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316강 속과 겉

아빠와 함께 2020. 6. 17. 09:00

316강-YouTube강의(속과 겉 마태복음 26:7)20200616-이 근호 목사


제316강, 제목은 ‘속과 겉’. 세상에서 인생경험 좀 있고 인생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던 사람들, 차분하게 세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자기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속과 겉이 하나가 되어야지 다르면 안 된다. 들어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만 그 사람들은 뭐를 모르냐 하면 겉과 속이 같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요.

바리새인들이 경건한 행동을 했죠. 주님께서는 그들의 경건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 그들의 속은 이미 추잡하다고 얘기했거든요. 어느 정도 추잡하냐면 마치 묘지 안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는데, 썩어가면 냄새 많이 나죠, 흉하잖아요, 흉물이죠, 시체 껴안고 잘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끔찍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끔찍하기 때문에 더욱더 과도하게 묘지를 아름답게 꾸밉니다. 아예 끔찍함이 생각나지 않도록. 전혀 그런 것이 의식되지 않도록 그렇게 조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평토장한 묘 또는 시멘트 포장을 한 묘라고 해서, 인간을 묘사할 때 유대인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뜻은 겉과 속이 다르다가 아니라 속에 시신이 들어있는 그 인간들이 속만 그런 게 아니라 겉도 경건하게 위장할 줄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겉과 속이 다른 게 아니고 똑같아요. 겉과 속이 똑같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인간은 자기 속을 행위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감출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감추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음흉한 속을 대신하기 때문에, 대변해주기 때문에. 뭔가 감추겠다, 건전해 보인다 라고 이렇게 나서는 것 자체가 속과 괴리된 게 아니고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더러운 것은, 고상한 것으로 나타나는 식의 더러운 짓을 바깥으로 표출한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인간은 속과 겉이 똑같다는 사실을 왜 그리 모르는지. 너희들이 원하는 당회장 목사, 너희들이 원하는 사도, 그것은 양의 탈을 쓴 이리라 했죠 (마태복음 7장 15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양의 탈을 썼다.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가면 안 쓰고 탈 안 쓴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어린 양, 순한 양의 형상을 띄고 나타나는 것, 그것이 목자도 거룩한 목자인 것처럼 위장하는 그 자체가 이미 내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부와 연결되지 않으면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죠.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사도바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속과 겉이 일치된 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런 겁니다. 여자로 하여금 그 모아놨던 옥합, 귀한 향수를 한꺼번에 예수님의 머리에 다 붓는 것은 여인이 한 행위가 아니에요. 앞에 있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유발된 거예요. 예수님 앞에 뭔가 해야 된다는 생각이 예수님을 만난 순간 발생된 겁니다.

그러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느냐 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겉(바깥, out)은 주님이 원하는 안(in)이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질 때나 가능한 일이 되는 거예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인간은 어느 누구도 속과 겉이 하나가 되어서 따로 놀 수가 없다. 안이 더러우면 바깥에 더러운 짓이 나오는데 그 더러운 짓이 바로 경건한 척 하는 것, 거룩한 척 하는 것, 남들 보기에 어떻게 보이는가 되게 신경쓰는 것, 그 짓이 속을 조작하는 짓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조작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타인을 속이고 사귀는 그 재주를 평생 키워나가는 게 인간입니다. 남 속이는 것. 남 속일 때 그 수단이 뭐냐. 말이라는 거예요. 행동, 말,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행위를 지금 이 여인이 했어요. 참으로 터무니없는 짓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참뜻은 인간들 보기에,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데 급급한 인간들 보기에 참으로 터무니없는 존재가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여인에게 상식에 맞지 않는, 상식을 뛰어넘는 그러한 황당한 일을 예수님으로 인하여 유발되게 하시는 그 관계.

이 여인과 예수님의 관계는 뭐냐. 그 여인은 순간 예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 존재자체가. 예수님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말씀화 된 여인이 되죠. 물론 그 여인이 구세주라는 뜻은 아니고 예수님 모습의 한 덩어리가, 조각이 여인을 통해 확장되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면 이 여인의 행위에 대해 누가 나서서 변호해주시는 거예요,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나서서 변호해주는 거예요. 여러분 행위를 여러분이 나서서 변호하지 마세요. 자기가 옳다 하는 것은 칭찬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유발된 존재, 유발된 행위, 유발된 마음을 안과 밖 공히 드러낼 때 그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개인적으로 착한 일한다고 착하다고 보지를 않아요. 예수님이 착하다고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면 예수님을 위하여 유발된 행위를 드러낼 때만 예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그 외에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겉과 속, 속과 겉이 신자나 불신자나 한결같이 동일합니다. 신자에서는 속과 겉 모두 다 예수님에 의해서 유발된 행위를 보여주게 되죠. 그리고 불신자는 속과 겉이 전부다 주님의 편에 서지 않고 주님의 반대편에 섰다는 것을 유감없이, 아주 거침없이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겉과 속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옥합을 예수님 머리에 붓는 이 여인에 대해서 여기 8절에 보면 제자들이 뭐라고 하느냐면, 그냥 말하지 않습니다. 분노에 차서 말합니다. “무슨 의도로 이 많은 돈을 한꺼번에 다 허비하느냐?” 라고 했을 때에 이 제자들의 평소 모습은 뭐냐 하면 돈은 귀하게 쓸 때 예수님이 기뻐하신다는 그러한 원칙을 지니고 있었던 거예요.

돈을 귀하게 쓰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다는 게 바로 자기 속내를 유감없이 보여준 겁니다. 주님 저 어때요? 착하죠? 이것은 조작이에요. 이것은 엉터리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마저 분노할 만한 일을 의도적으로 이 여인을 통해서 발생시켜버립니다.

이것이 그 당시 제자들이 이해 못한 주님의 독특함을 자기 여인을 통해서 드러내듯이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도, 우리도 예상 못한 독특함을 주께서 사용하셔서 드러내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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