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 설교에 대한 추가설명
<9/15수요설교 기호의 운명에 대한 추가설명>
(박 넝쿨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에 놀랐어요.)
그렇지요. 박 넝쿨이 예수님이시지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박 넝쿨은 요나가 생각하는 현장감에 존재하지 않았어요. 요나는 하나님하고 본인, 그 둘만 있으면 된다고 딴 거 필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했다는 것. 이건 요나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추가적인 것이지요.
왜 박 넝쿨을 준비했느냐 하면 요나는 자기가 왜 분노를 일으키는지를 몰랐어요. 분노를 일으키는 요나, 그 요나가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요나 본인은 찾아내지를 못하고 뭔가 중간에 들어와야 됐지요. 박 넝쿨이 들어와서 서늘하게 해주니까 그 순간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박 넝쿨이 벌레에 먹혀가지고 상해버리니까, 이건 본인이 예상 못한 새로운 추가된 분노가 나와 버린 거예요. ‘아, 더워서 못살겠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추가된 분노가 나왔지요. 그래서 박 넝쿨 하나를 집어넣어서 요나로 하여금 분노의 이유를 찾아내시는 것처럼 박 넝쿨 같은 그러한 니느웨를 집어넣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서 그동안 습관적으로 타성적으로 믿어왔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저는 그걸 수요설교에서 초기화 작업이라고 했잖아요. 초기화 작업.
컴퓨터 모든 걸 꺼버리고 다시 초기화 하는 것처럼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처음으로 돌아갈 때 요나부터 시작을 했지만, 그 처음의 자리는 니느웨 같은 심정이어야 이게 이스라엘이 초기 이스라엘이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요나는 지금 니느웨성 가지고 저주 안 받는다고, 심판 안 받는다고 화를 냈는데 이스라엘은 그럴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오히려 이스라엘이 초기화에서 벌써 멀어져버렸지요. 하나님께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들어왔다가 없는 박 넝쿨이 생기면서 그 없는 박 넝쿨이 생겼다고 좋다고 했는데 벌레가 와서 갉아 먹으니까 박 넝쿨 때문에 박 넝쿨 없다고 화를 내거든요.
그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가 아는 분노 말고 주님께서 새로운 요나로 하여금 새로운 분노를 유발시키는 분입니다. 새로운 분노를 자아내요. 그래서 분노 자아내고 다시 한 번 용서의 귀함을 은혜의 귀함을 깨닫게 하고, 또 분노 자아내고 또 용서하고 깨닫게 하고, 그래서 어제 설교에서 인간은 매일같이 분노한다 했지요. 한 번도 쉬지 않고 분노해요. 화내고 있어요. 입을 깨물고 살아요.
(그런데요, 니느웨는 왜 이방인인데 구원받고, 이스라엘 백성은요?)
바로 제가 이 이야기를 강의 전에 끄집어낸 이유가 바로 저 질문을 해주시라는 말이지요.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질문. 그러면 니느웨는 구원 받고, 이스라엘은 잘렸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 그러니까 제대로 들었으니까 제대로 질문이 나오신 거예요. 궁금했지요. 잘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구원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인간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그걸 가지고 제가 이렇게 했지요. 요나의 최후는 애초부터 없었다. 나의 죽음은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나의 태어남도 없는 거고. 니느웨라는 것은 애초부터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요. 이 세상에 유일하게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어요. 그게 초기화에요. 초기화. 컴퓨터 초기화 알지요. 스마트폰 초기화 처음으로 돌아가잖아요. 이걸 포맷이라 하지요. 확 지워버리는 것. 쓸데없는 것.
그러면 니느웨는 뭐냐, 니느웨는 기호입니다. 기호. 기호라는 뜻이 제가 어제 기호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기호라는 말을 사람들은 잘 사용 안 해요. 기호라는 말 대신에 그 비슷한 말로 문자, 글자, 이런 말을 해요.
기호라는 말을 쓴 이유는 문자와 글자가 비슷하지만 문자, 글자는 무엇 때문에 있느냐 하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글자가 있잖아요. 그런데 기호라는 것은 무엇까지 포함하느냐 하면 글자를 넘어서서 이런 컵이라는 것이, 이런 휴지통 이런 것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문자가 아니고 기호가 돼요.
분명히 이건 휴지지만, 휴지를 가지고 사용할 때 여기서 의미가 나오고, 그 의미가 나오는 걸 기호라고 합니다. 문자는 그냥 글자로 의미로 보지만, 물건 같은 거 이런 걸 가지고 의미를 표현할 때 기호라고 하는 거예요. 기호. 아이콘이라고 하잖아요. 기호. 인간 자체가 기호가 되는 거예요. 니느웨 자체가.
