에 하나씩 뭔가 맞는 부분이 있기는 있어요. ‘끼토산 야끼토 를디어 냐느가~’라는 게 장난인데 주님 보시기에 ‘나 착해. 나 훌륭해. 나는 말씀대로 바르게 살았어’라고 하면 주님께서 “너 왜 노래 거꾸로 불러? 너 왜 자꾸 거꾸로 불러? 왜 그래? 그러니까 너는 더러운 거야”라고 지적하는 거예요.
지금 욥은요, 아무리 봐도 자기는 뭐 가리고 숨기는 것이 없어요. 1963년도에 나왔던 우리나라에서 유행했고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팝송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도미니~크니~크니~크’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 ‘도미니크니크’라는 노래를 10년 전에 복음을 알고 가사를 다시 보니까 가사 내용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도미니크 님은 아주 검소한 차림으로 길을 걷게 계셨어요
피곤하지만 노래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어디를 머물든지
오직 주님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그는 오직 주님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이 노래가 한 수녀가 도미니크 수도원을 세웠던 도미니크 성자를 기리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거예요. 원래 원뜻은. 이것을 한국의 가수들이 부를 때는 성경 내용 다 빠지고 그냥 ‘도미니~크니~크니~크 모두 즐거워라~’라는 식으로 불렀어요. 나중에 보니 그 노래가 아니에요. 가사를 보면
잔레크랜드가 영국에 왕 되었던 시절에
우리의 성인 도미니크는 알비파와 싸우셨죠
여기 노래 내용에 교회사, 이단 이름이 나와요. 알비파, 왈도파라고도 하는데, 왈도파의 후계가 루터예요. 도미니크가 나오기 전까지 아직 개신교가 없었어요. 이 도미니크파를 작살내고 나온 것이 루터예요. 왈도파가 뭐냐 하면 신부만 설교하지 말고 모든 성령 받은 사람은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 왈도파예요. 그런데 도미니크 성자는 영국에 잔레크랜드 왕이 있던 시절에 왈도파와 싸웠다고 되어있어요. 그다음에 나오는 대사가
도미니~크니~크니~크
도미니크 님은 아주 검소한 차림으로 길을 걷게 계셨어요
어디를 가든지 어디를 머물든지
오직 주님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그는 오직 주님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어느 이교도가 그 고난의 가시밭길로 몰아갔으나
우리 성인 도미니크 님은 그것을 기쁘게~
가사에 보면 도미니크 님은 프로방스에 갔고 도미니크 님은 신학교를 세웠고, 이런 가사가 뒤에 쭉 나오면서 성자 도미니크의 일대기에 대해서 언급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천주교 주체의식이에요. 기독교 주체의식이 되든, 우리교회 주체의식이 되든, 천주교 주체의식이 되든, 뭐든지 주체의식이라는 것은 마음이 심히 부패하기 때문에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주체의식을 버릴 생각 하지 마세요.
마지막 대목이 반전인데 중요해요. 주체의식을 버리지 마세요. 주체의식을 버리는 것도 주체의식이에요. 뒤에 실컷 하시고, 끼토산 하든지, 산토끼 하든지, 뭘 하든지 다 좋은데 그걸 하시고 뒤에 이게 바로 꾸역꾸역 주께서 나를 통해 증명하고자 하시는 네가 얼마나 더럽고 부패했으면 주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려야 하는가를 증명하는 차원에서 이 주체의식을 품고 있는 우리 자신을 죽을 때까지 계속 사용하십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주체의식을 알면서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산다는 것이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
‘나는 개떡이야’라는 말을 기쁨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요. ‘나는 도미니크야. 난 이단과 싸웠어. 신천지와 싸웠어. 이게 바로 더럽고 부패한 모습이야’라고. 끝으로 유대 역사를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 말고 예수님 이후에 신약에 유대 역사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이 550만 명이었어요. 그런데 600년 지나고 120만으로 유대교인들이 줄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무조건 6살만 되면 율법 토라를 배우기 위해서 학교에 갑니다.
그런데 촌에 있는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 넣고 개종해버렸어요. 그러니까 550만 유대교인들이 120만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750~900년 시대에 페르시아 이슬람 쪽이 그 지역을 점령하니까 뭐가 필요하냐 하면 도시가 발달하고 도시에 상인들이 필요하고 상인들이 거래 계산서 쓸수 있는 사람들, 문자를 다루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때 유대인들이 확 도시에 와서 농촌 인구 75%가 모두 도시에 가서 거기서 장인과 상인 역할을 하면서 돈을 엄청 벌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율법 토라를 하고 어릴 때부터 율법 하더라도 역시 그들은 밥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주체의식에 보탬이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그대로 주체의식이 갖고 있던 잠재된 주체의식이 노골화되는 거예요. 남 어려운 것 돕는 것도 좋지만 우선 나부터 살아야 남을 도와주지. 지금 욥이 그런 식이거든요. 욥은 지금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남을 도와주기 위해서 산다는 겁니다. 정당해 보이죠. 심히 더럽고 부패한 마음이에요.
주님은 안 그랬거든요. 욥처럼 주님은 안 그랬단 말이죠. 주님을 십자가 죽게 한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이잖아요. 그들은 나라가 있어야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차마 못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켜 주옵소서’라고 했다고요.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켜달라는 게 뭔 뜻이에요? 자기 나라가 자기 속한 나라가 주체가 되었다는 뜻이거든요.
주님께서 그걸 버리라는 뜻이 아니에요.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시리아와 우리나라 축구 하는데 손흥민이 골 넣었을 때 ‘아~~ 그걸 왜 골을 넣어. 시리아가 이겨야지’라고 하는 우리나라 사람 없어요. 우리나라는 이 땅이 아니고 하늘나라가 우리나라다. 하늘나라가 우리나라인데 밤새도록 축구는 왜 보는데요.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는데 왜 국가대표 응원은 ‘아~~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이 짓은 왜 하는 건데요. 왜.
주체의식은 끝까지 가는 겁니다. 남의 아이보다 우리 아이 잘되어야 해요. 그게 심히 부패한 마음을 또다시 노출한 주님께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심히 더럽고 부패한 우리 마음 지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실습은 아직 많이 남아있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실습하는 가운데 주님 일하심과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해내시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기쁨이 더욱더 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