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오해와 거짓

아빠와 함께 2021. 9. 29. 08:02

365강-YouTube강의(오해와 거짓 마태복음 7:29)20210928-이 근호 목사


제365강, 제목은 ‘오해와 거짓’. 이게 쉬운 말인지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쉽게 다른 말로 하면 ‘아니다’와 ‘틀리다’의 차이. ‘아니다’와 ‘틀리다’의 차이.

‘너는 그게 아니야.’ 라고 할 때는요. 네가 지식적으로 뭔가 부족하다 할 때는, 아니, 그게 아니야. “3x5=?” “14” “아니, 14가 아니야. 그건 15야. 좀 노력해봐. 그럼 너는 이제 3x5=15라고 알게 될 거야.” 할 때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의 모자람이 있을 때는 ‘오해’가 되겠죠.

‘틀리다’의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사람이 달에 가려면 뭘 타고 가면 되지? 사람이 달에 가려면 뭘 타고 가야 갈 수 있지?” 라고 했을 때, “3x5=15” 답변하는 거예요. “아니, 아니, 아니. 지금 그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3x5=15 그걸 안다고 해서 달에 갈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3x5라고 말한 사람이 “그럼 3x5가 16이야? 17이야? 14야? 내가 바른 소리하는데 왜 틀리다고 이야기해?” 이렇게 나오죠. 자체적으로서는 3x5=15 맞는데 내가 질문한 것에 대한 답으로서는 틀린 답이 되죠. 설명하니까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 드는데.

아니다/틀리다. 오해/거짓을 잘 구분하면서 마태복음 7장 28절,29절을 제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은 산상설교라 해서 예수님이 산에 가셔서 하신 설교에요. 그 설교의 말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산상설교의 마지막 대목이 뭐냐 하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그 이야기했어요. ‘나중에 창수가 나고 바람이 나면 그 집에 부딪치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거침없이 무너진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뿐 아니라 앞에 있는 5장, 6장, 7장 이야기를 듣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 이게 지금 칭찬처럼 들리죠. ‘아, 대단하네. 우리가 아는 선생들하고는 격이 다르네. 월등하게 우리가 예전에 듣지 못한 더 추가적이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다. 새롭다.’ 이렇게 평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평하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까요? 아닙니다. 지금 평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들이 지금 평론가에요. “야, 놀랍다. 새롭다.” 이 말을 예수님한테 하는 것이지, “아, 그 말을 들어보니까 나는 죄인이야.” 뭐 이렇게 자기 자신을 아는 그런 모습은 안 보이죠.

아무리 예수님을 칭찬하고 우대하고 그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고 저 예수님 한번 따라가 볼까? 저기에 진리가 있는 것 같아. 이렇게 한다 할지라도 지금 예수님 말씀의 효과와 능력이 자기 자신의 본질까지는 전혀 도달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난 뒤에 마태복음 8장이 나와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2절,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이라 하는 것은 신의 특별한 징후로 봤어요. 자기 조상의 죄든지 아니면 자기 죄로 인하여 손댈 수 없는, 못 고치는 불치병. 손댈 수 없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보기에 도저히 이것은 문둥병이라는 저주받을 만큼 나쁜 짓하지 않았다 하면 필히 그것은 조상이 죄 지어서 그 저주가 그 가계, 가족력으로 내려앉았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이야기할 때 이 율법을 어긴 자는 3, 4대까지 저주를 받는다고 되어있거든요. 그게 율법이잖아요.

저주받는다는 개념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복 받은 사례를 봐가지고 복 받은 것과 반대방향으로 나가는 것. 풍요하게 주어지는 것은 복, 있는 것도 거덜나는 것은 저주. 뭐 이 이야기가 힘듭니까? 날로 건강하다, 복. 있는 건강 다 날렸다, 이건 저주. 집에 통장의 돈은 날로 계속해서 불어난다, 복. 통장에 있는 것도 다 까먹었다, 저주.

사람들의 복과 저주는 일단 자기 자신을 안 건드린다는 전제 하에 복과 저주입니다. 자기는 그냥 있는데, 나는 여기 있고 내 자체를 문제 안 삼아요. ‘건강해야 될 텐데’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복 받아야 될 텐데’. 그게 안 되면 또 저주 받는다 하는 거예요.

심지어 이건 어린애도 마찬가지에요. 초등학생 어린애들도 달을 보면서 ‘그저 우리 가정 잘 되게 해주시고 하는 일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할아버지 예수 믿게 해주시고...’ 뭐 그런 이야기.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애는, 이렇게 기도했으니까 날 부정하지는 말아주세요. 날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착한 나를 건드리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결국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 교회 가는 교인들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교회 가는 착한 일을 좀 봐주시고 내 미래가 좀 피게 하옵소서. 복 받게 하옵소서. 아, 내가 복 받게 해달라는 건 너무 기복신앙인가? 너무 염치없는가? 그러면 내가 좀 겸손의 톤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주여, 그저 안 까먹고나 살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자체적으로 겸손을 조작하죠.

그런데 성경에서 산상설교를 주신 이유는 바로 그렇게 칭찬 일변도로 주님을 칭찬하고 주님을 섬긴다는 그 자체가 네가 그게 저주받을 죄가 된다는 겁니다. 지금 네 걱정 안 하고 예수님 칭찬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거짓되기 때문에 거짓된 마음에서 예수님을 평하는 것도 틀려버린,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그 마음가짐에서 자기 딴에 주님을 높인다고 높이는 거예요, 교회 와서. 하나님 찬양합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하라. 네 딸을 보고 울어라. 나보고 울지 말고.”

근본부터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산상설교 전부를 반대로 생각합니다. 산상설교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위반한 사람을 찾는데 멀리 가서 찾을 필요 없어요. 바로 나에요, 나. 내가 산상설교 어느 하나 제대로 지키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너는 죽었어.

그러니까 마태복음 7장 끝나고 8장 나오죠. 거기에 누가 나옵니까? 문둥병자죠. 진정 산상설교를 이해했다면 문둥병자는 “저는 무능합니다. 저는 저주받았어요. 저주 받은 것을 자인합니다. 불쌍히만 여겨주세요.” 이런 자세, 이런 태도이어야 하는 거예요.

말씀 마치시고 내려오니까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문둥병자에요. 이 저주받은 것, 고칠 의사 없습니다. 이미 절망인 것을 그 문둥병자는 그대로 수용해요. 저 압니다. 이것은 내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문둥병 자체가 저주받았다는 말은 죽으면 어디 간다는 말입니까? 지옥 간다는 말이죠. 나, 지옥 갈 사람 맞습니다. 세상에,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 주님의 산상설교 취지에 딱 맞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불쌍히 여기니까 그 문둥병자가 아무 한 것도 없이, 산상설교 하나 안 지켰어요. 이 문둥병자가 산상설교에 순종했습니까? 아니에요. 산상설교와 관계없이 그냥 이 사람은 복 받았습니다.

복은 저주에서 오고 저주는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내가 모르는 주님 보시는 그 안목이 저주케 하는 그 말씀 안에 들어있으니 우리가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저주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다 차별 없이 “내가 바로 저주받은 사람 맞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이것이 바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