그래서 니느웨는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기호는 구원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구원은 항상 누가 구원을 해주었느냐가 문제에요. 누가 구원을 하느냐를 주인공으로 삼기 위해서 기호가 사용되는 거예요. “니 구원 받았어?” “나, 구원 받았어.” “니 백신 맞았어?” “나 안 맞았어.” 지금 니 백신 맞았어, 안 맞았어. 하면, 이건 우리가 주인공 되어버려요.
구원은 주님의 구원뿐이에요. 예수님만 구원돼요. 주님의 구원을 증거하기 위해서 곁다리로 같이 걸치는 것이 뭐냐 기호입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 설교에서 분명히 기호라 하는 것은 지금 어디 있느냐, 시계가 몇 시냐를 묻지를 않는 게 기호라고 했지요.
“니느웨는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됐습니까?” 니느웨는 곧 얼마 안 있어서 멸망당해요. 니느웨가 구원 받았는데 왜 멸망당합니까? 니느웨는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기호에요. 그냥 쓰시는 기호에요. 여기 통에 휴지가 있잖아요. 내가 휴지를 이렇게 쓰니까 휴지가 상당히 기분 좋아하는 거예요. “야, 어떤 사람이 나 휴지 좋아한다.” 그런데 휴지로 킁해가지고 코풀고 훅 던져버렸는데. 쓰레기통에.
조금 전까지 나는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나를 이뻐한다. 했는데 그런데 그만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쓰시기 나름이지요. 쓰시기. 그게 기호입니다. 모든 인간은 기호에서 주님이 주님 되게 드러내기 위해서 쓰시는 대상이에요.
이스라엘은 구원 받았다고요? 아니요.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스라엘도 멸망당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원래 멸망당하고.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인간을 사용하는 겁니다.
구원될 자격이 없으니까 “저 구원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그런 질문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애초부터 요나의 최후는 없었습니다. 요나의 탄생도 없는 거예요. 요나가 쓰여지는 기호로 쓰여져 가지고 충분하게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지요.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나는 벗어났다.
첫 번째가 하나님으로부터의 도피. 두 번째가 2장에 보면 자기는 죽음 속으로 도피. 세 번째는 도피에 실패합니다. 자기 분노하면서 도피하려 했는데 분노가 요나를 안 받아줬어요. 분노가. 그래서 그 분노의 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박 넝쿨을 사용한 겁니다. “나 분노할 테니까 차라리 하나님이여, 나 죽여주세요.” 이래서 퉁 칩시다.
퉁 친다는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하고 나는 내 고집은 유지하면서 죽는 걸로 샘샘 칩시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요나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자기의 분노에 자기가 죽는 것도 막혔어요. 요나의 분노마저 기호였습니다.
니 성질난다고 니가 죽도록 내가 내버려 두지 않겠다. 왜냐하면 니가 노리는 것은 너를 누구의 기호라 생각하지 않고, 나는 나라고 계속 유지하니까. 기호가 아니잖아요. 주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해가지고 요나와 결속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요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나 요나 혼자만으로 모든 의미가 충족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박 넝쿨이 첨가되면서, 이건 또 뭐야? 갑자기 내가 시원해지지. 왜 살고 싶어지지. 갑자기 분노가 좀 줄어들었어요.
그러니까 요나가 혼자 있으면 요나 인생이 되지만, 여기에 하나님이 준비한 것을 결합시키면 요나는 하나님의 기호가 되는 겁니다. 요나에게 임의로 박 넝쿨을 여기다가 결합을 시켜버립니다. 이게 구원의 시작이에요.
혼자 잘났다고 똑똑하다고 설치는 여기에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주께서 마련한 박 넝쿨을 요나 인생에 개입을 시켜버리니까 요나는 전에는 자기 혼자 길길이 뛰면서 분노하던 요나가 주님이 개입된 것과 결합된 채 분노를 유발하지요.
그러면 요나의 분노는 자기 한계에 머물지 말고 주님의 분노하심으로 확장이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죄가 된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박 넝쿨로 찾아와서 요나와 결합을 시켜놨습니다. 요나가 박 넝쿨이 있어 좋다 했지요. 요나가 분노가 뭐냐 박 넝쿨이 삭아질 때 벌레에 갉아 먹힐 때 그 때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왜 나를 시원하지 못하게 하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진짜 인간의 분노의 원인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는 거예요. 왜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왜 나의 요구하는 걸 들어주지 않고 죽어버립니까. 왜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이것 때문에 분노한 거예요.
그게 바로 니 한계다. 그게 죄다. 요나는 자꾸 홀로 생각하는데 결국 제가 수요설교 마지막에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시작점은 뭐라고 했습니까? 요나. 그리고 도착지점은 뭐라고 했지요? 니느웨. 니느웨는 현재 하나님의 현장성에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음이 되고, 요나는 니느웨의 그 회개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세계에 없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세계에 있는 인간이 되게 되면 구원이지요. 그게 구원되는 거예요. 구원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신 거예요. 요나로 하여금 자기의 털릴 것을 다 털리게 하시고 그 털릴 게 마지막에 뭐였습니까? 마지막 털리는 게 뭐였습니까? 분노였지요.
처음에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했잖아요. 다시스로 도망갔잖아요. 피했지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다음에 요나가 자기가 자진해서 자기 자존심 챙기면서 과감하게 바닷물 속에 뛰어들었잖아요. 자살했잖아요. 죽었잖아요. 스스로 죽었잖아요. 말려도. 자기가 알아서 바닷물에 떨어졌다고요. 죽음에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패했지요. 물고기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요나가 지 마음대로 안돼요. 세 번 째 요나가 분노했지요. 분노해가지고 분노 속에 자기가 도피하려했는데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또 실패했지요. 요나가 생각한 것은 자기가 바로 자기의 현장성. 그걸 자기의 현장성. 그걸 수요설교에서 다른 말로 해서 뭐냐 삶의 체험 현장. 그걸 두자로 줄이면 현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은 내가 구상한 나의 현장감입니다. 나의 현장감.
제가 수요설교하면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친구가 와서 교회 가는 친구가 “야, 교회에 가자.” 하니까 친구가 하는 말이 “내가 왜 교회가? 니나 가라. 나는 안 간다.” 자, 그렇게 그 친구가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죠? 자기 나름대로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뭐가 있습니까? 현장감이 있잖아요. 자기 나름대로의 살아온 뭐가 있어요? 현장감이 있지요.
현장감은 어떻게 구성된다고 했습니까? 살아온 습관이 뭐를 만들고? 기억을 만들고, 기억이 현실감이 되고, 현실감이 지금의 현장감이 된 거예요. 기억. 그 기억이 어디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습관. 아무 이유 없어요. 우리 집안은 원래 그래. 습관이거든요. 니 하루 스케줄 어떻게 돼? 스케줄 할 게 뭐가 있어. 일어나서 운동하고 밥 먹고. 그게 습관이에요. 관습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누굴 위한 현장감입니까? 자신을 위한 현장감이지요. 그러면 열사람이 있다면 현장감이 몇 개 되겠어요? 열 명되지요. 이 인간이 자기 위주의 나를 위한 현장감. 구원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구원될 수가 없지요. 평생을 자기를 위해서 살았는데 구원될 수가 없지요. 평생에 자기 습관과 기억과 현장감에서 오는데 안 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뭘 보냈습니까? 자기 현장 속에 없는 걸 보냈지요. 그 없는 게 뭐였습니까? 3자로. 박 넝쿨을 보내버렸습니다. 박 넝쿨. 박 넝쿨을 보냈지요. 그러면 박 넝쿨이 요나의 사적인 개인적인 현장감을 삼켜버렸지요. 박 넝쿨이. 지금 요나는 박 넝쿨이 시원했잖아요. 요나는 박 넝쿨에 종속된 겁니다.
그 시원함이 기억 속에 들어온 거예요. 아! 시원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벌레 준비해서 어떻게 됐습니까? 박 넝쿨을 야금 야금 삭게 하니까 갑자기 여기서 뭐가 등장해요? 분노가 등장하지요. 바로 박 넝쿨이 예수님의 십자가고,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뭐한다? 분노한다.
그러니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현장감에서 요나는 없었다. 가 돼요. 주님의 세계 속에 없던 요나를 주님께서 박 넝쿨을 보내가지고 요새 말로 십자가를 보내가지고 기어이 자기 현장감을 완전히 부정하게 만들어요. 아~ 내가 엉터리구나! 내가 살아온 게 다 엉터리구나! 부정하게 만들고 그 요나로 하여금 주님의 현장감 속에 그 다음에 마지막 중요한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지요. 하나의 기호가 되게 하는 겁니다.
기호라 하는 것은 자기의 본래의 의미는 날아가 버리고 누구의 의미만 실리는 것을 기호라고 합니까? 자기에게 은혜주신 분. 은혜주신 분의 의만 사는 게 기호라 해요. 의미만. 그래서 수요 설교 맨 마지막에 예를 들었는데 아는 사람. 몇 시간 안 지났어요. 수요설교 마지막에 든 예가 있는데. 그 예가 3자로. 회사 사장님이 직원들에게 준 게 있는데 뭐였습니까? 고구마 줬지요.
추석날 고구마 줬지요. 그래서 추석 끝나고 난 뒤에 사원들에게 뭘 묻습니까? 추석 잘 보냈어요? 아버님 잘 계시지요? 그런 거 안 묻지요. 뭐만 이야기해요? 내가 준 고구마 잘 받았나. 그 이야기만 해요. 그게 성도입니다. 내가 준 은혜 잘 받았나. 내가 준 박 넝쿨 잘 받았나. 이게 바로 성도에요. 그러면 그 현장은 뭡니까? 나를 위한 현장이 아니고 누굴 위한 현장이다. 예수님을 위한 현장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제 했던 수요설교의 해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